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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는 이야기

선생님이 돌아가셨습니다

by 허정도 2009. 10. 12.


《선생님이 돌아가셨습니다》


선생님이 돌아가셨습니다.
마산 창신공고 건축과에서 우리를 가르친 선생님입니다.
2학년 1학기가 시작되던 1969년 봄에 우리 반 담임으로 부임하셨으니 선생님 만난 지 꼭 40년 되었습니다.

첫날 인사에서 선생님은,
마산이 고향이며 한양공대 건축과를 졸업한 후 공군 제대하고 학교로 왔다고, 잘 해보자고 하셨습니다.
그 날 입었던 선생님의 차분하고 개성 있는 카키색 양복과 화려하게 붉었던 넥타이가 참 멋졌습니다.
옷 뿐 아니었습니다.
호리호리한 몸매에 서늘한 눈매, 약간 웨이브진 머리칼, 요즘 말로 얼짱이었습니다.
첫날 그 멋졌던 선생님의 모습은 그 후 오래 동안 내 기억 속에 남아 있었습니다.

고등학교 시절 미술부장을 했다는 선생님은 그림을 잘 그렸습니다.
흰색·붉은색·푸른색 분필로 세계의 유명 건축물들을 그려가며 강의하던 모습은 환상적이었습니다.

지금의 사모님과 열애 중일 때라, 그 야릇한 소문이 하이틴이었던 우리들을 더 뜨겁게 달구었습니다.

당시는 박정희 대통령이 밀어붙이던 경제개발 시기라 공고졸업하면 취직은 잘되었습니다만 교육시설은 엉망이었습니다.

내가 다닌 학교는 원래 인문고였는데 정부시책에 맞춰 공고로 전환하였고, 나는 첫 입학생이었습니다.

그러니 실업교육을 시킬 충분한 준비를 못한 채 학생을 받았던 모양입니다.
건축공부에서 기본인 제도판조차 준비가 제대로 안 되었고 교재도 변변치 않았습니다.
어영부영 1학년을 대충 마친 우리들에게 선생님은 대학교재에서 우리 수준에 맞는 내용을 발췌, 등사본 교재를 만들어 주었습니다.
그 내용이 대학교재의 엑기스였다는 건 세월이 제법 흘러 내가 건축에 대해 뭘 좀 안 뒤 알았습니다.

<선생님과 함께 찍은 졸업사진>



-졸업 후에도 이어진 선생님의 사랑-

1972년 말, 겨울 날씨가 한창일 때였습니다.
그때 나는 고등학교를 막 졸업하고 마산시청 옆의 작은 설계사무소에 다니고 있었습니다.
저녁 8시 쯤 선생님께서 사무소에 찾아 오셨습니다.
가끔 찾아왔지만 밤에 오신 적은 없었는데, 그 날은 내가 야근하는 줄 아신 것처럼 그렇게 찾아 오셨습니다.
분명히 마음먹고 날 찾아오셨을 겁니다.
그날 저녁 사무소에는 나 외에 아무도 없었습니다.

선생님께서 날보고
“여기 난로 옆에 와 앉아보라”고 하셨습니다.
피어오르는 불이 빤히 보이는 검은 색 난로였는데 깔때기 모양의 석유통과 난로가 한 세트로 장착된 것이었습니다.
영문도 모를 뿐 아니라 ‘선생님’은 왠지 어렵고 무서워 주저주저하며 의자를 끌어와 선생님 곁에 슬 앉았습니다.

“이제 건축을 좀 배웠냐?”
“아, 예에, 조금,,,”
“내가 하는 말 잘 들어라”
“예-에”
“지금 네 실력은 건축하지 않는 일반사람들도 알고 있는 상식 수준 정도다, 조그만 재주 믿다가 큰 코 다치니 절대 노력을 게을리 하지마라.”
“아, 예-에”

그날 밤 선생님의 그 한마디, 그것은 내게 청천벽력 같았습니다.
‘내 능력이 상식수준’이라는 말 때문이었습니다.
그 때 나는 내가 제법 하는 줄 착각하고 있었거든요.
그럴만한 이유도 나름대로 있었습니다.
바로 그 전 해에 실업계고등학생들이 겨루는 각종 기능경기대회에서 설계 잘 한다고 상을 많이 받았거든요.
주변에서 ‘잘한다’는 소리도 자주 들었고요.
그런 분위기 때문에 내가 마치 뭐나 된 것처럼 속으로 우쭐하고 있을 때였습니다.
아직 어렸거든요.

