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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305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2) - 조선시대 조용했던 마산포구에 조창이 생기자 조창에서 일을 보는 관원은 물론 인근 지역 관원들의 왕래까지 잦아지고 여각(旅閣), 객주(客主) 및 강경상인(江京商人)은 물론 각지의 상인들이 모여들었습니다. 해로와 육로의 접점이니만큼 시장으로서의 지정학적 조건도 좋았지만, 17-18세기 인구증가로 비농업인구가 급증하여 임노동자들이 도시에 집중하는 등 조선조 후기에 발생한 '봉건적 사회질서의 붕괴'가 마산포를 도시화시키는 결정적인 원인으로 작용했습니다. 마산창을 중심으로 자연스럽게 민가도 들어섰습니다. 동성리·중성리·오산리·서성리·성산리·성호리, 지금도 대부분 동명으로 이름이 살아있는 6개리가 이 때 형성되었습니다. 현재까지도 마산 도시구조의 주심부(主心部)인 이들 6개리가 오늘날 마산이라는 도시의 시작이었습니다. 이처.. 2010. 6. 28.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1) - 조선시대 조선은 태조 재위 중 고려 때 실시하였던 조창제도를 거의 복구하였습니다. 초기에는 전국 아홉 개 조창에서 세곡을 수납했습니다. 내륙 수로로 연결되는 조창이 충주의 사흥창(司興倉)․원주의 흥원창(興原倉)․춘천의 소양강창(昭陽江倉)․황해도 백천(白川)의 금곡포창(金谷浦倉)․강음(江陰)의 조읍포창(助邑浦倉)의 다섯 개였고, 바닷길이 연결되는 조창은 충청도 아산(牙山)의 공세관창(貢稅串倉)․전라도 용안의 덕성창(德成倉)․영광의 법성창(法聖倉)․나주의 영산창(榮山倉) 네 개였습니다. 경상도의 세곡은 충주의 사흥창에서 수납하였습니다. 조선중기를 지나면서 조운제도에도 변화가 생겼습니다. 조선(漕船)의 빈번한 침몰사고와 민간인에게 운임을 지불하고 운송하는 임운(賃運)이 생기면서 조창의 기능은 점점 위축되었습니다. 이에.. 2010. 6. 21.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0) - 조선시대 창원(昌原)이란 지명은 조선시대에 만들어졌습니다. 조선조 3대 태종 8년(1408년)에 의창(義昌)현과 회원(會原)현을 합쳐 창원(昌原)부로 승격되면서 그 이름이 역사에 등장합니다. 2008년에 창원시가 펼친 ‘창원탄생 600년’ 기념행사는 바로 이 사실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의창(義昌)의 ‘昌’자(字)와 회원(會原)의 ‘原’자(字)를 합쳐 만든 이름입니다. 7년이 지난 1415년(태종15년)에는 부(府)였던 창원이 도호부(都護府)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부성(府城)은 별도로 없었습니다. 현재 마산 합성동에 유적으로 남아있는 '합포성'의 병마도절제사가 창원도호부까지 다스렸기 때문입니다. '합포성'은 고려 우왕 4년(1378년)에 부원수 배극렴이 왜구의 침입에 대비해 축성한 병영입니다. 올해 초 경남대학교박물.. 2010. 6. 14.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9) - 고려시대 *작년 11월 9일 포스팅했던 글인데 연재라서 또 올립니다 '마산' 지명의 기원에 대한 몇 가지 설이 있지만 아직 정립된 주장은 없습니다. 이 글에서는 지금까지 제기된 마산지명 기원설들을 모아 보았습니다. 구전으로 전해내려온 이야기에서부터 고려시대 여원연합군 일본원정 때 이곳에 몽고군들이 주둔한 사실과 관련이 있다는 주장까지 있습니다. 먼저, 일본인 추방사랑(諏方史郞)의 주장입니다. 