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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11. 29. 00:00

마산번창기(1908) - 15

제5장 신도 및 종교

 

일본 고유의 신도(神道)에 관해서는 아직 아무런 시설도 없지만 멀리 고향을 떠나 한국에 머물고 있는 사람은 누구나가 이세신궁(伊勢神宮)을 숭배하여 앞날의 안전을 기원하지 않는 자는 없을 것이다.

한국에 건너와 오늘날 평온하게 살 수 있음은 신명(神明)의 가호(加護) 덕분이라 감사하지 않는 자 또한 없으리라. 날마다 신에게 감사하고 우국지심을 굳건히 하는 데는 간접적으로라기보다 직접적으로 참배를 통해서 그 기원을 실현하는 것이 적절할 것이다.

이것이 무사도(武士道)의 장려에 도움이 되고 일본 정신을 양성한 기초가 된다고 생각한다. 들리는 바에 의하면 신시 제일의 경승지(景勝地) 속칭 호시오카(星岡)는 당국자들 사이에 이미 공원지가 될 것으로 예정되어 맨 먼저 이세신궁의 그 혼을 나누어 받는다는 기획이 있다는 것이다.

얼마나 경사스러운 일인가. 하루 빨리 실현되었으면 한다. 신생아의 참배가 이루어지고 신덕(神德)을 느끼고 맹세를 올리며 나아가 대일본제국 국민임에 위안을 주게 되는 것은 거류민 전반이 강하게 바라는 바이다.

불교로는 본파본원사(本派本願寺), 정토종(淨土宗), 진언종진의파(眞言宗眞義派)의 세 교장(敎場)이 있다.

 

 

□ 본파본원사

포교장(布敎場)은 신시 하마마치(濱町 빈정, 현 창포동) 2정목 1번호(혼마치 4정목을 동쪽으로 들어간 모퉁이)에 있으며 개항 당시 러시아의 미센코(개항 이후 마산포에서 상업활동을 한 러시아인)란 사람의 소유 가옥을 빌려 쓰면서 히다카 타츠케이(日高達契) 스님이 열심히 포교에 종사하고 있다.

불교 여성회는 열심히 포교하는 중에 생겨나 제법 그 기세가 뚜렷하다. 스님의 세력 범위는 오직 마산에서만 한정되는 것이 아니라 통영, 창원, 진영, 낙동강까지도 미치고 있다.

스님은 야마구치(山口) 현 출신이며 1904년 러일 전쟁 때 한국에 건너오게 되어 먼저 진해만방비대에서 설법하여 병사들에게 큰 위안이 되었다고 한다. 그 이래 매월 한 번씩 첫째 일요일에 거제 송진까지 가서 설교를 계속하고 있다.

또한 매월 15일에는 진영에 가서 무라이(村井) 농장의 농부들을 모아서 설교를 듣게 하고 있다. 스님은 활달한 성격으로 세상일에도 밝고 교제장(交際場)에서도 많이 환영을 받고 있다.

 

□ 정토종 포교장

신월동에 있으며 미스미다 지몬(三隅田持門) 씨가 혼자서 운영하는 작은 사원이다.

그곳은 마침 화장터에 통하는 길에서 있어서 종파를 불문하여 화장자의 관을 이 절에 안치하고 망자를 보내는 사람들은 여기서 고별하는 것이 예사다.

지몬 스님도 야마구치현 출신이며 다소 학식이 있고 세상일을 잘 알며 일본인 학교를 마산에 처음 세운 원조이기도 하다. 또한 세속사, 세상의 단맛 쓴맛 다 잘 아는 인물이라 하겠다. 마산 염불 강좌를 스님이 행한다.

 

□ 진언종 포교장

마산포 공신당산(公神堂山)의 동쪽 기슭에 있다. 곧 홍법대사당(弘法大師堂)이며 마산포 유지자(有志者)의 정신 수양을 위한 도량이다.

1908년 마산포의 마츠바라 하야조(松原早藏, 송원조장)를 중심으로 그 외 유지들이 포교사 미츠미야 류코오(三宮隆晃, 삼궁융황) 스님을 위해 건축한 것이다.

