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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속 도시이야기

마산·창원 역사 읽기(9) - 마산만에 자리잡은 해상왕국 골포국, 그리고 포상팔국 전쟁

by 허정도 2014. 7. 21.

2. 청동기 시대에서 10·18까지

2-2 마산에 자리잡은 해상왕국, 그리고 포상팔국 전쟁

 

비옥하여 오곡과 벼를 심기에 적합하다. 누에치기와 뽕나무 가꾸기를 알아 비단과 짤 줄 알았으며, 소와 말을 탈 줄 알았다. 혼인하는 예법은 남녀의 분별이 있었다. 큰 새의 깃털을 사용하여 장례를 지내는데 그것은 죽은 사람이 새처럼 날아 다니라는 뜻이다. 나라에서는 철이 생산되는데 한. 예. 왜인 들이 모두 와서 사간다. 시장에서의 모든 매매는 철로 이루어져서 마치 중국에서 돈을 쓰는 것과 같다. 또 두 군에도 공급하였다. 풍습은 노래하고 춤추며 술마시기를 좋아한다. (삼국지. 위지동이전 변한조)

 

삼한시기 마산・창원지역이 속했던 변한의 생활모습을 적은 글이다.

변한은 삼한 중의 하나이다. 흔히들 한국의 고대사회를 고구려, 백제, 신라를 중심으로 하는 삼국시대로 이해하고 있지만, 기원을 전후로 한 시기부터 한강의 남쪽 지역에는 많은 나라들이 자리잡고 있었다.

중국의 역사책인 『삼국지』에 의하면 지금의 경기도, 충청도, 전남지역에서는 마한이, 낙동강을 경계로 동쪽에는 진한이, 서남부지역에는 변한이 있었다.

마한, 진한, 변한에는 여러 나라들이 있었다. 마한에는 백제국을 비롯한 54개국이, 진한에는 사로국을 비롯한 12개국이, 변한에는 구야국, 안야국을 비롯한 12개의 나라가 있었다.

이들 나라 외에도 다른 이름을 가진 나라들이 『삼국사기』, 『삼국유사』에 등장하고 있다. 대표적인 것이 포상팔국인데 그 중의 하나가 골포국이다. 골포국은 변한지역에 자리잡고 있었다.

골포국은 『삼국유사』에 합포로 기록되고 있지만 유적과 유물의 분포로 보아, 고대사회의 마산.창원 지역에서 정치집단이 형성되었을 가능성이 있는 지역은 성산패총 일대의 창원시 지역, 다호리를 중심으로 하는 창원 동읍일대와 마산의 진동만 일대로 볼 수 있다.

따라서 합포는 마산만을 가리키므로 마산의 중심지 보다는 마산만을 끼고 있는 창원시 지역일 가능성이 높다.

이 지역에는 청동기시대 이후부터 가야시기까지의 유적이 골고루 분포하고 있다. 가음정동유적(지석묘,청동기시대주거지.패총.고분군.수전지), 성산패총, 내동패총, 삼동동고분군, 외동패총 등이다.

이들 유적을 통해서 볼 때 골포국이었던 이 지역은 생활모습도 변한의 그것과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교역의 중심, 골포국-

 

골포국은 마산만을 끼고 있는 바닷가에 자리잡은 나라였다. 이 당시 대부분의 정치집단들은 중국이나 인근 이역과의 교역을 통하여 발전하고 있었다. 특히 위만조선의 멸망 이후 만들어진 낙랑군은 중국 한 나라의 한반도 진출을 위한 전진기지였으므로, 한나라는 낙랑을 통하여 한반도를 통제하고자 하였다.

낙랑은 한반도 지역에 대한 통제의 수단으로 중국의 선진문물을 가지고 각 정치집단의 지배세력을 회유하였다. 마산만을 끼고 있었던 골포국 또한 자연지리적 조건으로 보아 교역을 통하여 성장 발전하였던 것이다.

 

<1997년 창원대 박물관에 의해 발굴된 창원 서상동 남산 청동기시대 주거지 유적>

 

