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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 3. 9. 00:00

창원 진전 출신 이교재의 독립운동과 상해 임시정부-12

본 회까지 총 12회에 걸쳐 독립운동가 죽헌 이교재 선생(위 사진)의 생애사를 연구한 유장근 경남대 역사학과 명예교수(아래 사진)의 논문을 포스팅하였다. 이 논문은 한국민족운동사학회 학술지 「한국민족운동사연구 Vol.99 No.- [2019]」에 게재되었다.

독립운동사에 남긴 이교재 선생의 발자취에 비해 아쉽게도 본격 연구는 지금까지 없었다. 그런 점에서 유장근 교수의 이번 연구는 가치가 크다. (논문의 각주는 본문에서 푸른색으로 표기하였다.)

 

Ⅴ.맺음말

마지막으로 남은 문제 두어 가지를 언급하면서 마무리를 하고자 한다.

한 가지는 이교재(우측 사진)의 사망 상황과 관련된 것이다. 현재까지는 옥사하였다는 이야기가 많이 전승되고 있다.

예컨대 “부산형무소에서 2년 언도를 받고 복역중 1차 피검 당시의 전신타박과 고문의 여독으로 49세의 일기로 옥중에서 정돈”이라는 1954년 4월의 이교재댁 방문 기사가 그렇다.(H생, 「삼진기행, 이교재선생 묘지전배기(3)」, 마산일보, 1954년 4월 16일자)

이보다 7년 뒤에 동일한 신문사에서 작성한 이교재의 추도식 관련 기사에는 “진주형무소에서 옥사하였다”는 추도문을 전하기도 하였다.(「죽헌 이교재 열사, 32주기 추도회, 4월 17일」, 마산일보, 1961년 4월 1일자)

이보다 10여 년 뒤에도 변지섭은 “1931년 사명을 띠고 입국, 진주의 허만정, 달성의 문대효, 창녕의 성낙문 등 부호가를 역방하면서 군자금을 모집하다가 事露하여 마산경찰서에 피검, 부산형무소에서 복역 중 고문의 여독으로 옥중에서 영면”하였다고 기술하였다.(변지섭, 경남독립운동소사, 178쪽. 그러나 문대효, 성낙문 등 부호가를 역방하면서 군자금을 모집하다가 피검되었다는 기술은 사실과 맞지 않는다. 각종 문건이 세상에 드러난 이후의 사실을 과거에 소급하였기 때문이다. 이교재는 문대효나 성낙문을 방문하지 못하였다)

이 기술은 사실에서 오류를 범하고 있는데, 이교재는 위의 사람들을 만나지 못한 채 사망하였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설들을 해소하기 위해서는 그의 사망 직후에 나온 신문 보도를 보는 것이 좋을 것이다.

이교재의 사망 직후 동아일보는 「이교재씨 영면」이라는 제목 아래 “신유년 통영 사건으로 6년간의 철창생활을 겪고 나온 후 이래 10수년간을 해내외로 다니며 많은 활동을 하던 斗山 이교재씨는 풍상에 받은 악질로서 수년 동안 신음하던 바 불행히 지난 12일에 씨의 고향인 창원군 진전면 오서리 (578번지) 자택에서 47세를 일기로 영영 이 세상을 이별하였다 한다.

유족으로는 슬하에 일점 혈육이 없고, 다만 80노모와 미망인 홍씨가 있을 뿐이라 한다”고 그의 부음을 전하였다.(「이교재씨 영면, 신유년통영사건으로 옥고 후 신음 중」, 동아일보, 1933년 3월 1일자)

“풍상에 받은 악질로서 수년 동안 신음하던 바.. 자택에서 세상을 이별”이라고 한 대목에서 우리는 그가 수년간 병으로 신음하였고, 마침내 악질로 인해 자택에서 사망하였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다만 ‘신유년 통영사건’이라거나 ‘6년간의 철창생활’은 잘못된 설명이다.

통영사건은 신유년(1921)이 아니라 1923년(임술)에 있었으며 감옥생활 역시 4년이었기 때문이다.

부산교도소라든가 옥사에 관한 이야기는 나오지 않는다. 또한 가족으로는 부인과 노모 외에 8살 된 딸이 있었으나, 이 역시 빠트렸다.

따라서 이 신문기사에는 세 가지 정도의 오류가 있지만 죽음과 직접 관련되는 오류는 아니다.

이교재의 사망과 관련된 최초이자 당시의 기사라는 점에서 신뢰할 만하다고 생각된다.

와병 중에 사망하였다는 사실은 김구의 백범일지에서도 확인된다.

그가 해방 이후 삼진의 이교재 묘소를 참배하고 유족들을 만난 뒤의 글에 따르면, “과거 상해 체류시 본국으로 파견하여 운동하다가 옥중 고문을 받고 결국 그 여독으로 세상을 떠난 이교재 지사의 유가족을 방문, 위로” 하였다는 것이다.(김구/도진순 주해, 백범일지, 돌베개, 417쪽)

와병의 원인을 각각 악질과 고문의 여독으로 약간 달리 보았지만, 악질 역시 고문의 후유증이었다고 볼 수 있기 때문에 두 종류의 차이를 말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

따라서 부산교도소 수감되었다거나 옥사하였다는 이야기는 결정적인 자료가 나오지 않는 한 믿기 어렵다.