그러나 나는, 그날 밤 내 기를 콱 죽이는 선생님의 그 말씀을 가슴 깊숙이 새겨 넣었습니다.
제법 긴 세월이 흐른 뒤까지 선생님의 그 말씀을 내려놓지 않았습니다.
그 겨울밤,
선생님의 그 말씀 한 마디는 젊은 시절 내가 건축가로 성장하는 기름진 자양분이 되었습니다.

몇 년 후,
공부가 하고 싶어 어려운 여건을 뚫고 대학에 가려했을 때, 선생님께서 도움을 주셨습니다.
내가 유명 건축가 문하로 가게 되어 서울로 올라갈 때, 선생님은 더 없이 기뻐하시며 “꼭 좋은 건축가가 되라”고 격려하셨습니다.

세월이 흘러,
나도 선생님처럼 건축사가 되었고, 동종업계 같은 회원으로 사회생활을 했습니다.
건축이나 도시 관련 각종 위원회에서 함께 활동하기도 했습니다.
‘3.15의거기념사업회’에서는 선생님과 나란히 임원으로 활동했습니다.
내가 도시문제를 주제로 발표나 토론을 할 때면 선생님은 언제나 방청석에 앉아 내게 힘을 보내주었습니다.
좁은 지역이라, 사회생활하면서 선생님과 자주 얼굴을 마주치며 지냈습니다.

해마다 오월 스승의 날이 되면,
어느 해는 넥타이니 카네이션이니 조그만 선물을 들고 선생님을 찾았고,
어느 해는 통술집에서 선생님께 술잔을 드리기도 하면서 그렇게 세월이 흘렀습니다.

십년 전 쯤 이었을 겁니다.
한 번은 선생님께,
“그 겨울 밤 난로 옆에서 하신 그 말씀 한마디가 제게 끼친 영향이 너무 컸습니다”
고 말씀드렸더니 고개를 갸웃하며 가만히 생각하시더니,
“잘 모르겠는데, 내가 그랬던가? 허허”
웃으셨습니다.

선생님을 만나면 늘 무언가를 의논드리고 묻고 했습니다.
도의원을 지내기도 한 선생님은 지역의 주요현안에 대해 당신 나름의 생각을 갖고 계셨기에 들어 두어야할 말씀이 많았습니다.

그랬는데,
언제부터인가 선생님께서도 가끔 내 의견을 물었습니다.
내 나이 쉰 가까이 되고, 선생님께서 예순 정도 되었을 때부터였습니다.
선생님의 둘째 아들 진로문제를 두고도 많은 말씀을 하셨습니다.
나는 선생님의 그런 모습이 좋았습니다.
날 믿어주는 선생님이 고마웠습니다.
그 옛날,
까마득한 40년 전 사제지간이 그렇게 이어지는 게 참 좋았습니다.

서너 달 전,
신문사 대표직을 마치고 나니 앞으로의 내 진로를 물으시고 깊은 신뢰를 보내주셨습니다.
나는 선생님께,
‘옛날의 선생님으로 다시 돌아가 절 이끌어 달라’고 부탁드렸고, 선생님은 내 청을 기분 좋게 받아주셨습니다.

그랬던 우리 선생님께서 며칠 전 돌아가셨습니다.
지난 6일 아침 일찍,
선생님의 둘째 아들이 내게 부음을 알려 왔습니다.
전화하던 중 목이 콱 막히며 눈물이 툭 하고 떨어졌습니다.
건강이 좋지 않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갑자기 가실 줄은 몰랐습니다.

저녁에 도립 마산의료원 영안실에서 아들을 만났더니,
“어제 밤에 선생님(선생님의 아들은 날 선생님이라 부릅니다)의 얼굴이 TV에 비치는 걸 보며 좋아하셨는데 오늘 새벽 2시에 그만 돌아가셨......"
끝내 말을 잊지 못했습니다.


장례식 날,


땅에 묻히는 선생님께 마지막 인사를 드렸습니다.
영정 속 선생님은 조용히 웃고 계셨습니다.

돌아오는 길이 허전했습니다.
기댈 수 있는 언덕 하나가 허물어져버린 것 같았습니다.

그날 밤,
선생님 생각이 나서
‘혹시 고등학교 앨범이 있는지, 있다면 선생님 젊은 시절 사진이 있을 텐데’
싶어서 이리저리 찾아보았더니 책장 한 구석에 그 동안 잊고 있었던 낡은 졸업앨범이 있었습니다.

앞의 흑백사진은 거기서 찾은 선생님의 40여 년 전 모습입니다.
스물아홉 우리 선생님입니다.

"김정수 선생님, 감사합니다.
부족한 저를 끌어 주시고 믿어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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