규모는 그다지 크지는 않지만 숲이 우거진 데에 있어서 전형적인 사원풍의 절로서 마산포의 자랑에 들어간다. 스님은 니이카타(新瀉, 신사) 현 출신이며 대학림(大學林)을 나와서 그 유명한 도쿄 메지로(目白)의 절에서 샤쿠운쇼(釋雲照, 석운조, 1827~1909, 막부 말기부터 메이지 시대에 걸쳐 활동한 일본 진언종의 승려) 율사의 제자가 된 스님이다. 지금도 깊은 인연에 있어 만사 그 율사의 지휘를 받고 있다.

왕년에 서생이었기 때문인지 먹고 마시는 것에는 개의치 않고 가요, 음곡(音曲) 등에 능하다 한다. 가요와 시는 지금도 한다 하니 그 품행이 단정한지는 보증할 수 없는 노릇이다.

본 항(港)의 불교회의 상황은 이상과 같으나 한국인에 대한 도화기관(道化機關)을 갖춘 곳은 아직은 없다.

일상에서의 근행(勤行)은 우선 의식을 응용해서 일본 불교의 진상을 발양(發揚)하기 위해 활동을 할 수가 없는 것 같다.

생사를 깊이 사고하여 제행무상(諸行無常) 함을 각성하고 헛되이 장례에 부조가 많음을 바라는 것보다 안심입명(安心立命)의 위안을 주는 것을 바라며 있다가도 없어질 재물이 많아지기를 원하기보다 고생이 낙이라는 개달음을 주는 것을 원하고 방편적(方便的)인 설교로 어리석은 사람들의 환심을 사기보다는 도리어 선남선녀를 도의 길로 이끄는 것을 더 원하는 마음이야말로 오늘날 불교계의 정신 자리라 할 것이다.

 

□ 기독교는 마산포에 천주교는 완월동에 두 유파가 있다.

완월동 쪽은 프랑스 사람이 이끌고 마산포 쪽은 한인이 이끌고 있으며 두 파 모두 한인만을 상대하고 있다.

여기에 다니는 한인들은 여전히 선도된 모습을 모여주지 못하고 있다. 협박, 허위, 절도, 사기, 속임 등 온갖 악덕스러운 문자(文字)에 신도들이 씌워져 있다.

신시에는 일본 기독교회가 있기는 하나 이 또한 상주하는 교사나 목사가 있는 곳은 아니다. 특히 신도 중에는 그 교리를 활용할 능력을 갖춘 이가 적고 고집스럽고 완고하여 세상에서 인정을 못 받고 있다.

구래(舊來)의 신도도 도리어 교회에서 떨어져 나가려는 경향이 있어 보이며 교세는 거의 보잘것없고 겨우겨우 유지되고 있는 감이 있다.<<<

 

이 글은 창원시정연구원이 올 초에 번역한 『馬山繁昌記』(1908) 중 열다섯 번째 것이다. 그림은 별도로 삽입하였다. 『馬山繁昌記』는 1900년대에 발간된 일본 문헌 중 단행본으로는 처음인 것으로 알려졌다. 개항 이후 마산으로 몰려 들어온 일인들의 수는 1908년 6월 3천355명에 달했다. 같은 통계로 한인은 7천515명이었으니 당시 마산으로 이주한 일인들의 규모를 짐작할 수 있다. 책의 제목처럼 당시 마산은 '번창'해 가고 있었다. 마산으로 이주한 일인들에게 마산은 꿈을 주는 신도시였다. 책의 제목과 내용은 이런 시대 상황과 그들의 기대를 반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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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번창기(1908) - 14

제5장 교육기관

 

일본인 아동의 교육기관으로는 마산거류민단이 공설(公設)한 마산심상고등소학교가 있다.

위치는 전에 신월동 지역 내에 있던 철도관리국의 소관지이며 신시와 마산포 사이에 있으면서 약간 신시 쪽에 가깝다. 그 소재지는 사방이 뚫려서 조금 높은데에 있기에 소학교의 위치로서는 최고라 하겠다.

