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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7.06 00:00

김은숙의 추억


코스모스처럼 가냘프면서도 강철처럼 강했던 여인 김은숙이 지난 5월 24일 아침, 쉰 셋 나이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두 딸에게 “사랑해”라고 마지막 말을 남겼다 합니다.

김은숙,,,
1982년 암흑 같은 세상을 뚫고 부산미국문화원에 불을 질러 광주항쟁의 진실을 세상에 알린 여인입니다.

스물 넷 앳된 그녀가 부산미국문화원의 경비를 뚫고 들어가 플라스틱통에 든 인화물질을 복도에 붓고 공범 문부식이 불을 당겨 발발한 부산미문화원방화사건은, 그때까지 아름답게만 포장되어 있던 미국의 실체를 만천하에 폭로함으로써 '세계 모든 나라가 반미를 해도,,,'라고 자신했던 한국에서마저 반미 운동을 일게 한 우리 현대사의 대전환점이었습니다.

                                <1982년 3월 18일 불타는 부산미국문화원>

가 그녀를 만난 건 1988년이었습니다. 그녀가 부미방사건으로 5년 8개월간의 수형생활을 마친 직후였습니다.
마산 합성동에 있는 '성공회 마산교회'의 이교승 신부님이 연락해 성당사무실에서 만났습니다.
그때 그녀는 마산에 와서 노동운동을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저도
 이교승 신부가 말하기 전까지 그녀가 마산에 은거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몰랐습니다.

사무실 문을 열고 들어서는 그녀를 보는 순간, 가장 먼저 
‘저렇게 여린 아가씨가 그 엄청난 일을 해내다니,,,’ 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서른의 김은숙은 가는 어깨에 긴 머리와 깊은 눈을 가진 미인이었습니다.

이런 외모와 달리 이야기를 나눌수록 그녀의 내공이 강철같다는 사실을 알게되었습니다.
김은숙의 대화는 깊고 넓었습니다.
분명한 발음에 말투가 차분했습니다.
저보다 다섯 살 아래였지만 그녀는 이미 세상을 훤히 내다보고 있었습니다.
‘큰 사건을 경험해서 저런가? 참 대단한 아가씨네,,, 놀랍다,,,’
이야기를 나누는 내내 제가 가졌던 생각입니다.

한 시간 정도 이야기를 나누었으며 화재는 주로 민주화운동과 지역의 노동운동에 대한 것들이었습니다.
오래된 일이라 정확한 기억은 없지만 김은숙의 말은 한마디 한마디가 신중해서 심중에서 나오는 진정성을 충분히 느낄 수 있었습니다.

이야기가 끝나갈 무렵, 그녀가 어렵게 말을 꺼냈습니다.
앞으로 마창지역에서 노동운동을 할 계획인데 그 일에 필요하니 컴퓨터를 한 대 지원해달라는 부탁이었습니다.

지금은 흔한 게 컴퓨터이지만 당시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저 자신도 그때 컴퓨터가 없었으니까요.
그 시절 퍼스널컴퓨터 한 대 가격은 120만원 정도였습니다.

곤란하다고 혹은 생각해보겠다고 답할만한 분위기가 아니었습니다.
즉각 그러겠다 약속하고는 전달방법을 의논하다 현품보다 현금을 택했습니다.
돈이 전해지면 정보기관에서 눈치 채지 못하게 제3의 사람이 컴퓨터를 구매하기로 했죠.

그 때부터는 돈 전달방법이 문제였습니다.
당시 저는 설계사무소를 경영하고 있었습니다. 하여 정보기관의 감시를 받고있는 반국가사범 김은숙에게 공작자금(?) 120만원을 전달하는 일이 만만찮았습니다.
나중에 알려지면 크게 문제될 일이었거든요.
소위 ‘○○○사건의 자금책’으로 몰릴 수도 있는 위험한 일이었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우스울 정도로 까마득한 추억이지만 그 때는 그랬습니다.
고인이 된 벗 황주석 선생이 '운동권에 돈 안전하게 전달하는 방법'을 제게 가르쳐주기도 했던 시절이었으니까요.

답은 제 아내에게서 찾았습니다.
같은 여자니 자연스럽게 두 사람이 만나 주고받으면 될 것 같다는 생각에서였습니다.

집으로 돌아와 아내와 상의했습니다.
아내 정미라는 담이 약한 사람입니다.
하지만 사정이야기를 듣더니 “같은 여자니 내가 만나는 게 남의 눈을 피하기 좋겠다”고 쿨하게 답하더군요.

며칠 후,
약속한 시간과 장소에 아내가 나가 돈을 전했고 일은 거기서 끝났습니다.

제가 가진 ‘김은숙의 추억’은 여기까지입니다.
그 후 이교승 신부를 통해 가끔 그녀의 소식은 전해 들었지만 직접 만나지는 않았습니다.

지난 봄  김은숙이 죽던 날,
아내가 눈물을 그렁그렁하며 많이 안타까워했습니다.

그러면서도
“우와 그때 너무너무 겁나더라,
무슨 간첩 접선하는 것도 아니고,,,
떨려서 혼났네,,,
장소는 합성동 시외버스터미널 건너편 지하다방이었지?
누가 훔쳐보는 것 같고,,,
너무 겁이나 이야기를 길게 나누지는 못했고,,,
신문지에 싼 돈 전하고 조금 앉았다가 나왔지 그만,,,”
웃으면서 23년 전 기억을 되살리더군요.

한국 반미운동의 효시가 됐던 부산미국문화원 방화사건이 내년이면 30주년입니다.
엄혹했던 독재의 사슬을 끊고 온몸으로 민족의 아픔을 세상에 알린 김은숙,,,
그 영혼이 평안하기를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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