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돝섬4

김형윤의 <마산야화> - 52. 돝섬의 전설 52. 돝섬의 전설 돝섬은 마산 앞바다에 떠 있는 조그마한 섬, 일명 월영도(月影島)라 부르기도 한다.(행정구역 상 월영동에 속해 있기 때문) 1910년경에는 인가가 불과 7,8호였으나 지금은 20여 호. 아동 10여 명의 초등학교 분교장이 있고, 주민은 대개 영세 어민으로 섬의 동남 비탈에 보리와 채소를 가꾸기도 한다. 멸치 어장막이 있어 신·구마산 어판장과의 사이에 배의 왕래가 잦고 여름 한 때는 낚시꾼들과 피서객들이 득실댄다. 섬의 형상은 서쪽에서 바라보면 오리(鴨)가 먹이를 구하는 것 같기도 하고 인도산 코브라가 염소(羊)를 삼킨 것과 흡사하다. 일본인들은 이 섬이 일본의 비파(琵琶)와 같다 하여 그 어음(語音)에 비겨 미화(美和)라 했으며 마산만의 공원지로 지정하고 매번 벚꽃 묘목을 심었으나 바.. 2015. 10. 19.
김형윤의 <마산야화> - 23. 203고지의 거포, 24. 돝섬의 위장 적기 23. 203고지의 거포(巨砲) 마산 신사(현 제일여중·고) 정문 앞 공지에 녹슨 대포 일문(一門)이 거치되어 있었는데 어찌된 일인지 해방된 몇해 안가서 포대와 동시에 흔적이 없다. 이 대포는 1904년에 발발한 일로(日露)전쟁시 일본 최고의 군벌인 대산(大山), 내목(乃木) 등 원수급에 의하여 일본 조병창에서 건조, 군함으로 여순항에 인양하여 격전장이던 203고지에서 공을 세운 것으로, 일본의 군사력을 과시하기 위하여 마산만 입구이며 중포병 대대 입구 까치나루(鵲津) 산정에 두었다가 1935년 대대장이던 굴구중좌(掘口中佐)가 마산부에 기증하였던 바, 부 당국은 이것을 전기 장소에 이전 거치함으로써 마산만을 일모(一眸)에 보고 일본의 군국주의 사상을 환기했던 것인데, 그대로 보존해 두어서 하등 해될 것도.. 2015. 6. 15.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87) - 강점제3시기 도시변화 관련 기사 두 개 소개합니다. 8. 1938년 2월 24일 동아일보 7면 기사입니다. 이 기사는 돝섬을 새 명소로 만들기 위해 마산중포병연대에서 돝섬공원화 계획을 수립하였다는 내용입니다. 돝섬공원화 계획의 의도는 진해요항부와 비봉리에 해안도로를 조성한 후 진해와 돝섬을 연결하여 진해를 찾은 관광객이 돝섬을 거쳐 마산으로 오도록 한다는 겁니다. 또한 진해 부산 간 계획하고 있는 자동차도로가 개통되면, 돝섬이 연결점이 되어 1시간 3-40분내에 부산-진해-돝섬-마산이 이어질 것이므로 돝섬공원화 계획에 마산부민들도 적극 협력할 것이라 보도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기사처럼 돝섬이 개발되고 부산에서 진해와 돝섬을 거쳐 마산으로 연결되는 교통로가 실제로 만들어지지는 않았습니다. 9. 1938년 6월 3일 동.. 2013. 11. 11.
24시간 만에 마산 제대로 보여주기 먼 곳에서 10여 명의 손님이 왔었다. 역사를 공부하는 현직 교수와 젊은 대학원생들이었는데 모두 마산이 초행이었다. 오후 3시 경 버스 편으로 양덕동 터미널에 도착한 이들의 마산 여행은 이 도시에 얽힌 이야기를 듣는 것으로부터 시작되었다. 멀게는 여몽연합군의 정동행성으로부터 조창과 개항, 식민지 시대를 거쳐 가깝게는 3·15의거에 이르기까지 무려 1000년을 넘나드는 마산 이야기가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저녁식사는 신마산 두월동에 나가 해결했다. ‘통술거리’라 명명된 두월동 거리는 개항 직후인 100여 년 전, 일본인들이 차지한 조계지에서 최고 번화가로 쿄마찌(京町)라 불렀던 곳. 거리의 내력을 안 여행자들은 자신들이 100년 전 조계지 한 가운데 앉았다는 것만으로 매우 즐거워했다. 통술집 특유의 신선한.. 2009. 9. 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