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찾아간 도시이야기

옛 마산세관의 발자취를 따라서

by 알 수 없는 사용자 2009. 11. 16.

옛 마산세관의 발자취를 따라서

사진과 지도를 통해서 무엇을 찾아낼 수 있을까?

유장근교수의 도시탐방대에서는 신마산의 조계지에 설치된 신작로를 따라서 유서 있는 건물들을 찾아보는 기회를 가지게 되었다.

현재 건물이 사라졌다고 하더라도 당시의 건물사진과 지도를 통해서 시간속의 여행을 체험하는 색다른 의미가 있을것 같았다.

특히 조계지내에 설치된 세관은 개항과 함께 설치된 시설로서 그 위치가 변천하는 과정과  건축의 이력을  알아보는 것을 통해서, 땅에 숨겨진 이야기들을 들추어 보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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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계지 지도 : 중앙하단부가 해관부지임(1907)

 

남성동 해관업무개시

해관은 110년 전 구한말인 1899년 5월 1일 마산항이 개항장으로 발족됨과 동시에 마산해관지서로로 창설되었다..
해관세무사는 조선말기 관세의 징수업무를 담당하기 위하여 개항장에 창설하였던 해관의 제반업무를 관정한 기관이다. 이후 해관이란 명칭은 1907.12.16부터 세관으로 개칭되었다.

마산해관지서가 처음으로 그 업무를 개시한 곳은 현재 남성동 제일은행 2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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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창원감리서가 있던 곳,조선식산은행(이후 제일은행, 1918)

 

마산항 개항에 앞서 1898년 5월에 외부대신 박제순을 통해 마산포 개항사실을 조선 주재 각국공사에게 통고하고 마산포에 있는 유정당에 창원감리서를 설치하였다.
  창원부윤 안길수가 개항을 위한 감리업무를 담당하였으며, 그 별방에 마산해관지서가 남성동에 설치되었던 것이다
.

창포동 세관 이야기

이후 조계지내 가로가 형성됨에 따라 창포동 2가-31에서 1901년부터 업무를 보다가 1910년에 마산세관지서 건물을 지어 1946년까지 업무를 본 곳이다.

현재 수협이 있는 자리이며, 접안시설로 목조 잔교가 설치된 위치는 현재 창포경남맨션과 한백아파트 사이 길에 해당되는 곳이다. 당시 조계지 지도를 보면 이 두아파트는 바닷가였던 것을 알 수 있다.

초기 해관이 있는 창포동은 조계지내에서 당시 영사관(현 경남대 평생교육원)에서 해안으로 향하는 길에 접하는 위치로 맞은편에 우체국(1902년 설립)과 함께 영사관과 업무연락의 편의성을 고려하여 입지를 고려한 것으로 판단된다. 

06년에 정부는세관의 해륙설비공사를 하기로 의결하고 08년에 추진하게 된다. 당시 공사예산액은 1만 천원으로 부두의 길이84.5M 돌제부 길이10M를 보완하여 등대를 설치하고 여기에 폭이 3.4M 길이9M의 목조잔교를 가설하고 해안의 세관구내를 간조면 위로 3.79M 와 5.76 높이로 땅을 정리하여  창고 1동을 세웠다. 해관 주위는 철조망을 두르고 세관지서장 관사 1동도 신축했다. 마산항 최초의 항만시설이 완성된 것이다.


목조 잔교가 있는 해안 구내의 좌측에 목조 단층건물로서 아연도칠을 한 골함석을 지붕의 50평규모의 창고 한동이 있으며, 건평23평의 2층 목조건물인 세관지서장 관사 1동이 사진 우측에 나타나고 있다. 부두에 전신주가 있는 것으로 보아 사진은 1911년 이후에 촬영한 듯 하다.            
(마산의 전기는 일한와사전기회사에 의해 1911년에 시작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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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해관 목조잔교(1908-1910)

 

창포동에 소재했던 세관지서는 러시아식 단층 목조건물로서 외벽은 목제 비늘판벽으로 되어 있다. 정면은 포치(현관부분)를 두어서 박공부분을 강조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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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해관 마산지서전경(1910)

 

현재의 건물은 영생아파트와 1층에 수협이 자리하고 있다.
당시 영사관에서 바로 보이는 교차로에 위치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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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포동 해관위치의 현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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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관에서 영사관(경남대 평생교육원)을 바라본 모습

당시 세관과 영사관은 상당히 힘있는 사람들이 지나치던 길이었을 것이다.
오늘도 수많은 사람이 이 거리를 지나건만 그 때의 이야기를 아는 사람들이 얼마나 될런지-----

월남동 부두국 이야기

 

세관은 1943.12.18 폐청되고 조선총독부 교통국 산하에 부두국 소속됨에 따라 월남동에 월남동 46-4번지에 소재하는 부두국을 설치하였다.
그런데 창포동 세관이 이 곳으로 이전한 기록이 없다.
세관은 폐쇄되어도 마산항을 출입하는 모든 외항선들은 입출항은 일본인 마산세관장의 출입을 받아야 했던 것으로 보아, 양측에서 업무를 나누어서 보았던 것으로 보인다.