진전면에 소장된 범죄인명부에도 이 사실이 기재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지금으로서는 와병 중 자택에서 사망했다고 보는 것이 더 타당하다.

또한 그의 사망 뒤 집이 경매에 넘어갔을 정도로 경제 사정은 극히 어려웠다. 당시의 건물등기부에 따르면,(창원지방법원 마산지원 등기계, 건물등기부, 고유번호 1901-1912-162796. 2017년 10월 24일 발행) 이교재의 집은 그의 사망 직후인 1933년 3월 20일에 馬山府 萬町(오늘날의 동성동, 필자)에 사는 川崎泰次(가와사키는 함안군의 일본인 토지소유 중 11,197평으로 전체 25,305평 중 약 44%를 차지한 지주였다-이정은, 「경남 함안군 3.1독립운동」, 122~123쪽)에게 4백엔에 저당 잡혔으나 빚을 갚지 못해 경매에 들어가게 되었다.

그러나 통영에 사는 朴喜鎣(박희형은 통영에 있는 하동집 박진영의 장손이고 통영군자금사건에 연루되었던 박성숙의 조카이다. 통영사연구회 회장 박형균의 증언에 따른다. 박형균은 박희영의 아들이다-2019년 4월 1일 인터뷰)이 이를 갚으면서 경매가 취하되었고, 최종적으로 그 집은 이교재의 모친인 金受室에게 유산으로 상속되었다.(김수실은 이교재의 모친이었다. 이교재의 손부인 조혜옥의 증언에 따른다-2019년 3월 27일 인터뷰)

이러한 어려움이 그의 유족으로 하여금 동대 마을을 떠나 도산 마을로 이주하게 된 요인이었을 것이다.

도산 마을을 방문한 김형윤은 ‘한두 섬의 저축이 있을 리 없는’ ‘불행한 혁명가’로 묘사하였다.(H생, 「삼진기행, 이교재선생 묘지전배기(2)」, 마산일보 1954년 4월 15일자)

많은 역경에도 불구하고 이교재의 독립운동은 몇 가지 점에서 특별한 의미를 찾을 수 있다.

첫 번째 의미는 초기의 독립운동에서 마지막 단계까지 초지일관 해왔다는 사실과 더불어 시간이 흐를수록 활동영역의 확대와 심화가 두드러졌다는 점을 들 수 있다.

1910년대 직후의 초기 단계에서 이교재는 지역의 독립운동가들과 함께 활동하다가 삼진 지역의 3.1운동에 참가하는 것을 넘어서 진주지역으로까지 활동영역을 넓혔다. 량이나 형명으로 본다면 단순 참가가 아닌 주도자의 역할이었다.

두 번째 단계는 상해 망명 직후에 전개된 것으로, 주요 임무는 국내에 밀입국하여 군자금을 모으는데 진력한 일이었다.

통영에서 항일적 지사와 인척을 통해 군자금을 모으는 임무는 비록 실패하였지만, 그간 이 지역에서 구축한 그의 조직 능력과 군자금 모금에 대한 그의 책임감을 잘 보여주었다고 생각된다.

실제로 이 시기의 임정은 재정적으로 큰 어려움에 빠져있었기 때문에 이교재와 같이 헌신적으로 일할 사람이 필요하였다.

세 번째 단계는 임정이 1931년 9월에 시작된 중국 동북침략전쟁(만주사변)을 반침략전쟁의 중요한 기회로 삼고 이봉창·윤봉길 의사들의 거사를 통해 광복을 도모하던 때에 국내에 파견되어 그에 호응하는 조직을 갖추면서 준비하던 때였다고 할 수 있다.

이교재가 1931년 11월 말 이후 입국시 휴대하고 들어온 9개의 문건은 임정의 광복계획과 그에 따른 이교재의 역할을 충분히 인식할 수 있는 증거들이라고 할 수 있다.

휴대한 문서에 따르면 창녕·밀양·진주·달성 등 경상남북도 지역에 임정의 후원망이 있었고, 이교재는 이 네트워크를 구축하고 활용하는데 직접적으로 관여하였다고 볼 수 있다.

임정 설립 직후 구축한 연통제나 교통국이 일제의 단속에 의해 제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였다고 말한다.

하지만 이교재는 특파원으로서 이 과업을 수행하였으니, 임정의 국내연락망은 1930년대에도 여전히 살아있었음을 보여준다고 하겠다.

두 번째의 의미는 이교재가 그의 본거지이자 초기 활동무대였던 경남과 상해의 임정이라는 두 지역을 연계하면서 임정이 추구하는 조국광복이라는 광대한 목표를 지역이라는 맥락 속에서 실천했던 점이라고 할 수 있다.

