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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기환8

김형윤의 <마산야화> - 107. 최초의 야학교 107. 최초의 야학교 1911년 창원군 외서면 고산포(高山浦, 구마산)에는 한국 최초로 야학교(남자)가 탄생하였다. 발기인과 간부들은 지금은 전부 타계한 분들이지만 명부에 나타난 인물은 설립자 유천(柳川), 구성전, 교장 남전(藍田) 옥기환, 교감 창산(蒼山) 이형재, 경리 소원(小園) 김철연, 외 허당(虛堂) 명도석, 일파(一波) 김용환, 나인한(호 망각) 등 그때에도 쟁쟁한 청년 선각자들이다. 장소는 현재 시가지 구역확장으로 통로가 되었지만 당시 도면을 보면 남성동 69번지 조그마한 창고를 수리하여 시작하였다. 여기 수학생 중에는 초기 보통학교와는 달리 변발한 총각, 상투 있는 기혼자들로서 생도 전부가 선창에서 어물상의 고용인 또는 삭발 아동 등 혼성부대들이었다. 연혁은 기록이 소멸된 관계로 초대 .. 2016. 8. 22.
마산·창원 역사 읽기 (21) - 최초의 마산시장 옥기환 3. 지역의 인물을 찾아서 3-4 최초의 마산시장 옥기환 “마산의 역사 속에서 전후를 막론하고 옥기환(玉麒煥 1875∼1953) 선생을 능가할 사람은 찾기 힘들다.” 이 말은 평생을 언론인으로 살며 마산의 역사연구에 몰두하였던 향토사학자 이학렬(李學烈) 선생의말이다. 옥기환은 마산에서 태어났다. 민족이 가장 고통스러웠던 암울한 시기, 제국주의가 지배하는 세계질서 속에 조선이 강제적으로 편입되고, 식민지 시기를 거쳐서 분단이 고착화되는 한국전쟁이 끝나는 시기를 살았다. 집안에 대해알려진 것은 별로 없지만, 4대째 마산에 정착하며 살았던지주집안이었으며, 어시장에서 객주(客主)로 활동했다고 전해진다. 그도 지주였으며, 사업가였다. 그는 마산지역 교육발전의 버팀목이었다. 한국 최초의 야학인 마산노동야학교를 설립.. 2014. 10. 13.
마산창원 역사 읽기 (20) - 창씨개명 거부한 민족자산가 명도석 3. 지역의 인물을 찾아서 3-3 창씨개명 거부한 민족자산가 명도석 마산 진동 신기리 죽전마을 야트막한 뒷산 양지바른 곳에 묘 2기가 있다. 허당 명도석은 그의 부인과 함께 나란히 누워있다. 그의 사위인 김춘수가 지은 묘비문이 있다. 선생께서 남기신 항일투쟁 발자취는 크고도 뚜렷합니다. 일본인이 장악하고 있던 마산어시장에서의 상권투쟁(商權鬪爭), 노동야학교에서의 후진교육(後進敎育), 기미독립만세항쟁(己未獨立萬歲抗爭)의 마산에서의 주도, 동아일보 창립주주로 민족계도사업(民族啓導事業)에 참여 및 만주 땅 안동(安東)에서의 거사모의사건(擧事謀議事件)으로 체포되어 평양에서 치르신 옥고(獄苦), 밀양 폭탄사건(爆彈事件) 거사자금 전담(專擔), 의열단(義烈團) 경남거점조직을 주재(主宰), 일본에의한 창씨개명(創氏改.. 2014. 10. 6.
