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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속 도시이야기

마산·창원 역사읽기(7) - 민주화의 성지, 마산과 창원

by 허정도 2014. 7. 7.

 

1. 한국사 속의 마산·창원

1- 7  민주화의 성지, 마산과 창원

 

일제의 억압에 굴하지 않고 치열한 저항정신을 보여준 지역민들의 역사적 경험은 1960년대와 1970년대 이승만 독재와 박정희 독재정권에 대항하는 민주화운동의 성지로 자리잡았다.

마산에서의 3.15의거는 그 뒤 4.19 항쟁의 기폭제가 되었고, 이로 인하여 이승만 독재정권을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만들었다.

이승만 정권의 부도덕성은 도시의 지식인층이나, 학생들, 중간층들에게 반이승만, 반자유당이라는 성향이 투표로 나타났다.

1960년의 정.부통령 선거는 온갖 부정으로 인하여 2.28 대구에서의 학생시위, 제1.2차 마산봉기, 그리고 서울과 전국에서의 4.19항쟁, 4.26 교수단 시위와 이승만의 하야로 연결되었다.

1960년 3월 15일 오후 3시 30분에 오동동 불종거리의 민주당 마산당사를 뛰쳐나간 민주당 소속 정남규 도의원을 비롯한 간부와 당원 등 20여명은 당사 앞에 모여든 군중을 뚫고 “민주주의 만세”등 구호를 외치면서 해안 쪽으로 달려나갔다.

이렇게 자유와 민주사회 건설을 위한 항쟁은 시작되었다.

4월 11일 오전 11시 30분경 마산 중앙부두 앞바다에서 오른쪽 눈에 경찰이 쏜 불발 최루탄이 박힌 마산상고 신입생 김주열군의 시체가 떠오르면서(아래 사진) 항쟁이 다시 시작되었다.

당시 경찰은 김군의 시체에 돌을 달아 바다 속에 던져 버렸던 것이었다. 격분한 시민들은 “살인경찰을 잡아라”고 외치면서 대규모 시위에 들어갔다.

해가 질 무렵 “이승만정권 물러가라”, “정.부통령 선거 다시 하라”등의 플래카드를 앞세우고 시위행진을 계속했다.

마산에서의 1.2차에 걸친 항쟁은 전국민의 항쟁이었던 4.19로 계속되었다. 더 이상 이승만정권은 권력을 유지할 수 없었다.

유신체제를 타도했던 마산항쟁은 부산의 항쟁소식을 접한 경남대생을 선두로 시위는 시작되었다.

아래 사진은 부마민주항쟁 당시 경남대학교 정문 앞 시위 상황으로 경찰과 학생들이 대치하고 있는 장면이다.

 

학생이 중심이었던 시위대들은 1979년 10월 18일 ‘독재타도’ ‘유신철폐’를 외치며 거리로 뛰쳐나왔다. 경찰의 강경진압에도 굴하지 않고 양덕동 공화당사와 관공서, 파출소를 공격했다.

수출자유지역의 노동자와 상당수의 고교생이 참여한 마산시위는 부산지역보다 한층 격렬했다.

유신정권은 민중들의 요구를 거부하고 10월 19일 마산 창원지역에 위수령을 발동하여 항쟁을 저지하고자 하였다.

마산의 항쟁은 이틀만인 20일 새벽에 진압되고 말았다. 조직적인 항쟁의 지도부가 없었던, 다만 민중의 자발적 참여로 이루어진 항쟁은 정권의 무차별 폭력에 의해 진압되고 말았던 것이다.

하지만 박정희 독재정권도 오래가지는 못했다. 10월 26일 박정희의 죽음으로 군부독재도 막을 내리고 말았다.

1979년 10월의 부산지역과 마산지역의 항쟁은 4.19이후 독재정권에 대항하는 학생과 다수 시민이 봉기한 최초의 사건이었다.

유신정권의 억압적 통치구조와 부정부패에 대한 민중의 불만이 자연발생적으로 분출된 항쟁으로 군부독재를 종식하고 민주화를 이루는데 일대 전기를 가져왔다.

그 뒤 1986년 6월 항쟁으로 민주화에 대한 요구로 계속 이어졌다.

마산.창원지역은 한국사회가 산업화되는 과정에서 그 근본적 모순을 안고 있었던 지역이었다. 마산수출자유지역, 창원공단은 한국산업화 과정에서의 사회적 모순을 대변해주고 있었다.

이로 인하여 노동운동 등이 어떤 다른 지역보다 힘차게 계속되었다. 지금도 이 지역은 한국사회의 자주와 평등을 위한 노력이 계속되고 있다.

마산.창원지역은 언제나 한국사회발전의 중심에 있었으며, 앞으로도 한국사회의 발전과 함께 할 것이다.<<<

남재우 / 창원대 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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