세 번째 의미는 임정에서 부여한 군자금 모집에 많은 힘을 기울였고, 독립운동의 방법론과 조직화에 큰 공을 세운 독립운동가였다는 점이다.

해방 뒤에 김구가 이교재의 묘소에 와서 남긴 말은, 단순한 상찬을 넘어서 그의 업적을 정확하게 평가한 것이었고, 임정문서를 휴대하고 입국시킨 이유도 여기에 있다고 생각한다.<<<

 

투고일 : 4월 22일 심사일 : 5월 17일 게재확정일 : 6월 3일

주제어 : 이교재, 창원 진전면 오서리, 경행재, 3.1독립운동, 상해 임시정부, 통영군

자금모금사건, 이교재임정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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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 12. 23. 00:00

창원 진전 출신 이교재의 독립운동과 상해 임시정부 - 1

앞서 9회에 걸쳐 1954년 김형윤 선생이 마산일보에 기고한 '이교재 선생 생가 기행문' 「삼진기행」을 포스팅했다.

오늘부터는 독립운동가 죽헌 이교재 선생(위 사진)의 생애사를 연구한 유장근 경남대 역사학과 명예교수(아래 사진)의 논문을 11회로 나누어 포스팅한다. 이 논문은 한국민족운동사학회 학술지 「한국민족운동사연구 Vol.99 No.- [2019]」에 게재되었다. 

독립운동사에 남긴 이교재 선생의 발자취에 비해 아쉽게도 본격 연구는 지금까지 없었다. 그런 점에서 유장근 교수의 이번 연구는 가치가 크다.

(논문의 각주는 본문에서 푸른색으로 표기하였다.)

 

목 차

Ⅰ. 머리말

Ⅱ. 성장 환경 및 3.1운동 때의 독립활동

Ⅲ. 상해 임시정부로의 망명과 통영군자금 모금사건

Ⅳ. 임시정부 발행 9개 문건의 국내 반입과 그 의미

Ⅴ. 맺음말

 

Ⅰ. 머리말

창원군 진전면 오서리(현 창원시 마산합포구 진전면 오서리 / 창원군 진전면이라는 행정구역명칭은 1914년의 행정구역 개편 이후의 것이다. 조선시대의 지명은 경상도 진해현 서면 대곡리이다. 이 글에서는 이교재가 주로 활동하였던 1910년대 이후의 지명인 창원군 진전면 오서리를 사용한다.) 출신인 이교재는 창원시에서 운영하는 애국지사 사당에서 이윤재, 주기철과 함께 독립장을 받은 3인 중 한 사람으로, 봉안된 위패에서도 최상위에 올라 있는 항일독립지사이다.

그는 청년시절부터 3.1독립운동에 적극적으로 참가하였고, 그 중에서도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부여한 군자금 모집 임무나 독립운동가들의 조직에도 헌신적으로 일을 하였다. 이로 인해 여러 차례의 감옥 생활을 겪었고 결국 신병과 생활고에 시달리다 47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하였다.

이러한 활동에도 불구하고 그에 대한 연구는 현재까지 거의 없는 실정이다. 독립운동가의 후손인 변지섭이 경남독립운동소사(변지섭, 경남독립운동소사, 삼협인쇄, 1966, 176~178쪽)에서 그를 소개한 이후 이를 기초로 쓴 몇 편의 짧은 글과 신문기사들이 있을 뿐이다.

이러한 자료조차도 단편적이거나 종종 오류(변지섭의 경남독립운동소사는 많은 이들이 활용을 하지만, 더러 구체적인 사실에서 착오를 보인다고 비판을 받았다. 예컨대 합천군 초계면 3.1운동 서술에서 4월 5,6일경 창원의 변상태가 초계를 심방하면서 4월 20일에 시위가 일어났다고 하지만, 초계 시위는 3월 21일에 일어난 까닭에 전후 관계가 맞지 않는다는 지적이 있었다. 가회면의 주도자도 정확하지 않다 / 이정은, 「경남 합천의 3.1운동」, 한국독립운동사연구 3, 1989, 234~235·238쪽 참조)가 발견되고 있기 때문에 이교재의 독립운동을 정확하게 파악하기 어려운 점이 있다.

보훈처의 독립유공자 공적조서에도 그의 공적을 1) 3.1운동 때 경남북 일대에 선전문배포, 피체되어 3년 복역(진주형무소),  2)상해로 망명, 임정의 밀령으로 입국 피체되어 5년간 복역(대구형무소), 3) 다시 상해로 망명 도중 신의주에서 피체 2년간 복역(서대문형무소), 4) 상해로 망명하였다가 재입국 사명 수행 중 피체, 1933년 2월 부산형무소에서 복역 중 옥사 등으로 열거하였다. (공훈전자사료관 독립유공자 공적조서, 검색어 ‘이교재’  http:/e-gonghun.mpva.go.kr/user/ContribuReportList.do?goTocode=200014)

이 공적조서 또한 사실과 부합되지 않는 부분이 적지 않기 때문에 신뢰하기 어렵다.