그는 1926년에 간행한『마산항지』에서 '구전으로 내려오던 이야기'라고 전제하며 「임진왜란(1592-1598년) 이후, 각 지역에 전염병이 창궐하여 창원 소재 오산진(현 산호동 용마고 부근)에도 매일 시체가 산을 이루어 50구, 30구 혹은 20구의 시체가 동시에 묻히는 등 참혹한 상황이 되었다. 살아남은 이 지역의 고로(古.. 2010. 6. 7.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8) - 고려시대 두 번의 전쟁 후, 조정에서는 마산지역의 지명이었던 의안(義安)을 의창(義昌)으로, 합포(合浦)는 회원(會原)으로 개칭하고 금주(金州, 지금의 김해) 수령이 통할하던 이곳에 현령을 직접 파견하여 행정지위를 승격시켰습니다. 일본 정벌기간에 보여준 마산지역 민관의 노고를 치하해 내린 조치로, 소위 민심수습책이었습니다. '합포'와 '회원'은 최근 통합창원시 출범으로 두 개의 구청이 들어서는 마산에 '마산합포구'와 '마산회원구'로 행정구 명칭이 되었고 '의창'은 현 창원시의 두개 구 중 하나의 명칭인 '의창구'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조정의 배려도 하루하루 힘겹게 살아가야 했던 힘 없는 백성들에게는 아무 의미도 없었습니다. 전쟁 때문에 고난을 겪은 백성들에게 다시 내린 충격은 왜구의 침입이었습니다. 고려시.. 2010. 5. 31.
어디, 이런 사람 한 번 찾아 봅시다 6.2 지방선거가 절정입니다. 통합 창원시의 미래는 이번 선거에서 선택받는 공직자들에 의해 크게 좌우됩니다. 그만큼 중요한 선거입니다. 그래서 하는 말입니다. 60년대 이후 급격히 진행된 인구 도시집중현상은 도시의 양적 팽창이라는 물리적 변화와 함께 사람과 사람, 사람과 도시시설 사이에 해결하기 어려운 수많은 문제를 유발시켰습니다. 도시의 규모가 비대해진 대도시일수록 문제의 정도는 더 많고 더 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한 도시를 이끌어갈 공직자의 도시인식과 도시에 대한 철학은 다른 어떤 덕목보다 우선 검증되어야할 조건일 수 있습니다. 공직자의 도시철학은 그 도시의 경제 발전과 문화 품격을 상승시킬 뿐만 아니라 당장에 시민생활의 질과도 관계되기 때문입니다. 이미 브라질 쿠리티바의 자이메 레르네르 시장을 통.. 2010. 5. 26.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7) - 고려시대 왜? 원 세조 쿠빌라이와 고려 충렬왕은 대일본 원정기지로 남도의 작은 포구 합포를 택했을까요? 그 이유는 바로 당시 이 도시가 가졌던 자연적 사회적 조건 때문이었습니다. 학계에서 정리된 내용은 대략 다음의 네 가지입니다. 첫째는 위치입니다. 아래 그림에서 보듯이, 합포가 해로(海路)상 일본과의 최단거리에 있는 항구입니다. 그리고 거제도와 쓰시마 사이를 지나는 쓰시마 난류를 타면 큰 힘을 들이지 않고 쓰시마를 거쳐 일본 본토로 갈 수 있는 첩경(합포-거제도-대마도-이키-일본본토)이라는 점입니다. 해로 뿐 아니라 육로도 수도 개경에서 일본으로 가기 위한 최단거리에 위치한 항구가 합포였습니다. 둘째는 항구시설입니다. 합포에는 이미 조창이었던 석두창이 설치되어 상대적으로 다른 포구보다 양호한 항구시설을 가지고 .. 2010. 5. 24.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6) - 고려시대 13세기 후반, 고려의 남쪽 해안에 있던 합포는 행정상으로 경상도 금주(金州, 지금의 김해) 의안군 관할의 영현(領縣)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고려 현종 군현체제 개편 때 지금의 양산인 양주에서 금주로 이속되었습니다) 하지만 합포는 동아시아의 이목이 집중되었던 국제군사도시였습니다. 