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해 중원로터리 팽나무>
일제에 의해 계획된 진해 신도시의 한복판 중원로터리에는 늙은 팽나무 한그루가 있었습니다.
바로 이 나무입니다.
식민지 시대, 일본해군은 이 나무 아래서 행사도 많이 했습니다.(1930년대 사진)
1950년대 중반에 제 수명을 다해 고사(枯死)했는데 당시 수령이 1,200여년이었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이 팽나무는 신라, 고려, 조선 세 왕조를 지켜본 진해의 역사 그 자체라고 할만합니다.
이 늙은 노거수(老巨樹)는 어디에서나 불 수 있는 ‘한 그루의 나무’가 아니었습니다.
1899년 일본해군에서 제작한 「마산포 및 부근」이라는 지도에 의하면 당시 웅천군 웅중·웅서 양면이 자리 잡은 진해신도시지역은 넓은 평야였습니다.
북쪽은 장복산이 막아주고 남쪽으로는 야트막한 산과 오목조목한 해안을 낀 살기 좋고 아름다운 지역으로 ‘중평’이라는 이름을 가진 들판이었습니다.
그곳에는 9개 마을이 들판을 사이에 두고 오손도손 살고 있었는데, 이들 2천 여명을 벼락같이 내쫓고 만든 것이 진해신도시입니다.
하지만 이 늙은 팽나무는 쫓겨난 마을주민들과 달리, 진해 신도시의 중심에 살아 남아 신도시의 랜드 마크 역할까지 했습니다.
중평마을에서의 팽나무 위상을 확인해보기 위해 팽나무의 위치와 일본인들에 의해 사라진 9개 마을의 위치를 추정해보았습니다.
해방 2년 후인 1947년 7월에 일본식 동리명칭을 우리 식으로 다시 고치는 작업이 있었고, 1955년 8월 진해읍이 ‘진해시’로 격상될 때 다시 동명조정이 있었습니다.
이때 위 9개 마을의 명칭이 대부분 되살아났습니다.
현동·도만·도천·중평(이상 중앙동)·안곡·속천(이상 태평동)이 법정동으로 되었고, 여명리(余明里)의 ‘余’자와 통자되는 ‘餘’를 취하고 좌천리(左川里)의 ‘左’와 자음이 같은 ‘佐’를 취해서 여좌동(餘佐洞)이 되었습니다.
이 동(洞)들의 명칭을 정할 때 옛 마을 위치에 맞추어 결정했는지의 문제에 대한 전문가의 견해를 살펴보았더니, 창원대 민긍기 교수는 옛위치가 그대로 적용된 것은 아니라 했습니다.
하지만 진해·웅천향토연구회 황정덕 회장의 견해는 달랐습니다.
군사지역 때문에 약간의 차이가 있을 수는 있지만 현재 동의 위치는 옛날 리(里)의 위치와 크게 다르지 않다고 했습니다.
2011년 8월 8일, 황정덕 회장에게 직접 확인하였습니다.
황정덕 회장이 쓴 『우리고장문화유적길잡이』에 실린 ‘옛 중평마을 일대 추상도’에도 도만리·도천리·여명리는 현재 도만동·도천동·여좌동과 비슷하게 그려져 있습니다.
다음 그림은 옛 이름을 가진 현재의 동과 팽나무를 함께 앉혀본 도면입니다.
황정덕 회장의 견해가 맞다고 볼 때, 당산나무였던 팽나무를 중평들판 중앙에 두고 각 마을들이 둘러 앉아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철거당한 마을주민들은 물론, 그들의 삶의 터전이었던 중평들판에 있어서 팽나무의 위상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는 장면입니다.
마을 주민들을 강제로 내쫓고 만든 진해라는 일본인도시 한복판에 오랜 세월동안 9개마을주민들과 희로애락을 함께했던 팽나무가 있었던 겁니다.
뿐만아니라 이 나무 주변에 일본제국을 과시하는 시설들도 들어섰습니다.