왕망의 지황연간(A.D 20-23년)에 염사치가 진한의 우거수였는데 낙랑의 토지가 비옥하여 사람들의 생활이 풍요롭고 안락하다는 소식을 듣고 도망가서 항복하기로 하였다. 살던 부락을 나오다가 밭에서 참새를 쫓고 있는 남자 한 사람을 만났는데 그 사람의 말은 한인의 말이 아니었다. 그 남자는, “우리들은 한나라 사람으로 이름은 호래이다. 우리들 천 오백명은 목재를 벌채하다가 한의 습격을 받아 포로가 되어 모두 머리를 깎이고 노예가 된 지 3년이나 되었다”고 하였다. 염사치가, “나는 한 나라의 낙랑에 항복하려고 하는데 너도 가지 않겠는가?” 하니 호래는 ‘좋다’고 하였다. 그리하여 염사치는 호래를 데리고 출발하여 함자현으로 갔다. 함자현에서 낙랑군에 연락하자 낙랑군은 염사치를 통역으로 삼아 금중으로부터 큰 배를 타고 진한에 들어가서 호래 등을 맞이하여 데려갔다. 함께 항복한 무리 천 여명을 얻었는데, 다른 5백명은 벌써 죽은 뒤였다. 염사치가 이때 진한에게 따지기를 “너희는 5백명을 돌려보내라. 만약 그렇지 않으면 낙랑이 만명의 군사를 파견하여 배를 타고 와서 너희를 공격할 것이다”라고 하니, 진ᄒᆞᆫ은 “5백명은 이미 죽었으니, 우리가 마ᄄᆞᆼ히 그에 대한 보상을 치르겠다‘ 하고는 진한인 만 오천명과 변한포 만 오천 필을 내놓았다. 염사치는 그것을 거두어 가지고 곧바로 돌아갔다. 낙랑군에서 염사치의 공로와 의리를 표창하고, 관모와 땅, 집을 주었다.(『삼국지』위서동이전 한전에 인용되어 있는 『위략』의 기록임)

 

이 글은 진.변한의 여러 나라들이 낙랑과의 교류가 활발했음을 잘 보여 주고 있다.

진한의 우거수가 낙랑으로 망명하려 했다든지, 중국 한인이 한의 포로가 되었다든지, 변한포를 낙랑에 보냈다는 것은 그 증거이다.

이 외에도 “변한의 나라에서는 철이 생산되는데 한. 예. 왜인 들이 모두 와서 사간다”, “왜와 가까운 지역이므로 남녀가 문신을 하기도 한다.”등의 기록은 중국 뿐만 아니라 왜,예와의 교류도 있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마산회원구 무학여고 뒷편삼한시대 성지로 추정되는 이산성지>

 

골포국으로 추정되는 창원지역에도 중국, 일본과의 교류를 보여주는 유물이 조사되고 있다.

성산패총에서는 중국 한나라에서 주조하기 시작한 오수전과 일본계의 토기들이 출토되었으며, 도계동에서는 일본계인 철로 된 창, 삼동동에서는 일본계인 청동화살촉이 조사되기도 하였다.

이를 보아 골포국은 남해안과 같은 교통로를 따라 중국의 군현이나 일본과 교역했던 것이다. 수입품은 주로 옷과 책, 거울, 칠기, 유리제 장신구 등과 같은 신분과 부를 상징하는 물건이었을 것이고, 수출품은 철, 포, 생구 등이었다.

철은 성산패총에서 철을 제련. 생산하는 야철지가 조사됨으로써 철이 생산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것은『신증동국여지승람』 창원도호부 토산조에 “불모산에서 철이 생산된다‘는 기록으로 증명된다.

따라서 창원지역의 정치집단인 골포국은 철을 한나라의 군현이나 일본 그리고 인근 한의 여러 나라에 수출하였을 것이다.

 

-골포국이 주도했던 포상팔국전쟁-

 

전쟁은 인간이 집단을 만들면서 끊임없이 행해져 왔다. 전쟁은 개개인의 복수나 싸움과는 분명히 다르다. 전쟁은 “집단적으로 그리고 조직적으로 싸우는 행위”를 말한다.

전쟁은 고통이다. 사랑하는 가족과 연인에게 생이별을 강요하고 무수한 인간의 갊을 파괴할 뿐만 아니라 인류가 이룩한 모든 성과를 하루아침에 잿더미로 만들기도 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전쟁을 입에 올리기조차 꺼려한다.

그렇지만 대부분의 국가는 전쟁으로 성장하고, 망하기도 하였고, 각 지역이나 세계질서도 전쟁을 통해 끊임없이 재편되었다. 전쟁과정에서 문화가 교류되고 과학기술이 발전하기도 하였다. 전쟁에서 사용되었던 나무몽둥이에서 핵무기에 이르는 온갖 물질문명은 당시 사회의 최첨단 기술을 반영하는 것이다.

지금도 전쟁은 계속되고 있다. 9.11 테러 이후 아프가니스탄 지역에서의 전쟁 그리고 미국의 이라크에 대한 침략은 전쟁이 여전히 강대국이 그들의 의사를 표현하는 가장 중요한 수단임을 증명해 주고 있다.

우리가 살고 있는 한반도도 전쟁의 위험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전 미국 대통령 부시가 북한에 대하여 ‘악의 축’ 이라 규정한 것은 전 지구에서 유일한 분단국으로 남아있는 한반도에 대한 전쟁의 가능성을 높여주고 있다. 이라크와의 전쟁에서 승리를 거둔 미국은 그 자신감으로 인하여 북한 핵개발을 빌미로 전쟁을 일으킬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할 수는 없다.