당시 세계최대 강국이었던 원나라와 고려의 연합군이 이곳 합포를 일본정벌기지로 삼았기 때문입니다. 때는 1274년, 고려 충렬왕 원년이었습니다. 여원연합군은 지금의 합포고등학교 남쪽 일대를 싸고 있던 현 자산성을 정동행성(征東行省)으로 삼고 전함건조(戰艦建造) 및 군사훈련을 비롯하여 일본정벌을 위한 대대적인 준비를 시작합니다. 둔전은 황해도 봉주(봉산)과 경상도 금주(김해)에, 선박건조는 제주도와 전라도 쪽에서 맡았습니다. 군사.. 2010. 5. 17.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5) - 고려시대 조선시대 조창인 마산창은 위치와 규모 등 관련 내용들이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하지만 마산의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 보면 고려 석두창(石頭倉)의 중요성도 결코 조선시대 마산창 못지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석두창은 별로 알려져 있지 않으며, 아직 그 위치도 밝히지 못한 채 몇 가지 가설만 나와있습니다. 이 글에서는 지금까지 주장된 석두창 위치에 대한 가설들을 소개하겠습니다. 석두창 위치 비정은 모두 세 가지인데 모두 그 근거와 논리가 좀 복잡합니다. 천 년 전에 있었던 석두창의 위치를 찾는 일이니 그도 그럴 것입니다. 세 주장의 결론만 간략하게 정리하겠습니다. (관심 있는 분들만 읽어볼 수 있도록 자세한 내용은 이 글 뒤에 별도로 붙여 놓았습니다) 첫 번째는, 몇몇 문헌(마산시사, 창원군지, 박희윤, 이.. 2010. 5. 10.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쳔사 (4) - 고려시대  고려시대는 조운제가 ‘국가지중최중자야(國家之中最重者也)’라고 표현될 정도로 중요한 제도였습니다. 조운제의 성립시기에 대해서는 몇 가지 견해가 있습니다만, 고려 제6대 성종(982-997년)기에 전국 여러 포구에 조운기지를 설치하였다가 이후 정종(1035년-1046년)대에 이르러서 이를 개경 남부 12조창으로 개편하였다고 보는 견해가 많습니다. 12조창은 위의 그림에서 보는 것처럼 서해의, 하양창(충청도 아산), 영풍창(충청도 부성), 진성창(전라도 임파), 안흥창(전라도 보안), 부용창(전라도 영광), 해릉창(전라도 나주), 장흥창(전라도 영암). 내륙의, 흥원창(강원도 원주), 덕흥창(충청도 충주). 남해의, 해룡창(전라도 순천), 통양창(경상도 사천), 석두창(경상도 합포, 마산)이었습니다. 12.. 2010. 5. 3.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3) - 통일신라말기 고운(孤雲) 최치원은 857년(헌안왕 1년) 6두품의 집안에서 태어났습니다. 12살에 당나라로 유학을 떠났고, 18살에 당나라 조정이 외국인을 등용하기 위해 설치한 빈공과에 급제하여 당나라에서 여러 관직을 지냈습니다. 「당서예문지(唐書藝文志)」에 이름과 저서가 실릴 만큼 학문이 출중했습니다. 28살에 신라로 돌아 온 고운은 한림학사에 임명되는 등 공직을 맡기도 했으나 국내 사정이 복잡해 자신의 경륜을 펼칠 상황이 아니었습니다. 부패한 진골귀족과 지방세력 간의 혼란에 나라의 근간이 심하게 흔들렸기 때문입니다. 현실에 대한 좌절감과 정치에 대한 실망으로 벼슬을 내던진 고운은 은거를 결심합니다. 경주, 영주, 지리산 쌍계사, 부산 해운대, 울산 등 전국 곳곳을 주유하다가 경치 좋고 학문하기도 좋다싶어 이곳 합.. 2010. 4. 26.