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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속 도시이야기

경남지역 주거변천사 - 3 / 조선시대 이전

by 운무허정도 2018. 4. 30.

 

1) 고대에서 조선시대까지 - 3

 

조선시대는 우리나라 주거문화 형성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시기이다. 반상(班常)을 철저히 구분한 신분사회였기 때문에 신분에 따라 주택의 크기나 형태를 규제하는 가사규제(家舍規制)가 있었다.

신라의 가사규제인 옥사조(屋舍條)와 가장 큰 차이는 택지 규모에 제한을 두었다는 것이다.

이 시대의 주택은 산악과 구릉이 많은 자연환경과 최대한 조화를 이루는 특징을 갖는데, 상류층의 주택은 기후가 구조에 영향을 적게 미쳤으나 서민주택의 경우 북쪽지방은 보온을 위한 겹집구조와 온돌이, 남쪽지방은 바람이 잘 통하는 홑집구조와 마루가 발달하였다.

<우리나라 전통가옥구조의 분포>

 

반가(班家)라 부르는 양반의 주택은 지역적 특성보다 지배계층으로서의 권위와 유학자로서의 성리학적 규범에 따른 생활방식 등이 중요 요소로 고려되었다. 때문에 가문의 전통, 신분과 성별, 나이의 많고 적음에 따라 채() 단위로 공간을 구분하여 사당채·안채·사랑채·행랑채·별당채·곳간채 등으로 건물을 분리 배치하였다.

특히 기와로 이은 지붕의 처마를 길게 돌출시켜 날아갈 듯한 지붕선을 만들어 고래등 같은 기와집으로 묘사되었다.

2006년 김화봉 교수(경남과학기술대 건축학부)는 경남 하동지역에 산재해 있는 반가 8채를 조사 연구하였다. 이에 따르면, 건물의 배치 형태는 남부지방의 일반적 구성인 자형이었으며 내부공간은 부농층(富農層)에서는 근대적 특성이, 지배계층에서는 공간적 우위를 점유하려는 경향을 보였다.

또한 좁은 지역 임에도 불구하고 경남지역 나름의 계층성과 다양한 주거 유형이 나타났으며, 이러한 경향은 근대까지 지속되었다.

민가(民家)라 부르는 서민주택은 중·하류층이 살던 집으로, 경제적 이유는 물론 사회적으로 가사규제 때문에 그 범위가 한정되어 있었다.

따라서 권위적 혹은 유교적 표현보다는 농업 생산성을 높일 수 있는 주택, 즉 지역의 자연환경에 경제적으로 대응하고 생산공간과 주거공간이 공존하는 주거형식으로 발달했다.

또한 대부분의 민가는 건축주 스스로 짓거나 지역의 장인(匠人)에 의해 지어졌고 사용된 자재는 주변의 자연재료인 자연목, , , 짚을 이용하였다. 초가지붕은 민가를 상징할 정도로 가장 널리 쓰인 민가의 지붕 형태였다.

 

경상도 지방의 민가는 홑집계열겹집계열로 크게 구분할 수 있다.

소득 수준이 낮은 소농계층은 부엌··방으로 배열된 마루 없는 3자형 홑집, 경제 사정이 약간 나은 계층은 부엌··마루·방으로 배열된 마루 있는 자형 홑집이나 겹집에서 살았다.

서민주택의 외부공간은 몸채와 울타리, 그리고 이들 사이에 놓인 마당으로 구성되는데, 마당은 동선과 작업의 공간이자 내부공간에서 부족한 주거 기능의 일부를 수용할 수 있는 매우 특징적인 외부공간이라 할 수 있다.

1986년 이상정 교수(경상대 건축학부)가 경남의 합천·산청·진양·사천지역 전통 농촌주택을 조사한 사례를 보면 안채·아랫채·부속채의 세 개 동으로 구성된 가옥이 많았으며, 건물의 평면형태는 자형 홑집으로 산간지역은 직교형 배치가, 해안지역은 병렬형 배치가 다수였다.

안채의 평면구성은 부엌++방의 유형이 경남 전 지역에 널리 분포했으며, 각 실의 출입문은 마당을 향해 나있었다. 각 채의 중심에 배치된 마당은 협소한 내부공간을 보완해 주는 역할을 수행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