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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속 도시이야기

마산항지(1926년) - 4 - 건권(乾卷) / 제1장 마산항의 대관

by 운무허정도 2022. 7. 4.

마산항지 건권(乾卷)

오릉(午陵) 하쿠엔보(白猿坊) 스와 시로(諏方史郞)

 

제1 마산항의 대관

1. 위치 및 지세

우리 마산항은 조선반도의 동남쪽, 경상남도의 중부에 있으며 마산부의 관치(官治)에 속하며 창원군 관할의 복부(腹部)에 포함된다. 그 위치는 동경 128도 33분, 북위 35도 11분의 교차점을 낀다.

동서 28정(町, 거리의 단위. 1정은 1간(間)의 60배로 약 109미터이다) 30간(間). 남복 1리 14정 사이에 펼쳐져 육지 면적은 1방리(方里, 가로세로 1리(里)가 되는 면적. 약 15㎢이다)의 63퍼센트에 불과하다.

 

 

전면은 바다로 마산만에 임하며 만 내 거의 중앙에 주위 500간도 안 되는 저도(猪島), 일명 월영도(月影島)가 누워 있고, 그 동쪽 끝을 경계선으로 한 약 2해리를 마산부 영해라 한다.

뒤로는 유현(杻峴), 대곡(大谷), 봉암(鳳岩), 부응(浮鷹), 고운대(孤雲臺), 환주(還珠) 등의 여러 봉우리로 이어지는 무학(舞鶴), 연산(連山)을 분수령으로 하여 창원군과 경계를 이루며 서북풍을 막는 담장으로 삼는다.

동북안으로는 반룡산(盤龍山)의 연이은 고개들이 우뚝 솟았다. 서남안으로는 정령(丁寧), 청량(淸凉), 자복(滋福), 율전현(栗田峴) 등의 산들이 솟았다 앉았다 하고 있으며 동쪽의 맞은 편 해안으로는 진해와 웅남 두 면(面)의 산들이 푸른 그림자를 거울 같은 바다 표면에 드리우고 있다.

오직 남쪽 일각(一角) 만이 부도수도(釜島水道, 진해만의 부도(釜島) 서쪽 해상에 설정된 항로로 마산항의 출입구이다)로 통하여 진해만에 열리고 거제도의 대금산(帶錦山)과 마주하고 있다. 기정(汽艇), 기선(汽船)이 종횡으로 운행하며 내뿜는 연기가 계속 이어지며, 마산 수산시장에 오고 가는 돛단배들이 아침저녁으로 정취를 자아내고 낚싯배와 고기잡이배들의 유유한 모습 등은 한 폭의 그림과 같다.

그러니만큼 산자수명(山紫水明)이란 문자를 이해하려는 사람은 먼저 마산의 풍광을 보고 나서야 이야기하니 않으면 안 될 것이라는 말이 과언이 아닐 것이다.

마산항의 형성이 이러하니 외해의 물결이 아무리 드세어도 항내의 파도는 잔잔하기 짝이 없어 여유 있게 하역도 할 수 있으며 수십만 톤의 선함의 정박도 용이하다.

외국의 어떤 이는 이 해구(海區)를 평하여 태평양 연안 가운데서 호주의 시드니 항, 북미의 샌프란시스코 항에 버금가는 제3위의 최량 항만이라 하여 아주 탐냈다는 소문으로 미루어 봐도 진해만을 통하는 마산만의 가치를 짐작할 수 있으리라. 왕년에 러시아가 동양함대의 근거지로 이 부동항을 얻으려고 토지 매수를 둘러싸고 우리 제국과 극렬한 항쟁을 벌이기도 했다.

당시 내외인의 이목을 놀라게 한 소위 ‘마산포사건’이 일어난 것도 그 진상은, 풍광명미(風光明媚)한 요새지인 이 마산을 걸고 조선해협의 제해권을 장악하고자하는 의도에서 기인한 것이다. 양국의 평화가 깨지고 이 양항양만(良港良灣)은 바다와 육지에서 승리를 거듭한 우리 제국의 독무대가 되고 평화가 회복되고 나서는 우리의 전관거류지에 육군이 경영하는 시설이 나오고, 각국거류지를 우리 제국 동포가 독점하게 되었다.

