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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305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89) - 강점제3시기 마산도시변화와 관련된 두 개의 기사 두소개합니다. 12. 1940년 2월 3일자 동아일보7면 기사입니다. 기사 제목은 「共同墓地 移轉要望」이고, 내용은 「마산부 완월동 산기슭에 설치되어 있는 현재의 공동묘지는 도시의 미관으로나 일반출입인사의 눈에 뜨이는 점으로 보아 늘 불유쾌한 감이 있어 각 방면에서 항상 논의되어 오던 터에 더욱 마산부에서도 대마산건설을 목표로 명년에 도시계획실시의 예정인 차제 도시미관을 파괴하는 차등공동묘지는 당연 타처로 옮겨야할 것을 크게 요망한다. 차 지구는 마산의 고지대로서 도로가 불편하므로 부 도로 행정에 대한 불편의 소리도 자자하다」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완월동 공동묘지는 1916년에 제작된 마산지도(아래 그림 참조)에도 나타납니다. 이런 것으로 보아 이 공동묘지는 일본인들이.. 2013. 11. 25.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88) - 강점제3시기 도시와 관련한 두 가지 기사입니다. 10. 1938년 7월 21일자 매일신보 6면입니다. 기사의 제목은 「馬山午東洞에 夜市」이며 기사는 「마산부 오동동에 있는 번영회 주최의 납양야시(納凉夜市)는 작년부터 개시 하였던 바 금년에도 지난 17일부터 개시되었는데 첫 날부터 나온 사람이 무려 수천 명에 달하여 납량구역 오동동 일대에는 미증유의 잡담과 은성을 이루었고 주로 과일 도시 목공물 포목 십전균일품 등으로 또 값도 싸므로 성적이 양호하다고 한다」입니다. 1937년부터 개장된 오동동 야시장이야기인데 당시 오동동 모습을 짐작하게 해주는 기사입니다. 기사 중 납양야시(納凉夜市)는 '여름철 더위를 피해 시원한 밤에 열리는 시장'으로 이해할 수 있겠고, ‘은성을 이루었고…’는 요즈음 잘 사용하지 않는 언어로 ‘번화.. 2013. 11. 18.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87) - 강점제3시기 도시변화 관련 기사 두 개 소개합니다. 8. 1938년 2월 24일 동아일보 7면 기사입니다. 이 기사는 돝섬을 새 명소로 만들기 위해 마산중포병연대에서 돝섬공원화 계획을 수립하였다는 내용입니다. 돝섬공원화 계획의 의도는 진해요항부와 비봉리에 해안도로를 조성한 후 진해와 돝섬을 연결하여 진해를 찾은 관광객이 돝섬을 거쳐 마산으로 오도록 한다는 겁니다. 또한 진해 부산 간 계획하고 있는 자동차도로가 개통되면, 돝섬이 연결점이 되어 1시간 3-40분내에 부산-진해-돝섬-마산이 이어질 것이므로 돝섬공원화 계획에 마산부민들도 적극 협력할 것이라 보도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기사처럼 돝섬이 개발되고 부산에서 진해와 돝섬을 거쳐 마산으로 연결되는 교통로가 실제로 만들어지지는 않았습니다. 9. 1938년 6월 3일 동.. 2013. 11. 11.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86) - 강점제3시기 도시변화와 관련된 기사 두 개 소개합니다. 6. 1935년 10월 22일자 매일신보 3면 기사입니다. 기사의 제목은 ‘舊馬山驛移築 用地買收完了’ 이며 기사 내용은 ‘경남 제2의 능률을 내고 있는 구마산역은 외관상 누추와 내용상 협애(狹隘) 및 이의 장래발전에 반(伴)하는 요충지대에 이축을 계획하고 그 동안 용지 매수에 열중 중이던 바 가격 평가가 원만히 되지 못하여 매수에 지장이 되어있던 바 근일에 이것이 호전되어 매수가 거의 완료된 모양이라 하며 가급적 금년 내 완성을 보게되도록 할 것이라 하며 완성 후는 구마산에 신위관(新偉觀)을 정(呈)하리라 한다’ 입니다. 지금의 육호광장 자리에 있었던 구마산 역은 이 신문 기사처럼 위치를 약간 옮겨온 자리입니다. 처음에 있었던 역도 비슷한 위치에 있었습니다만 역.. 2013. 11. 4.