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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 6. 22. 00:00

김형윤의 <마산야화> - 25. 기독교인과 마산신사, 26. 도리이를 닮은 문

25. 기독교인과 마산 신사(神社)

 

일본인 추방무골(諏訪武骨)옹의 마산항지(馬山港誌)에 의하면 현 문화동의 높은 자리에 위치하였던 마산 신사는 1909년(원문에는 1910년으로 되어 있음 / 옮긴 이), 즉 명치 42년에 창건된 것이다.

정전(正殿)에는 천조(天祖) 천조대신(天照大神)을 모신 곳이며 경내 우측에는 도하대명신(稻荷大明神)을, 그 곁에 사당은 주호신(酒護神)을 모신 송미신사(松尾神社)를 건조하여 경신(敬神)관념을 숭양(崇養)해 왔는데 신관(神官)으로서 발령된 사람은 고등관 3등의 수자춘충(須子春忠)이었다.

아침 미명 때를 기하여 일본인 노소남녀가 앞을 다투어 박장(拍掌) 참배하는 것은 그들의 경신(敬神)하는 정신적 관례이지만 일인 아닌 조선인의 별의별 각설이와 풍각쟁이 같은 아유배(阿諛輩) 혹은 소위 조선인 연맹 이사장이니 또는 동·반장이란 감투로 크게 우쭐거리던 천식배(淺識輩)들의 강제 동원에 시달려서 참배하는 사람들이 있었는가 하면, 값싼 친일배가 아니면 경찰 끄나풀들이 참배치 않은 사람을 밀고하여 욕보이기도 했다.

이외에 이주회(唎酒會 / 술맛 콘테스트 ; 옮긴 이)가 있을 때는 부내(府內)의 양조장과 다수 지방 유지들이 몰려와서 주호신(酒護神)을 모신 송미신사(松尾神社) 앞에서 성대한 제를 드린다. 이리해서 세월은 흘러 만주, 지나사변을 일으키자 신사는 물론 조선인 전국 사찰에까지도 타도(打倒), 귀축영미(鬼畜英美) 기무운장구(祈武運長久)를 대서특필하였고, 조석으로 염불하였던 것이다,

전국 각지 일제히 기독교 신자들만 꼬집어 신사 참배를 폭력으로 임하였으나 백중구구(百中九九)는 굴하지 않았다.

마산도 예외일 수 없고 헌병대, 경찰서 고등계에서 불굴(不屈)하는 기독교계 학교는 모조리 폐쇄령을 내렸고, 신자들은 걸리는 대로 고문과 투옥으로 불행하게 옥사한 신자도 상당수였던 것이다.

마산 신사는 지금 제일여중·고가 되어 있다.

 

<강점기의 신사 정문과 현재의 제일여중고 정문>

 

 

26. 도리이(鳥居)를 닮은 문

 

마산 신사 정문으로 향하는 참도(參道)에 당시 조선 총독 제등실(齊藤實)의 휘호로 높은 석조 도리이 좌우 기둥에 ‘봉납(奉納)’이란 음각이 있었고 정문에도 도리이가 있었다.

종전 직후 얼마 동안은 수십 주의 벚꽃나무가 온존(溫存)하였으나 어느덧 도끼날의 서리를 맞아 자취를 감추었고, 도리이도 무참히 도양(倒壤)되었다.

진정한 배일 민족 사살의 발로라고 할까? 신사 본전은 지금은 윤환(輪奐)의 미를 자랑하는 모 여자 중고교가 자리 잡고 있다.

교사는 철근 콘크리트의 현대식 건물인데 그 정문은 어떠한가를 한번 검토하여 보기로 한다.

도리이란 한국의 홍문(紅門)과 흡사하여 한국의 경우로 말하면 국가의 고관이나 왕과 왕손의 능에 한하여 세워지는 것이지만, 이와 달리 일본의 도리이는 일본 독특한 신을 상징하여 이를 숭앙하기 위하여 세워지는 것이며, 일본인들은 해외에 살더라도 그 집단권에는 반드시 규모 여하를 막론하고 신사를 조영(造營)하여 그 앞에 도리이를 건립함으로써 대화혼(大和魂)을 함양하게 하는 것이 상례로 되어 있었다.

그런데 학생들이 출입하는 전기(前記) 학교의 정문이 선입관 때문인지는 모르되 도리이의 모양을 닮았다는데 있어 구안자(具眼者)로 하여금 다소 회의의 느낌을 가지게 하는 것이다.

그것이 옛날 기존하던 도리이라면 과거를 회상하여 수긍이 갈 수도 있는 일이겠으나 30년이 가까운 오늘에 와서는 일본의 잔조(殘糟)란 모조리 불식되고 없는 것으로 보아야 마땅할 것이다.

비록 신사의 본전은 없어졌다 하더라도 그 도리이를 너무도 닮은 문이 과거의 신사를 연상하게 함은 심히 불쾌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일제 식민지였던 암흑시대, 무수한 조선인, 그 중에서도 특히 기독교 신자들이 신사 참배 문제로 하여 겪었던 정신적, 육체적 고초를 상기해 보았다면 필자의 심경을 이해할 수 있으리라.

신사 앞을 통과할 때 직립부동(直立不動)의 자세로 최경례(最敬禮)를 올리지 않으면 일경(日警)에 붙들려가서 매를 맞아야 했으며, 기독교 신자들의 우상 숭배 배척 관념에서 오는 신사 불참배 문제는 전국에 비화(飛火)하여 최고형을 받고 옥사한 목사의 순교 얘기는 너무도 유명하지 아니한가?

가까운 일본의 예를 들어 보더라도 각 소·중학교정에 있던 덕천(德川)막부 시대의 이궁존덕(二宮尊德)이나 충군의 권화(權化)라는 남정성(楠正成)의 동상 같은 것도 모조리 철날(撤捏)하였다는 판국인데, 하물며 한국의 남단 마산의 한 학원에서 일본 패전 전의 복고 인상을 주는 것과 같은 처사는 반성의 여지가 있다고 생각한다.

문교 당국의 좀 더 적극성을 띤 도의적인 관여가 있기를 바란다. 이것은 여담이지만 현재의 정문이 일본 수만처(數萬處)에 현존하는 도리이 중 명신신사(明神神社)의 그것과 유사하다는 점을 말하여 둔다.

(주 ; 위 제일여고의 설립자 이형규 학원장에 의하면 이 문은 도리이를 본뜬 것이 아니고 전주 체육관의 정문을 보고 와서 그대로 설계해 지은 것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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