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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는 이야기

굵고 짧은 놈, 가늘지만 긴 놈

by 허정도 2009. 11. 4.

크고 잘생겨야 대접 받는 세상이라,
말로는 ‘작고 힘없다고 깔봐서는 안 된다’면서도 내 무의식도 세상따라 가는 것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여기,
크고 잘 생긴 놈이 허무하게 스러져갈 때, 작고 약한 놈은 끈질기게 살아남아 제 몸을 뽐내고 있습니다.
우리 집 대문과 담장에 붙은 담장이넝쿨이야깁니다.

크게 잘 자란 넝쿨은 지난여름 짙은 녹색에 넓은 잎사귀 뽐내며 담장을 온통 제 것인 양 휘감았습니다.
볼만했습니다.
그 위세가 영원할 것 같았습니다.
바람이 불면 아이손바닥만한 초록잎사귀가 출렁거렸는데 그 광경에 지난여름이 다 시원했습니다.
담장을 온통 뒤덮은 넝쿨과 새파란 잎사귀는 마치 화려한 고급포장지로 싼 선물상자처럼 멋졌습니다.

                                  <지난 초여름의 완성한 넝쿨>
                       
바로 그 곁에 동전만한 잎사귀가 달린 가느다란 넝쿨 몇 줄기가 떨어질 듯 떨어질 듯 연명하며 겨우 붙어 있었습니다.
힘이 없으니 면적을 넓히지도 못했고 위세는커녕 자신의 존재를 눈에 띄게도 못했습니다.
혹 바람이라도 불면 떨어져 날아갈까 파르르 떨고만 있었습니다.
매일 드나드는 대문이었지만 하도 볼품이 없어서 계절이 몇 번 바뀌는 동안 있는지 없는지 눈여겨보지도 않았습니다.


                                  <제대로 자라지 못한 작은 잎들>


그런데 오늘 아침,
집을 나서다 이 둘의 비교되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크게 잘 자란 넝쿨은 스스로 제 잎사귀의 무게를 못 이겼는지, 아니면 넓은 잎사귀가 받는 바람을 못 이겼는지 이미 떨어져 길 위에 나딩굴고 있었습니다.
남은 잎들도 오늘내일 낙엽신세를 면치 못할 것 같았습니다.

하지만 잘못자란 넝쿨은 몸이 가볍고 바람도 많이 안타 아직 멀쩡했습니다.
푸른 빛깔도 여전했고, 약하긴 했지만 지금도 넝쿨 끝에 조그만 새싹까지 달려 있었습니다.

굵고 짧게 살다간 담장이와 가늘지만 길게 살고 있는 담장이.
어느 담장이가 더 행복한 건가요?


                   
      <곧 떨어지거나 이미 떨어져 버린 굵은 잎(상, 중)과 멀쩡한 작은 잎(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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