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80) - 강점제3시기 오늘도 그림 석장입니다. 44. 마산공원 마산신사에 접한 위치. 지금의 제일여고 부지 중 일부였습니다. 조경계획은 임학박사였던 본전정육(本田靜六)이 하였고 수종은 벚나무, 매화나무, 대나무 등이었습니다. 강점기 내내 일본인들의 놀이터와 휴식처로 사용되었습니다. 45. 근위빈공원 일본인들이 주로 사용했던 조그마한 해변공원으로 1934년 월영동 해안에 조성되었습니다. 1941년 벚나무 묘목 1백본, 버드나무 2백본을 이식해 공원을 꾸몄다는 기록도 남아 있습니다. 46. 추산공원 추산동 마산박물관 일대에 있었으며 지금까지 공원으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암석이 많았다고 하며, 동쪽에 오래된 벚나무 수십 그루가 있어서 벚꽃이 필 때 쯤이면 관광객들이 많이 찾았다고 합니다. 2013. 9. 23.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79) - 강점제3시기 오늘도 그림 석장 소개합니다 41. 합성리 정동행성지 창원(昌原)이란 지명은 조선시대에 만들어졌습니다. 조선조 3대 태종 8년(1408년)에 의창(義昌)현과 회원(會原)현을 합쳐 창원(昌原)부로 승격되면서 그 이름이 역사에 등장합니다. 의창(義昌)의 ‘昌’자(字)와 회원(會原)의 ‘原’자(字)를 합쳐 만든 이름입니다. 그러나 창원의 부성(府城)은 별도로 없었습니다. 현재 마산 합성동에 유적으로 남아있는 '합포성'의 병마도절제사가 창원부까지 다스렸기 때문입니다. 합성리 정동행성지는 바로 그 합포성을 말합니다.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153호로 등록되어 있습니다만 관리가 제대로 되지 않고 있습니다. 아래 사진은 어느 주택의 담벼락으로 아직 남아 있는 합포성의 성곽입니다. 42. 월영대 월영대는 경상남도기념물 제.. 2013. 9. 16.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이야기 (177) - 강점제3시기 이번에도 금융기관 세 곳 사진 소개합니다. 35. 무진회사 1925년 3월 월남동 1가에서 시작한 마산무진주식회사입니다. 1931년 월남동 3가 1번지에 아래 사진처럼 철근콘크리트조 2층 건물을 신축하여 이전하였고 진해에도 지점이 있었습니다. 1936년 경남 도내의 각 무진회사들이 통합하여 부산무진회사를 창립함으로써 부산무진회사 마산지점으로 개편되었습니다. 무진회사는 지금의 상호신용금고를 의미합니다. 36. 마산금융주식회사 1908년 6월 일본인 만무구일(滿武龜一)이 설립한 회사로 각 개인들을 상대로 부동산 담보대출을 목적으로 설립하였습니다. 아래 사진은 1926년 추산동 69번지에 지은 근대적 2층 건물의 사옥니다. 37. 산업금융주식회사 1929년 5월 19일 동성동 173-1번지에서 시작하였고 금전.. 2013. 9. 2.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73) - 강점제3시기 오늘도 재미있는 사진 석 장 소개합니다 23. 구마산공설시장 지금의 부림시장입니다. 1924년 개설된 시장으로 당시 마산에서 가장 큰 시장이었습니다. 특히 마산장날인 매 5일과 10일에는 대성황을 이루었습니다. 건물은 연와조와 장가(長家)점포 3채였고 그밖에 아연지붕의 바라크식 건물 여러 동이 있었는데 수많은 노점 상인들이 어울려 저녁시장 시간이면 언제나 크게 붐볐다고 합니다. 24. 원동무역주식회사 조선회사령이 폐지되자 1920년 5월 16일 자본금 50만원으로 창립한 마산 최초의 한국인 회사입니다. 이 사진은 1927년 8월에 착공하여 1928년 4월에 준공한 철근콘크리트 2층 현대식 건물로 지은 사옥입니다. 외형이 변하긴 했지만 아직 원형이 남아있으며 건물 앞에는 이 건물의 역사를 말해주는 표지석이.. 2013. 8. 5.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72) - 강점제3시기 오늘은 당시 유명했던 마산의 장유공장(醬油味噲製造場 / 장유미쾌제조장) 세 곳을 소개합니다. 일제강점기 마산은 장유산업의 메카였습니다. 