전쟁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은 청동기시대부터이다. 농경의 발달로 일여 생산물이 늘어나고 빈부의 차도 커졌다. 단 한차례의 약탈로 일년치 식량을 마련할 수 있는 길이 열린 것이다.

이처럼 전쟁은 약탈로부터 시작되었다. 특히 여러 나라가 병립하여 전쟁을 통해 세력과 영역을 확장하던 고대의 역사는 전쟁으로 점철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총이나 대포가 없던 그 시절 병사들은 자신의 힘으로만 싸워야 했고, 군량미를 운반할 트럭이나 성을 쌓을 중장비도 없었기 때문에 수많은 민간인이 동원되어야 했다. 전쟁과 전쟁터는 고대인의 또 다른 삶의 현장이었던 것이다.

고조선과 삼국시대를 거치면서 전쟁목적이 약탈에서 영토확장으로 바뀌면서 전쟁은 더욱 치열해졌다. 농업이 발전하면서 농지를 확대하고, 농업생산력을 증대할 수 있는 인간의 노동력을 확보하는 것이 국가의 안정적인 발전을 도모할 수 있는 바탕이었기 때문이었다.

고구려, 백제, 신라는 영토확장의 승리자로서 수많은 여러나라를 병합하여 만주와 한반도 일대를 나누어 가졌던 것이다.

포상팔국은 삼한시기에 변한지역에서 자리잡고 있었으며, 바닷가와 접해 있었던 여덟 개의 나라였다. 확인이 가능한 나라는 다섯인데 지금의 위치로 비정이 가능한 것이 창원의 골포국을 비롯하여, 사천의 사물국, 고성의 고사포국, 칠원의 칠포국이다. 이외에 보라국이 있지만 지금의 위치는 알 수 없다.

나머지는 알 수 없지만, 유적이나 유물의 분포로 보아서 진해의 웅천, 마산의 진동 일대, 삼천포, 거제 등지에는 정치집단이 형성되었을 가능성이 있으므로 이들 지역이 포상팔국에 포함된 나라였을 가능성이 높다.

포상팔국전쟁은 왜 일어났을까?

포상팔국전쟁에 대해서는 가야와 관계되는 어떤 사건보다도 비교적 상세하게 『삼국사기』, 『삼국유사』에 기록되어 있다.

포상팔국은 가라 또는 아라와 갈화성을 공략하였다. 전쟁의 원인은 포상팔국이 당시 해상교역권을 장악하고 있는 김해지역을 대상으로 교역권을 뺏으려했던 전쟁이라는 입장과 해안가에 위치해 있던 포상팔국이 안정적인 발전의 기반인 농경지 확보를 위하여 내륙지역으로 진출하려고 함안지역과 전쟁을 벌였다는 입장이 있다.

포상팔국이 바닷가에 자리잡았기 때문에 바닷길을 따라 선진 문화를 받아 들일 수 있는 좋은 조건을 갖추었지만, 이러한 자연환경이 바다로부터의 외부세력의 침입에 대비할 수 밖에 없는 불리한 조건이 되기도 하였다.

또한 당시의 선진문화의 수입은 대부분이 지배층의 권위를 강조하는 물품이 대부분을 차지했기 때문에 피지배층의 삶을 보장해 주지는 못하였다. 일반민들의 삶이 보장되지 못하고서는 나라의 안정적인 발전은 기대하기 어렵다. 나라의 지배층들이 그들의 지위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백성들이 안정적인 삶을 유지 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하는 것이 급선무였다.

당시로써 백성들의 삶을 보장해주는 가장 중요한 산업은 농업이었다. 천재지변이 없는 한 농사를 지음으로써 그 땅이 붙박혀 생계를 유지할 수 있으며, 그들의 생산물은 나라에 세금으로 바쳐지고, 그들의 노동력 또한 나라 발전의 기반시설이 되는 도로건설, 성곽축조 등에 활용될 수 있으며, 군사력이 될 수도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조건이 나라를 안정적으로 발전시키고, 지배층은 그들의 지위를 계속적으로 확대할 수 있다.

함안지역과 울산지역은 내륙으로 진출할 수 있는 중요한 지역이었다. 함안지역으로의 진출은 함안의 북쪽에 있는 의령, 진주, 고령, 산청, 합천, 거창 등지로 뻗어갈 수 있으며, 울산은 넒은 뜰을 가진 경주로의 진출이 가능한 관문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골포국을 비롯한 포상팔국은 전쟁에서 패배했다.

4세기 이후가 되면 가야의 여러나라들 중에서 급격하게 성장했던 함안의 안라국의 영역으로 편입되거나, 영향력 아래 놓이기도 하고, 또 다른 가야의 나라로 바뀌었다. 창원지역은 『일본서기』에 등장하는 가야의 탁순국이 되었던 것이다.

<함안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안라국 유물>

 남재우 / 창원대 사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