이 글에서는 위와 같은 점들을 고려하여 우선 당대의 기록을 면밀히 검토하면서 그의 독립운동을 몇 단계로 나누어 분석해 보고자 한다.

첫째로 그의 성장터였던 진전의 지리적· 인문적 환경과 성장과정, 그리고 3.1운동에 참여하였으나 체포되어 수감되는 상황을 살펴볼 것이다.

두 번째로는 상해 망명 이후 1923년 9월에 있었던 통영군자금 모금사건의 실체와 관련 인물들을 통해 그의 활동 양상을 검토하고자 한다.

마지막으로 1931년 말 이후에 국내에 입국할 때 휴대하고 온 9개의 상해 임정 문건, 곧 ‘이교재임정문서’를 통해 그의 임무가 무엇이었고 이 문서의 내용과 의미를 살펴볼 것이다.

이러한 몇 단계의 활동들을 검토하면 그의 독립운동 전반에 대한 이해가 어느 정도 가능하리라고 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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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 10. 20. 00:00

마산창원 역사 읽기 (22) - 백범도 존경했던 독립운동가「이교재」

3. 지역의 인물을 찾아서

3-5 백범도 존경했던 독립운동가 「이교재」

 

1982년 3월 1일, 언론은 이교재 선생이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경상남북도 상주대표였음을 증명하는 위임장이 발견되었다고 보도하였다.

그 동안 남몰래 보관해오던 선생의 양자인 이정순씨가 공개한 위임장은 가로 29cm 세로 20cm 크기의 명주천에 붓글씨로 다음과 같이 적혀 있었다.

이교재를 경상남북도 상주대표로 다음 사항을 위임한다. 나, 애국지사 연락에 관한 일, 하나, 독립운동에 대한 비밀적 지방조직을 행할 일, 하나, 독립자금을 모금하는 일.

(李敎載 右人을 慶尙南北 常駐代表로 右記事項을 委任함 一. 有志者 聯絡에 關한 일, 一. 獨立運動에 對한 秘密的 地方組織을 行할 일, 一. 政府에 對한 特殊獻誠을 勸行케 할 일, 大韓民國 十三年十一月二十日 大韓民國 臨時政府 內務長 趙琬九, 財務長 金九)

 

 

대한민국 임시정부(상해임시정부)의 내무장 조완구와 재무장 김구의 직인이 나란히 찍혀 있는 위임장이 훼손되지 않고 그대로 발견되기는 처음이었다.

당시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국내의 도(道)마다 대표를 임명하여 특별 임무를 부여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대부분의 상주대표가 일본경찰에 의해 쫓겨다녔고 가족들도 보관하기보다는 없애버렸기 때문에 그동안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위임장이 한 번도 발견되지 않았다고 한다.

 

-마산을 찾은 백범 김구-

1946917일 창원군(현 마산시) 진전면 도산리에는 당시에는 보기 드물 정도로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그들은 조용히 귀를 기울여 우리 민족의 지도자인 항일독립운동가 백범 김구 선생의 말을 경청하고 있었다.

죽헌 이교재 선생은 독립운동을 같이 하던 나의 동지였습니다. 이교재 선생이 살아 계셨더라면 지금 얼싸안고 반가이 맞아 주었을 텐데, 나라를 위해 먼저 순국하셨으니 참으로 가슴이 아픕니다. 진작 성묘도 하고 참배도 하고자 하였으나 마음대로 되지 않아 이제야 찾아 왔습니다. 

 

해방 후 어수선한 정국 상황에도 불구하고 백범 김구 선생은 항일독립지사들의 유족을 위로 방문하기 위해 삼남지방(경남·전남·충남)으로 향하였다.

백범 김구 선생이 다른 곳보다 제일 먼저 찾은 사람이 바로 이교재 선생의 유족이었다.

이는 이교재 선생에 대한 김구 선생의 각별한 애정을 알 수 있는 유명한 역사적 일화의 하나로 현재까지 전해지고 있다.

죽헌(竹軒) 이교재(李敎載) 선생은 188779경남 마산시 진전면 오서리에서 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릴 때부터 의협심이 남달라 불의를 보면 참지 못했다고 한다.

그가 항일독립운동에 나선 것은 한일합방이 되던 24세때였다. 그때부터 그는 고향에서 뜻이 맞는 동지를 모아 구국격문을 비밀리에 배포하는 등 독립운동에 앞장섰다.

이렇게 몰래 항일운동을 하던 중 19193·1독립만세운동이 일어나자 동지와 함께 독립선언서와 격문을 돌리다가 진주에서 일본경찰에게 붙잡히고 말았다.

결국 이교재 선생은 대구법원에서 불온문서를 배포한 혐의로 26개월형을 언도 받고 대구형무소에서 처음으로 옥고를 겪게되었다.

 

-상해 임시정부에 가담하다-

1921년 만기 출옥한 이교재 선생은 더 큰 뜻을 품고 중국 상해로 건너갔다.

그곳에서 그는 당연히 상해임시정부에 가담하였고 곧이어 군자금 모금과 국내 연락책으로 다시 국내로 잠입하여 비밀활동을 벌였다.