양도 양이지만 품질이 우수하여 경남 뿐만 아니라 멀리 청진, 원산 등지에까지 판매되었습니다. 당연하게도 이 모든 장유산업은 일본인의 독점산업이었습니다. 20. 복정(福井 / 후쿠이)醬油味噲製造場 한일병합 다음 해인 1911년 5월 복전증차랑(福田增次郞)이 마산부 都町(도정 / 현 중앙동)에서 창업한 회사입니다. 1928년 마산의 장유 총생산량 5,000석의 70%를 생산한 대형공장이었습니다. 21. 적문(赤門 / 아카몽)醬油味噲製造場 1906년 관무부(管武夫)에 의해 설립된 마산 최초의 장유공장입니다. 마산 유정(신창동) 18번지에 공장이 있었으며 연간 1,000석 내외.. 2013. 7. 29.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71) - 강점제3시기 오늘은 양조장 네 곳을 소개합니다. 양조장은 이것이 마지막입니다. 16. 청수(淸水 / 시미즈) 양조장 1921년 창업하였고 신창동, 현 무학아파트 자리(전 무학소주 자리)에 있었습니다. 가장 규모가 컸으며 만주에 까지 수출하였는데 만주에서는 마산에서 온 청주를 ‘조선의 나다자케(당시 일본에서 가장 유명했던 청주)’라 불렀습니다. 상표는 ‘大正櫻(대정앵)’과 ‘井筒平(정통평)’을 사용했습니다. 이 공장이 있던 곳 옆을 흐르는 창원천(대곡천이라고도 함)에는 이 공장의 이름 그대로 사용하는 청수교(淸水橋)가 있습니다. 17. 원등(遠藤) 양조장 1909년에 창업하였고 장군동에 있었습니다. 얼마 전에 건물 보존 여부를 놓고 논쟁거리가 되었던 천도원(千島園)주조장이 바로 이 양조장입니다. 상표는 彌生(미생)이었.. 2013. 7. 22.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70) - 강점제3시기 이번에도 양조장 세 곳을 소개합니다. 모두 당시 유명했던 일본 청주 공장들입니다. 13. 월포(月の浦) 양조장 장군동 경남데파트 뒤편에 있었습니다. 당시 이 회사가 사용했던 술통도 함께 소개합니다. 14. 삼호(三好 / 미요시) 양조장 1913년에 창업하였고 부림동 아래에 있었습니다. 상표는 ‘松の色(송색)’이라고 했습니다. 15. 산읍(山邑 / 야마무라) 청주 양조장 1929년에 창업하였고 월남동에 있었습니다. 만주에 수출하였는데 만주에서는 마산에서 온 청주를 ‘조선의 나다자케(당시 일본에서 가장 유명했던 청주)’라 불렀습니다. 상표는 ‘櫻正吉(앵정길)’이었고 지금 중리에 있는 무학주정 전신입니다. 2013. 7. 15.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69) - 강점제3시기 오늘은 양조장 세 곳을 소개합니다. 10. 빈전(濱田 / 하마다)양조장 1923년 설립하였고 상표는 금배빈학(金盃濱鶴)이었습니다. 추산동에 있었습니다. 11. 서전(西田 / 니시다)양조장 1907년 설립하였고 상표는 계림(鷄林)이었습니다. 위치는 홍문동, 즉 현 신동아빌라 자리입니다. 마산의 토호 이승훈 씨가 운영한 백광청주가 바로 해방 전 이 회사입니다. 상당히 규모가 큰 양조장이었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12. 촌기(村崎 / 무라자키)양조장 1925년 설립하였고 상표는 염록(艶錄)이었습니다. 홍문동에 있었습니다. 마산상공회의소백년사에는 1923년에 설립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사진의 앞 건물은 사무실, 뒷 건물이 공장이었던 것 같습니다. 2013. 7. 8.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66) - 강점제3시기 지난 회에 예고한대로 오늘부터는 「觀光の馬山」이라는 리플렛(leaflet) 속에 들어 있는 사진들을 소개하겠습니다. 순서는 본판 순서를 따르겠습니다. 오래된 사진이고 원판 사이즈가 가로40mm×세로30mm 밖에 되지 않아 상세하게 감상하지는 못할 것입니다. 그냥 1930년대 마산도시의 분위기만 짐작하시기 바랍니다. 1. 마산부청 중앙동 3가에 있는 현 마산합포구청, 즉 오랫동안 마산시청으로 이용되었던 위치에 있었었던 건물의 최초 모습입니다. 마산시민들에게는 약간 낯이 익은 건물일 겁니다. 2. 부산지방법원 마산지원 현 마산법원 자리에 있었습니다. 