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2) - 통일신라시대 통일신라 신문왕 5년(685년)에 행정체계를 주-군-현으로 정비하여 중앙집권을 강화한 9주5소경제(九州五小京制)로 재편했습니다. 지금의 경남지방에는 진주와 양산이 9주(州)에 포함된 도시입니다. 당시 진주는 뒷날 강주(康州)가 되는 청주(菁州)로, 양산은 뒷날 양주(良州)가 되는 삽량주(歃良州)라고 불렀습니다. 삽량주(지금의 양산)에는 12개 군이 속해 있었는데 그 안에는 굴자군(屈自郡)도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굴자군(屈自郡)에는 칠토(柒土-칠원)․골포(骨浦-마산)․웅지(熊只-웅천)에 각각 현(縣)을 설치함으로써 마산지역은 골포현이 되었습니다. 마산지역 현(縣)의 명칭인 ‘골포(骨浦)’는 포상팔국 중의 ‘골포국’에 이어 또 한번 사용되었습니다. 곧 '골포'는 기록에 남아있는 마산 최초의 국가명칭이자 행정.. 2010. 4. 19.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 - 통일신라 이전 마산인근에는 언제부터 사람이 살기 시작했을까요? 선사시대(先史時代)부터 이 지역에 사람들이 살았다는 사실은 그 동안의 다양한 연구와 유적 발굴을 통해 이미 증명되었습니다. 대표적인 사례로, 창원시 반계동 선사유적지 발굴현장에서 빙하기에 형성된 토층 발굴과 창원 동면 덕산의 합산패총, 그리고 진해 안골포 패총에서 출토된 '신석기시대'의 토기(土器)를 들 수 있겠습니다. 청동기시대 유적으로는, 마산의 현동․구산면․진동․진북 등지에 분포된 고인돌과 고대취락지가 있습니다. 마산 도시 한복판에서도 청동기시대유적 이 나왔습니다. 바로 위 사진입니다. 마산 회원동의 무학여고 뒤 이산미산에서 1972년 출토된 붉은 채색간토기(紅陶)입니다. 채색간토기는 고운 흙을 사용하여 형태를 만든 뒤 표면을 갈아 반들거리게 하고 그.. 2010. 4. 12.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여는 글) 창원 진해와의 통합으로 마산은 곧 단독 시로서의 이름을 잃게됩니다. 아쉬움과 함께 이 도시의 변천과정을 기록으로 남깁니다. 도시는 형성과 변환이라는 두 과정을 끊임없이 반복하면서 생성해온 유기적 생명체입니다. 도시에는 그 곳에 존재했던 인간의 모든 역사가 고스란히 녹아 있습니다. 그러므로 도시의 변천과정은 곧 인류의 역사이자 기록이고, 도시의 형태는 인간의 구체적인 문화실체입니다. 도시(city)와 문명(civilization)이 동일한 어원에서 비롯된 것도 이러한 이유 때문입니다. 인간의 성격과 행동양식이 선․후천적 요인에 의해 결정되듯이 도시도 선천적 요인으로서의 자연조건과 후천적 요인인 역사적 과정에 의해 결정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살고 있는 도시의 상황과 문제를 이해하고 미래 도시의 올바른 발전.. 2010. 4. 8.
바다가 살아야 마산이 산다 바다가 있지만 바다를 활용하지 않는 유일한 도시. 도시지역에만 약 4킬로미터의 해안이 있지만 수변공간다운 장소를 한 뼘도 가지지 못한 도시. 그래서 해안도시라 차마 말하기 부끄러운 도시, 해안도시라 말할 수 없는 도시. 지도에서만 바다와 면했을뿐 시민들의 삶과 동떨어져 바다 제 혼자 있는 도시. 바로 마산 아닌가요. 해방 전에 이미 대부분의 해안이 매립되었지만 어느 곳에도 공공용지는 없었습니다. 해방 후 시행된 여러 번의 매립공사에서도 일본인들과 똑 같이 공공용지를 만들지 않았습니다. 매립 때마다 제각기 자기 잇속 채우기 바빴습니다. 가장 최근의 매립은 80년대 이후 시행된 구항과 서항 매립이었습니다. 시기나 규모나 위치로 볼 때 마산도시를 획기적으로 바꿀 절호의 기회였습니다. 하지만 기회가 곧 위기라 .. 2010. 3. 29.