그러던 중 통영군 김종원(金宗元) 집안에서 군자금을 모금하다가 1923921일 통영경찰서에 체포되었다. 이 사건으로 이교재 선생은 3년 간 마산교도소에 갇혀 두 번째 옥살이를 하였다.

출옥 후 그는 국내의 상황을 정리한 보고서를 가지고 상해로 되돌아가려다가 신의주 국경에서 다시 붙잡히고 말았다. 선생은 서울 서대문형무소에서 2년 간 세 번째 옥고를 겪게 되었다.

세 번째의 옥고를 치른 후 이교재 선생은 상해임시정부로 복귀했다. 그러나 이교재 선생은 잠시 쉴 틈도 없이 얼마지 않아 다시 국내에 잠입하여 서울에서 칼톱회를 조직하였다고 한다.

칼톱회는 고학생들의 조직으로 이교재 선생은 그들에게 독립사상을 심어 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칼톱회원들은 일본경찰의 눈을 피해 독립지사들간의 연락을 맡는 등 여러 가지 지원 활동을 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칼톱회의 구체적인 조직 형태가 현재에 전해지지 않아 선생의 활동을 정리하는데 많은 아쉬움으로 남아 있다.

1931년, 이교재 선생은 국내상황을 보고하기 위해 다시 상해임시정부로 되돌아갔다. 그리고 같은 해 1120일, 당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재무장 백범 김구와 내무장 조완구로부터 임시정부의 경상남북도 상주대표 직위를 위임받게 된다.

이는 자신을 돌보지 않는 선생의 헌신적인 항일투쟁이 상해임시정부로부터 큰 신뢰를 얻게 되었음을 뜻한다.

이교재 선생은 임시정부의 경상남북도 상주대표로서 또 다시 국내에 잠입하였다. 그가 대한민국 임시정부로 부터 위임받은 임무는 모두 세 가지였다.

먼저, 경상남북도에 퍼져 있는 애국지사와 상해임시정부간에 연락책 역할을 하는 것이고 다음은, 각 지방에 독립운동조직을 결성하는 것이었다. 마지막 임무는 독립자금을 모금하는 일이었다. 어느 것 하나 결코 쉬운 일은 아니었다.

그러나 선생은 자신에게 맡겨진 임무를 완수하기 위해 진주로, 대구로, 또 창녕으로 자기 몸을 아끼지 않고 돌아다녔다. 그러다 마산에서 다시 경찰에게 체포돼 6년형을 선고받고 부산형무소에 투옥되었다.

하지만 경찰에게 체포된 후 당했던 혹독한 고문의 후유증으로 목숨이 위태로워지자 부산교도소는 이교재 선생을 강제로 출소시켰다.

강제로 풀려난 지 10여일 만인 1933214일에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47세의 젊은 나이로 조국의 해방을 보지도 못하고 순절하고 말았던 것이다.

선생이 죽은 이후에도 일제는 선생의 형기가 남았다는 이유로 그의 묘소에 철책을 설치하기도 했다.

 

-나라와 겨레의 임이로다-

이교재 선생의 독립활동이 얼마나 치열했는가는 김구 선생의 표현에서 잘 드러난다. 

이교재 선생은 학자고 선비입니다. 인격이 매우 고매하시고 지혜가 뛰어나시며 정의감과 애국심이 투철하신 분입니다. 상해임시정부에서 여러 번 만났는데 독립운동의 방법과 독립운동자금 모금에 관해 능력이 탁월하였습니다. 선생은 국내주재 조직 및 독립운동자금 모금의 경상남북도 상주대표였습니다. 그의 임무는 장관 몇 명이 하는 일보다 더 중요하였습니다. 독립운동자금을 보내오고 연락이 자주 오다가 그만 연락이 끊겼습니다. 미처 조국의 광복을 못 보시고 순국하였으니 하느님이 원망스럽습니다. 

 

해방 당시 선생의 묘소는 애국지사임에도 불구하고 매우 초라했다. 그러나 마산시 진전면 임곡리에 위치하고 있는 현재 묘소는 옛날의 묘소에 비하면 잘 정돈되어 있다.

그렇게 선생의 명예가 회복되는데는 많은 사람들의 노력이 있었다.

1954년 마산일보(현 경남신문)의 사장이었던 김형윤(작고)이 이교재 선생의 뜻을 기리는 추모회를 만들어 지역 유지와 학생들의 성금을 모금하여 현 위치로 묘소를 옮긴 것이다.

그 당시에 새로 세운 이교재 선생의 묘비에는 그의 의로운 투쟁을 기리는 글이 다음과 같이 적혀 있다.

상해가 세 번이라면 감옥은 네 번이요 기 꺾일줄있으랴만 몸은 이미 마쳤구나 아, 임이로다 나라와 겨레의 임이로다 

 

 

현재 이교재 선생의 묘소에 이르는 길은 마산시에 의해서 죽헌로(竹軒路)로 명명되어 그의 항일구국투쟁 정신을 기리고 있다.