창원으로 지방법원이 이전하기 전까지 마산지방법원으로 사용되었던 곳입니다. 3. 마산경찰서 중앙동 2가에 있는 옛 마산경찰서, 현 마산중부경찰서 자리에 있었던 건.. 2013. 6. 17.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165) - 강점제3시기 이번 회부터는 「觀光の馬山」이라는 아래 리플렛(leaflet) 속에 들어 있는 사진들을 소개하겠습니다. 이 리플렛과 리플렛 속에 들어 있는 마산 지도는 이미 포스팅한 바 있습니다만 지도의 아래위에 실린 사진은 처음 소개합니다. 2012/11/05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34) - 강점제3시기 2013/01/07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43) - 강점제3시기 이 리플렛은 1937년에 제작 발행되었습니다. 일본관광객 유치용 마산 홍보 혹은 마산을 방문한 일본인들에게 마산 도시를 안내하기 위한 목적으로 제작된 리플렛입니다. 「觀光の馬山」이 발간된 1937년은 만주사변(1931년)에 이어 일본군부가 중국대륙을 삼키기 위해 중일전쟁을 일으.. 2013. 6. 10.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63) - 강점제3시기 1939년 일제에 의해 강제 폐교 당한 사립 창신학교의 1930년대 사진 몇 장 소개합니다. 『창신학교 100년사』에 있는 자료들입니다. 이 사진들은 폐교되기 전, 창신학교 학생들과 교사들의 활동을 담은 장면입니다. 당시 우리 지역의 근대식 교육기관이 어떤 모습이었는지 가늠할 수 있는 자료라 소개해봅니다. 어떻습니까? 불과 80년 전 마산 창신학교의 학생들과 교사들 모습이. 2013. 5. 27.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61) - 강점제3시기 1940년 2월에 創氏改名이 실시됩니다. 따라서 토지소유주의 이름만 보고 한국인과 일본인을 구별하는 일은 쉽지 않은 일일 겁니다. 이 글에서 토지 소유관계를 정리할 때 확인한 이름 중 대부분의 한국인은 개명이 되지 않았지만 개명한 것으로 보이는 것도 제법 있었습니다. 이에 대해서는 우선 이름의 형태을 보아 국적을 판단하였고 그 다음은 한국인이 개명을 하여 실제로 사용했던 사례, 그리고 일본인들이 보통 사용하지 않았던 이름들을 찾아 이들을 한국인이라고 자의로 판단하여 정리하였습니다. 그러니 약간 틀릴 수도 있다는 말씀입니다. 아래 표는 1910년, 1920년, 1930년, 1945년의 원마산 토지에 관한 비교표입니다. 구분 정부. 마산부 기업. 단체 한국인 일본인 중국인 게 필지수 5 10 853 271 .. 2013. 5. 13.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60) - 강점제3시기 1910년대 중반에 대규모 매립을 경험한 원마산 해안은 25여 년 동안 큰 변화가 없다가 1930년대 후반에 이르러 다시 동성동 해안 일대의 대규모 매립이 시작되면서 변화하기 시작하였습니다. 다음 그림 중 앞의 것이 1930년, 뒤의 것이 1945년 그림입니다. 1910년대 박간(迫間)의 매립 때 매립되지 않고 남아있던 동굴강이 1927년에 현재 대신증권에서 어시장으로 내려오는 도로와 매립지의 도로망이 연결되는 형태로 부분적으로 매립되었다가 1935년 마산부가 행한 매립 때 전면적으로 매립되었습니다. 동굴강은 현재 어시장에 있는 이른바「너른 마당」의 북측 인접대지입니다. 「너른 마당」은 마산의 어시장 내에 있는 지명입니다. 일제 때 도로개설과정에서 각 도로가 집중함으로써 넓어진 곳인데 넓은 곳이라 하여 .. 2013. 5. 6.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59) - 강점제3시기 먼저 1945년 원마산 상황과 1930년 상황을 비교해 보겠습니다. 위의 두 그림에서 보다시피 1930년부터 1945년까지에 원마산에는 큰 변화가 있었습니다. 변화의 내용을 정리해보겠습니다. 