 

<마산심상고등소학교 / 현 월영초등학교>

 

학교 건물은 1908년 2월 11일, 기원절(紀元節, 일본의 건국기념일)에 낙성식을 올린 것이다. 부지는 2,500여 평이며 교사 및 부속건물의 건평은 380여 평, 그 경비는 29,510여 원이 들어간, 항내(港內)의 장대미려(壯大美麗)한 큰 건축물이다.

이 학교는 1902년 11월 4일, 정토종 포교승 미스시다 지몬(三隅田持門, 삼우전지문) 스님이 혼자서 자금을 내어 신시의 남단에 일본소학교를 일으켜 생도 13명을 수용하여 개교식을 거행하기에 이르렀고 다음 해 11월에 마산심상소학교란 공인(公認)을 거치고 1906년 7월 관인을 얻고서 심상고등소학교가 된 것이다.

1907년 이후 통감부에서 연간 42원의 보조를 받기로 되었고 같은 해 일본 동궁(東宮) 요시히토(嘉仁, 가인) 전하가 방문했을 때 학사 장려하는 뜻에서 장려금 3백 원을 받아 바로 학교 기본재산에 산입하였고 동년 12월 12일, 양 폐하의 사진과 칙어(勅語)를 증여 받은 한국 내에서 몇 안 되는 학교 중의 하나다.

낙성식은 진해방비대사령관인 해군소장 미야오 나오키(宮岡直記, 궁강직기) 씨 및 진해만요새대대장 이하 관민 3백여 명을 초대하여 총감부 총무장관 츠루하라 사다키치(鶴原定吉, 학원정길) 이하 여러 명의 축사 낭독이 있었다.

당일 통감부의 부통감인 소네 아라스케(曾根荒助, 증근황조) 씨로부터 건축비용 일부로서 5백 원이 정해졌다. 본교의 방침으로는 학사장려를 위해 수시로 학부형 회의를 개최하고 위생에 관해서는 직원과 아동들에게 매일 학교 안팎을 청소시키고 매주 한 번 대청소를 시킨다.

또한 매년 4월에는 촉탁 의사가 와서 위생 상태를 시찰하고 학생 전원의 건강진단을 실시한다. 눈병인 트라코마(角膜粒腫, 각막입종, 전염성 만성결막염)에 관해서는 특히 엄중한 예방을 실시하고 있다.

현재 학생 수는 346명이며 그중 남학생이 160명, 여학생이 186명이다. 교장은 사가(佐賀, 좌하) 현 출신 나카지마 데이지로(中島訂治郞) 씨이며 교감은 다케시다 도모(竹下智) 씨, 이하 남녀 교사 5명과 한국 촉탁교사 1명이 지도하고 있다.

일단 소학교 전과(全科)를 졸업한 자는 별도로 보습과(補習科) 혹은 고등여학교나 중학교 등 설비가 없기 때문에 그 학식(學識)의 향상을 쉬어야 하는 처지가 되어 있다. 그래도 진학하려는 자는 한국에 있어서는 부산이나 경성, 인천 이외에는 일본으로 갈 수밖에 없으니 참 유감스럽기 짝이 없다.

그래도 교육과정은 일본과 연결되어 있어 전혀 다를 바 없을뿐더러 고등과에는 도리어 한국어 이수라는 부하도 있는 것이다. 매년 3월 시험을 실시하여 졸업증서와 수학증서를 수여한다. 봄, 여름 두 계절에 대운동회를 행하고 고등과 학생은 수학 소풍 여행을 실시할 때가 있다.

교육계에서 불리는 노래에 “노래(唱歌)는 부산, 수공(手工)은 마산, 도화(圖畵)는 경성, 도구(道具)는 원산, 유희(遊戱)는 인천”이라고 하여 그 특기를 드러내고 있다. 그렇다면 수공은 마산소학교가 잘하는 분야일지 모르겠지만 유희도 아주 잘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

한인의 아동교육에 관해서는 마산포의 성호라는 곳에 공립마산보통학교란 것이 있다.

