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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속 도시이야기

마산·창원 역사읽기(6) - 일본의 침략과 저항

by 허정도 2014. 6. 30.

1. 한국사 속의 마산·창원

1-6 일본의 침략과 저항

 

1876년 조선이 일본과의 굴욕적인 강화도조약이 맺어진 이후 마산지역도 다른 지역과 마찬가지로 일본인들과 친일조선인들에 의해 잠식당하였다.

개항 이후 마산지역은 러시아와 일본의 조차지 경쟁이 치열하여 개항 초기부터 외세에 의한 피해가 컸던 지역이었다.

특히 마산은 항구를 끼고 있었기 때문에 해상운송부문 및 어항과 관련한 상업부분을 장악하기 위한 일본 상인들의 침략이 노골적으로 진행되어 마산은 일본인들의 소굴로 변해갔다.

드디어 1899년 5월1일, 마산은 일본에 의하여 강제적인 개항의 길을 걸을 수밖에 없었다. 마산포 남쪽 2㎞거리에 이쓴 창원군 외서면 해안의 신월리와 월영리 일대가 각국공동조계지란 이름으로 계획도시(지금의 신마산지역)가 들어섰다.

같은 해 11월1일, 부산해관 마산출장소로 사용되던 남성동 조창건물에서 시행된 제1차 경매를 시작으로 총 4차례의 경매를 통해 조계지는 외국인들이 소유가 되었다.

1.2차 경매까지만 해도 러시아, 독일, 미국, 일본, 영국, 오스트리아 등이 참여한 공동조계 성격이었지만, 1908년 일본의 러일전쟁 승리와 을사조약 체결, 그리고 마산과 삼량진 사이에 건설되었던 철도 마산선의 개통으로 일본인의 독차지가 되었다.

1910년 조선이 일본에 합병되면서 구마산지역까지 일본인의 영역이 되었다. 1911년 일제는 마산항의 개항을 폐쇄하고 일본과의 단독무역만을 허락하였다.

그 결과 마산은 조선의 쌀을 비롯한 각종 물자를 일본으로 실어 나르는 전진기지로 바뀌었고 동시에 일본의 소비재를 수입하는 창구로 변질되어갔다.

<식산은행 마산지점 / 옛 제일은행 마산지점 자리>

 

이에 따라 일제의 침략에 대응하는 마산사람들의 저항도 점차 거세어졌다. 시장권과 매축권을 수호하기 위한 운동과 어용단체 신상회사 철폐 및 국채보상운동 등이었다. 또한 마산의 지역 상인들은 일본상인들의 경제적 침략에 대응하기 위해 민의소와 조선인 상업회의소를 만들었다.

비밀결사를 조직해 일제에 저항한 조선인 자본가들도 있었다. 1910년대 민족해방운동의 대표적 비밀결사조직인 “조선국권회복단 마산지부‘의 지부장 안확, 이형재, 김기성, 배중세 등이 그들이었다.

뿐만 아니라 창신학교와 의신여학교 그리고 마산노동야학교에 참여했던 많은 사람들도 1910년대의 어려운 조건속에서도 독립에 대한 꿈을 계속 이어갔다. 1911년에 일어난 일본국왕의 즉위를 기념하는 시가행진에서 일제에 저항하기도 하였다.

일제에 강점 당한 이후 국내에서는 일제에 반대하는 투쟁이 계속되었지만, 대부분의 투쟁은 일회적인 것이었고 조직적으로는 전재되지 못하였다.

그러나 1919년 3월의 만세시위는 달랐다. 일제를 경악하게 만들었으며 독립에 대한 조선인의 열망이 어떠한 것인가를 세계 만방에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

이 지역에서도 시위는 조직되었고, 만세의 물결이 모든 거리에 넘쳐났다.

만세시위는 기독교 계열과 연계되어 있던 이갑성과 임학찬 등이 중심이되어 시작되었지만, 비밀결사 대동청년단 세력과 연결되고 있었던 김용환, 이형재등 민족주의자들도 큰 역할을 하였다.

이 외에 창신학교와 의신학교의 교사였던 이상소와 박순천 등도 시위를 계획하고 주도했다. 만세시위는 창신학교와 의신여학교 등의 학생들이 중심이었지만, 마산 시민과 인근 지역의 농민 등도 참여한 광범위한 투쟁으로 전개되었다.

특히 마산의 시위는 3월3일 두척산(무학산)시위를 시작으로 4차례 이상의 대규모 시위가 일어났다. 창원지역의 구창원읍(지금의 창원시 소답동)의거, 상남면(지금의 창원시 상남동)의거는 창원지역민들의 독립의지를 보여주기에 충분했다.

3.1운동 이후 국내외를 막론하고 전민족적인 민족해방과 독립의 열기가 고조되고 있었다.

하지만 민족해방운동 내부에서는 해방운동의 방법론을 둘러싸고 실력양성을 통해 점진적인 독립을 추구하자는 세력과 일제에 대한 전면적인 항쟁을 통해 즉각적으로 독립을 추구하는 세력으로 나뉘어졌다. 이러한 상황은 마산지역도 예외는 아니었다.

마산지역에서도 실력양성론을 추구하는 사람들에 의해 이른바 “문화운동”이 활발하게 일어났다.

1920년 6월경 마산지역 문화운동의 구심점으로 ‘마산구락부’를 창립하고 교육.체육.계몽.교류 활동 등을 활발하게 벌여 나갔다.

마산구락부를 만든 사람들은 과거 마산인의소의 회원들이 많았으며, 회원은 대개가 상인을 비롯한 지주출신 자본가들이었다. 손덕우, 옥기환, 김치수 등이 그들이었다. 이들은 마산학원과 마산여자야학을 설립하여 정규학교에 가지 못한 아이들을 교육하기도 하였다.

반면에 문화운동을 주도하던 민족주의 계열이 민족해방운동전선에서 이탈할 즈음 이 지역에서는 사회주의사상으로 무장한 사람들이 등장하고 있었다.

1922년 11월에 결성된 사상단체 ‘신인회’가 바로 그것이다. 이듬해 조직을 확대하여 혜성사(살별회)로 개편되었다.

혜성사는 사회주의 사상의 본격적 연구와 전파 그리고 성장하는 민중운동 즉 노동. 농민운동 단체를 ‘조선노동총동맹’에 가입시킨 것은 이들의 활약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뿐만 아니라 이들은 1925년 건설되었던 ‘조선공산당’에도 적극 참여하여 조선공산당 마산 야체이카(세포-당원)가 되었다.

이후에도 일제에 대한 저항은 계속되었다.

1929년 광주학생운동의 여파로 발생한 ‘친일교사배척운동’ 시위사건과 1937년 신사참배거부를 주도했던 마산 창신학교의 학생들은 폐교가 될 때까지 일제에 저항했다. 이외에도 노동자.농민들의 일제에 대한 투쟁도 계속되었다.<<<

남재우 / 창원대 사학과 교수

<1910년 당시의 창신학교(지금 창원시 마산합포구 상남동 87번지 자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