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한국사 속의 마산·창원
1-4 고려시대의 마산과 창원
신라말의 사회는 중앙진골귀족들간의 왕위계승분쟁으로 지방세력들이 독립적인 세력으로 성장하기 시작했다. 이들이 호족세력이었다.
이 지역의 인근에는 김해지역의 호족이었던 김율희가 있었다. 이 사람은 신라말 구산선문의 하나였던 봉림사 개창을 지원했던 인물이다.
고려 태조 왕건은 후백제를 제압하고 한반도를 통일했다.
마산.창원지역은 고려 현종때에 의안.합포를 합쳐서 금주(지금의 김해)에 소속시켰다가 뒤에 감무를 각각 설치하였다.
충렬왕은 원나라가 일본을 정벌할 때에 군량등을 공급한 공로가 있었다고 하여 의안을 의창으로 합포를 회원으로 지역명을 변경하고 현으로 승격시켰다.
고려시대의 마산지역은 원나라 주도의 일본정벌이 시작되면서 전진기기가 되었다.
몽고와의 처절한 전쟁으로 수많은 사람이 죽고, 토지는 황폐화되어 지역민들은 삶의 터전을 잃고 이리저리 떠돌 수밖에 없었다. 뒤이는 일본 정벌은 이들을 다시 파멸의 위기로 몰아넣고 있었다.
고려 충렬왕 즉위년(1274) 10월3일, 원나라 도원수 홀돈과 고려 도독사 김방경의 지휘하에 4만군의 군사가 900척의 전함에 나눠타고 합포만을 출발하여 대마도로 향했다.
합포가 일본정벌의 전진기지가 되었던 것은 그 입지조건 때문이었다.
합포는 포구가 길고 거제도가 앞을 가로막고 있어 태풍의 영향을 덜 받는 천혜의 조건을 갖추고 있어, 당시 남해안에서 항구로서의 입지조건을 갖추고 있는 몇 안 되는 지역이었다.
뿐만 아니라 일찍부터 진이 설치되어 있었고, 일본과의 직선거리도 짧아 출발기지로 활용하기 좋았다.
조류 또한, 합포에서 출발하여 거제도를 지나 대마도-일본 본토로 들어가는 것이 지름길이었다. 게다가 군량확보에도 유리한 지역이었다.
합포에는 석두창이라 는 조창이 있어서 인근 지역의 조세가 모여들었기 때문이다.<<<
남재우 / 창원대 사학과 교수
아래 그림은 1872년 제작된 진해현 지도이다. 여기서 말하는 진해는 지금의 창원시 진해구(구 진해시)가 아니고 마산의 진동, 진북, 진전 지역을 말한다. 읍치는 진동면 진동리에 있었다. 남해안에 위치한 작은 고을이어서 치폐(置廢)를 거듭하였다.1601년(선조34)에는 임진왜란으로 인해 고을이 너무 피폐하여 함안에 합속되었다가 광해군 때 다시 복구되었고 1627년(인조5)에 창원에 편입되었다가 1629년 다시 함안에 귀속되었는데 1639년 고을 사람들의 소청에 의해 다시 복구되었다. 지도는 「여지도서」나 1871년의「영남읍지」에 수록된 지도와 유사한 구도를 지니고 있어서 이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북쪽 여항산을 비롯한 산지는 회화적 기법으로 세밀히 그렸다. 둥근 성곽이 있는 읍치는 문루와 더불어 내부의 관아건물과 민가도 그려 넣었다. 성곽은 둘레가 446척으로 읍성으로서는 매우 작은 규모이다. 남문의 앞에는 양이척화비()를 크게 그려 강조하였다. 특히 주변지역을 연결하는 도로는 홍선으로 그렸는데 하천과 구분하기 위해 '도'라고 표기한 점이 이채롭다. 고을의 서쪽 어변정(禦邊亭)은 당시 선소(船所)였는데 전선(戰船)도 그려져 있다. 창포리와 내포리에는 2일장시와 7일장시가 표시되었는데 보통의 5일장과는 달리 10일장으로 개설된 점이 특이하다. 읍치의 동쪽과 서쪽의 하천에는 숲도 잘 가꾸어져 있음을 볼 수 있다.
위 그림의 선소(船所) 위치는 아래의 현재 위성사진에서 율티리 해변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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