전 학급을 4학년으로 나누어 매 학년 50명씩 도합 200명을 수용할 예정이나 현재의 학생은 100명에 미치지 않는다. 그리고 모두가 남학생이고 여자부의 설비는 없다.

한국 정부에서는 매년 360원, 지방청인 창원부는 230원의 보조를 주고 있다.

교장은 한국이이며 본과(本科) 훈도(訓導)로는 윤태권과 교감이자 일어를 가르치는 가고시마(鹿兒島, 녹아도) 현 출신의 구로키 겐지(黑木源仁), 두 사람이 있다. 그 외 부훈도가 두 명이 있다.

교사(校舍)는 융희 2년 즉 1908년 3월 10일 봄날의 좋은 시기에 낙성식이 거행된 것이다. 당일 낭독된 축사는 아래의 한 건이며 뒤에 한국어로 번역되었다. 나머지는 식사(式辭)와 축전에 불과했다.

 

공립마산보통학교의 낙성식을 경축드리며

장가(長歌, 5자 혹은 7자로 짓는 일본 시가인 화가. 끝에 만가를 따른다.)

융희 2년 무신년 2월 초 일본 재야의 신하 스와 부고츠(諏方武骨)

 

“장차 향기롭게 성장하는 아이들이여 학창에서 보이는 뜰의 꽃들과 같구나.”

운운(이하 시가의 번역은 생략한다)

 

이 글은 창원시정연구원이 올 초에 번역한 『馬山繁昌記』(1908) 중 열네 번째 것이다. 그림은 별도로 삽입하였다. 『馬山繁昌記』는 1900년대에 발간된 일본 문헌 중 단행본으로는 처음인 것으로 알려졌다. 개항 이후 마산으로 몰려 들어온 일인들의 수는 1908년 6월 3천355명에 달했다. 같은 통계로 한인은 7천515명이었으니 당시 마산으로 이주한 일인들의 규모를 짐작할 수 있다. 책의 제목처럼 당시 마산은 '번창'해 가고 있었다. 마산으로 이주한 일인들에게 마산은 꿈을 주는 신도시였다. 책의 제목과 내용은 이런 시대 상황과 그들의 기대를 반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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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번창기(1908) - 13

제4장 위생 및 의료

 

공중위생으로는 1906년(명치39년) 가을에 비로소 대청결법(大淸潔法)이 제정되어 매년 봄가을 두 계절에 집행을 보게 되었다. 또한 청결사(淸潔社)라는 회사가 있어 한인 인부들이 매일 일인 감독의 지휘 하에 쓰레기차를 몇 대 돌리면서 집이나 가게 앞의 쓰레기 함에 모아둔 것을 수거해 간다.

종두(種痘)는 매년 두 번 봄가을에 장려되었다. 마산포의 거리에서도 청결차가 다니는 것을 보게 된다.

종래부터 일인들이 곤란하게 여긴 것은 화장실 청소에 관한 일이다. 한인들은 일정한 시기를 빼고는 분뇨를 비료로 쓰는 것을 원하지 않기 때문에 논밭에 시비를 할 때 이외에는 분뇨가 많이 남아서 한계에 도달하면 돈을 주어 투기하도록 했다. 청결사가 조직된 이래 이 회사는 연락을 받으면 이것을 날라 버리고 거류민은 이 회사를 편리하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또한 묘지와 화장터는 신월동 지역의 산기슭에 있고 묘지에는 일본 전관(專管)과 각국의 두 구획으로 나뉘어져 있는데 토장(土葬)을 허용하지 않기 때문에 돌아간 사람이 나오면 민단의 시설인 화장장에서 화장을 해야만 한다. 묘지에는 뼛가루만 매장하는 것뿐이며 여태껏 여기에 매장된 일은 없다. 단지 신생아의 옷이 매장되어 있다.