그리고 이교재 선생의 항일투쟁은 196331일 대한민국 건국훈장 독립장(제208호)을 추서 받아 국가로 부터 그의 공적을 공식 인정받게 되었다.<<<

허성진 / 당시 마산문화방송 P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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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참교육 2014.10.20 09:07 신고 address edit & del reply

    요즈임 사람들은 오늘의 대한민국이 저절로 된것처럼 알고 있습니다.

    • 허정도 2014.10.23 22:59 address edit & del

      글쎄 말입니다

  2. 2014.11.10 22:44 address edit & del reply

    비밀댓글입니다

2011. 12. 12. 00:00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88) - 강점제2시기

<회사령 폐지와 마산도시변화>

1920년 4월 ‘회사령’이 폐지되었습니다.

‘회사령’은 1910년 12월 30일 조선총독부가 공포해 3일 만인 1911년 1월 1일부터 시행한 ‘기업통제령’입니다.

분문 및 부칙 20개조로 되어 있는 회사령의 주요 내용은 한국에서의 회사설립 및 한국 외에 설립된 회사가 한국 내에 지점을 설치코자 할 때는 조선총독부의 허가를 받아야한다는 것이었습니다.

‘회사령’의 표면상 이유는 한국의 산업을 위한다는 것이었으나 그 본질은 식민지인 한국에 일본 국내공업과 경합되는 근대공업을 억제하기 위함이었습니다.
한국의 기업 성장을 억제하고 한국을 일본자본주의를 위한 원료공급지로, 상품판매시장으로 육성한다는 의도로 만든 규정이었습니다.

회사령은 1910년대 내내 한국 내에서 한국 사람들이 마음대로 기업을 할 수 없게 통제함으로써 한국의 산업 발전에 큰 저해요소가 되었습니다.

이 법령 때문에 1910년에서 1920년 사이 10년 동안은 공업발전의 지표로 삼을 수 있는 도시인구증가율이 연평균 1.6%로 총인구 증가율 2.6%보다 1% 정도 낮았습니다.

이와 같은 ‘회사령’이 폐지되자 일본 자본가들이 대거 한국으로 진출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변화는 마산에도 영향을 끼쳐 일본인들이 기업을 앞세워 본격적으로 원마산에 진출하기 시작하였습니다.
뿐만아니라 회사 설립을 마음에 두고 있었지만 뜻을 이루지 못했던 마산의 한국 자본가들도 회사를 설립하였습니다.

1920년대 초기 마산의 회사 설립 상황을 보면 주식회사마산정미소(1919년 10월 15일 설립, 자본금 10만원)․남선양조주식회사(1919년 11월 14일 설립, 자본금 10만원)․마산창고주식회사(1920년 5월 2일 설립, 자본금 10만원)․원동무역주식회사(1920년 5월 16일 설립, 자본금 50만원)․마산운수합자회사(1922년 9월 1일 설립, 자본금 7천원) 등입니다.

이 중 대표적인 한국인 무역회사가 원동무역주식회사입니다.
아래 사진은 1928년 신축한 남성동 원동무역 사옥의 당시 모습과 현재의 모습, 그리고 원동무역 터 앞에 세워 놓은 표지석입니다.
 


이 회사는 마산 경제계에 진출한 최초의 한국인 주식회사였으며 회사의 대표는 지역 유지 옥기환이었고, 업무는 육산부․해산부․위탁부․부대사업 등이었습니다.

옥기환 선생은 마산 지역에서 추앙받던 지도자로 일찍이 노동야학과 민족교육에도 관심이 높았으며 원동무역의 수익금으로 상해임시정부를 지원하기도 했습니다.

해방 후 미군정기에 초대 마산부윤(시장)을 지낸 분입니다.



1910년대에는 한국인 회사가 단 하나도 없었고 1923년 이후로도 회사 설립은 드물었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이때의 회사설립에 대한 지역사회의 분위기를 짐작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회사령 폐지에 따른 마산지역의 산업화는 도시변화에도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1920년대 중반 쯤 부터 원마산(마산포)에 대대적인 도로개설공사가 일어났으며, 필요한 산업용지를 확보하기 위해 마산 앞바다가 매립으로 메워졌습니다.
그리고 신마산과 원마산으로 나누어져있던 두 도시의 중간지역(중앙마산, 도립의료원 일대)이 개발되기 시작합니다.<<<


2011/11/21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85) - 강점제2시기
2011/11/28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쳔사 (86) - 강점제2시기
2011/12/05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87) - 강점제2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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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장복산 2011.12.12 16:55 address edit & del reply

    1928년이면 83년 전에 세원진 건물이군요. 표지석을 세워 둔 것으로 보아 역사적 의미가 매우 큰 건물인데...점점 원형을 일어 가고 있군요. 이런 의미 있는 건믈을 의미 있는 용도로 사용할 수 있는 방안은 없을지 궁금합니다. 예를 들면 개인 노래방이나 영업장 말고 상공회의소 건물 같은 공공성이 있는 건물로 사용하면 보존이 가능할 것 같습니다.