지구 지키겠다 나선 '호사비오리'들 이틀 전(3월 23일) 마산 3․15아트센터 국제회의장에서 열린 「초록별 창립대회」에 참석했습니다. 이름이 너무 예쁘죠? 정식명칭은 「마산YMCA기후변화교육 강사모임 ‘초록별’ 창립대회」입니다만 줄여서 ‘초록별’이라고 부릅디다. ‘지구온난화의 브레이크를 걸자’라는 슬로건을 내세우며 젊고 고운 마산 아줌마 20명이 모여 지구를 지키겠다고, 지구 지키는 방법을 사람들에게 가르치겠다고 나서는 자리였습니다. 청일점도 한 분 있었습니다. 규모가 큰 행사는 아니었지만 흐뭇하고 풋풋한 분위기는 어떤 행사보다도 크고 좋았습니다. 목적이 아름다워 그런지는 몰라도 시종 하하호호 웃음이 넘쳤고 진심어린 격려와 덕담이 이어졌습니다. 초록별 모든 회원들이 차례대로 동영상에 출연해, 참여하게 된 동기와 앞으로의 계획들을 보여주기.. 2010. 3. 25.
창원세계지식컨퍼런스에 참석했습니다 지난 금요일(3월 19일) CECO에서 열린 '창원세계지식컨퍼런스'에 토론자로 참석했습니다. 창원시가 지속가능한 발전을 위하여 준비한 야심찬 기획으로 지역에서는 처음 시도된 행사였습니다. 대중교통, 디자인, 건강도시, 생태, 자전거정책 등 도시문제가 대종을 이루었고 교육과 복지전문가도 참여했습니다. 발표자들 모두 국제적인 활동가이거나 전문가여서 들어볼만한 것들이 많았습니다. 지금까지 도시와 지역사회를 설계 관리해 온 우리의 방식이 달라져야 한다는 주장들이었습니다. 나는 ‘건강도시’를 주제로 발표한 호주 그리피스대학 환경보건학장 ‘피터 데이비’ 교수와 ‘유니버설 디자인’을 주제로 발표한 일본 트라이포드 디자인주식회사 ‘나카가와 사토시’ 대표의 발표문에 대해 토론하였습니다. 한정된 시간에 발표자 숫자가 많아.. 2010. 3. 22.
3·15를 통합시 정신으로 하자는데 오늘, 3월 15일. 이승만 독재에 저항, 부패한 절대 권력을 권좌에서 끌어내린 마산시민의 위대한 승리를 이루어낸 3·15의거 50주년 기념일이다. 이 나라 민주항쟁의 효시요, 민주주의의 초석을 세운 자랑스러운 날이다. 마침 정부에서 국가기념일로 지정해 의미가 더 깊어졌다. 매년 기념일을 전후해 크고 작은 행사들이 있었지만 올 해의 행사는 더 풍성하다. 뮤지컬, 드라마, 열린 음악회에 메이저 언론의 집중조명도 받는다. 좋은 일이다. 마산시민들 모두 자랑스럽고 환영할만한 일이다. 여기서도 3·15, 저기서도 3·15를 말하니 3·15의거기념사업회의 일원으로 참여하는 필자도 내심 흐뭇하다. 이틀 전 3월 13일 토요일 오후에는 50년 전 시위를 재현하는 거리상황극까지 있었다. 마산의 고등학생 천여 명이 참여.. 2010. 3. 15.
도시의 섬, 3·15아트센터 지난 4일(목) 오후 마산21포럼 주관으로 '마산항 수변공간 개발방안모색을 위한 전문가 초청 세미나'가 열렸다. 영국에서 도시계획가로 활동하고 있는 양도식 박사가 발제를 하고 경남대 이찬원 교수와 창원대 조형규 교수를 비롯한 전문가들이 토론자로 참여하였다. 양도식 박사는 발제에서, 수변을 기준으로 가장 선호해야할 건축물과 그 반대인 건축물을 정리하면서 선호도 1등급에 박물관 등 문화예술시설을 꼽았고 가장 선호도가 낮은 건물, 즉 수변에서 가장 멀리 배치되어야할 건물로 주거시설을 꼽았다. 세미나가 끝난 후, 마산바닷가 머리맡에 지어 놓은 현대아이파크와 양덕동 북향 땅에 지어 놓은 3·15아트센터에 얽힌 우울한 기억이 되살아났다. 두 건물은 양도식 박사의 주장과 정반대로 지어졌다. 이미 '현대아이파크'에 대.. 2010. 3. 9.
