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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속 도시이야기

김형윤의 <마산야화> - 마지막회, 저자를 회고하면서

by 허정도 2017. 3. 27.

 

2015323일 시작해 이번 회까지 만 2년 동안 포스팅한 목발(目拔) 김형윤 선생의 마산야화(馬山野話)」143꼭지가 이번 회로 끝납니다.

지나간 시절 마산사회와 마산 사람들을 추억하는데 적지 않은 도움이 되었습니다.

 

다음 주부터 연재될 포스팅은 신삼호 건축사가 준비합니다.

(주)유에이건축사사무소 대표 신삼호 건축사는 건축작품활동도 활발하지만 도시와 건축의 역사에도 관심이 많아 부산대 대학원 건축학과 박사과정을 수료하고 현재 논문 준비 중입니다.

블로그에 포스팅하게 될 내용은 논문 준비과정에서 접하게된 여러가지 자료들을 소개하고 해석하는 형식이 될 것이며 분량은 약 20여 회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마산야화> 마지막 회, 저자를 회고하면서-

 

조병기(趙秉基)

 

김형윤 공은 1903년 마산시 서성동에서 김양수 씨의 3남으로 출생하였다.

공의 성장과 수학 과정에 대하여서는 소상하지 않으나, 일생을 통하여 소년기에 돈을 번 일이 꼭 두 번 있었다 하는데 18세 때 진영 대목장에서 조장수를 한 일이 있었고, 또 한 번은 창원산업조합에 가마니 검사원으로 취업을 하여 월봉 10원이란 대금을 벌어 쓴 일이 있었다고 자랑삼아 얘기하곤 하였었다.

 

20대에 손문기 씨가 경영하던 조선일보 기자를, 30대에 고교(高橋) 씨가 사장이던 남선일보 기자를, 40대에는 창산(蒼山) 이형재(李瀅宰) 씨가 경영하던 동아일보 기자를 역임하였으며, 1947년에는 김종신 씨가 경영하던 남조선민보를 인수하여 마산일보로 개제(改題)한 후 현 경남매일(경남신문)로 넘어가기까지 최근 20여 년간을 경영하였으니 공의 일생은 그야말로 언론에 모조리 몸을 바친 거나 다를 바 없다.

 

그러나 공의 진면목은 유우머와 해박한 풍자에 있는 것이며, 가지가지의 기행과 괴벽(怪癖)은 김립(金笠)이나 정수동(鄭壽銅)을 방불케 하였고, 특히 방랑벽이 있어 국내는 물론, 일본 만주 등지를 바람처럼 편력(遍歷)하다가 서울에 돌아와서 조국 해방을 맞았다.

 

해방 그 해 1230일 신탁통치 반대시위에 선봉으로 나섰다가 검거되어 1947년 봄에 석방, 마산으로 돌아왔던 것이다. 공의 모든 언행의 근원이 되는 인생관이나 사회관을 이해하려면 먼저 공의 사상적(무정부주의) 배경을 알아야 한다.

 

공은 끝까지 부정, 불의를 증오하였고, 자유와 정의를 위하여 투쟁하였고, 권력에 굴하지 않았고, 부귀를 탐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많은 곤욕과 박해가 노상 뒤를 따랐으며 일정 때는 옥고도 수없이 치렀다. 3년 전 봄에 공은 필자에게 말하기를 우리가 이제 죽을 날이 멀지 않았으니 미력이나마 마산 사회를 위하여 뭔가를 기여하고 가야 하지 않겠나?” 하면서 마산시사를 편찬하는 일을 시작하자고 하기에 쾌락(快諾)를 하고 발족하였던 것이나 오늘날까지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한 것을 오직 죄스럽게 생각할 뿐이다.

 

끝으로 공을 애칭 또는 별명으로 목발(目拔)’이라 부르게 된 일화를 여기 소개하면서 공의 약전(略傳) 겸 회고담을 공을 추모하는 유우머로써 맺을까 한다.

 

우금(于今) 50년 전 마산 앵정(櫻町)의 벚꽃이 만개(滿開)일 때 일인 요정에서는 가설무대를 지어놓고 일인 게이샤(기생)’들이 삼미선(악기)을 통기며 일남(日男)들과 어울려 가무가 한찬 무르녹고 있었다.

 

한 조선인 지게꾼이 흥에 겨워 관중 속으로 들어가는 것을 보고 일() 헌병이 민족적 모역을 주며 그를 끄집어 내었다. 이를 본 김 공은 의분을 참지 못하여 비호 같이 일() 헌병에게 달려들어 그의 한쪽 눈을 뽑아 버렸던 것이다. 공의 용기도 용기려니와 당시 힘이 또한 장사였었다.

 

목발(目拔)’이란 이 무용담에서 비롯한 것이나 유래를 모르는 사람들은 절름발이로 오단(誤斷)을 하여 빚어지는 희화(戲話)가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끝

 

  <마산야화 초판본(1973)과 재판본(1996)>

 

 

-김형윤 선생을 회고한 조병기(趙秉基) 선생은 창원의 대표적인 아나키스트였다.

 

창원공립보통학교 훈도였던 조병기 선생은 1928년 핵심회원 6명과 비밀결사체 흑우연맹(黑友聯盟)’을 조직하였다.

흑우연맹은 창원.마산의 열혈청년들로 구성되었다. 면면을 보면 창원공립보통학교 동료교원이었던 손조동(23), 창원 북동출신 박창오(朴昌午.20)와 박순오(朴順五.19), 창원 북면의 김두봉(金斗鳳.20), 창원 동면의 김상대(金相大.20), 창원 북동의 김두석(金斗錫.21)이었다.

이들은 나라사랑과 겨레번창의 유일한 길은 민중계몽과 혁명적 투쟁에 진력하는데 있다고 굳게 믿었다. 그리고 이러한 애국심도 강력한 정신적 기반이 없으면 뜻을 이룰 수 없다고 생각했다.

이런 입장에 따라 조병기 선생은 청년.학생들이 민족의식과 항일사상을 고취하는데는 오로지 민중계몽밖에 없다고 본 것이었다.

1927<청년에게 고함(크로포드킨 저)>이란 책자를 비밀리에 출판 보급하려다 일경에게 발각, 체포되었다. 이 때문에 출판법 위반으로 부산지방법원 마산지원에서 징역 1년에 집행유예 3년의 언도를 받기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