    • 허정도 2011.12.12 23:24 address edit & del

      요즈음 진해 일로 너무 신경을 많이 쓰는 것 같습니다. 제가 뭘 도와 드릴까 생각하지만 해드릴 것이 없습니다. 미안합니다, 선생님.

2009. 11. 25. 00:32

250년 된 원마산(마산포) 골목길



「유장근 교수의 도시탐방대」 세 번째 참석 후의 글이다.
원마산(마산포)에 자연취락이 형성되면서 생긴 ‘길’에 대한 이야기다.

1760년, 마산창(馬山倉)이 설치된 후 마산이 도시 형태를 띠면서 도시공간의 성격도 형성되었다.
요즈음 말로 하자면 마산창 주변은 공공업무지구로, 현재 황금당 옆 골목길 주변은 상업지역으로, 동성동과 오동동 즉 코아양과점 뒤편 일대는 배후 주거지로 사용되었다.

‘·······사람이 다니면서 길이 생겼다’는 루쉰의 말처럼,
마산포에도 사람이 모이고 사람이 다니면서 ‘길’이 생겼다.
자연취락 특유의 좁고 꾸불꾸불한 ‘길’이었다.

<옛 마산 사람들의 발자취가 남아있는 골목길>

지금도 생생히 남아있는 원마산의 좁은 골목길들은 멀게는 250년 가깝게는 200년이 족히 된 마산사람들의 ‘길’이다.
조선시대를 살았던 이곳 사람들이, 때로는 조창 쪽으로 때로는 해변의 선창 쪽으로 아침저녁 부지런히 다녔던 바로 그 길이다.
단지 길로서만이 아니라 마산 선인들의 숨결이 고스란히 배어있는 삶의 흔적이기도 하다.

남성동 성당 옆 좁은 내리막 길도,
마산사람 누구나 친숙한 전설적인 떡볶이가게 ‘복희집’ 앞길도,
삼겹살로 유명한 삼도식당 골목도,
홍화집과 골목식당 길도, 아구찜 집들이 옹기종기 모여 복잡하게 얽혀있는 동성동 좁은 골목길도,
옛 마산사람들이 걸었던 바로 그 ‘길’이다.

‘아는 것만큼 보이고 보는 것만큼 느낀다’고 했는데,
이 좁고 보잘 것 없는 골목이 ‘조선시대 길’이라는 사실을 아는지 모르는지 오늘도 사람들은 무심코 길을 지난다.

도시탐방대원들과 골목길 내력을 이야기하고 복원도와 비교확인도 하면서 이 도시의 지난 시간을 맛보며 함께 걸었다.
간간이 들리는 옅은 탄성과 함께 탐방의 즐거움이 거리를 메웠다.



         <위 부터 남성동성당내려가는길, 삼도식당 길, 복희집, 홍화집 길>


<마산사람들의 자랑이었던 「원동무역」>

탐방길 시작한 후, 마산창(馬山倉), 매립 전 해안선, 어시장의 진동골목, 대풍골목, 서굴강, 동굴강을 지나 도착한 곳은 원동무역주식회사.

원동무역은 1919년 9월 독립지사 옥기환 선생과 명도석 선생이 마산 최초로 설립한 회사다.
현재 남성동 91-1번지에 남아 있는 사옥은1927년 8월에 착공해 1928년 4월에 준공한 철근콘크리트 2층 현대식 건물이다.
영욕의 세월을 지내고 외피만 바뀐 채 오늘도 말 없이 거리를 지키고 있었다.
설계한 사람이 누구이지 시공한 이는 또 누구인지 알길 조차 없지만 세련된 근대미의 격조 높은 이 건물은 일제기 마산포 사람들의 자부심을 한껏 채워준 건물이었다.
이 회사에서 남긴 이익금의 일부가 백산 안희제 선생에게로, 상해임시정부로 건너갔다고 한다.

옥기환 선생은 해방 후 초대 마산부윤(마산시장)을 지냈고, 허당 명도석 선생은 건준에 참여하는 등 해방 후에도 많은 일을 했다. 봉암로에 가면 허당 선생의 추모비도 있다.
마산이 배출한 주요인물 중 친일이니 친독재니 궂은소리 때문에 기념사업에 시비가 끊이지 않는다. 하지만 이 두 분의 삶에는 흠결 있다는 소리를 듣지 못했다.
암흑기의 자랑스러운 마산 어른이시다.


          <표지석 / 원동무역의 본래 모습 / 현 상태, 3층부분은 뒤에 증축>


<원마산 복원도 제작>

10여 년 전, 도시연구를 하면서 원마산(마산포)의 도시형태를 복원했다.
1912년 조선총독부가 공포한 사정지적도(査定地籍圖)를 이용해 분할과 합병으로 변형된 지적도의 원형을 추적해 복원하는 작업이었다.

10년이 지났지만 지금도 기억이 생생하다.
지난했던 작업이 끝난 후 복원도를 들고 시내로 나갔다. 실제상황과 확인해보기 위해서였다. 현장 확인은 그 때가 처음이었다.
골목골목 다니며 현장과 도면을 비교하면서 두 번 놀랐다.
도면상 복원한 작업의 정확도에 스스로 놀랐고, 복원도에 나타난 그 복잡한 골목길들이 그때까지 대부분 원형대로 보존되어 있다는 사실에 놀랐다.