보행권은 인간권이다 ‘보리밭을 질주하는 멧돼지’ 메이지(明治)시대, 일본 도시에 처음으로 나타난 자동차를 두고 일컬었던 말이다. 상황이 조금 바뀌었지만 도시의 평화는 보리밭을 짓밟는 멧돼지처럼 자동차가 짓밟고 있다. 100여 년 전 우리나라에 처음 들어온 자동차도 이미 2,000만 대를 눈 앞에 두고 있다. 자동차산업의 수준도 세계 상위권이 되었다. 그러나 이렇게 차가 많아질 것을 예측치 못한 채 만들어진 우리의 도시는 자동차에 압도당해 몸살을 앓고 있다. 우리나라뿐만 아니다. 전 세계가 함께 앓는 몸살이다. 답은 이미 나와 있다. 오래 전부터 선진도시들은 이런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 노력한 결과다. 개인자동차 통행량을 줄이고 보행과 자전거 혹은 대중교통의 이용률을 높여야한다는 것이다. 다른 답은 없다. 제아무리 도로를 넓히.. 2010. 3. 5.
바람재에서 만난 사이클리스트 '하늘에 안창남, 땅에는 엄복동' 암울했던 일제기에 자전거 한 대로 민족의 울분을 삭히고 자존심까지 살려주었던 전설적인 자전거 레이서 엄복동(1892∼1951). 1913년 3월, 한·일 선수들이 함께 참가한 ‘전 조선자전차경기대회’를 우승하면서 민족의 스타로 떠오른 엄복동은 그후 계속되었던 한·일 사이클대회에서 일본을 눌러 나라 잃은 서러움을 달래주었다. 10년 후인 1923년에는 마산에서도 엄복동의 자전거가 달렸다. 4월 29일∼30일 이틀에 걸쳐 마산체육회가 주최한 '전 조선자전차경기대회'에서였다. 그 때 엄복동이 달렸던 코스가 지금 마산의 어디였는지 알 수 없는 점은 아쉽지만, 87년 전 마산에서 전국규모의 사이클 대회가 열렸다는 사실이 주는 도시적 의미는 크다. 지난 일요일 오후, 만날재와 대산.. 2010. 2. 23.
인도위의 지뢰 '볼라드', 개선이 시급하다. 걷고 싶은 거리, 걷기 싫은 거리⑤ 볼라드는 인도 차도사이에 설치하는 차량진입 억제용 말뚝으로 차량으로 부터 상대적으로 약자인 보행자를 보호하기 위한 시설물이다. 하지만 규정에 맞지 않게 설치되어 보행자를 보호하기 위한 시설이 보행자, 특히 시각장애인에게 불편을 주고, 크고작은 안전사고를 유발하며, 도시미관도 저해시키고 있다. 2006년 1월 28일 시행된 '교통약자의 이용편의 증진법'을 보면 볼라드는 보행자가 부딪쳤을 때 충격을 흡수할 수 있는 재질로 만들도록 규정되어 있다. 길을 다녀보면 알겠지만 이규정에 맞는 볼라드를 보기가 쉽지 않다. 최근에 탄성을 가진 재료의 볼라드가 간혹 설치되기도 하지만 아직 대부분이 철재나 석재로 만들어져 있다. 보행자에 대한 배려보다 유지관리의 편리성이 먼저 반영되었다.. 2010. 2. 20.
‘구(舊) 마산형무소 터’ 의 추억 ‘유장근 교수의 도시탐방대’ 일곱 번째 길에 나섰다. 1월 9일 토요일 오후 1시 반, 코아 양과점 앞, 30여명이었다. 바람은 없었지만 짙게 흐렸고 기온이 낮았다. 코스는 오동동 문화의 거리에 있는 ‘3.15의거 발원지’에서 시작하여→구 마산형무소 터→오동동 일대→오동동 아케이드→용마고등학교→지하련 거주지→산호동 효자각→용마산→구강포구까지였다. 오동동 문화의 거리에 있는 3.15의거 발원지에서는 특별손님으로 3.15의거기념사업회 백한기 회장님이 직접 나와 의거에 대해 설명해주어 의미가 더했다. 한때 화려했던 오동동의 밤 문화에 대한 설명은 이승기 선생님께서 맡았는데 두 분은 마산상고 동기생이시다. 가는 곳곳마다 새로운 걸 느꼈고 배웠지만, 여기서는 나와 특별한 인연이 있는 ‘구(舊) 마산형무소 터’에 .. 2010. 1. 24.
