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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속 도시이야기

마산항지(1926년) - 2 - 추천사, 저자 머리말

by 운무허정도 2022. 6. 20.

스와 시로(諏方史郞) 옹의 저술

『마산항지』에 붙여

도오산(宕山) 소시 힌(莊子 斌)

 

煥發史才斑馬豪(환발사재반마호) 옹의 사재가 얼룩말의 빛과 같이 드러남이여

操觚幾歲肺肝勞(조고기세폐간노)   문필 작업하는 세월동안 허파와 같이 성했을까

謝君彰考闡幽筆(사군창고천유필)   선친의 필치를 펼치어 아버지를 드러내셨고

爲我馬山吐氣高(위아마산토기고)   우리 마산을 위해 기운을 크게 토하셨네

父子文名並見豪(부자문명병견호)   부자 함께 문명을 호쾌히 보이시도다

料知昔日切嗟勞(료지석일절차노)   일찍이 절차탁마의 노력 있었음을 알겠도다

一家衣鉢相傳在(일가의발상전재)   가문의 전통이 전승되고 있음이여

筆底波瀾萬丈高(필저파란만장고)   붓 아래 치는 파도 만장같이 높도다

 

스와 옹의 시문(詩文)의 원천은 부친 고슈(翁洲) 선생의 은택인 바, 곧 무장의 기세가 파란만장한 데가 있다. 고슈 선생은 아이즈 와카마츠(會津若松)란 대번(大藩)의 무가 출신이며 어릴 적부터 신동으로 불리었다.

16세 때에 선발되어 에도(江戶)에 가서 창평사숙(昌平黌)에서 배웠다. 약 10년의 고학을 마치고 고향에 들어와서는 번(藩)의 학교 일신관(日新館)의 교수가 되었다.

우연히 보신(戊辰, 무진, 1868년 1월부터 이듬해 5월 말까지 이어진 일본의 내전. 왕정체제로 복귀하려는 유신파와 도쿠가와 막부의 권력을 유지하려는 막부군 간의 전쟁으로 유신파의 승리로 막을 내렸다.)전쟁을 조우하며 제자들을 이끌고 성의 서쪽 방면인 에치고구치(越後口)에서 악전고투하면서도 전공을 올리기도 하였으나 어차피 지게 된 전쟁을 뒤집을 수는 없는 노릇. 아이즈와카마츠 번의 몰락을 보게 된 것이다.

선생은 그 후 에치고타카다(越後高田)의 사카키바라(榊原) 번에 유배되었다가 3년 만에 사면되어 귀향하고 와카마츠(若松) 형 양성학교장 겸 예과학교장으로 선임되었다. 그 후 후쿠시마(福島) 현 제3사범학교 학감 등을 역임하다가 명치 21년(1888)에 미야기(宮城) 현 센다이(仙臺) 시로 나가 세이신기쥬쿠(聲振義塾)란 사숙을 열고 한문을 가르쳤다.

당시 그 문하생이 5백여 명에 이르렀으며 고(故) 오츠키 한케이(大槻磐溪, 대규반계) 선생과 함께 동북의 두 석유(碩儒)로 칭해졌다. 당시 여러 선비들과 어울리는 가운데 교류하는 벗들도 많았다.

이들은 선생 같은 큰 그릇이 시골에 처박혀 있음을 안타까워하며 몇 번이고 모시고자 하였으나 늙으신 모친이 계시는 것을 이유로 고장을 떠나려 하지를 않았다. 그 때문에 선생의 고명을 아는 이가 많지 않은 것이다.

선생은 일문, 한문 이외에도 서화도 즐기시는 분이라, 무리를 좇아 추종하기에 바쁜 그러한 사람들과 동일시할 수 있겠는가. 선생이 제자들을 다스리기 위해 만들어 낸 잠언(箴言)들을 보면 그 분의 사람됨을 추정해 볼 수 있을 것이다. 간추려 보면 다음과 같다.