 

<당시 일본인 공동묘지와 피병원>

 

피병원(避病院, 전염병 환자를 격리 수용하는 병원)도 신월동 지역에 있어 1907년에 한 명의 콜레라 환자를 수용해 왔으며 연간 한두 명의 이질 환자를 수용했을 뿐이다.

각기병(脚氣病) 환자는 우기 혹은 여름에서 가을에의 장마철에 발생할 때가 있으나 극히 적다. 대개 한국의 공기는 건조함에도 불구하고 각기 환자가 많다는 것은 다소 이상한 감이 들기는 한다. 마산에서는 이 유례를 벗어나 각기 환자의 전지요양지(轉地療養地)로서는 다른 데서 찾아볼 수 없을 만큼 최고의 보양지라 하겠다.

기타 말라리아나 장티푸스도 있지만 극히 드물다. 또한 건강에 신경을 별로 안 쓰는 한인들 사이에 간혹 천연두나 홍역 등이 유행하고 그 여파로 일인에게도 옮겨진 경우도 있는데 아주 드물다. 페스트 병은 아직 한 번도 들어오지 않았다.

콜레라는 부산에서 그 계통의 병이 전염되어 1907년 10월 중에 4명의 환자를 내었는데 모두 죽었기 때문이다. 더 이상 확산되는 일은 없었다. 1908년 6월 하순부터 소아(小兒) 디프테리아 환자가 2,3명 나왔으니 빨리 발견되어 죽는 사람은 없었다.

마산에는 지방 풍토병이라 명명할 만한 병도 없다. 특히 전염병은 대체로 느슨한데다가 그 세균이 겨울의 극렬한 추위 때문에 동사하고 그 여독을 다음 해에 끼칠 것도 없으니 이것이야말로 하늘이 베풀어주신 은혜일지도 모를 땅, 낙원이라 하겠다. 전지 요양자가 많은 것도 이 때문이다.

의료기관으로서는 이사청 보호 아래 세워진 마산병원이 신시의 남쪽 하마마치(빈정 濱町, 현 창포동) 3정목에 있었는데 1909년 9월 초순, 전에 신월지역에 있던 철도관리국 소관의 토지와 가옥을 빌려서 거기로 이전하게 되었다.

현재 75명의 화양(和洋, 왜식과 서양식) 절충의 건물을 건설하고 있으며 의무, 내과, 수술, 안과, 해부, 저약(貯藥), 조약(調藥, 여러 가지 약재를 섞어서 약을 조제함), 접수, 환자대기실로 나누어 쓰게 된다. 빌린 가옥 네 동 중 세 동의 방 12개를 병실로 쓰게 되는데 특등부터 3등까지 나눈다. 게다가 저빙고(貯氷庫)까지 짓는다는 계획이다.

본 병원은 서쪽을 정면으로 하고 앞으로는 장군산의 산들이 있고 그 산이 내려오는 높은 기슭에 자리 잡고 있다.

후방은 마산만의 매축지를 눈 아래 두고 각 병실은 다 동쪽을 향해 해돋이를 보게 되어 있고 매축지 너무 마산만에 떠다니는 배가 보이는 조망은 그야말로 아름다운 정경이라 한일 양국을 통틀어 이렇게 좋은 병원 건축의 적지(適地)는 없을 것이다.

이 청정한 공기에다가 산과 바다의 조망을 갖춘 병실은 약의 효과 이외로 위안의 효력을 자아내므로 그 치료 시기를 앞당기는데도 그 의미가 크다 하겠다.

마산포에 분원을 경영하며 후쿠오카 출신의 활달하고 친절한 해군 2등 군의관인 하라다 히코지로(原田彦次郞)가 주임으로 종사하고 있다.

그 외 개업의원으로는 신시 혼마치(本町, 현 월남동) 1정목에 오카바야시(岡林 강림) 의원이 있다. 원장 오카바야시 도지로(岡林藤次郞) 씨는 특히 외과, 위장, 화류병과(花柳病科)에 능숙해 찾아오는 환자로 많은가 보다. 또한 완월교 부근에 오오카(大岡) 의원이 있으며 오오카 키(大岡規, 대강규) 씨는 에히메(愛媛, 애원) 현 무사 집안 출신이며 내외과와 소아과를 잘 봐서 개업한 지 얼마 안 되었지만 환자가 계속 문전에서 성시를 이룬다고 한다.