정리한 번호는 위 1945년 그림에 표기되어있는 번호와 일치합니다. ① 1935년에 지금의 신포동 일대 매립으로 원마산과 신마산이 지형적으로 하나의 도시가 되었습니다. ② 같은 해 기선권형망수협지소와 그 인근 건어물 시장 주변 매립으로 동성동과 오동동의 경계까지의 해안이 직선으로 변했습니다. ③ 1937년에는 수성동, 즉 시민외과 앞 도로가 부림시장과 이어져 신포동 매립지와 연결되었습니다. ④ 같은 해 현 오동동 네거리에서 남쪽으로 내려오는 도로가 개통되었습니다. ⑤ 같은 해 ④의 도로가 새로 매립된 지역의 도로망과.. 2013. 4. 29.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쳔사 (158) - 강점제3시기 오늘부터는 1930년~1945년의 마산포(원마산)의 변화에 대해 올리겠습니다. 이 시기 마산포는 대규모 매립이 시행되어 규모도 커지고 근대식 도로망도 확산되는 대변화가 있었기 때문에 시가지가 확산되었습니다. 1930년~1945년 사이의 원마산에는 한국인 상인들에 의해 부림동 시장과 남성동 해안 일대에 걸쳐 곡물․면사포 등의 포목류․식료품․고무화․기타잡화 등 생활필수품을 판매하는 소점포가 주류를 이루고 있었습니다. 또한 일본상인들도 원마산에 많이 진출하여 건축자재․철물․과자․서적과 문방구․가구․의복․주류․육류․연료․선구(船具) 등을 판매했습니다. 대금업자도 10여명에 달했으며 건축 붐을 타고 토건청부업도 호황을 누렸습니다. 1931년에 간행된『경상남도 통계연보』에서는 당시 마산 토지 중 대지․논․밭을 종류.. 2013. 4. 22.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57) - 강점제3시기 일제강점기 마산만 매립 관련 글은 지난 번까지였습니다. 개항기 9회, 강점 제1시기 2회, 강점 제2시기 3회, 강점 제3시기 15회로 총 29회였습니다. 하지만 개항기 매립 중 5회는 계획으로만 끝났기 때문에 실제로 시행된 매립 횟수는 총 24회였습니다. 매립 면적은 모두 325,000여 평이었습니다. 매립 주체를 유형별로 나누어 보면 조선총독부․마산부․기업․개인 혹은 공동매립과 단독매립 등이 있었으며, 1회 매립 면적도 최소 100여 평에서 최대 10만 평 가까운 면적까지 다양하였고 일거에 수만 평의 매립을 했는가 하면 한 사람이 세 번에 걸쳐 시행하기도 했습니다. 매립의 목적도 다양했습니다. 항만건설을 비롯해서 농지로 사용하기 위한 매립이 있었는가하면 군용지 혹은 철도용지를 목적으로 매립한 것도 있.. 2013. 4. 15.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56) - 강점제3시기 중앙부두 건설공사도 제1부두와 같이 1936년 10월 조선총독부에서 경성의 삼택조(三宅組)에 맡겨 시공하여 제1부두와 같은 날인 1939년 5월 19일 준공하였습니다. 총 25,475평 규모로서 총길이 1,080m의 물양장도 갖추었습니다. 현재 이 중앙부두에는 연안여객터미널․마산지방항만청․모래부두․쌍용양회 시멘트 사일로․세관․검역소 등이 자리하고 있습니다만 현대아이파크 앞에 합동청사가 준공되었기 때문에 공공기관은 곧 이전할 것 같습니다. 공공기관들이 이전하고 나면 이 일대를 근래에 조성한 서항부두와 함께 해양친수공원으로 조성할 것입니다. 마산 해안에 큰 변화를 가져올 계획이므로 시민들 기대가 높습니다. 시멘트 사일로도 철거한다고 하는데 여수엑스포 때처럼 재사용하는 것이 더 낫지 않을까 싶습니다. 아래 설.. 2013. 4. 8.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55) - 강점제3시기 -부두의 건설- 부두 역시 매립으로 건설되었지만 그 목적이 항만건설이라는 점에서 일반 매립과 구분하여 다룹니다. 일제강점기 마산에는 부두를 건설하기 위한 네 번의 매립이 있었습니다. 모두 강점 제3시기(1930년 이후)에 이루어 졌으며 조선총독부 혹은 마산부가 시행하였습니다. 그러나 당시의 국내 사정 및 권력 체제로 보아 마산부는 명의만 제공했을 뿐, 모두 조선총독부의 의도가 개입된 것이었다고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처럼 같은 시기에 급속히 대규모로 시행된 이 항만공사는 마산을 상업무역항으로 키우기 위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오직 일본의 침략전쟁을 돕는 병참기지로의 역할 수행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만주사변(1931), 중일전쟁(1937), 태평양전쟁(1941)로 이어지는 일제의 전쟁 광란에서 .. 2013. 4. 1.
