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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속 도시이야기

마산번창기(1908) - 22 - 제10장 마산잡록잡황(馬山雜錄雜況)

by 운무허정도 2022. 1. 31.

제10장  마산잡록잡황(馬山雜錄雜況) - 1

 

(1) 마산상업회의소

1908년 3월 30일, 다가까손(田中遜) 씨 외 29명이 발기 인가를 받고 5월 23일 설립 인가를 얻어 5월 30일 의원 선거에 의해 6월 1일 임원의 선출이 끝났으므로 비로소 그 성립을 고(告)하게 된 것이다. 이 설립에 관해서는 불필요론자도 시기상조론자도 있는데 그 주장하는 바는 마산 경제계가 부진한 데도 각자의 부담을 증대시키는 것은 마산 발전의 앞길을 어둡게 한다는 일치된 소신 때문이다. 그래도 니시카와 다로이치(西川太郞) 씨의 의지는 확고하여 이곳 사람들이 인정하고 있으며 시기카와 씨의 주선으로 서기장(書記長)까지 마산에 들어와 있으니 반드시 설립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스스로 의원이 되겠다는 인사들 중에는 열심히 한 운동으로 마음을 바꾸게 되는 사람도 나오게 된다. 또한 의원은 신시와 마산포에서 각 10명씩 추선(推選)하게 되었다.

당선자는 예선(豫選)의 결과를 얻게 된 것이다.

1번 상의원(회계심사위원) 다나카 스스무(田中遜) (신시)

2번 히사시게 간사쿠(久重勘作) (마산포)

3번 상의원(자격심사위원) 히로시 세이조(弘淸三) (신시)

4번 상의원(실업조사위원) 메카타 헤이자브로(目加田平三郞) (신시)

5번 야마모토 고조(山本好藏) (마산포)

6번 상의원(실업조사위원) 다나하시 센노스케(棚橋仙之助) (마산포)

7번 마츠바라 하야조(松原早藏) (마산포)

8번 다카하시 가치지로(高橋吉次郞) (마산포)

9번 시가 가메조(志賀龜三) (신시)

10번 회장 니시카와 타로이치(西川太郞一) (신시)

11번 하마다 시치주로(濱田七十郞) (신시)

12번 가도와키 게이조(門脇惠三) (신시)

13번 히로시게 세츠노스케(弘重節之助) (신시)

14번 상의원(자격심사위원) 시게무라 우이치(中村宇一) (신시)

15번 아카츠카 도쿠지로(赤塚德次郞) (신시)

16번 상의원(회계심사의원) 후지사키 도모히데(藏崎供秀) (마산포)

17번 모리야마 에지로(森山亥次郞) (마산포)

18번 야마노 겐지로(山野源次郞) (마산포)

19번 에다 구니미츠(江田國光) (마산포)

20번 요시다 마스터로(吉田益太郞) (마산포)

번외 서기장 다니가키 가이치(谷垣嘉市) (마산포)

 

그후 가도와키(門脇), 다카하시(高橋) 양 의원은 퇴임하여 그 뒤를 이은 보결 의원은 다음과 같다.

8번 나츠메 데츠조(夏目哲三) (마산포)

20번 아카마츠 기이치로(赤松龜一郞) (마산포)

 

본 회의소 경비는 연간 2,700여 원인데 마산의 경제사정은 이 부담이 너무 무겁다고 유지자들이 그 경비의 경감(輕減)을 건의했다.

9월 11일 총회는 혼마치(本町, 월남동) 1정목 1번지 오다젠지로(小田善四郞) 씨 자택 2층에서 열렸다. 당일 히로시 세이조(弘淸三) 씨 등이 허심탄회하게 의사 진행 개발을 제안하기도 했지만 어떤 속셈인지 방청은 안된다고 주장한 의원도 있었다고 한다.

회장 니시카와 타로이치(西川太郞一) 씨는 일부의 방청을 인정하는 한편 경비 불납자 처분 안에 대해서는 방청을 불허하는 식으로 절충 타협했다. 개방안(開放案)은 모두 통과되었으나 금지안(禁止案)은 어떻게 되었을까.

훗날 들은 바에 의하면 늦게 참가한 나츠메 데츠조(夏目哲三) 씨가 회의소 경비 총예산안의 3분의 1 삭감을 제의하여 후지사키 도모히데(藏崎供秀), 에다 구니미츠(江田國光), 아카마츠 기이치로(赤松龜一郞) 의원의 찬성을 얻어 수정안이 건의되어 다수의 찬서으로 의결되었다고 한다.

이후 상업회의소에 대해 큰 고충 없이 모두가 그 운전 활동에 도움을 주게 될 것으로 여겨진다.

 

회장인 니시카와 다로이치(西川太郞一) 씨는 효고(兵庫) 현 단마쿠니 이즈시(但馬國出石) 출신으로 게이오(慶應) 3년(1867년) 6월에 출생했다.

