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터데스크 관리자

도움말
닫기
적용하기   첫페이지 만들기

태터데스크 메시지

저장하였습니다.


2011. 3. 30. 15:39

1997년 그려진 '마산항 재개발계획'을 보면서

■  그간 논란이 많았던 '마산 해양신도시'의 건설방향에 대하여
국토해양부의 결정을 지난 주 창원시가 발표하였다.

주요 내용은 매립지의 면적을 19만평으로 축소하되, 공공용지로의 개발과 함께
매립면적의 축소에 따른 민간 참여업체의 손실비용 측면을 고려한 개발도 불가피함을 시사하고 있었다.

■  만약 상업용지와 아파트부지 용도로 사용된다면 많은 문제를 낳게 된다.
문제는 매립지의 내부의 문제가 아니라 기존 도심에 미치는 영향이다.
현재 원도심 재생사업을 진행하면서 매립지에 대형상권을 형성되었을 때의 기쇠퇴한 원도심의 상권이 아무리 재생을 한다고 한들 경쟁력을 가질 수 있겠는가?
또한,
매립지에 수 천호의 아파트가 들어서게 되었을 때 현재 진행중인 재건축  및 재개발 아파트 개발지역의 사업은 제대로 진척이 될 수 있겠는가?
뿐만 아니라 준설토 매립과정에서 발생하게 될 기존 도심 앞의 환경 문제,
나아가서는 매립후 마산만 환경의 문제에 이르기까지 매립지에 공공의 용도 외에 상업용지나 아파트부지가 개발되었을 때 원도심에 미치는 사회적 문제점들은 시민단체들의 주장을 통해 수 차 지적인 된바 있다.
이러한 폐해가 예상이 됨에도 불구하고 가포신항을 당초계획되로 추진하기 위해 항로 준설이 불가피하기 때문에 매립토를 기존의 도심 코 앞에 갖다 부을 수 밖에 없다는 논리이다.

■  결론부터 이야기 하자면
공공용지로 사용하려면 굳이 민간자본을 투입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민간건설업체가 공사를 하는 것을 전제로하여 사업부지의 용도를 논의한다면 
일부 공공용지와 함께 상업용지나 아파트부지로의 개발은 불가피한 실정이기 때문에,
아예 매립지 개발의 방향을 공공용지 확보를 전제로 하여야 원도심의 피해를 막을 수 있을 것이다.

■  이 사업이 시작된 발단은 '가포신항 컨테니어 부두' 건립이 목적이었지,
해양신도시 건설은 아니였던 것이다.
1997년 2월 11일에 '조선일보'에 게제된 '마산항 재개발계획'을 보면 그 내용이 정확하게 나타나 있다.

 


■  당초 매립지의 개발용도가 공공용지로 되었음을 그림을 통해 알 수 있다.
시민체육시설, 해운여객 터미널, 복합용도 및 행정문화시설과 함께
시민휴게공간으로 야외음악당, 선상 무대, 인공호수, 피크닉장, 야외광장, 분수대와 함께 롤러스케이트장, 배트민턴장으로 계획되어 있었다.
계획의 범위도 서항일대에서 창포동 앞 1부두(임항선 종착점)까지로 되어있다.


■  기사내용에도 '서항지역의 재개발로 수변공원과 국제금융 - 물류 - 관광여객 기능을 갖춘 종합항만공간으로 탈바꿈한다' 고 적혀있으며
- 국제교역시설, 해양공원, 해양 박물관 등을 갖춘 관광위락시설로 바꾸는 내용의 마산항 광역개발계획을 수립하여 1997년 2월 10일 해양수산부가 발표했었다.

■  당초 '마산항 재개발계획'의 목적과는 달리,
14년이 지난 지금, 전혀 엉뚱한 방향으로 가고있는 것 같다.
그간에 이 업무를 담당했던 수 많은 사람들은 온 데, 간 데 없다.
남아있는 것은 공사를 할 민간건설업체만 남아서 사업의 향방을 주도하고  있다.

공공개발사업시 당초 수립된 개발의 목적이나 취지가  개발업자와 계약조건에 의한 상황적 논리에 의해 결정된다면, 이는 결코 바람직한 현상이라고 할 수 없다.
지금이라도 원래의 목적에 부합되는 방향으로 결정될 수 있도록
   모두의 지혜를 모아야 할 것이다.



Trackback 0 Comment 3
  1. 오호 2011.03.31 13:58 address edit & del reply

    그노무 매립 매립, 그 질알들로 쳐 먹는 돈이 도대체 얼마나 되길래 모도 그리 미쳐 돌아갈까?
    저마다 수백억 수천억씩 쳐 먹을 수 있는가? 과연? 그 질알로?
    그 질알로 미쳐 돌아가는 것들이야 말로 무식하고 대가리 나쁜 게 죄악이 되는 경우다.
    마산만, 마산을 연달아 능욕하는 것들. 반드시 죄값을 치르리라!

    • 삼식 2011.03.31 15:19 address edit & del

      별다른 대안없이 일방적으로 추진되는 것 같아서 걱정입니다.
      앞으로 우찌하는지 지켜봐야겠죠!

  2. 1 2011.04.10 12:26 address edit & del reply

    수십년 내로는 마산만이 없어질것 같아요

창원 진전 출신 이교재의 독립운동과 상해 임시정부-10

Ⅳ. 임시정부 발행 9개 문건의 국내 반입과 그 의미(3) 그렇다면 개별 문건들의 내용은 무엇이었는가. 이교재(우측 사진)가 전달하려던 문건 중에는 달성의 문영박(호는 장지, 1880~1930)에게 보내려던 두 종류의 문건이..