 

매일 아침 일찍 일어나라

일을 게을리 하지 마라

솔선수범하여라

사적인 감정에 흐르지 마라

품행단정하여라

외설과 잡스런 재미에 빠지지 마라

돈을 아껴 쓰라

음식을 간소히 하라

경천하는 마음을 근본으로 삼아라

충효공순하여라

완고함과 아둔함을 측은히 여겨라

남의 비위 맞추려고 재간을 부리지 마라

시간을 아껴라

시간을 헛되이 낭비하지 마라

 

명치 12년(1879) 2월 고슈(翁洲) 스와키(諏方喜) 쓰다

시로(史郞) 옹은 이 선생의 차남으로 태어나고 어릴 적부터 영문, 한문, 일문을 배우고 지리 역사에 취미를 가졌으니 ‘마산항지’의 편찬도 우연한 일이 아닐 것이다.

대정 15년(1926) 9월 상한(上澣)

 

 

머리말

하쿠엔보(白猿坊)에서 스와 시로(追方史郞)

 

<저자 스와 초상 / 조선사료 탐방 중인 명치 39년 촬영>

 

충신은 효자 집안에서 나고 충효의 덕을 지닌 자는 으레 고향을 사랑하는 집안에서 난다는 이치는 우연이 아닐 것이다.

원래 애향심이란 우선 그 고장의 사계절 풍치를 맛보고 그곳의 역사에 통함으로써 비로소 우러나오는 일종의 충동적인 감촉에 기인하는 것이다.

산자수명한 풍광은 마음과 눈을 즐겁게 해주지만 그것은 일시적인 동경의 심정에 불과하며 고향을 위해 일을 해 보겠다는 기개는 일어나지 않는 법이다. 고향의 풍치를 숙지하고 역사를 많이 알아야 고향을 위하려는 마음이 생기는 동시에 고향에 대한 애착의 정이 만 송이 벚꽃처럼 피어나는 것이다.

그리고 그 마음이 응어리지는 데에 애국의 큰 정신이 열매를 맺게 되어 굳디 굳은 무쇠같이 단단해지는 것이다. 소생이 ‘마산항지’를 편찬함은 이 의미에서 조금이라도 국가에 공헌하고자 하는 작은 의도 때문이라 해도 무모한 헛말이 되지는 않을 것이다.

내가 한국에 건너온 것은 히로시마(廣島)의 집에서 모친의 상을 치루고 난 후이며 인천을 떠나 마산에 온 것은 명치 39년(1906) 즉 광무 10년 병오(丙午) 3월이었다.

당시에는 마산의 아름다운 경치에 동경만 가지고 지냈지만, 오래 있는 동안 이 고장에 친근감을 느껴 이곳 역사는 알게 됨에 이르러 마침내 이곳에 뼈를 묻겠다는 결심을 하게 되었다.

그러다 보니 한층 더 애향심이 솟아 나오고 점점 더 커져서 남한의 과거까지 연구하려는 욕심을 가지게 된 것이다. 열심히 여러 곳을 찾아다니며 기록에 남기려다 항간에서 도적을 만나는 등 위험한 국면을 맞이한 일도 한두 번이 아니었다.

마산의 현재에 관해서는 일지에 기록하고 ‘마산항지’를 발행할 날을 기다리고 있던 참에 대정 11년(1922) 6월 22일에 이웃의 조선인 집의 온돌에서 난 불로 내지인(內地人) 여섯채, 청국인 한 채, 조선인 아홉 채가 모두 초토화되어 버린 것이다. 때는 낮 오후 2시 24분, 외출 중으로 아무도 없던 집은 그 불길에 휩싸여서 한 개의 물건도 빼내지 못하였고, 17년 동안 애썼던 원고는 가재도구와 함께 모두 잿더미가 되었다.

천금만금의 돈이야 잃어도 아깝지는 않겠지만 원고와 자료를 소실한 것에는 눈물이 한없이 흘렀지만 어찌하랴. 다시 붓을 들고 새로 써가기로 마음을 다잡고 동분서주로 사료를 수집하고 혹은 기억을 되살리면서 대강 복기했으나 그 양이야 옛 원고의 백 분의 일에도 미치지 못했다.

그래도 마산의 역사가 사라지지 않음을 바라면서 차츰 발행의 준비를 하고 있었을 때, 동 14년(1925) 6월 18일 오전 2시 반에 또다시 조선인의 옆집에서 불이 나는 바람에(분문에서 언급된 바와 같이 1922년과 1925년, 두 차례 화재를 당했을 당시 저자는 모토마치(元町-남성동) 구마산금융조합 인근에 살고 있었고 그의 부인은 고토부키마치(壽町-수성동)에서 조산원을 열고 있었다) 원고가 산일(散逸)하여 빠진 부분도 있고 전후 착각되어 순서가 뒤바뀐 부분이 적지 않으나 지금 이것을 발간하려는 이유는 마산 사람에게 마산의 역사와 그 위치를 개관케 하여 마산을 사랑하는 생각을 가지도록 하려는 성의 이외에는 아무 것도 아니다.