월남동 부두국 건물은 목조2층 구조로, 외벽은 목제 비늘판벽으로 되어 있으며 90년대까지 사용되었으나 해안도로 확장으로 인하여 철거되었다.
 현재 타이어상점이 들어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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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남동 부두국, 19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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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두국 위치의 현재의 모습

 

해안도로의 확장에 의해 필지가 짤려지고 일부에 건물이 남은 모습이다.
이마저도 주변 아파트 재개발계획에 포함되어 있어 땅의 흔적도 없어질 지경이다.

월남동 세관이야기

해방이후 1946.08.19 세관은 월남동2가 47번지(현재 마산식당)로 이전하였다. 여기로 세관을 옮긴 이유는 해방까지 해안의 매립에 부두가 현재의 해안도로변까지 확장됨에 따라 업무기능상 동선의 편의를 고려하여 옮긴 것으로 판단된다.
월남동 마산식당 청사는 해방후 마산교회로 사용하던 것을 미군정청과 마산세관이 임대차 계약을 체결하여 사용하였고 한다.
그리고 원래의 창포동 해관자리가 59년에 마산교회의 자리였다는 기록으로 보아 마산교회와 임대차 계약이후 창포동 건물과 교환하였을 가능성이 있을 것 같다.

그리고 마산식당의 건물은 다행히 당시의 구조가 원형을 잘 보존하고 있는 건물이다.
건물의 이력을 알아본 바 [근대문화유산 목록화사업] 경상남도, 2004에 의하면 건축물 관리대장상은 1939년 등재되어 있으나 건물은 1905년에 지어진 것을 추정하고 있다.
기록에 의하면 일본인 개인영업(1939년 기준)에서 이 건물은 일이삼식당이란 상호로 古本露라는 사람이 요리집을 경영한 것으로 나타나 있다.(상공회의소 100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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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의 마산식당 모습

당시 두월동에 여관이 유명한 곳으로서 그 중 하나였을 것으로 보고 있다. 당시 여관은 요리와 숙박을 같이하는 지금의 호텔같은 기능을 하였기에 지어질 당시는 세관과 같은 업무기능은 아니었지만, 부두가 있는 해안으로 접근하기 가장 좋은 위치에 있는 건물이었기 때문에 옮겨진 것으로 보인다.

특히 이건물은 원형이 잘보존 된 상태라서 누가 관심을 가지지 않으면 주변개발에 포함되어 곧 없어질 가능성이 크다.  안타까울 뿐이다.

 


월포동 세관이야기

55년 8월 현재의 세관자리로 이전하게 되었다. 당시 1부두, 2부두, 중앙부두가 확장된 상태이었으며, 현 청사 부지는 당시에 보세지역으로 1951년 3월 2일 고시되었으나, 보세구역 및 창고는 조국해방에 따른 귀환동포 임시거처로 사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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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시세관으로 사용된 월포공립초등학교(1955)



 

당시 임시청사로 사용된 건물은 월포공립국민학교로 사용중이던 건물을 미군이 보급창으로 사용하기 위하여 1955년 4월 19일 징발한 것을 임시청사로 사용하게 되었다.
건물을 보수해 사용하다 57년 사라호 태풍으로 넘어지자 1958.4.1.에 붉은 벽돌의 2층 건물을 신축했다. 지금의 청사는 1995년 1월에 신축한 건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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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8년 건축한 벽돌조 2층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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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5년 신축한 현재의 마산세관

 

그나마 현재의 청사마저도 지방합동청사 추진계획에 의해 옮겨질 신세에 놓여 있다.

신포동 2만㎡ 부지 이달 입찰 공고·내년 6월 착공
2012년 완공…세관·검역소 등 6개 정부기관 입주
마산 서항 지구 해양신도시 조성 예정지에 산재해 있는 6개 정부 기관을 한 곳으로 이전시키기 위한 지방합동청사가 신포동 1가 78 일대 2만6155㎡에 2012년까지 들어선다. 마산시는 3일 국비 482억원을 투입해 건물 연면적 2만4600㎡ 규모의 지방합동청사를 내년 6월 착공, 오는 2012년 3월 준공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건물은 가만히 있으려 하나, 사람이 가만히 두지 않는 꼴이다.
 
건물과 땅의 흔적들을 생각하며

한 건축물의 110년간의 이동과정을 추적해 보았다.

사람과 같이 우여곡절을 겪으면서 이동을 하게 되고 다양한 건물의 형식을 통해 변모하는 것을 보았다.
세관건물은 물리적인 위치의 변경을 가지게 된 특수한 경우이긴 하지만, 한 장소에서 지어지는 건물의 수많은 흔적들도 누군가는 정리해야 할 필요가 있을 것 같다.
화산재에 묻혀있던 폼페이라는 도시를 우리가 볼 수 있었던 것은 18세기 독일의 요한 빙켈만 같은 고고학자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