스스로는 자신을 무종교가라고 하는데 종교란 이름은 둘째로 치고 첫째는 정신인지라 나시카와 다로이치 씨와 같은 열정이 많은 정신가에게는 정신이 없을 리 없었다. 과거 교토(京都)의 도시샤(同志社)에 있었다고 하니 니시카와 다로이치 씨는 정신적인 신앙은 물론 기독교에 있다고 생각된다. 이후 제일은행원이 되고 1888년(명치21년) 부산지점원으로 도한(渡韓) 하였다가 원산지점으로 전근한다. 1898년 목포출장소 소장이 되고 1907년 3월 전 주임 법학사 나카무라 미츠키치(中村光吉) 씨의 후임으로 마산출장소장으로 전근해 왔다. 니시카와 다로이치 씨는 자존심이 세고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의지의 소유자이기는 하지만 항상 관과 민을 불문하여 원만한 평민사상을 가지고 사람들과 잘 어울리고 있다. 이는 니시카와 다로이치 씨의 성격이 활달하고 세상일에 능숙하기에 가능하리라고 본다. 게다가 비밀 없는 소위 개방주의를 중용하고 있는데 비교적 사람들의 인기가 없었던 이유는 니시카와 다로이치 씨가 부임했을 당시의 상황 때문이었다. 즉 금융 건축으로 많은 금액의 대출이 불가능해지고 예금 금리도 인하된 그 시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마산에서 덕망 있던 전임자 나카무라 씨가 원산에 부임하여 그곳에서 사람들의 인기를 얻지 못하는 것도 니시카와 씨의 경우와 같은 이치이다. 니시키와 다로이치 씨의 말투는 때로는 상대방에 대해 조롱하거나 해학하는 투로 들리고 거만한 구조가 담겨진 점이 있어 사람들의 인기를 얻지 못하는 원인의 하나가 된 것 같다. 자존(自尊) 만능주의의 표출이라고도 할 수가 있겠는데 실제로는 자신력이 강할 따름이지 악의를 품은 사람은 아니다. 다만 으스대는 인물이라는 것이다.

부회장 마츠바라 하야조(松原早藏) 씨는 나가사키(長崎) 현 이키(壹岐) 섬 출신이다.

육군보병특무조장 출신의 예비역으로 현재 마산포에서 미곡 무역상을 하고 있다. 약간 자존망대한 데가 지나쳐서 침착함이 결여된 것 같아 보이나 상업적 기회를 판단하는 예민한 지략이란 면에서는 마산 전체 가게 중에서 그의 것이 으뜸인 것은 틀림없어 보인다. 판단력이 있다는 점에서 그의 머리맡에 과단할 단(斷)자를 붙여도 될 만하다. 영단이 있으니 한번 마음 먹으면 절대 주저함이 없고 밀고 가게 되고 이것이 오늘 마츠바라 하야조 씨의 성공을 이룩한 것이라 생각한다. 한 마디로 씨를 표현한다면 정신이 뚜렷한 사람, 실천력이 있는 사람, 상략가(商略家)이자 청년실업가이다.

상의원 히로시 세이조(弘淸三) 씨는 조슈(長州, 옛 지명으로 현재의 야마구치 현의 서부지역이다) 출신이며 실업가로서 깨끗하게 장사를 하려는 자세가 있으며 성격이 온화하고 두뇌는 명석한 사람이다.

히로시 세이조 씨는 원래 오사카의 이오이(五百井) 본점 출신인데, 2년 근무하다가 1892년 1월 이오이 부산지점원이 되면서 도한한 사람이다. 1900년 부산지점 지배인 하자마 후사타로(迫間房太郞) 씨는 어떤 이의 대리로 당시 러시아가 가지고 싶어 하던 토지의 매수에 종사하게 되었는데 그때 히로시 씨는 이오이 지점을 그만두고 하자마 씨의 대리인으로서 이해 5월에 마산에 온 것이다. 창원군 외서면 월영동 및 구산면 자복포(滋福浦, 일본전관거류지로 중포병영이 있던 곳)의 일부 땅을 매수하여 러시아의 기선을 제압한 사람이다. 그 후로는 하자마 지점이란 이름으로 마산에 영주하게 되며 거류민단회 의장, 마산포 우편소장, 수산회사 상임이사, 오사카상선 마산 하객 취급주임 등 기타 수많은 요직을 떠맡아 세상 사람들이 소중히 여기는 이다. 마산포의 청년실업가 마츠바라 하야조(松原早藏) 씨와 비견될 사람인데, 약간 제 마음대로라는 데가 있는 것은 사실인 것 같다.

상의원 다나카 손(田中遜, 아래 사진) 씨는 궁내대신 다나카 미츠아키(田中光顯) 씨의 양자이며 고치(高知) 현 출신이다.

