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2월 3일 건축사 신문에 게재된 '건축시론'입니다.
동료들께 소설 한권 권해드린다. 시간 없다는 핑계로 전공서적 아니라는 이유로 소설 잡아본지 오래된 분들 많을 것이다. 속 깊은 건축은 인문학에서 나온다지만 그럴 여유도 쉽지 않을 터이다. 설계현장의 이야기이고 가슴 뜨거웠던 젊은 시절로 돌아가게 해준 소설이라 지면을 빌렸다. 이미 읽은 분들께는 양해를 구한다.
일본작가 마쓰이에 마사시(松家仁之)의 『여름은 오래 그곳에 남아』. 제64회 요미우리문학상 수상작이며 원제목은 ‘화산자락에서(火山のふもとで)’이다. 요미우리는 심사평에서 ‘장면이면 장면, 언어면 언어, 하나하나에 정중함이 담긴 품격 있는 작품’이라며 격찬했고, ‘명석하고 막힘없는 언어의 향연’ ‘풍요로운 색채와 향기가 담긴 경탄스러운 작품’ 등 평단과 독자의 호평도 많았다.
크지 않은 설계사무소에서 건축을 사이에 두고 오가는 스토리지만 그 속에는 인간의 삶을 위로하는 메시지가 담겨있다. 문장이 워낙 결곡해서 어디 한군데 걸리는 데가 없었고 문체도 수려했다. 소설 속의 노(老)건축가 무라이 슌스케는 김수근의 스승 요시무라 준조, 그와 경쟁하는 후나야마 게이이치는 단게 겐조가 모델인 듯싶다.
소설 속 화자인 ‘나’는 대학 건축학과 졸업반인 스물세 살의 청년이다. ‘나’는 대형 종합건설회사에 취직할 생각도 대학원에 진학할 생각도 없었다. 그가 가고 싶은 곳은 오직 '무라이 슌스케' 선생의 설계사무소뿐이었다. 무라이 선생은 화려하고 압도적인 건축보다는 소박하고 단아한 건축, 튀지 않고 주변에 녹아드는 공간을 추구한다. 새로운 흐름이 해일처럼 건축계에 밀려든 1980년대 초반이었음에도 무라이 선생은 꾸준히 자신의 건축을 지켜나갔고, 그 때문에 다소 예스럽다는 평가도 받았다. 하지만 ‘나’는 그런 그가 좋았다.
이미 일흔 남짓한 무라이는 사사하기를 원하는 이들에게 몇 해째 답을 주지 않았다. '나'는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이력서와 졸업작품을 보냈고, 뜻밖에 채용되었다. 소식을 전해주는 사무소 직원도 입사통보를 받은 '나'도 의아해했다. 알고 보니 '국립현대도서관공모' 때문이었다. 운 좋게 입사를 허락받은 ‘나’는 무라이 선생 밑에서 건축의 첫 걸음을 뗐고, 그곳에서 좋은 선배와 여자도 만났다. 스물세 살 ‘나’의 입사직후 장면에서는 수십 년 거슬러 신입시절의 내 모습을 보는듯했다. “설계실 제일 구석에 책상이 배정되었다. 그러나 가만히 앉아 있을 여유는 없었다. 옆 자리의 교육담당인 열두 살 위의 우치다 씨가 잡일을 계속시켜 간신히 처리하면서 일을 익혀가는 나날이 이어졌다.”
무라이 설계사무소는 7월말부터 9월 중순까지 아오쿠리 마을의 여름별장에서 일한다. 라이트의 탈리에신을 닮았다. 여름별장은 해발 1천 미터가 넘는 고지에 있었다. 밤이면 하늘이 온통 별로 덮이고 사람이 드문 대신 수십 종의 야생조류가 활동하는 곳이다. 그 숲속은 새벽 5시면 아침이 시작된다. “여름별장에서는 선생님이 가장 일찍 일어난다.” 소설의 첫 문장은 그렇게 열린다.
이 소설에는 두 건축가의 죽음이 등장한다. 첫 죽음은 쉰다섯에 심장발작으로 세상을 떠난 스웨덴 건축가 아스플룬드이다. 자신이 설계한 화장터에서 불태워졌고 자신이 설계한 ‘숲의 묘지’에 묻혔다. 그가 떠난 뒤 숲의 묘지는 20세기 건축 중 최초로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등록이라는 영예를 안았다. 또 하나의 죽음은 뇌졸중으로 떠난 무라이 슌스케이다. 라이트 문하를 거쳤던 그는 국립현대도서관 공모에 진력을 다했지만 당선자는 후나야마였고 그가 남긴 것은 선택받지 못한 계획안뿐이었다.
죽음의 길을 예술로 바꿔 놓은 아스플룬드와 작은 광선 하나까지 건축의 정신으로 본 무라이 슌스케의 이야기가 ‘어떤 공간에 있느냐에 따라 인간의 행복이 달라진다.’는 명제를 실감시켰다. “건축은 예술이 아니야, 현실 그 자체야.”라며 단호히 끊기도 하고, 때로는 “침대와 벽 사이는 말이야, 한밤에 잠이 깨서 화장실에 갈 때 한 손을 가볍게 내밀면 바로 닿을만한 거리가 좋아. 캄캄해도 벽을 따라서 문까지 갈 수 있고 말이지.…”라며 편안히 설명하는 무라이 선생은 지성적인 장인 이미지다.
무라이 선생이 떠나고 이십 구년이 지난 후, 사무실 동료였던 유키코와 부부가 된 중견건축가 ‘나’는 유키코와 함께 아오쿠리의 여름별장을 다시 찾았다. 책상과 의자, 책들은 물론 손때 묻은 연필까지 이십 구년 전 그대로였다. 무라이 선생의 구상에 따라 만들어진 국립현대도서관의 모형도 남아있었다.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지 못한 모형이었다. 하지만 ‘나’는 “건축은 준공되고 나서 비로소 생명이 부여된다. 그러나 선택받지 못한 건축이라고 해서 그 가치가 훼손된 것은 아니다. 생명이 불어넣어지지 않았을 뿐이다.”고 스스로에게 위로하며 스승을 그리워한다.
‘나’는 무라이 선생이 가르쳐준 대로, 낡은 신문지 한 장을 바통처럼 둥글려서 불을 붙인 뒤 난로에 연기가 잘 빠져 나가는지를 확인하고 우물 정(井)자로 쌓은 장작에 불을 피웠다. 그리고 치열했지만 아름다웠던 이십 구년 전 그 젊은 여름을 쓸쓸히 추억했다.
장작불이 ‘나’와 유키코를 뜨겁게 비추는 것이 대미다. “… 노랑 잎에 감싸인 여름별장의 굴뚝에서 연기가 피어오르는 모습이 머리에 떠오른다. 저녁이 되어 주위가 완전히 어두워졌어도 오래된 장작이 다 탈 때까지 우리는 말없이 난로 앞에 앉아 있었다. 장작이 타고, 타다 무너지는 것을 싫증도 내지 않고 바라보며 그 소리를 듣고 있었다." 아름다운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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