러일전쟁기념탑과 진해신사를 비롯하여 진해역·진해우체국·진해면사무소 등이 그것들입니다.
신도시가 완성되고 정착된 1920년경의 도시전경인 아래 그림에서 보듯이 도시중심에 앉은 중원광장 팽나무(화살표 방향)는 크기가 대략 폭 30m 높이15m 정도로 짐작되는 도시의 강력한 상징이었습니다.
이 그림은 엽서 4장을 연결해 만든 겁니다.
대정10년(1921년) 9월 3일자로 소인된 엽서라 1920년경으로 추정하였습니다.
보시죠.
일본해군은 이 팽나무를 중원로터리 중심에 두면서 방사상(放射狀) 신도시 디자인의 기점으로 삼았습니다.
추정해 보면,
진해신도시를 설계하기 위한 사전현장조사과정에서 팽나무의 크기·모양·위치·앉은 높이를 비롯하여 나무에 얽힌 역사와 주민들과의 관계까지 충분히 조사 분석하였을 겁니다.
그런 후, 팽나무가 앉은 위치에 맞추어 중원로터리를 배치한 후 북원광장, 남원광장과 크고 작은 도로들은 그에 적절히 어우러지도록 설계하였을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진해신도시계획의 전체 틀은 바로 이 팽나무에서 비롯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들은 왜 그 오래된 팽나무를 신도시계획의 모티브로 삼았을까요?
강제로 철거당한 마을의 당산나무였던 팽나무를 신도시의 중심기점으로 삼은 것은 작은 의미가 아닙니다.
당산나무는 단순히 나무로서의 의미만 있는 것이 아니거든요.
마을을 지켜주는 수호신으로 믿어 신목(神木)이라 부르기도 했습니다.
당산수를 베거나 해를 입히면 큰 재앙을 입게 되며 천재지변으로 나무가 죽거나 쓰러져도 마을 전체가 큰 화를 입는다고 믿기도 했습니다.
그런가하면 당산나무는 마을주민들의 대소사를 치렀던 행사장으로, 때로는 지친 심신을 품어주는 휴식의 장소로도 사용되었던 마을의 상징이자 자부심이었습니다.
이런 나무를 남겨 도시설계의 모티브로 삼은 것을 두고 생태와 경관을 고려했다고도 볼 수 있고, 벌목에 대한 미신이 작용했다는 등 다양한 추측이 가능할 겁니다.
하지만 급하게 토지를 수용했던 당시의 정황을 보면, 이런 이유보다는 군항건설과정에서 저지른 자신들의 만행에 대한 민심을 우려하여 선택한 수습책 아니었나 싶습니다.
모든 것을 잃고 내쫓긴 9개마을 주민들의 '고향의 상징' 당산나무마저 베어냈을 때 생길 후환을 고려했다는 뜻입니다.
이 추정은 물리적인 도시구조에 대한 결과론적 담론보다는 식민도시의 전개과정에서 나타나는 억압과 수탈의 과정에 대한 담론으로 진해신도시를 조명해보자는 의미도 포함하고 있습니다.
어쨌든 이 늙은 팽나무의 위치가 신도시의 상징공간이었던 중원광장 한복판이라는 점은 ‘비록 마을은 없어졌지만 그 역사와 전통은 존중한다’ 고 표현함으로써 자신들의 강제토지수탈을 ‘부득이한 조치’ 로 위장하기 위한 판단이었던 것 같습니다.
이 오래된 나무는 신도시건설 이전의 한국전통마을과 신도시건설 이후의 일본인 전용도시를 아우르는 상징이었습니다.
수령 1,200여년을 채워 천수를 다한 나무를 대신해 현재 중원로터리에는 작은 나무들과 조형물이 들어서있습니다.
어차피 큰 의미가 없는 것들이니,
역사적으로나 생태적으로나 이것들 대신, 잘 생긴 팽나무 한 그루를 다시 심는 것이 어떨까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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