가포신항 준설 말고 해양신도시도 중지해야 이미 오래 전부터 예측되었던 일이 현실로 나타났습니다. 마산의 가포신항 문제를 두고 하는 이야깁니다. 양심적인 학자와 전문가, 시민단체에서 가포신항의 경제성 문제는 일찍부터 제기하였습니다. 하지만 사업자와 국토해양부 관료 그리고 옛 마산시의 행정을 책임졌던 분들이 아무 문제가 없다며 뭉개고 넘어갔던 일입니다. 토론회, 간담회 수도 없이 많이 했습니다. 기자회견, 성명서 말할 것도 없고 시청, 국회에 까지 적잖게 뛰어 다녔습니다, 지난 십수년, 가포신항과 해양신도시를 막거나 변경시키기 위해 참 많이도 다녔고 몇해 전에는 해양신도시조정위원회의 책임을 맡아 고민해보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결국 가포신항은 아래 사진처럼 되고 말았습니다. 예견되었다고는 하지만 참으로 어처구니 없고 한심합니다. 이 일 추진했던 사람.. 2013. 3. 28.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54) - 강점제3시기 “나카무라 되었다?” 마산의 명승지 월포해수욕장이 매립된 이후 근위빈 해수욕장이란 이름으로 해운동 일대(전 마산화력발전소 자리) 해변이 해수욕장으로 이용되었습니다. 이 해수욕장이 1944년 12월 3일자로 일본인 종촌번부(中村繁夫)에 의해 매립되었습니다. 지금의 마산시외버스터미널 남부주차장을 포함한 해운프라자, 뎃츠빌딩까지의 넓은 지역이며 시기적으로는 일제기 마산의 마지막 매립이었습니다. 면적은 12,254평이었으며 매립 후 해안은 석축으로 호안하였습니다. 시기에서 알 수 있듯이 이 매립지는 완공된 지 8개월 만에 일제가 패망했기 때문에 매립된 땅을 제대로 사용해보지도 못했고, 해방 당시에는 공터로 버려져 있었습니다. 당연히 매립공사에 투자한 금액을 회수할 수가 없었고 매립을 한 나카무라(中村)는 졸지에.. 2013. 3. 25.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53) - 강점제3시기 1940년부터 1942년 9월 5일까지 부산 토건업체인 죽본조(竹本組)의 사주였던 竹本熊次(부산부 수정동 116번지 거주)가 시행된 매립공사입니다. 원마산(마산포) 매축지 동쪽 해변일대로서 마산시 수협이 있던 오동동 251-3을 비롯하여 동일제빙․동양공업․신기사 등이 자리했던 곳입니다. 지금은 복어거리와 탑마트 그리고 웨딩그랜덤 건물이 있는 일대입니다. 총 11,860여 평이었으며 이중 대지로 사용한 면적이 8,885평, 도로는 2,539평, 하치장이 436평이었습니다. 이 외에 물양장이 254평 있었고 방파제 153m도 함께 시공했습니다. 다음 그림은 정부기록보존소가 소장하고 있는 「매립준공인가관계서류」에 첨부된 본 매립공사의 설계도입니다. 시간을 되돌려 보면 이 매립지의 위치는 오랜 세월 동안 마산포.. 2013. 3. 18.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52) - 강점제3시기 이번 포스팅에서는 강점 말기에 시행된 네 곳을 소개하겠습니다. 매립지 모두 공장부지로 사용한 사례입니다. 지금은 경남대 앞 상업용지로 도시 한복판인 이 땅들이 불과 7-80년 전에는 바다였으니 정말 격세지감입니다. 1938년 1월 28일 창포동 3가 5-12 전 심건(心建)조선소 자리 594평을 앞의 국전암시(菊田岩市)가 자영 국전(菊田)조선소 용지로 매축 준공하였습니다. 총 세 번에 걸쳐 매립을 한 국전암시(菊田岩市)는 1909년에 마산으로 이주해 와서 국전(菊田)조선소를 경영했던 일본인입니다. 위치는 현 경민 아파트 자리로 그림의 A입니다 1940년 2월 15일 창포동 3가 5-14번지인 전 심건조선소(心建造船所) 건너편 주택지 437평을 교본육삼랑(橋本六三郞)이 매립하였습니다. 위치는 역시 경민 아.. 2013. 3. 11.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51) - 강점제3시기 1920년대 중반까지 마산의 도시구조는 한국인들이 모인 원마산과 일본인들이 거주한 신마산으로 갈라져 있었습니다. 