마산포 신마치(新町, 현 추산동)에는 산과, 부인과, 소아과를 잘보는 고세이(弘生, 홍생) 의원이 있고 신월동에는 요쿠라(興倉, 흥창) 치과 전문의가 있다. 수의(獸醫)로서는 마산포 신마치에 개원하여 경찰 수의사로 촉탁된 야마구치 가나우(山口叶, 산구협) 씨가 있다. 또한 신시 혼마치 2정목에 있는 인풍당(仁風堂) 약국의 이이츠카 추타로(飯塚忠太郞, 반총충태랑) 씨는 약제사로서 수질 및 우유 등의 검사를 할뿐더러 청결사 사장으로서 공중 위생 집행에도 입회(立會)하고 있다.

산파(産婆)로는 마산포에 오카모토 나츠(岡本なつ), 신마치에 유카다 우미에(湯川うみえ) 니시하라 마스에(西原ますえ), 구리하라 도요(栗原とよ)란 네 여사가 조산원을 운영하고 있다. 그 실력에 얀간 차이가 있다 해도 모두 상당한 학술과정을 마친, 면허를 가진 이들이다.

이 지방은 소(牛)의 명산지이며 그 숫자도 많으며 공기가 건조하여 소의 병도 적은 편이다. 그래도 한 번 병이 번졌다 하면 참사를 이룬다고 한다. 닭 콜레라도 간혹 유행할 때가 있었던 것 같은데 극히 드물다.

의료계에서도 페스트 예방을 위해 도쿄(東京) 식으로 고양이를 기르는 것을 권장하면 어떨까. 일이 발생하면 후회해도 소용이 없는 법. 이 항구처럼 해륙의 출입이 빈번한 곳에서는 언제 그 균이 들어올지 모른다. 나쁜 역병이 유행하고 나서 비로소 대청소는 한다는 꼴이 된다면 최악 중의 최악이 아니던가.<<<

 

이 글은 창원시정연구원이 올 초에 번역한 『馬山繁昌記』(1908) 중 열세 번째 것이다. 그림은 별도로 삽입하였다. 『馬山繁昌記』는 1900년대에 발간된 일본 문헌 중 단행본으로는 처음인 것으로 알려졌다. 개항 이후 마산으로 몰려 들어온 일인들의 수는 1908년 6월 3천355명에 달했다. 같은 통계로 한인은 7천515명이었으니 당시 마산으로 이주한 일인들의 규모를 짐작할 수 있다. 책의 제목처럼 당시 마산은 '번창'해 가고 있었다. 마산으로 이주한 일인들에게 마산은 꿈을 주는 신도시였다. 책의 제목과 내용은 이런 시대 상황과 그들의 기대를 반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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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번창기(1908) - 12

제3장 지질 및 기후

 

마산 부근 일대는 제3기층에 속하는 데가 많고 산이나 계곡에는 화강암 또는 결정편암(結晶片巖)을 노출하고 있는 데가 있다.

해변 및 평야는 주고 제4기층으로 구성되어 있어서 지미(地味)는 기름지고 좋다. 논에서는 쌀과 보리를 이삼모작(二三毛作)으로 짓고 밭에는 보리와 채소를 이모작하는 것은 다른 데와 같다.

 

 

거친 땅을 개척해 비료를 주지 않아도 여러 종류의 과일, 채소, 곡물이 알차게 자란다. 산악지역은 노출된 바위가 많고 거목이나 울창한 숲은 드물지만 산 중턱과 산 아래 평기의 묘역에서는 소나무가 성긴 숲을 이루기도 한다.

또한 신시 부근 혹은 관공서 소유지로 남별을 피한 곳에는 모두 소나무가 무성하다. 이러다보니 식림(植林)은 희망이 없는 것도 아닐뿐더러 수원(水源)을 확보하기 위해서라도 시급한 사업이라 하겠다.