북으로는 산이, 남에는 바다를 보며 집필을 하고 있는 서재, 하쿠엔보(白猿坊)는 신축이 거의 다 되었다. 본 ‘마산항지’에 대해 내가 오류나 탈락을 발견하거나, 독자 여러분께서 오류나 탈락을 지적해 주신다면 개정 제2판을 발행할 것을 기약하면서 머리말로 갈음한다.

 

拮据執筆虎猫歎(길거집필호묘탄)   쉴 새 없이 집필했건만 호랑이 그리려다 고양이 그린 한탄이네

況又資稿不得完(황우자고부득완)   하물며 원고조차 다 수습 못했으니

由來回祿呪我史(유래회록주아사)   화재마저 나의 역사서를 저주하는가

燒盡案牋管墨晻(소진안전관묵엄)   책상, 종이, 붓, 먹까지 다 타서 어둑하구나

再修三改無貫臆(재수삼개무관억)   두 번 세 번 수정해야 막힘이 없어지는데

恨地怨天夢更寒(한지원천몽갱한)   천지간에 원망한들 헛된 꿈이어라

東奔西走僅收補(동분서주근수보)   동분서주하여 겨우 수습하였네

老齡將招行路難(노령장초행로난)   늙은이의 가는 길 이다지 힘드는구나

 

본 ‘항지’ 발행에 즈음하여 많은 동정을 보내주신 마산부윤 데라시마 도시히사(寺島利久, 사도리구, 4대 마산부윤), 도평의원(道評議員) 히로시 세이죠(弘淸三), 무라이 진영농장(村井進永農場) 농장장 히노니시 나가테루(日野西長輝, 일야서장휘, 1875~? 에도 막부의 문신이자 제이지 시대 귀족이던 히노니시 미츠요시(日野西光善)의 아들. 훗카이도에서 목장 경영. 1926년부터 무리아 농장 농장장. 그의 여동생(村井薰子, 촌정훈자)이 무라이 농장의 설립자 무라이 기치베에의 부인이 되면서 무라이 집안과 관계를 맺게 된다), 유지(有志) 마츠바라 하야조(松原早藏, 송원조장, 쓰시마 출신의 실업인. 1890년 부산에 정주한 이후 1899년 마산으로 이주. 마산거류민단과 마산사업회의소에서 활동. 부산공동창고, 마산수산 대주주. 마산신탁 사장, 경상남도평의회 의원, 마산부회협의회 의원 등 역임), 마산조면(馬山繰綿) 공장 주임 츠시마 수에키치(津島末吉), 이산광업(鯉山鑛業) 주(主) 가토 사루히라(加藤猿平, 원평, 광업인. 1918년부터 창원군 내서면 양덕리에서 이산광산을 운영. 금운동철 채광. 현재도 광산의 흔적이 남아있다) 등 제씨의 방명(芳名)을 여기에 적고 오래 기념으로 삼으며 삼가 감사의 뜻을 표한다.

 

諏問是生滅法陰(취문시생멸법음)   여쭈어 보았네 내 생에 어두움이 멸하는지

方知常寂涅槃心(방지상적열반심)   항상 적멸을 안다면 곧 열반의 마음이란다

武文一乘卽身徹(무문일승즉신철)   문무 일체는 내 몸을 투철히 하는데 있네

骨吐雲烟入梵林(골토운연입범림)   뼈에서 그름과 아지랑이 토하며 부처세계에 들자<<<

 

 

이 글은 창원시정연구원이 2021년에 번역한 『馬山港誌』(1926) 중 두 번째 것이다. 『馬山港誌』는 1900년대에 발간된 일본 문헌 중 가장 가치가 높은 책으로 평가 받고 있다. 저자는 앞서 게재한 『馬山繁昌記』와 같은 스와 시로(諏方史郞)이다. 본 포스팅은 비영리를 전제로 창원시정연구원의 양해를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