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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춰진 도시이야기

마른 멸치 언제부터 먹었을까?

by 알 수 없는 사용자 2009. 6. 4.
최초 멸치생산 : 일본의 어업이민
우리나라에서 마른멸치(이하 멸치)를 맛보기 시작한 것은 그리 오래지 않다. 일본이 우리나라와 1905년 맺은 을사조약에 의거 풍부한 수산자원을 가진 남해안 연안에 불법, 합법적으로 어로작업을 해오던 일본어민들에게 집단이주를 권유해 그결과 1909년까지 총1,146호 4,820명이 한국연안 40개 마을에 이주하였는데, 이중 60%이상이 남해안 연안마을에 이주했다.

당시 남해안 일대에 일본 어민들이 집단으로 이주하여 선진수산업을 전개하면서 마른 멸치를 선 보이게 되는데 멸치어장은 1910년 전후시기에 주로 히로시마에서 온사람들에 의해 통영, 거제지역을 중심으로 어장이 경영되었다. 당시에 우리나라는 생멸치를 잡아서 그냥 먹거나 멸치젓갈이나, 말린 포로 먹는 정도였기 때문에지금의 마른멸치처럼 생멸치를 가마에 쪄서 말리는 가공법에 의해 맛이 장기간 유지되는 고급 수산업기술은 당시에 전파된 것이다.

마산어시장에 멸치가 입하하기 시작한 시기는 1920년대에 당시 이순란, 김성칠씨가 일본에서 수입하여 판매한 것이 그 그 기원이 된다. 일본상인으로부터 수입된 멸치는 중개상인을 거쳐 대구, 김천 등지로 판매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당시 남해안에서 생산된 멸치의 대부분은 하관(시모노세키)을 통해 일본으로 수출되었다고 하다.

해방전까지 일본사람들로 구성된 '히로시마 온망조합'에서 멸치의 9할 이상을 생산하였다 하며 해방  5년후 한국인 최초로 온망어업을 시작한 사람은 거제의 진정률이었다고 한다. 이후 멸치의 주생산은 통영을 중심으로한 기선권현망수산업협동조합에서 우리나라 전체 생산량의 절반이상을 감당하고 있다.


마산의 어업이민
마산의 율구미 해안마을(지금의 가포동 일부)은 일본 지바현 어민들이 집단이주해 와서 살던곳으로, 일본 어민촌을 지바무라(千葉村)라고 불렀다. 1905년 1월 지바현의 수산조합 이사 吉野文吉은 어민 20명에게 보조금 4,000원을 보조금으로 주며 어업이민을 시켰다고 한다. 이주한 어민들은 모두 어획물 처리장을 건설하고 멸치 권현망, 도미 연라망, 수조망어업등에 종사하였다. 현재 가포의 장어구이로 유명한 '소나무집'이라는  식당과 그 일대에 당시의 흔적이 일부 남아있다.

                                                   (남해안의 죽방렴 사진)

멸치의 일상성.
멸치를 두고 회자되는 얘기들이 많다. 하챤고 짜잔한 대상을 두고 멸치도 생선이냐?는 얘기도 더러한다. 그건 멸치의 실상을 잘모르고 하는 얘기일 것이다. 신체구조상, 아가미, 지느러미 심지어 이빨까지 일반생선과 다를바 없이 있을건 다 갖추고 있다. 단지 크기만 작을 뿐이다.

멸치는 우리 일상생활 속에 깊이 자리 잡은 생선이다. 각종 국물맛을 내는데 멸치를 따를만한 것이 없으며, 김장의 멸치젓갈은 빠질 수 없는 재료이다. 가장 만만한 술안주로 마른 멸치와 고추장 그리고 갓 잡은 굵은 알배기는 회 무침으로, 멸치쌈밥 역시 빼놓을 수 없는 별미이다

몸값은 어떤가? 
키로당으로 치자면 일반 생선에 비교할 바가 아니다.  보통 키로당 2-3만원 정도이며, 죽방멸치인 경우는 30만원선이라고 한다. 이 만한 가격대의 생선이 과연 얼마나 있을런지! 죽방멸치는 우리들에게 죽을때 잘죽어야 몸값이 제대로 나간다는 교훈(?)을 보여주고 있다. 암튼 멸치를 만만케 보아서는 않될 듯 싶다.

멸 치     

죽방멸치의 똥은 쓰지 않다고 한다
비늘 한점 떨어지지 않도록

대나무 통발로 몰래 가둬

끓는 솥단지까지 곱게 모셔와

그 숨이 똑,

한번에 떨어지도록 했기 때문이다

똥이 쓰다는

아랫배 쪽에 흉터가 생긴

일반멸치는

그물에 몸이 걸린 채

온몸으로 苦悶死하므로

비늘도 상하고 속은

썩은 쓴 맛을 우려낸다는 것이다

종이그물에 몸이 얽힌 채

온몸으로 너무 고민한 잘 쓴 시들은

일반멸치의 맛이 난다

죽기 직전까지 살아 있는 게 관건이다

여러 번 죽는 것은 한 번 죽는 것만 못하여

비늘도 상하고 내장에 쓴 맛이 들어가는

일반멸치가 되는 것이니

시는 아무래도 말짱한 죽방멸치로 태어나야 한다


(정준영)

* 정준영시인은 죽방멸치를 멸치를 비유해서 죽기직전까지 살아있는 작가정신의 상징으로 표현하고 있다. 작가정신과 죽방멸치, 멸치가 이렇게 만만치 않은 대상으로 변신하게 될 줄 누가......?