한국의 융희황제는 명치43년(1910년) 9월 28일(저자의 착오. 일제에 국권이 피탈 당한 경술국치일은 8월 29일이다)에 조선반도 만반(萬般)의 현상을 들어 대일본제국에 병합시켜, 명치 대제(大帝)의 위엄은 국가와 더불어 방방곡곡에 구가(謳歌)되어 민중은 일시동인(一視同仁, 원래는 다른 모든 사람을 똑같이 사랑한다는 뜻이지만 일제가 조선인의 민족 정체성을 희석하여 일본에 통합하려는 의도에서 사용한 용어이다. 비슷한 말로 내선일체(內鮮一體), 선만일여(鮮滿一如), 내성융화(內鮮融和) 등이 있다)이란 그 은덕에 싸이게 된 것이다.

마산항은 서북으로 산이 있고 동남으로 바다가 열려 기후는 온화하고 샘과 우물은 달고 시원할 뿐 아니라 전 항구를 둘러싼 벚꽃과 버드나무, 향긋한 술맛 등은 반도에서 으뜸이라 일컬어진다.

봄에는 곳곳에서 벚꽃놀이 방문객을 환영하는 노래와 악기 연주며 춤판이 벌어지고, 여름에는 뱃놀이, 낚시며 해수욕으로 청량미를 만끽하고, 가을에는 달 보기, 단풍 구경 혹은 버섯 패기에 신이 나고, 겨울에는 산과 바다의 모습을 이 재방의 술에 띄우면서 냄비요리를 즐길 수 있는 등 사계정의 정경에는 다함이 없는 것이다.

천둥과 번개는 한 해에 두세 번 있을 정도이며 격렬하지도 않아 보도되는 일은 거의 없다. 만약 있었다 해도 그 낙뢰가 전주의 변압기에 떨어졌다는 정도의 것이며, 때로는 겨울에 낙뢰 소리를 듣는 좀 기이한 현상이 벌어지고도 한다.

지진도 역시 마산에 산지가 21년이나 되었는데도 단 한 번도 진동을 느껴본 적이 없다. 그 이유는 화산활동이 완전히 멈춘 결과겠지만 신라나 고려사를 들추어 보면 지진의 기록이 꽤 있고 중국와의 국경에 있는 백두산이나 추풍령의 산맥같이 분화구에 물이 고인 데도 있다. 또한 지층 단면의 가파른 경사로 볼 때 얼마 안 되는 과거 혹은 몇 만 년이나 몇 억 년 전 격렬한 지진이 있었던 징표다. 오늘의 지리학자는 조선은 무지진 국가이며 곳곳에 있는 온천은 화산 작용에 의한 것이 아니라 라듐 작용에 기인한 것이라 함은 옳은 말이라 할 것이다.

마산부의 대체의 지세(地勢)는 본래의 마산포 곧 마산포 방면과 이전의 각국거류지 및 군영(軍營), 군관사(軍官舍)가 있는 신마산 방면, 그 중간의 철도용지가 있는 중앙부 방면의 3대부로 구성된다.

한마디로 이를 평하면 마산포 방면에는 한인(韓人)을 상대로 하는 상점이 많고 미곡, 해산물의 집산지라 하겠다. 신마산 방면은 정비된 도로와 화려한 집들이 있고 군인, 관리를 상대로 하는 상점이 많으며, 중앙부는 관청, 학교, 사원, 철도 소재지이기 때문에 이와 관련된 사람들의 집이 많다.

여기의 일부로 신마산에 접한 데는 장사가 활발하고 신마산을 능가하는 곳도 있으나 나머지 대부분은 철도용지를 빌려 쓰는 논밭인 것이다. 마산부는 현재 시가지조성계획을 추진 중이니 위의 3대 부분이 합쳐져서 일대 도시가 출현할 날도 그리 멀지는 않으리라.<<<

 

이 글은 창원시정연구원이 2021년에 번역한 『馬山港誌』(1926) 중 네 번째 것이다. 그림은 별도로 삽입하였다. 『馬山港誌』는 1900년대에 발간된 일본 문헌 중 가장 가치가 높은 책으로 평가 받고 있다. 저자는 앞서 게재한 『馬山繁昌記』와 같은 스와 시로(諏方史郞)이다. 본 포스팅은 비영리를 전제로 창원시정연구원의 양해를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