새단장한 구름다리가 달갑지 않은 이유 옛 북마산역 자리의 구름다리가 새단장을 하고 있다. 계단과 육교상판에 합성목재를 덧대고, 기존 철재난간도 모두 잘라내어 합성목재로 난간을 설치하고 있다. 겉으로 보기에는 원래보다 한결 깔끔해졌다. 하지만 나는 새단장한 모습이 그다지 달갑지 않다. 소중히 숨겨두고 간혹 꺼내보는 무언가를 잃어버린듯한 느낌에 마음 한구석이 허전하다. 나에게 이 구름다리는 어쩌다 한번씩 건널때마다 아련한 옛추억을 떠올려주는 고마운 장치 중의 하나였다. 그 추억은 철길로 인해 끊어진 길을 이어주는 '다리'에서 오는것이 아니라 수없이 지나간 사람들의 발길에 닳고 닳아 자갈이 도드라진 계단판과, 시대를 반영해 다양한 구호가 써 있던 녹슨 아치와, 기성품에는 결코 느낄 수 없는 사람의 손길이 담긴 허술한듯 정직한 철재난간 따위에서 온.. 2010. 1. 19.
이천년 전 길이 이십년 된 길에게 묻다 걷고 싶은 거리, 걷기 싫은 거리 ④ 발이 편해야 걷기가 즐겁다. 무심코 길을 걷다 무엇인가에 발이 걸려 넘어질뻔 한 경험. 누구나 한 두번씩은 겪었을 것이다. 이런 상황의 대부분은 예상치 못한 돌출된 턱이있거나 고르지 못한 바닥에 발이 삐끗하면서 발생한다. 하지만 크게 넘어져서 다치지 않는 이상 본인의 부주의를 탓하며 그냥 지나칠 것이고, 그 자리에서 계속해서 같은 일이 반복될 것이다. 혹시 넘어질까봐 발 밑을 신경써야 하고 이로 인해 걷기는 불편해진다. 현재 마산시내의 보도에 깔려있는 대부분의 블럭은 20년이 채 안됐다. 2천년도 더 된 로마의 아피아 가도(via appia)중 일부를 아직까지 불편없이 사용하고 있음을 볼 때, 반성과 진단이 반드시 필요하다. 이천삼백여년 전에 건설된 아피아 가도 로.. 2009. 12. 30.
걷고 싶은 거리, 걷기 싫은 거리 ③ 광고물로 뒤덮힌 도시 2009/11/13 - [도시 이야기] - 걷고 싶은 거리, 걷기 싫은 거리① 2009/11/18 - [도시 이야기] - 걷고 싶은 거리, 걷기 싫은 거리② 도시에 사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아침에 일어나 대문을 나서는 순간부터 수많은 광고물과 마주하게 된다. 아파트에 사는 사람은 엘리베이터안의 거울과 출입구 게시판의 협찬광고를, 주택에 사는 사람들은 동네 슈퍼나 철물점의 간판이나 도로를 가로지른 각종 현수막과 본인 의지와 상관 없이 만나게 된다. 하루 일과 중 밖에서 보내는 대부분의 시간동안 각종 광고물을 만나거나 스쳐 지나가고, 퇴근해서 집 대문에 붙은 족발집 전단지를 떼기까지 그야말로 광고물의 홍수속에 살고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주로 개인의 영업을 위한 대부분의 광고물들이 허락도 없어 내눈을 혹사.. 2009. 12. 4.