멸치의 어원
한자로는 멸치(蔑致), 멸어(滅魚), 멸치어(滅致魚)로 불리는데, ‘물 밖으로 나오면 금방 죽는다’는 뜻에서 나온 이름이다. 멸치란 이름에 얽힌 또 다른 하나의 설은 물에서 나는 물고기의 대명사인지라 한자어로는 수어(水魚)라 하며, 고유어로는 물의 고어인 ‘미리’가 ‘며리’, ‘멸’로 음운변화하고 물고기를 뜻하는 접미사인 ‘치’를 합성하여 멸치로 되었다고 한다.

공식적으로는 우리나라의 수산물 검사법에 의하면 건조품 중 전장 7.7cm 이상을 대(大)멸, 7.6~4.6cm를 중(中)멸, 4.5~3.1cm를 소(小)멸, 3.0~1.6cm를 자(仔)멸, 1.5cm 이하를 세(細)멸이라고 구분하여 부른다.

멸치의 어획방법
멸치를 어획하는 대표적인 어업은 권현망이다. 멸치는 기선권현망, 유자망, 정치망, 낭장망, 연안들망, 죽방렴 등 30여개의 다양한 어업에서 어획되고 있지만 주로 기선권현망어업에 50~60%이상을 어획하고 있다. 이 권현망(權現網)이란 명칭은 풍어를 상징하는 일본의 바다 수호신인 권현신(權現神)에서 따온 것이라는 유래가 있다.

죽방렴은 말 그대로 대나무로 만든 어살(漁箭)이다.  수심이 별로 깊지 않은 바닷속에 길이 5~10m 가량 되는 참나무 말뚝을 'V'자 형태로 박는다. 이처럼 부채꼴로 박은 말뚝을 ‘살(삼각살)’이라고 하는데, 이것의 한 변은 길이가 무려 80m에 이른다. 그리고 살 안쪽의 뾰족한 부분에는 참나무 말뚝을 둥그렇게 박은 다음, 대나무로 촘촘하게 발(簾)을 쳐서 불통을 만든다. 불통과 살 사이에는 대나무를 엮어 만든 문짝이 매달려 있다. 이 문짝은 밀물 때에는 조류의 힘으로 활짝 열려 있다가 썰물 때에는 축 늘어져서 꽉 닫히게 된다. 그러므로 일단 불통 안으로 들어온 고기들은 다시 빠져나갈 수가 없다.  죽방렴에는 날씨가 따뜻한 봄부터 가을까지 멸치가 드는데, 죽방렴으로 잡은 멸치는 그물로 잡은 것 보다 곱절이나 높은 값에 팔린다. 그물로 잡은 멸치는 금세 숨이 끊어지는 데다 비늘이 다 벗겨지고 온 몸에 상처를 입어 맛이 떨어진다. 반면, 조류를 따라 자연스레 죽방렴 안에 들어온 멸치는 산채로 곧장 삶아서 말리기 때문에 맛이 훨씬 더 좋다고 한다.

 
멸치잡이는 멸치어군을 찾는 어탐선, 그물을 끌어 직접 멸치를 잡는 본선 2척, 잡은 멸치를 즉석에서 삶아 운반하는 가공.운반선 2척 등 대개 5척의 배로 구성된 선단을 통해 이뤄진다. 본선 2척과 어로장이 탄 어탐선이 같이 항해하다 어로장의 지시가 떨어지면 곧바로 배 한척마다 길이 500m가량의 그물을 투하하는 것으로 시작된다.두척의 배가 그물을 끌면서 걸려든 멸치를 그물자루 끝쪽으로 모으고 한쪽으로 몰린 멸치들은 굵은 호스와 연결된 펌프로 빨려들어가 곧바로 가공.운반선으로 자동으로 보내진다. 이 과정이 끝나면 본선 2척은 다시 투망준비를 하면서 어탐선이 어군을 발견할 때까지 대기하고 가공.운반선은 펌프를 통해 보내진 살아 펄떡이는 멸치들을 즉석에서 대나무 발에 담은 후 팔팔 끓는 솥에서 3~4분 가량 삶는다. 배위에서 삶아진 멸치들은 곧바로 육상의 건조장까지 운반된 뒤 13~14시간동안 말려진 다음날 바로 시장에 판매된다.

- 이학박사 황선도님 글에서 요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