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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 10. 22. 04:30

탱크를 제조하던 군수공장, 예술을 생산하다.

도시를 바꾼 10가지이야기(5)
중국북경 789따산즈 예술구

매년 4,5월이면 전세계의 예술가와 예술을 사랑하는 이들이 중국북경에 모여든다.
'따산즈예술구'에서 열리는 '따산즈국제예술제'에 참가하기위해서다.
아직 10년도 채 안된 이 행사가 그토록 주목받는 이유가는 무엇일까?

중국 북경 조양구 동북쪽에 위치한 따산즈 798지역은 원래 "북경화북무선전연합 기자재공장"이라는 군수공장지역이었다.
1950년대 구소련이 원조하고, 구독일이 설계를 맡아 건물의 용도를 강조하는 바우하우스(Bauhaus)양식으로 지어졌으며 중국 공업의 요람으로 무선통신설비, 탱크 등을 제조했다.


산업시대에 호황을 누리던 이지역도 1990년대 들어 불황이 찾아왔고 차츰 빈공장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공장지대가 점점 쇠퇴해가던 1997년,
중국중앙미술대학교의 한 교수가 다른 30여명의 강사와 같이 798공장에서 3000여 평방미터의 빈공장을 임대하여 작업장으로 사용하면서 이지역의 변화가 시작되었다.

암울했던 공장지대는 조금씩 활기를 찾기시작했고 2002년 부터는 798공장의 소유주인 '북경칠성화전과기집단'이 공장 빈 건물의 활용도를 높이기 위해 공방 일부의 빈 건물을 예술가들에게 저렴한 가격에 임대하였고, 이후 가난한 예술가들의 입주신청이 몰려들기 시작하면서 798예술구를 형성하게 되었다.

2005년 개발이익을 노린 북경시에 의해 철거,재개발될 위기를 겪기도 했으나, 결국 눈에 보이지 않는 무형의 가치가 인정받아 "문화창의산업기지"로 공식지정되면서 다양한 지원을 받게되었다.



798따산즈예술구는 중국에서 가장 큰 예술특구로서 하루에 2,3만명정도가 다녀가고, 국제예술제 기간에는 30만명 정도의 관광객이 방문한다.  
현재 예술구에는 200여개의 창작실, 400여개의 갤러리, 50여개의 패션숍 이외에도 스튜디오, 레스토랑, 카페, 출판사, 디자인회사, 광고회사 등이 입주해 있다.
북경이 세계 12대 도시 중 하나로 선정된 이유로 따산즈지역의 존재와 발전이 큰역할을 했다는 평가도 언론을 통해 나온다.


냉전종식과 함께 쇠락해가던 공장지대가 예술가들의 창작활동을 매개로한 재생을 통해 예술촌으로 변모하면서 군수품을 생산하는 공장보다 공장보다 훨씬 가치있는 생산을 하는 지역이 된것이다.


한때 경북지역에서도 손님이 찾아올 정도로 호황을 누렸던 마산부림시장
90여년의 역사가 무색하게 일부구역은 80%가 빈점포로 방치되어있다.

시설현대화 사업등으로 50여억원의 예산을 쏟아부었으나 매출은 별반 달라진게 없다는 것은 더이상 시장으로는 경쟁력이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비슷한 상황의 창동 지하상가와 골목의 빈가게들...

따산즈 예술구의 사례에서 보았듯이 이제
과거의 영화는 묻어두고 과감한 변화로 새로운 활로를 찾아야 할 시기이다.





 
Trackback 1 Comment 1
  1. 이윤기 2010.10.22 10:10 address edit & del reply

    고쳐 쓰는 것이 가장 바람직한 방법이겠지요.
    지속가능한 개발이란 결국 다시쓰고 , 고쳐 쓰는 것이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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