지독한 검약가이다. 마산에서 이름나고 대자산가이기는 한데 마산을 위해 활동하고 결과를 내었다는 에기는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다. 다나카 손 씨는 평등주의의 사람이라 귀천 없이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은 그가 외국에서 돌아온 학자이기에 그런 교제에 익숙하다는 평이 자자하다.

 

 

상의원 메카타 헤이자부로(目加田平三郞) 씨는 시가(滋賀) 현 출신이며 육군보병 중위 예비역으로 현재 마산 재향군인협회장이다.

메카타(目加田) 상회란 상호로 무역상을 영위하는, 소탈하고 위세를 떠는 일이 없는 유망한 청년실업가이다. 자기 소신을 절대 굽히지 않는 굳건한 성격의 사람으로 마산의 명물 사나이라 할 만한 호남인데 남의 말을 듣지 않고 맹진하는 데가 있다. 아직 젊어서 그러는 것 같으니 세상 인정에 많이 접해보고 사방에 신경을 쓸 만큼 되면 아마 마산의 청년실업가로서 그 두각을 드러낼 것이다.

상의원 후지사키 도모히데(藤崎供秀) 씨는 가고시마(鹿兒島) 출신이다.

야마가타(山形) 현, 히로시마(廣島) 현의 경부장(警部長)을 역임한 사람이며 정 6위훈 5등의 훈장을 받기도 했다. 사직 후 도쿄전당포조합의 회장으로 선출된 적도 있다. 올해 62세의 고령이라 왕년의 기운찬 모습은 변하여 그 의론도 고리타분한 데를 면치 못한다. 그래도 육체와 정신은 여전하나 실업가로서는 경험상 부족함이 없지 않은 부분은 어쩔 수 없다 할 것이다. 하면 된다는 식의 정신으로 사업에 덤벼드니 사업에 실패하거나 도중에 그만두는 일 때문에 적지 않은 손해를 볼 때가 있었는데 그 점은 동정을 금할 수가 없다. 상업적 가회를 잡는 데 잘하지는 못하지만 그 준비 등에 용의주도함은 씨가 교제를 잘해서 그러하다고 감탄하는 바이다. 그래서 씨는 실업가나 실행가로서는 배울 것이 많지는 않으나 농사경영자로서 또한 그 정신의 소유자로서는 존경받을 만한 일을 하고 있다. 씨의 부인은 천황가의 옛 공경(公卿)대신 마츠키(松木) 백작의 딸이라 한다.

상의원 다나하시 센노스케(棚橋仙之助) 씨는 1874년(명치7년) 교토 후시미(伏見)에서 태어난 진정한 상인이라 할만하다.

어릴 적부터 오사카 이오이상점의 상업 견습생이 되고 1887년부터 1897년까지 이오이 상점 부산지점에서 일을 했다. 1897년 목포지점 개설 시에 거기에 주임으로 가게 되고 무역에 종사하게 되었다. 25년 동안 상업을 하다가 마산포에 오게 되어 무역업을 운영하고 있다. 다나하시 센노스케 시의 경력이 이렇게 상업계에서 태어난 듯한 사람이라 다소의 손해에도 끄떡도 없다. 그에 대해 이렇다 저렇다 말하는 사람이 있는데 적어도 상업가가 되려는 사람은 씨를 본보기로 삼아야 할 것이다.

상의원 나카무라 우이치(中村宇一) 씨는 야마구치(山口) 현 유게(熊毛) 군 출신이며 1896년(명치29년) 도한하여 부산에 머물다가 1899년 11월에 마산포로 이사해 오고 다음 해 말 각국 거류지에로의 이주를 권유 받고 솔선하여 이곳으로 이주하였다.

당시에는 한인을 상대로 잡화를 판매하고 있었으나 거류지에 일본인이 점차 많아지자 화양잡화 가게로 탈바꿈했다. 씨는 1891년에 부산에 있다가 1893년에는 미국으로 가서 4년간 유람하다가 귀국하고 얼마 안 되어 한국에 건너 온 사람이다. 때때로 해학적인 언사가 있지만 원래 과묵한 사람이라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지는 않으며 정직하고 착실한 상인이라 하겠다. 현재 거류민단회 의원이다.<<<

 

이 글은 창원시정연구원이 올 초에 번역한 『馬山繁昌記』(1908) 중 스물두 번째 것이다. 그림은 별도로 삽입하였다. 『馬山繁昌記』는 1900년대에 발간된 일본 문헌 중 단행본으로는 처음인 것으로 알려졌다. 개항 이후 마산으로 몰려 들어온 일인들의 수는 1908년 6월 3천355명에 달했다. 같은 통계로 한인은 7천515명이었으니 당시 마산으로 이주한 일인들의 규모를 짐작할 수 있다. 책의 제목처럼 당시 마산은 '번창'해 가고 있었다. 마산으로 이주한 일인들에게 마산은 꿈을 주는 신도시였다. 책의 제목과 내용은 이런 시대 상황과 그들의 기대를 반영하고 있다. (본 포스팅은 비영리를 전제로 창원시정연구원의 양해를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