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역사속 도시이야기

마산항지(1926년) - 26 - 건권(乾卷) / 제6장 개항사(開港史)

by 운무허정도 2022. 12. 5.

제6장 개항사

 

7. 한로조약(韓露條約)과 러시아 영사의 난폭함

이보다 앞서 3월 3일에 러시아의 파블로프 공사는 경성 정부와 아래와 같은 조약을 체결했다.

1. 한국정부는 새로 개항한 마산포 거류지에서 거리 2리 이내에 있는 율구미만(栗仇味灣)에 러시아 동양함대를 위한 석탄 저장소 및 해군병원 한 군데를 건설하기로 한다.

2. 러시아는 한국에 대해 결코 거제도 및 그 대안 육지와 아울러 부근의 여러 섬에 대해 조차를 요구하지 않는다.

3. 위 지역 내에서는 한국은 결코 다른 나라로부터의 조차 요구에 응하지 않을 것이다.

 

4월 11일 러시아의 마산 주재관 소코프(러시아 외교관으로 서울 주재 러시아공사관에서 근무하다가 1900년 3월 마산포 주재 러시아 부영사로 부임하였다. 마산포에 상주하면서 대한제국 남부지역인 부산, 마산포, 목포, 군산항의 영사 업무를 담당하였다) 영사는 군함 만주르(만주르 호, 1886년 덴마크의 코펜하겐에서 건조된 러시아 해군의 포함(砲艦). 1900년 초를 전후로 하여 극동 지역에서 항해했으며 1945년 일본에서 침몰하였다)로 한국 외부 통상국장 정대유(丁大有, 1852~1927, 구한말과 일제강점기의 관료. 1897년 12월에 외부(外部) 통상국장에 임명되어 1904년 4월까지 근무했다. 1900년 6월에 마산포 주재 러시아 부영사 소코프와 ‘율구미조약’을 체결한 당사자이다), 동 통역관 양종언(梁宗彦) 등과 함께 율구미의 조사와 특량을 위해 마산에 입항했다.

이날 부산영사관 분관은 철폐되고 나쿠무라(中村) 주임은 귀국 준비를 하고 새로 마산영사관을 두게 되어 영사사무를 다루는 사카타 쥬지로(坂田重次郞) 영사관보가 착임했다. 그는 얼마 있지 않아 영사로 승진했다.

또한 창원감리서에는 감리 안길수가 사임하고 한창수(韓昌洙, 1862~1933, 1900년 5월 창원감리 경 창원부윤으로 임명 받아 1903년 5월까지 3년간 창원감리로 있었다. 이후 일제로부터 남작의 직위를 받고 중추원 고문과 이왕직 장관 등을 역임한 친일관료. 친일반민족행위자)가 부임하게 되었는데 이때는 감리서 서리가 되어 창원군 군수로 겸직하고 있을 때였다.

다음날 12일 소코프 일행은 한 감리가 있는 마산포에 찾아가 처음부터 고압적인 언동으로 우선 거류지와 마산포의 중간지점 즉 현재 철도용지, 저도(돝섬), 저도의 대안인 웅천군 웅남면 귀실리(貴實里) 등 각지의 매수, 알선을 강요했다.

한 감리는 거류지와 마산포 사이의 땅은 전부 일본인이 사들였으며 저도에 관해서는 바다와 경해 있는 도서는 그 대소를 불문하고 외국인에게 팔아주는 일은 국법이 엄금하는 바이고, 귀실리는 웅천군수의 소관지이라 자신은 어찌할 수 없다며 모든 요구를 거절하였다.

정대유 등은 크게 화를 내며 러시아의 요구를 들어 주지 않으면 군함 내에 구류하겠으니 자성하라고 하면서 그날은 귀함하였다. 13일에는 비가 오는데도 소코프, 정대유 등은 거의 폭력적으로 한 감리를 율구미에 유인하고 병사들이 부근 일대의 산야를 답사, 게측하고 경계표석을 세워 그 권애 전부를 매수, 알선하도록 강요했다.

한 감리는 그 권내에는 많은 일본인들의 매수지가 있으니 그것을 제외한 땅의 알선은 노고를 아끼지 않겠노라고 변명했으나 숙고하라, 재고하라는 등 한 감리를 만주르 함으로 납치해 다음 날 새벽까지 함내에 구치했다가 석방시켰다.

한 감리는 이러한 러시아의 폭력적 위압과 정(丁), 양(梁) 등의 이치에 어긋난 만신주기에 분개하여 돌아와 이원규(李元珪) 주사를 우리 영사관에 보내와 율구미와 함내에서 있었던 러시아의 악행을 고소하고, 하자마 매수지에 대해서는 그들이 아무리 압박을 가해와도 소유권을 취득할 수 없을 것임을 맹세하오니 한 감리가 우리 영사관을 신뢰하기 시작한 경향을 보였다.

이때 러시아는 여순과 블라디보스톡(浦監) 간의 해상연락을 안전하게 수행하기 위해서는 몇 척의 군함과 운반선을 율구미에 정박시켜 날마다 수병을 상륙시켜 경계선을 돌로 쌓거나 일시적인 제방을 만들어 급수용 도랑을 파거나 혹은 육상 사령부나 기타의 기조 공사를 개시하는 등 제반의 준비를 착실히 진행 시켰으니 그 경계 표식 내의 넓이는 산지 경사면과 평지를 합쳐서 약30만 평 내외로 목측된다.<<<

 

이 글은 창원시정연구원이 2021년에 번역한 『馬山港誌』(1926) 중 26번 째 것이다. 그림은 별도로 삽입하였다. 『馬山港誌』는 1900년대에 발간된 일본 문헌 중 가장 가치가 높은 책으로 평가 받고 있다. 저자는 앞서 게재한 『馬山繁昌記』와 같은 스와 시로(諏方史郞)이다. 본 포스팅은 비영리를 전제로 창원시정연구원의 양해를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