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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는 이야기

끊어진 다리

by 허정도 2011. 6. 7.

얼마 전, 압록강 하류에 있는 중국 단동에 다녀왔습니다.
중국 요령성 단동은 북한의 평안복도 신의주와 철교로 이어지는 곳, 북한과 가장 가까운 중국 땅입니다.
한반도와 중국 땅을 오가기 좋은 곳이라 예부터 조공로(租貢路)로 사용된 지역이기도 합니다.

육이오 때 미공군 폭격으로 부서져 있는 철교며, 이성계가 회군했던 위화도며, 항미원조(抗美援朝)전쟁의 도도한 자부심이 넘치는 중국정부의 기념물들과 여진족을 막기 위한 명(明)의 장성(長城, 虎山山城)이며, 고금을 넘나드는 시대의 유적들이 고스란히 남아 이곳이 소용돌이쳤던 역사의 한복판이었음을 말해주었습니다.

늦은 저녁에 도착하여 압록강 철교의 밤풍경부터 보았습니다.


6.25 때 잘려나간 철교가 어두운 압록강 위에 걸쳐 있었습니다.
일한병합 직후인 1911년 일제가 놓은 이 철교는 6·25전쟁 때 파괴되어 중국에 연결된 절반만 남아 있어서 압록강단교(鴨綠江斷橋)라고도 부릅니다.
철교의 중앙부는 철로로 사용되었고 양쪽에 보도로 사용되었는데 1932년 통계에 의하면 그 해 보도통행자가 260만 명이었다고 합니다.

식민지 말기 쯤, 이 철교가 노후되자 일제는 강 상류 쪽 100m 지점에 새로운 다리를 놓기 시작해 1943년 4월 개통하였습니다.
이 철교는 지금도 사용되고 있는데 기차통행용 철도와 일반차량용 차도가 동시에 이용되고 있었습니다.
1990년 북한과 중국의 합의에 따라 조중우의교(朝中友誼橋, 중국에서는 중차오유이차오[中朝友誼橋]라 부름)라 명명하였습니다.
김정일 위원장 방중 때도 이 다리를 건넜습니다.
통한도 60년 전의 일, 지금은 관광지로 이용되고 있었습니다.

흐르는지 멈췄는지 조차 알 수 없는 캄캄한 강물 위에 덩그러니 떠있는 네온불빛이 여기가 끊어진 철교임을 말해주고 있었습니다.
질흙 같은 밤이라 강 건너 저기가 북한 땅이려니 상상만하고 호텔로 돌아와 여장을 풀었습니다.

다음 날 아침 9시 경, 어젯밤에 보았던 철교에 다시 나가 이번에는 유람선을 탔습니다. 5-60명은 족히 탈 수 있는 유람선 서너 대가 교대로 관광객을 맞이하고 있었습니다. 이용자는 대부분 중국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때 강 건너 북한 쪽에서 색다른 장면이 보였습니다.
철교 아래에 갖가지 색의 옷을 입은 어린아이들 1-200명 움직이고 있었습니다. 소풍을 나왔는지 현장교육을 나왔는지, 무채색 배경에 짙은 원색의 움직임이 분주했습니다.


선상에서 관광기념품을 파는 중국여인의 시끄러운 고음이 십여 분 나오더니 유람선이 출발하였습니다.

배는 철교 밑을 지나 위화도 쪽으로 올라갔습니다. 아래 사진이 위화도입니다.


지금은 고인이 되신 중학교 역사 선생님께서 이성계가 위화도회군 때 주장한 ‘4불가론(四不可論)’을 판서로 깨끗이 적어 놓고 설명하던 모습이 생생히 떠올랐습니다.

그 중 ‘장마철이라 전염병 때문에 불가’ 하나 밖에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하자 일행 중 한 분이 “첫째, 약소국이 강대국과 싸우는 것은 상책이 아니다. 둘째, 여름철에 전쟁을 벌이면 농사를 망쳐 농민의 호응을 받기가 어렵다. 셋째, 주력군이 이쪽으로 몰리면 그 틈을 타 왜구의 침입이 증대할 것이다. 넷째, 당시 장마철이라 전투가 불편하고 전염병으로 군사들이 희생될 우려가 크다는 것이 ‘4불가론’이다” 면서 유창한 역사실력을 과시해 한 수 배웠습니다.

우리에게는 ‘조선’을 있게 했던 역사적인 섬이라 그저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벅찼지만 사정이 다른 중국 사람들은 이 섬에 눈길 한 번 주지 않았습니다.

위화도에 인접한 배는 머리를 오른쪽으로 돌려 북한 쪽으로 다가가더니 강물의 흐름에 맞춰 천천히 내려왔습니다.
2006년 11월 한국YMCA가 북한에 자전거 6천대를 보낸 후 조선기독교총연맹의 초청을 받아 북한에 다녀온 적이 있습니다만 여전히 북한 땅과 북한사람들의 생활은 제 눈길을 끌었습니다.

강변에는 작은 배들이 여러 대 정박해 있었고 해안에는 배에 짐을 싣고 내리는 사람들이 눈에 띄었습니다.
활기 없는 해안가 건물 벽에 붙어 있는 ‘21세기의 태양 김정일 장군 만세!’라는 붉은 글이 생경스러웠습니다.


유람선에 탄 사람들 중 몇 분이 반갑다고 고함을 지르며 손을 흔들었지만 북한 사람들은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습니다.
배에 탄 사람들은 반가운지 모르지만 북한사람들은 하루에도 수십 번 보는 유람선이라 그러겠지 하고 이해했습니다.

한국전쟁 참전을 기념한 항미원조(抗美援朝)기념관과 호산산성(虎山山城)을 관광한 후 오후에 다시 철교를 찾았습니다.
이번에는 끊어진 철교 위를 걸었습니다. 전쟁 때 폭격으로 끊어진 아픈 역사의 흔적을 직접보기 위해서였습니다.


일본제국이 대륙 침략을 꿈꾸며 놓았던 거대한 이 다리는 당시 최첨단 공법으로 설계되었습니다.
큰 배가 지날 때를 대비해 교량 중간부분을 회전시킬 수 있는 개폐식(開閉式)으로, 열면 십자(十字)가 되고 닫으면 일자(一字)가 되도록 설계된 다리였습니다.
사용 않은지 오래지만 철교를 여닫던 거대한 톱니바퀴는 그대로 남아있었습니다.

철교 끝에서 강가에서 마주보고 있는 북한과 중국 두 지역을 보았습니다.


시장경제를 받아들인 대가로 정체불명의 고층건물들이 빼곡한 중국 땅 단동(사진 왼쪽)과 무기력한 북한 땅(사진 오른쪽)이 비교되었습니다.
빈부격차가 가시화되고 있는 중국의 도시문제가 눈에 들어왔고, 이런
중국에 비해 북한 땅은 너무 썰렁했습니다.
단동의
막개발을 두둔하는 것은 아니지만, 쳐져있는 북한 땅을 보니 안타까웠습니다.

안타까운 건 북한 뿐만 아니었습니다.
남의 땅 중국에서 배를 타고 우리 땅을 관광(?)하고 있는 제 모습도 안타까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