지난 토요일, 도시탐방대가 걸었던 길은 바로 그 때 확인되었던 길들이었다.
조그맣게 복사된 복원도와 창동 남성동의 골목길을 대조하면서 탐방대원들이 즐거워하는 모습에 나도 즐거웠다.

<1908년 조선통감부 철도관리국에서 발행한 '마산전도' / 오른쪽 단선으로 표시한 길들이 원마산 골목길이다>


<1916년 조선총독부 육지측량부에서 제작한 '마산, 1/10,000지도' / 새로난 신작로와 원래의 골목길들이 그려져 있다.>

<복원도 / 1910년 경의 것이지만 도시계획이 없었던 시기라 조선시대로 까지 추정가능하다>
    <원마산의 옛 길 / 노란 색이 복원도에서 확인된 길인데 대부분 지금까지 원형 그대로 남아 있다>


뒤늦게 합류한 ‘창동의 산 역사’ 이승기 선생님의 창동과 극장과 영화에 읽힌 이야기가 분위기를 한층 더 띄웠다.
듣는 이와 말하는 이 즐겁기는 매한가지, 지나간 마산이야기에 토요일 오후가 금세 지나갔다.





<도시에서 역사란?>

마음만 먹으면 현대기술로 어떤 도시라도 만들 수 있다.
넓은 도로를 뚫고 번쩍번쩍한 건물도 짓고 키 큰 나무도 얼마든지 심을 수 있다. 그러나 도시의 역사를 급조할 수는 없다.
때문에 역사의 흔적을 느낄 수 있는 곳이 남아있다면 우리는 그것을 소중하게 보존해야 하고, 다음 세대에 잘 넘겨주어야 한다.

웬만큼 여행을 해본 사람이라면 잘 알겠지만 여행이란 것이 대부분 도시의 역사를 체험하는 것이다. 그래서 외국의 어떤 도시에서는 심지어 그들의 부끄러운 과거인 조계지까지도 복원하여 관광자원으로 이용하고 있다.
이처럼 도시의 역사는 단지 옛 모습을 보여주는데 그치지 않고 그 도시의 소중한 문화자원, 관광자원으로 활용되는 것이다.
미국에서 서부 개척시대의 술집 따위들까지도 현재 사용하고 있는 집주인에게 국가재정까지 지원하면서 함부로 바꾸지 못하게 하는 까닭은 바로 이 때문이다.

마산 도시의 역사를 모두 복원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역사를 가진 도시에서 어떠한 역사적 흔적도 찾을 수 없고, 이를 위한 노력조차 하지 않는는 것은 심각한 도시적 비극이다.

창동과 동성동 일대에 남아 있는 골목길들은 자연취락을 원형을 그대로 느낄 수 있는 곳이며 마산의 도시역사를 가장 잘 설명해주는 곳이다. 다른 도시에서는 도저히 이런 길을 만날 수 없다.
혹자는 꾸부러지고 좁은 골목길이 수치스러운 전근대적 모습이라고 말할지 모른다.
그러나 그 길은, 오늘의 마산이 있기까지 마산사람들이 서로 부대끼며 살았던 발자국이며 고금 모든 마산 사람들의 호흡과 땀이 녹은 생생한 기록이다.
그 역사적 가치는 어디에도 비할 바가 아니다.

한때 번성했던 마산 오동동이 최근 들어 점차 쇠퇴해지고 있는데 이곳을 살릴 길이 이 오래된 골목길 속에 묻혀있을 수도 있다.

생각해 보자.
250년이라는 긴 시간의 멋과 맛을 느낄 수 있는 ‘골목길’이 남아있다면, 우리는 어디로 가서 하루저녁 친구와 즐길 것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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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옥가실 2009.11.25 09:46 address edit & del reply

    아침에 좋은 글 보고갑니다.
    특히 새로 작성한 원마산도로 지도가 좋습니다.
    이걸 들고 다시 옛길 탐사를 좀 해야겠군요^^

    • 허정도 2009.11.25 18:02 address edit & del

      반갑습니다.
      공부해야할 것도 많을텐데 시민들을 위해 봉사하신다고 고생이 많습니다.
      언제 날 잡아서 물메기탕이나 한 번 먹읍시다.

  2. 영영사랑 2009.12.01 00:20 address edit & del reply

    남성동,창동,복희집.. 떡볶이,오징어튀김.... 감동입니다. 혹시 아시는지요? 마산에는 골목이 많아 길을 잃었을때 어떻게 큰길로 나오는지? (하수구관따라 가다보면 큰길이 나왔어요 경험입니다) ?? 즐겁게 보고갑니다

    • 허정도 2009.12.01 10:40 address edit & del

      하수구관 따라가 아니라 하수구 두껑따라 아닌가요?
      내 눈에는 하수구 관이 안 보이던데......
      방문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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