두 지역을 연결해야할 중앙지역은 지형적으로도 잘록한 병목형이었을 뿐 아니라 철도용지로 묶여 있기까지 해서 도시발전에 장애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철도용지가 마산부에 불하되어 시가지 형성이 가능해지자 마산세무서․마산부청․경성전기 마산지점․도립마산병원․지방법원 지원․신문사 등 관공서나 공공시설의 건물이 세워지거나 또는 건축예정부지로 결정되었습니다. 이른바 중앙마산이 공공업무지역으로 재탄생하기 시작한 겁니다. 때를 맞춰 비슷한 시기에 조선회사령도 철폐되자 일본인들이 기회를 놓칠세라 마산의 중앙부 해변에 매축을 계획하게 되어 본 매립이 추진되었습니다. 위치는 현 대우백화점, 어시장, 삼익아파트, 센트럴.. 2013. 3. 4.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50) - 강점제3시기 1935년 2월 19일에 국민은행 마산지점 앞 간선도로 일대 2,145평이 매립 준공되었습니다. 그 중 대지는 1,043평이었고 그 외는 도로 및 하수구 등이었습니다. 매립의 목적은 어시장부지와 택지 조성이었습니다. 위성사진에서 본 위치입니다. 이 매립은 1927년 마산부가 시행한「남성동 30번지 동굴강 일부 매립」과 함께 마산부 직영사업으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아래 도면이 매립설계도입니다. 매립설계도(정부기록보존소,「공유수면매립방파제축조공사서」,문서번호87-1907,필름번호87-1291)를 자세히 보면 이 매립은 한 곳에서만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네 곳에서 시행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1927년에 시행된 동굴강 107평 매립(2012/04/23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106) - 강점제2시기.. 2013. 2. 25.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49) - 강점제3시기 1933년 1월 25일 준공된 매립입니다. 위치는 현 경남대 앞 삼우상가와 월드프라자 빌딩 사이의 부지와 그 뒤쪽 횟집이 많이 있는 삼각형 블록입니다. 아래 그림에서 노란색으로 표시한 땅입니다. 면적은 속칭 번개시장 옆 삼각형으로 남아있는 부지 창포동 3가 7-1번지의 589평과 그 주변 일대에 해당되는 월남동 5가 4-1번지 23평, 월남동 5가 4번지 일대 1,596평을 합쳐 총 2,185여 평이며 도로까지 합친 면적은 3,300여 평입니다. 매립을 추진한 이는 일본 문사(門司 / 모지)에 거주하던 지전원차(池田源次)와 창포동에 거주하던 영삼구간(永森久幹) 두 사람입니다. 처음 매립권을 취득한 자는 경성에 살던 고영경일(高榮京一)과 영삼구간(永森久幹)이었지만 자금사정 때문에 고영경일(高榮京一)의 매립.. 2013. 2. 18.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48)- 강점제3시기 -강점 제3시기의 매립- 1920년대 후반부터 시작된 마산 해안의 매립은 1930년대 들어서 절정을 이루었습니다. 하이라이트가 1929년에 착공하여 6년 간 시공한 후 1935년 완공한 신포동의 중앙마산지역 매립인데 이 매립으로 그 동안 둘로 나누어져있던 마산의 도시공간이 지형적으로 연결되었습니다. 1931년 12월 4일 창포동 3가 1-1번지 801평이 매립되었습니다. 일본인 조선업자로 창포동 3가 5번지에 살던 국전암시(菊田岩市)에 의해 조선공장 부지조성을 목적으로 시행되었습니다. 정부기록보존소에 보존된 「공유수면매립준공인가서 / 문서번호 87-969」에 의하면 토지소유권 취득자 통지서에 토지 취득 일자가 1932년 3월 25일로 기록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비고란에는 도로․구거 및 호안석원(護岸石垣.. 2013. 2. 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