마산·창원 역사 읽기 (14) - 일제하 치열했던 민족해방운동 2. 청동기시대에서 10·18까지 2-7 일제하 치열했던 민족해방운동 1876년 조선이 강제적으로 세계자본주의체제에 편입된 이후 마산지역도 다른 지역과 마찬가지로 일본인들과 친일 조선인들에 의해 잠식당하였다. 원래 마산은 개항 이후 러시아와 일본의 조차지 경쟁이 치열했던 까닭으로 개항 초기부터 외세에 의한 피해가 컸던 지역이었다. 특히 마산은 항구를 끼고 있었기 때문에 해상운송부문 및 어항과 관련한 상업부분을 잠식하기 위한 일본 상인들의 침략이 노골적으로 진행되어 마산은 일본인의 소굴로 변해 갔다. 1911년 일제는 마산항의 개항(開港)을 폐쇄하고 일본과의 단독무역만을 허락하였다. 그 결과 마산은 조선의 쌀을 비롯한 각종 물자를 일본으로 실어나르는 전초기지 역할을 하였고 동시에 일본의 소비재를 수입하는 .. 2014. 8. 25.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31) - 강점제3시기 1941년 간행된『약진마산의전모(躍進馬山の全貌)』와『마산개항백년사』에 게재된 내용에 의하면 1930년대 마산의 교육기관은 공립으로 마산공립중학교․마산공립상업학교․마산공립고등여학교가 있었습니다. 반면 사립으로는 창신․호신․의신학교․마산노동야학교 등이 있었으며 초등교육기관으로서 마산공립심상고등소학교․마산성호공립심상소학교․마산완월공립심상소학교가 있었습니다. 유아교육기관으로는 사립마산유치원과 사립대자유치원 등 몇 개의 시설이 있었으며 종교기관에서 사회교육차원에서 행한 교육시설도 있었습니다. 현 마산고등학교의 전신인 마산공립중학교는 1936년 개설하였으며 입학생의 대다수가 일본인이었습니다. 한국인 학생은 친일파 자제이거나 성적이 우수한 극소수의 학생만 입학할 수 있었습니다. 반면 마산상업고등학교를 거쳐 몇 년 전.. 2012. 10. 15.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88) - 강점제2시기 1920년 4월 ‘회사령’이 폐지되었습니다. ‘회사령’은 1910년 12월 30일 조선총독부가 공포해 3일 만인 1911년 1월 1일부터 시행한 ‘기업통제령’입니다. 분문 및 부칙 20개조로 되어 있는 회사령의 주요 내용은 한국에서의 회사설립 및 한국 외에 설립된 회사가 한국 내에 지점을 설치코자 할 때는 조선총독부의 허가를 받아야한다는 것이었습니다. ‘회사령’의 표면상 이유는 한국의 산업을 위한다는 것이었으나 그 본질은 식민지인 한국에 일본 국내공업과 경합되는 근대공업을 억제하기 위함이었습니다. 한국의 기업 성장을 억제하고 한국을 일본자본주의를 위한 원료공급지로, 상품판매시장으로 육성한다는 의도로 만든 규정이었습니다. 회사령은 1910년대 내내 한국 내에서 한국 사람들이 마음대로 기업을 할 수 없게 통.. 2011. 12. 12.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31) - 개항이후 마산 최초로 근대식 학교가 섰습니다. 창원군에 있던 소학교가 마산으로 이전하면서 개설한 공립소학교로, 현재의 성호초등학교입니다. 1901년 4월에 개교하였으며 한국인들이 다녔습니다. 마산공립소학교는 1904년에 지방 유지들의 성금 2,000여원으로 교사(校舍)를 지었고 1911년 마산공립보통학교로 교명이 바뀌었습니다. 아쉽게도 1904년에 지은 교사의 사진은 남아있지 않습니다. 아래 사진은 1927년에 벽돌조 2층으로 지은 교사입니다. 일본인을 위한 최초의 정식 교육기관은 마산심상소학교(현 월영초등학교)입니다. 1902년 11월 조계지 내 남쪽 끝 해안의 한옥을 한 채 빌려 일본불교 정토종 개교사(開敎師) 삼우전지문사(三隅田持門師)가 마산포일본인소학교를 세웠는데 1904년 6월 마산심상소학교가 설립되자 .. 2010. 11. 8.
250년 된 원마산(마산포) 골목길 「유장근 교수의 도시탐방대」 세 번째 참석 후의 글이다. 원마산(마산포)에 자연취락이 형성되면서 생긴 ‘길’에 대한 이야기다. 1760년, 마산창(馬山倉)이 설치된 후 마산이 도시 형태를 띠면서 도시공간의 성격도 형성되었다. 요즈음 말로 하자면 마산창 주변은 공공업무지구로, 현재 황금당 옆 골목길 주변은 상업지역으로, 동성동과 오동동 즉 코아양과점 뒤편 일대는 배후 주거지로 사용되었다. ‘·······사람이 다니면서 길이 생겼다’는 루쉰의 말처럼, 마산포에도 사람이 모이고 사람이 다니면서 ‘길’이 생겼다. 자연취락 특유의 좁고 꾸불꾸불한 ‘길’이었다. 지금도 생생히 남아있는 원마산의 좁은 골목길들은 멀게는 250년 가깝게는 200년이 족히 된 마산사람들의 ‘길’이다. 조선시대를 살았던 이곳 사람들이, 때.. 2009. 11. 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