창원 진전 출신 이교재의 독립운동과 상해 임시정부-9

Ⅳ. 임시정부 발행 9개 문건의 국내 반입과 그 의미(2) 이교재(우측 사진)의 임정문서 일부가 동아대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는 정보는 이정순의 아들인 이상화를 통해 알게 되었다.(이상화와의 면담은 2017년 9월 27일 마산..

창원 진전 출신 이교재의 독립운동과 상해 임시정부-8

Ⅳ. 임시정부 발행 9개 문건의 국내 반입과 그 의미(1) 이교재(우측 사진)의 독립운동 중에서 증거가 가장 많이 남아있는 부분은 상해임시정부에서 발급한 ‘경상남북도 상주대표’라는 위임장을 비롯하여 다종..

창원 진전 출신 이교재의 독립운동과 상해 임시정부-7

Ⅲ. 상해 임시정부로의 망명과 통영 군자금 모금 사건(2) 이교재(우측 사진)가 상해 임정에 도착한 1921년대 혹은 1922년대 초는 임정으로서는 어려운 처지에 놓여 있었다. 베르사이유 체제가 공고화되고, 임정 내의 갈등도..

창원 진전 출신 이교재의 독립운동과 상해 임시정부-6

Ⅲ. 상해 임시정부로의 망명과 통영 군자금 모금 사건(1) 이교재(우측 사진)의 독립투쟁에서 두 번째 단계는 상해로 망명한 다음 상해 임시 정부의 일원으로서 활동한 시기이다. 그는 상해에 언제 갔으며, 어떻게 갔을까? 이 부..

창원 진전 출신 이교재의 독립운동과 상해 임시정부-5

Ⅱ. 성장 환경 및 3.1운동 때의 독립활동 (4) 그렇다면 이교재와 함께 형무소에 갇힌 위의 인물들은 누구일까. 순서대로 적힌 인물들을 검토해 보자. 沈相沅에 관한 기록은 재판 기록 이외에서는 신상정보를 확인할 수 없었다...

창원 진전 출신 이교재의 독립운동과 상해 임시정부-4

Ⅱ. 성장 환경 및 3.1운동 때의 독립활동 (3) 이교재가 독립운동에 몸을 던져 뛰어든 것은 3.1운동 때였다. 그는 1919년 3월 1일에 독립만세운동이 일어났을 때 고향의 동지와 더불어 선언서를 비롯한 독립운동 관련 문..

창원 진전 출신 이교재의 독립운동과 상해 임시정부-3

Ⅱ. 성장 환경 및 3.1운동 때의 독립활동 (2) 이교재가 소년시절을 보냈던 조선조 말기와 대한제국시기에 진전면 일대에는 몇몇 서당들이 있었는데, 이들은 대체로 마을 단위이자 문중 중심으로 운영되었다. 특히 문중 중에서도 ..

창원 진전 출신 이교재의 독립운동과 상해 임시정부-2

Ⅱ. 성장 환경 및 3.1운동 때의 독립활동 (1) 이교재(사진)는 1887년(고종 24년) 7월 9일 경상도 진해현 서면 대곡리(현 창원시 마산합포구 진전면 오서리 578번지)에서 농민의 아들로 출생하였다. 그가 부농의 아..

창원 진전 출신 이교재의 독립운동과 상해 임시정부 - 1

앞서 9회에 걸쳐 1954년 김형윤 선생이 마산일보에 기고한 '이교재 선생 생가 기행문' 「삼진기행」을 포스팅했다. 오늘부터는 독립운동가 죽헌 이교재 선생(위 사진)의 생애사를 연구한 유장근 경남대 역사학과 명예교수(아래 사..

김형윤의 <삼진기행> 9 / 1954년 4월 23일 (금)

황교 교반의 전적지 / 장렬히 순국한 8열사 - 3 이 황교전투로 말하면 삼진방면의 만세의거로서는 제3회째라고 하는데 제1회가 현동 제2회가 진북의 순으로 황교전이야말로 규모를 확대하였든 만큼 피해가 우심(尤甚, 정도가 더욱 ..

김형윤의 <삼진기행> 8 / 1954년 4월 22일 (목)

황교 교반의 전적지 / 장렬히 순국한 8열사 - 2 논둑 받아(?) 둑아 날 살리라 심의중(沈宜中)이 불콩이 날 죽인다! 이것은 누구의 창작인지 미상이나 지금도 산야엘 가면 나물 캐는 촌새악씨나 나무하는 목동이나 또는 소먹이는..

김형윤의 <삼진기행> 7 / 1954년 4월 21일 (수)

황교 교반의 전적지 / 장렬히 순국한 8열사 - 1 우리일행은 이교재선생의 묘소에 정중한 전배식(展拜式)을 마치고 산에서 마을까지 내려왔을 때에는 사양(斜陽)이 부락에 빚칠 때이다. 일행은 노부인과 작별인사를 할 때 굵은 눈물..

김형윤의 <삼진기행> 6 / 1954년 4월 20일 (화)

이교재 선생 묘지전배기(李敎載 先生 墓地展拜記) - 6 불우 순국열사들! 이 땅에 얼마나 많은가? 백년 일세기를 영길리(英吉利, 잉글랜드)의 식민지로서 정치적 압박으로 말미암아 정치적 치명상을 입고 경제적으로 약탈착취(掠奪搾取..

김형윤의 <삼진기행> 5 / 1954년 4월 18일 (일)

이교재 선생 묘지전배기(李敎載 先生 墓地展拜記) - 5 그러면 다른 말은 잠간(暫間, '잠깐'의 비표준어) 차정(次頂)에 미루어두기로 하고 정부에서는 무수한 순국열사에게 무엇으로 보답하였으며 무엇을 하려고 구상하고 있는가? 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