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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속 도시이야기

마산항지(1926년) - 110 - 곤권(坤卷) / 제27장 선인의 잡속(雜俗)

by 운무허정도 2024. 7. 29.

9. 선인의 하급생활과 그 버릇(習癖)

조선 내에서는 어디에 가도 같은 풍속이리라 사료 되겠지만 우선 마산부와 그 부근에서 보는 바를 대략 적어본다.

하급 생활자는 전체에 십 분의 육에 해당한다.

생활은 내선인을 위한 하루살이 노동에서 밥을 먹는다.

수입이 모자란 자는 하루 한 끼로 목숨을 이어가는 경우가 적지 않다.

하루살이의 종류에는 몇 가지가 있는데 여러 공장에 고용되는 자, 혹은 목석공(木石工)의 도우미를 하는 자, 농경에 힘을 쏟아 붓는 자, 관공서의 심부름꾼 등은 어느 것이나 비교적 상위에 속해 하루 세 끼 혹은 두 끼로 떼우고, 또한 인부는 지게꾼이라 불러 지게를 지며 길을 헤매거나 혹은 정차역에 서서 승강객의 짐을 운반하는 자 등이 최열등으로 그날 수확이 없을 때는 하루 한 끼 보리죽으로 이슬 같은 생명을 이어가는데 그 명이 한정된 자가 많다.

그들의 대부분은 아주 무식하고 겨우 자기성명을 습관적으로 읽고 외워 있는 것에 불과하다. 지게(荷梯)란 자연 그대로의 두 갈래 목재에 그 폭에 맞춘 나무를 끼워 짠 것이며 이것을 등에 지고 여러 무게의 물건을 운반할 때는 통상 완력의 두 배 효과가 있다고 한다.

 

우리네 동북지방의 아이즈(會津)에서는 이것을 야세우마(瘠馬, 수척한 말, 여윈 말)라고 부르며 제조 방법은 다르지만 지게와 같은 종류의 것이 있다.

비슷한 지게로 짐을 졌을 때 그 운반력이 마른 말에 맞먹는다는 뜻에서 나온 말이다.

이 지게꾼이란 말은 군대 출정 혹은 행군 때에 지게로 짐이나 군수품을 운반하는, 즉 병참에 쓰이는 인부란 말로써 지금은 이와 같은 종류의 노동자를 일반적으로 지칭하는 보통명사가 된 것이다.

이들 가정의 사람들은 남자는 열두세 살이 되면 아버지 일을 이어 지게꾼이 되어 생가지나 생오이 혹은 참외 등을 먹으면서 길을 배회하는 등 풍기 상 보기가 민망스러운 것이다.

여자아이는 집을 나가 남의 집에서 기한을 정해 노예 같이 일을 해 오늘날에는 내지인 중에서도 이런 애를 사용하기도 한다.

그런데 그 사용료는 주인집에서 자는 애는 일 년에 약 20~30원을, 다니면서 점심 붙여서 한 달에 5~6원 내지 7~8원을 보통으로 한다.

그러나 많이 먹기로는 내지인 보통 사람의 세끼 분량을 한때 먹어도 모자란 듯한 얼굴을 한다.

하루 세끼를 주어도 식사마다 많이 먹으니 쌀값이 비쌀 때에는 아주 비경제적일 것이다.

그들이 집에서 한두 끼 먹는 것이란 중국 쌀의 죽이거나 쌀보리 혼합죽, 순보리죽, 가루쌀죽 등으로 순 쌀밥을 먹을 일은 아주 드물다.

누구든 때 묻은 백의를 입어 상투를 올린 자가 많지만 근년에는 종래의 짚신을 신지 않고 모두 고무신을 신으니 7~8년 전에 비하면 거의 격세지감이 있다.

또한 그들의 마누라를 보면 태반은 매일 간조에 맞추어서 조개 캐는 것을 일로 하고 그 잡은 대합, 모시조개, 바지락, 맛조개 등은 날마다 도미마치(富町) 시장에 내어 파는 것이 일상이다.

그래도 부인이 지게를 지는 일은 거의 없고 행상에 나갈 때나 다소의 물품을 운반할 때에는 다 머리 위에 올려놓고 다니는 점은 류큐(琉球) 부인들과 같다.

 

그리고 한 종기, 한 개의 주먹밥이라도 손에 들지 않고 다 머리에 얹힘으로써 남자가 그렇게 하는 것을 절대 본 적이 없으니 참 기이한 현상이라 하겠다.

그들의 보잘것없는 끼니는 그렇다 치고, 거기에다 원래 저축심이 빈약한 성벽을 가진 그들은 다소라도 불시의 돈이 날라 들어왔을 때에는 내일의 생계 따위는 생각하지도 않고 꽤나 맛있는 음식을 사 먹고 또한 비싼 반찬으로 배불리 먹는다.

그 저축심이 없는 것은 부유하지 못한 가정의 자제로 내일의 생계를 꾀하지 않고 함부로 잘 입고 좋은 가죽신을 신고 시계의 금줄을 번쩍이게 하면서 대로를 활보하거나 혹은 금은제의 장식이 달린 양지팡이(洋杖)를 집으면서 비단 두루마기를 입어 잘난체하는 자가 있기는 하다.

내지인이 와서 사업을 일으키려 하려다가, 혹은 토지를 매수하려다가 실패한 자 혹은 그들의 교묘한 말에 매혹된 자도 많이 있다.

그런 일은 적은 일에 불과 하지만 평소에 주의해 두어야 할 점이리라.

또한 복장에 관해서 살펴보면, 상의와 하의(下袴, 핫바지)가 같이 다 순백한 것은 남자만이며, 여자는 그 나이와 계급을 불문하고 하얀 상의에 까만 치마를 입는 것이 보통이다.

다만 귀천에 따라 그 원단이 다르다는 것일 뿐이다.

거의 마(삼베)를 짠 것을 보통으로 하고 비단을 사용함은 없다.

일전에 마산의 관민유지는 폭우가 쏟아지는 날, 영국함대의 여러 장교를 극장 마루니시자(丸西座)에 초대해 대환영의 연회 자리를 마련한 적이 있었다.

그때 내지인, 선인의 예기들이 단체로 와서 교대로 특유한 손춤이나 집단무용을 보이게 되었다.

내지 예기의 복장은 비단으로 짠 수백 원 값어치인 아주 비싼 것이었는데도, 무대에 서는 것을 보면 그저 까만 옷을 입은 것밖에 보이지 않고 그 자리에 어울리지 않았다.

이에 반해 조선기생들은 상하 면옷이며 상의는 순백, 치마는 보라색으로, 기생들의 춤추는 모습이나 복장이 다 똑같았기 때문에 아주 보기가 좋아 금발 손님의 갈채를 받은 것이다.

선인 부인의 복장은 멀리서 보나 가까이서 보나 그 우아함은 내지 부인이 따라갈 바는 못 된다.<<<

 

이 글은 창원시정연구원이 2021년에 번역한 『馬山港誌』(1926) 중 110번 째 것이다. 그림은 별도로 삽입하였다. 『馬山港誌』는 일제강점기에 발간된 일본 문헌 중 가장 가치가 높은 책으로 평가 받고 있다. 저자는 앞서 게재한 『馬山繁昌記』와 같은 스와 시로(諏方史郞)이다. 본 포스팅은 비영리를 전제로 창원시정연구원의 양해를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