촌로들의 얘기를 들으면 지금으로부터 백 수십 년 전까지는 깊은 숲이 도처에 있고 거의 햇빛도 들어오지 못할만큼 나무가 많았는데 나라에서 온돌이 유행한 이래 어린 나무와 뿌리까지 연료로 채굴되어 오늘 날과 같은 처참한 풍경을 보게 된 것이라 한다.

계곡 물의 수량이 비교적 적은 것은 이 때문일 것이다. 또한 이 탓으로 비가 올 때마다 계곡이 범람하고 논밭을 해치는 것과 동시에 그 토사가 마산만 바닥에 매몰되어 있는 것은 식자(識者)의 지적을 기다릴 필요 없이 다 아는 바인데 당국자는 특히 깊이 유의해 주길 바란다.

우물에 관한 한, 어디를 파나 물이 나오지 않는 데는 없으나 마산포의 일부분과 신시 매립지에서 나는 물은 수질 검사 결과 염소가 다량 함유되어 있어 비록 여과를 한다 해도 음료수로는 적절치 않다고 한다. 기타의 우물은 여과할 필요도 없이 바로 음료수로 제공이 가능할뿐더러 차 끓이기에도 딱 적당하다.

그 중에서도 이사청 및 우체국의 물은 우수한 물이기는 하나 감미롭고 상쾌한 맛까지는 도달하지 못하리라 본다. 산기슭이나 높은 언덕에 있는 우물은 다 천연의 지하수인지라 가뭄이나 우기에 관계없이 그 수량이 증감될 일은 거의 없으나 요 근래 수년 사이에는 그런 현상이 일어나기도 한다.

이 물은 비가 지중에 스며들었다가 다시 나오는 것이라 평소에는 무미투명(無味透明)한 물도 때때로 그 맛과 색상이 다를 때도 있다. 또한 청결한 수질도 통과하는 지질에 따라서는 냄새가 나거나 철분을 포함할 때가 있다.

기온은 관측소의 설비가 없으므로 확실한 것은 말하지 못하겠지만 매년 극서(極暑)는 7월 중순부터 8월 상순 사이이며 화씨 98도(섭씨 36.6도)를 넘을 때는 없고 극한(極寒)은 1월 중순부터 2월 초순 사이에 있으며 최저 화씨 26도(섭씨 영하 6도) 이하로 내려갈 때는 드물다. 눈은 거의 오지 않으며 눈이 쌓인 것을 본 적이 없다.

풍향은 여름에는 남풍의 계절이며 바다 위를 스쳐오는 시원한 바람이 계속 불어오고 실내에 있어서도 그 열기로 불쾌해지는 일은 없으며 간혹 소나기가 올 때도 있어서 지열을 식혀 주기도 한다.

한국의 우기에 관해서는 한국 속담에 삼음사시(三陰四時, 三陰四晴의 오식誤植)라는 말이 있다. 사흘 비가 오면 나흘 갠다는 말이다. 천둥벼락은 극히 적고 낙뢰가 내리는 일은 십 수 년에 한두 번 밖에 없으리라.

초가을부터 바람은 동풍으로 바뀌고 계속 비가 올 때가 있다. 낙동강의 본 지류가 범람하여 교통기관에 피해를 주는 때는 바로 이 때이다. 반딧불이가 한창인 이때, 늦가을까지 파란 빛을 보이며 동서(東西)로 날아가는 것은 일인(日人)에게는 신기한 현상으로 보이낟. 만추에 들어서면서 풍향은 바야흐로 동북으로 변하면서 겨울에는 온전한 북풍으로 변한다.

찬바람이 불면 그 차가움이 살을 찌르는 듯하며 물받이 수통의 물이 3센티 정도까지 얼음이 되기도 한다.

이 계절 집에서는 난로 혹은 고타츠(火燵)로 난방을 하는데 한옥 집에서는 모두 온돌이라고 하여 바닥 밑에서 땔감을 태우며 난방하는 방식을 취한다.

