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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속 도시이야기

마산항지(1926년) - 85 - 곤권(坤卷) / 제12장 남선일보사(南鮮日報社)

by 운무허정도 2024. 2. 5.

12장 남선일보사(南鮮日報社)

 

본사의 전신은 명치 41(1908) 101일 젠젠시(然然子) 도리코시 엔지로(鳥越圓次郞) 씨에 의해 주관된 마산신보사(馬山新報社)이다.

그 후 씨는 발행권과 인쇄기 및 부속물 전부를 금 25백원에 경성일보사에 매각했다.

경성일보사는 이것을 남선일보사로 개칭하고 나카마루 고오타로(中丸好太郎)씨를 주간으로 해 남선일보를 발행했는데 사운이 기울어진 채로 부득이 사임하게 되었다.

<1915년 2월 19일자 남선일보. 창원시립 마산박물관 소장>

<1932년 11월 3일자 남선일보. 부산박물관 소장>

 

주필기자였던 쿄쿠잔(旭山) 야마구치 가네키치(山口金吉) 씨가 대신 주간이 되었지만 쇠퇴 경향은 멈추지 않았다.

남선일보는 휴간하고 야마구치 씨는 도쿄로 떠나고 휴간기한이 다가왔을 때에 경성일보사는 선후책을 미마스 마산부윤에 의뢰하고 발행권 및 기구, 기계 전부를 10년 동안 무상조건으로 대부하기로 약속했다.

이와 관련하여 미마스 부윤은 전에 마산상업회의소 서기장이었던 오카 요이치(岡庸一) 씨에게 그 취지를 전하고 남선일보의 계속을 협상하였던 바, 당시 오카() 씨는 한가로이 소일하는 시기라 이 일을 쾌락하여 일간(日刊)을 계속하기로 한 것이다.

대정 14(1925) 4, 10년이란 약정기한이 되어 발행인 겸 편집인의 서명(署名)이 바뀔 수밖에 없는 운명에 처하게 되었다.

발행인 겸 편집인은 경성일보사의 가와타니 시즈오(河谷精夫) 씨로 변경되고, 조잔(靜山) 요코세 신자부로(橫瀨新三郎) 씨가 남선일보사 주간으로 내사하니 오카() 씨는 뒤탈 없이 경성으로 떠났다.

그 후 요코세 씨는 노력과 분투로 조직을 확장하며 활자를 새로이 하고 구독료를 원래 80전이던 것을 70 전으로 인하하고 지상(紙上)에는 비단 꽃을 장식하는 등 오카()씨 시대에는 구독자가 5백에 미치지 못했던 것을 현재는 2천여의 독자를 가질 정도로 급증한 것이다.

당사는 혼마치 5정목에 있으며 원래 러시아인의 소유였는데 지금은 선인 소유가 된 것을 쓰고 있다.

본사는 대정 15(1926) 81일부터 동 20일까지의 22일 납량물산전람회(納凉物産展示會)를 주최했다.

도평의회의원인 히로시 세이조(弘淸三) 씨를 회장으로 추대해 조직을 접대, 설비, 진열, 여흥, 구호, 장식, 서무의 8개 반으로 나누어 준비에 들어갔다.

또한 경상남도지사, 진해요항부사령관, 진해만요새사령관 이하 지방관민 중 유력자 30명을 고문으로 삼아, 회장은 관공리 기타 군의 지식계급 백 수십 명을 위원으로 촉탁하여 630일 새로이 꾸며서 개장한 마산해수욕장에서 첫 번째 회합을 가지게 되었다.

그 내용은 마산소학교를 제1전시회장으로 하여 경상남북도의 물산, 농기구, 수산물 및 가공품, 청주, 육해군의 군기(軍器) 기타 참고품일 진열하며 마산역 구내는 제2회장으로하여 즉석판매관인 즉매관(卽賣館), 연예관, 수족관, 다방 기타 매점을 설치하고 분수탑 외에 수리관개실황, 모리나가() 어린이나라, 육군의 전서구(傳書鳩), 전기를 응용한 대폭포(大瀑布), 라디오, 사진전람회 등을 기획했다.

이와 동시에 고등여학교를 반도미술전람회장으로 하여, 다이토(大東) 양복점 주 이소유 간잔(磯遊寬山), 마산고녀의 교유(敎諭) 이노우에 료쿠호(井上綠峯), 마산상업 교유 아즈마 오잔(東櫻山) 세 사람을 중심으로 각자 자작의 필적을 진열하였다.

여흥으로는 불꽃놀이, 수영, 씨름, 보트경기, 보물찾기, 화선(和船, 일본 배) 경기, 변장, 유등놀이, 생화, 야구, 축구, 정구, 투우 등을 하기로 했다.

내선인 중에서 수위(守衛)와 여성 간수(看守) 각각 25명을 모집해 각 부서에 붙이게 하고 동시에 조선 문헌의 백일장을 개최할 예정이었지만 실행은 하지 못했다.

이러한 전람회는 올 한 해만이 아니라 매년 계속 개최하여 마산의 소개, 발전의 한 진로로 하기로 했다. 마산부 내외의 유지(有志)들의 많은 공헌이 기대되는 바이다.

부언해서 말하거니와, 2전시회장의 입구를 신마산 미나토마치(湊町)에 여는 것은, 신마산 방면에서 오기는 편리한데 마산포 방면에서 오기에는 자동차 두 구간을 지불해야만 미나토마치에 올 수 있다는 불편이 있다.

해수욕장에 바로 입장하게 하면 입장자는 몇 배나 될 것이라 말하는 이도 있었다.

또한 이번 전람회는 마산의 소개 방편으로는 지극히 좋은 정책이나 신마산 방면을 위주로 하고 마산포를 고려하지 않음을 유감으로 느끼는 이도 있으니 장래에는 반드시 고려가 필요할 것이다.<<<

 

이 글은 창원시정연구원이 2021년에 번역한 『馬山港誌』(1926) 중 85번 째 것이다. 그림은 별도로 삽입하였다. 『馬山港誌』는 일제강점기에 발간된 일본 문헌 중 가장 가치가 높은 책으로 평가 받고 있다. 저자는 앞서 게재한 『馬山繁昌記』와 같은 스와 시로(諏方史郞)이다. 본 포스팅은 비영리를 전제로 창원시정연구원의 양해를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