모지를 바라보며 마산을 생각하다 낡고 오래된 도시공간을 되살리거나 이미 죽었던 옛 도시의 영광을 부활시키는 도시재생프로그램은 현대도시설계의 중요한 장르가 되었다. 잿빛 벽돌의 폐허였던 화력발전소를 한해 관광객 400만 명이 찾게 만든 런던의 ‘테이트모던미술관’. 오래된 철도역을 재활용하여 ‘오르세’라는 이름의 세계적인 미술관으로 변모시킨 파리. 설탕공장을 개조한 이탈리아 파르마의 ‘파가니니 음악당’. 모두 재생의 비전으로 되살린 현대도시 최고급 보석들이다. 기타큐슈의 모지항(門司港)도 그렇다. 재생에 성공하였다. 마산보다 10년 빠른 1889년 개항한 모지는 한 때 국제무역도시로서 수많은 사람들이 북적였던 도시다. 은행, 무역회사, 호텔, 대형점포 등 근대산업을 상징하는 대형건물들이 해안을 가득 메웠던 도시다. - 마산을 생각하며 모지.. 2009. 11. 20.
‘마산’은 언제 어떻게 생겨났을까? '마산' 지명의 기원에 대한 몇 가지 설이 있지만 아직 정립된 주장은 없다. 지금까지 제기된 주장들을 모았다. 일본인 추방사랑(諏方史郞)은 1926년에 간행한『마산항지』에서 구전으로 내려오던 이야기라고 전제하며 ‘임진왜란(1592-1598년) 이후, 각 지역에 전염병이 창궐하여 창원 소재 오산진(현 산호동 용마고 부근)에도 매일 시체가 산을 이루어 50구, 30구 혹은 20구의 시체가 동시에 묻히는 등 참혹한 상황이 되었다. 살아남은 이 지역의 고로(古老)들이 서로 상의하여 유명한 풍수사에게 그 연유와 대책을 묻자 오산(午山)의 오(午)자에 문제가 많아 이런 일이 일어났으니 오(午)자 대신 같은 의미인 마(馬)자를 사용하라고 하여 오산(午山)을 마산(馬山)이라 개명하게 되고 이때부터 마산이란 지명이 생겼.. 2009. 11. 9.
술과 꽃의 도시 《유장근교수의「도시탐방대」에 참여해, 한 때 전국적으로 유명했던 마산의 술 공장과 벚꽃 휘날렸던 창원천을 둘러보니 일제기 ‘술과 꽃의 도시’로 명성이 높았던 ‘그 옛날 마산’이 생각나 이 글을 포스팅한다》 특정한 도시를 한두 가지 단어로 정확히 규정 할 수는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느 도시건 그 도시 특유의 자연조건과 문화조건을 이용해 한마디로 규정하기도 한다. 부산하면 항구, 진해하면 벚꽃, 춘천하면 호수 등과 같은 의미다. 이런 관점에서 일제강점기였던 1930년대 경의 마산은 ‘술과 꽃의 도시’였다. - 술의 도시 마산 - 개항 직후인 1904년 최초로 아즈마(東)양조장이 설립된 이후 꾸준히 성장했던 마산의 양조산업은 1928년에 부산을 제치고 이윽고 국내 지역별 주조생산량에서 1위를 차지하였다... 2009. 11. 2.
‘현대아이파크’의 추억. 마산 앞바다 신포동 매립지에 현대아이파크 고층아파트가 우뚝 섰다. 짓기 전에는 몰랐지만 다 올라가고 난 지금, 많은 시민들이 혀를 찬다. ‘도시를 막았다’ ‘추산공원에서 돝섬이 보이지 않는다’ 말들이 많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 돌이킬 수도 옮길 수도 없다. 도시와 건축은 그런 것이다. 비록 늦었지만 저 아파트가 지어질 당시를 기억해 보자. 오래된 일이 아니라서 기억이 생생하다. 시민들의 반대서명, 토론장에서의 날선 소리, TV공개토론 등 많은 분들이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이미 끝난 일인데 왜 다시 짚어봐야 하는가? 두 번 다시 이런 식의 행정을 않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기왕 지어진 건물, 옮길 수도 없으니 반면교사로라도 삼기 위해서이다. 현대아이파크 고층 아파트는 마산시가 이 아파트가 들어서면 도시가 .. 2009. 9. 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