거류민 중에 한인의 방을 빌리고 있는 사람들은 초겨울부터 온돌을 사용하여 기상을 하는데 계절이 마치 봄이나 가을과 같이 느껴져 그 사람은 죽을 때까지 그 온돌의 따스함을 잊지 못하겠다고들 한다.

극한의 날씨도 2, 3일로 끝나고 5일 이상 계속되는 일은 없다. 바로 기온이 올라가서 얼어붙은 것은 녹이게 하여 따사로운 초봄의 나날이 계속되는 것이 보통이다.

이 변화는 삼음사청과 더불어 한국에 특유한 삼한사온(三寒四溫)의 계절적 특징 때문에 기인한다.<<<

 

이 글은 창원시정연구원이 올 초에 번역한 『馬山繁昌記』(1908) 중 열한 번째 것이다. 그림은 별도로 삽입하였다. 『馬山繁昌記』는 1900년대에 발간된 일본 문헌 중 단행본으로는 처음인 것으로 알려졌다. 개항 이후 마산으로 몰려 들어온 일인들의 수는 1908년 6월 3천355명에 달했다. 같은 통계로 한인은 7천515명이었으니 당시 마산으로 이주한 일인들의 규모를 짐작할 수 있다. 책의 제목처럼 당시 마산은 '번창'해 가고 있었다. 마산으로 이주한 일인들에게 마산은 꿈을 주는 신도시였다. 책의 제목과 내용은 이런 시대 상황과 그들의 기대를 반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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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11. 1. 00:00

마산번창기(1908) - 11

마산의 관공서 - 5

 

□ 민의소(民議所)-마산포 소재(전 마산보통학교 터)

이것은 한인(韓人) 측의 자치기관이며 마산포 읍내 6개 동의 하급 행정을 담당하는 곳이다. 이 사무소에도 역시 민의소장과 부소장이 있고 의원도 있지만 그 의사(議事)나 역소(役所)의 모양새는 볼 것이 없다.

명치유신 때 일본에서 이루어진 그것보다 더 유치한 것이거니와 사무소는 담배 피우는 휴게실 모양이다.

 

 

□ 창원재무서(昌原財務署)-마산포 소재

한국정보의 탁지부(度支部) 직할로 지방의 조세 등을 정리하는 기관이며 서장은 재무관인 한인인데 재무보좌관으로서는 일본인이 주로 책임지고 집무하고 있다.

그 위치는 오산으로 명태어 회사 남쪽 앞에 있는, 전에 한국척식회사 마산출장소 건물이었던 곳에 건물을 빌려 쓰고 있는데 현재 마산포 신마치(新町)에 새로 건물을 짓고 있는 중이다.

 

□ 창원금융조합-마산포 소재

한국정부의 탁지부가 자본금 1만 엔을 지출해 한인에 대한 소규모의 금융기관으로 만든 것이며 재무서에 부속되어 있으며 상당한 저당을 잡아서 저리로 대부를 해주는 곳이다.

말하자면 농공은행의 소규모 판인데 그 성적은 별로 좋지 못하다는 이야기가 들여온다. 이 조합은 창원부는 물론이고 함안, 진해, 고성, 진남(鎭男, 진남군 1900년-1909년. 현재의 통영시),웅천 등지까지 설쳐 활동한다.<<<

 

이 글은 창원시정연구원이 올 초에 번역한 『馬山繁昌記』(1908) 중 열한 번째 것이다. 그림은 별도로 삽입하였다. 『馬山繁昌記』는 1900년대에 발간된 일본 문헌 중 단행본으로는 처음인 것으로 알려졌다. 개항 이후 마산으로 몰려 들어온 일인들의 수는 1908년 6월 3천355명에 달했다. 같은 통계로 한인은 7천515명이었으니 당시 마산으로 이주한 일인들의 규모를 짐작할 수 있다. 책의 제목처럼 당시 마산은 '번창'해 가고 있었다. 마산으로 이주한 일인들에게 마산은 꿈을 주는 신도시였다. 책의 제목과 내용은 이런 시대 상황과 그들의 기대를 반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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