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한국사 속의 마산·창원
1-5 ·조선시대의 마산과 창원
창원이란 지명이 만들어진 것이 조선시대이다.
조선 태종대에 의창과 회원을 합쳐 창원이라 이름지었다. 부로 승격되었다가 뒤에 도호부가 되었다. 선조 34년에 대도호부로 승격했다.
대도호부로의 승격은 임진왜란때 병사 겸 부사인 김응서와 그를 따르는 군인, 관인, 백성들이 한 사람도 일본에 항복하지 않았다는 체찰사의 장계 때문이었다.
임진왜란때 일본군과 벌였던 대표적인 전투는 노현 및 창원성 전투, 안민고개전투, 합포해전이 대표적이다.
칠원군과 합쳤다가 광해군 9년(1617)에 나누었다. 인조 5년(1627)에 진해와 합쳤다가 7년에 나누고, 현종2년에 전패를 잃었기 때문에 현으로 강등되었다가 11년에 다시 승격되었다.
조선후기에 들어서면 이 지역은 경제활동의 중심지가 되었다. 특히 마산지역은 조선후기에 물산의 집산지로서 발전하기 시작했다.
대동법이 시행으로 해로가 연결되는 전국 각지에 조창이 설치되었는데. 영조 36년(1760년)에 창원 마산창이 설치되었는데 마산창 관할구역은 인근 8개 읍이었다.
고려시대의 석두창이 없어진 후 이 때 다시 신설된 것이다.
마산창은 남해안의 수산 물집산지이자 교환의 중심지역활을 담당했다.
조선시대에 남해의 마산은 동해의 원산, 서해의 강경과 더불어 전국 3대 수산물집산지의 하나였다.
이렇게 번성한 마산장은 함경도 덕원의 원산장, 충청도 은진의 강경장과 더불어 조선후기 15대 자아시 중의 하나로 발전하면서 마산이 남해안 최대의 상업도시가 되었다.<<<
남재우 / 창원대 사학과 교수
아래 그림은 조선 후기에 제작된 각선도본(各船圖本)에 실린 조운선 그림과 조선시대 이용했던 조운선의 모형이다. 그림에서는 배의 골격만 나타내었지만 모형은 섬세하게 복원된 것이다. 배의 기본구조 위에 삼판(杉板)을 얹어 용적량을 늘린 것이 특징이며 배 안에다 세곡을 적재했다.
초 봄에 이런 조운선 16척이 각 읍에서 보내온 대동미 9,215석(石) 5두(斗)를 싣고 마산포를 출발하여 거제 견내량→고성 사량도→남해 노량→전라도 영암 갈두포→진도 벽파정→무안 탑성도→영광 법성포→만경 군산포→충청도 태안 서근포→보령 난지포→경기도 강화 이고지포를 지나 6월 하순경 한강 마포에 있는 경창(京倉)에 도착한다. 1886년 일본과 미국의 차관으로 구입한 기선 해룡호가 나오기 전까지 모든 세곡이 이 배로 수송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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