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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속 도시이야기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쳔사 (158) - 강점제3시기

by 허정도 2013. 4. 22.

<원마산(마산포)의 변화 - 시가지의 확산>

오늘부터는 1930년~1945년의 마산포(원마산)의 변화에 대해 올리겠습니다. 이 시기 마산포는 대규모 매립이 시행되어 규모도 커지고 근대식 도로망도 확산되는 대변화가 있었기 때문에 시가지가 확산되었습니다.

1930년~1945년 사이의  원마산에는 한국인 상인들에 의해 부림동 시장과 남성동 해안 일대에 걸쳐 곡물․면사포 등의 포목류․식료품․고무화․기타잡화 등 생활필수품을 판매하는 소점포가 주류를 이루고 있었습니다.

또한 일본상인들도 원마산에 많이 진출하여 건축자재․철물․과자․서적과 문방구․가구․의복․주류․육류․연료․선구(船具) 등을 판매했습니다. 대금업자도 10여명에 달했으며 건축 붐을 타고 토건청부업도 호황을 누렸습니다.

1931년에 간행된『경상남도 통계연보』에서는 당시 마산 토지 중 대지․논․밭을 종류별로 나누어 매매가격과 임대가격을 기준으로 등급을 구분하고 있습니다.

대지중 상등지는 남성동 141번지(현 남성동 파출소 앞 네거리의 대각선 방향 토지)였으며 그 다음은 남성동 187번지(현 남성동 지하도와 연결되는 속칭 돼지골목 주변)와 두월동 1가5번지(현 식당 함흥집의 옆 대지)였습니다.

토지가격으로 보나 이 지역이 마산에서 가장 상업적 가치가 높았던 것으로 추정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한편 이 시기에 원마산은 범역이 확산되어 북쪽으로 상남동․교방동․오동동을 넘어 산호동 일부까지 시가지가 연결되었습니다.

이런 변화에 따라 서원곡으로 올라가는 구 성호동사무소 앞 도로가 1938년 개설되는 등 도시변화 때문에 필요해진 도로도 개설되었습니다.

해방기에 이미 산호동의 마산용마고등학교(전, 마산상고)로 가는 직선도로 등이 개설되어 있었으나 등기상으로는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1930년 이후 원마산의 도시구조 변화를 지적도와 관련자료 등을 통해 확인한 후1945년의 도시구조를 복원한 것이 다음 그림입니다.

 

이 그림은 1930년 토지이용도를 기준으로 그 이후 15년 동안 시행된 매립과 도로의 개설 및 폐쇄, 대지의 분할과 합병, 소유 변경 등의 변화를 지적도와 토지대장을 이용하여 실증한 것입니다.

그림을 보면 매립지역의 도로 축과 기존 원마산에 개설된 도로의 축이 서로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매립지역은 최초의 남성동 매립지역 도로와 동일한 축을 형성하며 도로가 개설된 반면 기존 원마산의 도로는 1910년대에 개설된 최초의 도로축에 따라 형성되었기 때문입니다.

두 지역의 도로 연결은 일정한 체계 없이 기존 지역과 매립지역간의 상황에 따라 임기응변식으로 연결되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일제강점기 동안 조성된 원마산의 해안은 해방 후 수십 년 동안 사용되어 1985년 매립공사(오동동에서 서성동 해안까지의 구항 297,512㎡와 창포동에서 월영동까지의 서항 382,069㎡의 매립공사. 1985년 11월 23일 착공하여 서항은 1992년 10월 13일, 구항은 1993년 10월 4일에 준공)가 착공되기까지 원형이 그대로 있었습니다.

도로 역시 1968년 현재 간선도로인 합포로가 매립지역의 도로 축에 맞춰 건설된 것 외에는 별 다른 변화 없이 지금까지 사용되고 있습니다.

아래 그림은 위 그림의 직전 상황, 즉 1930년의 마산포(원마산) 도면이며 그 밑은 1920년, 제일 아래가 1910년 매립과 도로개설이 있기 전 원래 모습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