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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속 도시이야기

마산항지(1926년) - 40 - 건권(乾卷) / 제7장 동포발전사

by 운무허정도 2023. 3. 13.

제7장 동포발전사

 

17. 마산포의 대화재

광무 9년 즉 명치 38년(1905) 1월 5일 새벽, 마산포의 한 한인 집에서 불이나 때마침 차고 거센 바람이 불어와 부근 40채의 일, 청, 한인 집들이 연소되었다. 소방기계가 하나도 구비되지 않은데다가 동지(冬至) 후인지라 물조차 적을 때라 한인들은 아이고 비명을 지르며 바가지에 물을 길러 붓는 등 불길을 막으려 대혼잡이 벌어졌다.

이것이 마산포 최초의 대화재로 불리며 불 난 곳은 현재의 모토마치(元町)이며 구마산금융조합 서쪽 이웃으로 생각되나 소실 구역은 거기보다 동쪽 현재의 고토부키마치(壽町) 까지 퍼졌던 것이다.

필자가 대정 11년(1922) 6월 22일 오후 2시 반 집에 아무도 없을 때 조선인 신용균(申容均)의 집 온돌에서 불이 나 우리 집에도 불이 붙어 내지인 집 6채, 선인 9채, 중국인 1채와 함께 타버린 구역은 바로 그 전의 화재 터라고 한다.

그 후에도 과거의 불난 터에 세웠다는 중국인 음식점에서 불이 나 이웃인 사토 고노스케(佐藤子之助) 상점을 반소시킨 일이 있었다고 한다.

또한 대정 12년(1923) 중에는 가와이 약방(河合藥店), 아카츠카 상점(赤塚商店) 외 1호의 선인(鮮人) 상점이 전소됐고 마츠바라 하야조(松原早藏) 미곡점을 반소시켰다.

대정 14년(1925) 6월 18일 오전 2시에 왕년의 불난 터로 생각되는 조선인 가게 온돌에서 불이 나 2채를 전소하고 구마산금융조합 및 그 부속 가옥인 필자의 주거와 동쪽 이웃 이와타 간이치(岩田寬一) 철물상점을 반소시켰다.

같은 해 12월에는 필자가 대정 11년(1922)에 전소한 터에 신축 중이던 중국인 집에서 불이 나 두 이웃집을 전소시키고 구마산금융조합 사무소를 반소시켰다니 이 주변 일대가 얼마나 화마의 노여움을 사고 있는 땅인지 알 수가 있다.

 

18. 군항 예정지의 발표

러일전쟁의 결과로 일본제국의 위력을 인정한 한국정부는 광무 9년 명치 38년(1905) 9월 관보를 통해 진해만을 중심으로 부근 일원의 바다와 육지를 구획한 약도를 첨부하여 해군군항 예정지로 한다고 발표했다.

그 구역 내에서 토지와 가옥은 일본인 이외의 외국인에게 팔거나 빌려주는 것을 금지할 것을 고지했다.

이로써 일본정부는 그 권내의 일부 지역, 곧 왕년의 완포향(莞浦鄕)이었던 웅천군(熊川郡)의 웅중면(熊中面) 비봉(飛鳳), 현동(縣洞), 여명(余明), 도만(道滿), 중평(中坪), 행암(行巖) 등의 각 리에서 덕산(德山)에 이르는 일대, 웅서면 비봉리를 매수토록 착수했다.

원래 진해(鎭海)란 명칭은 현재의 창원군 진동면으로, 진해현(鎭海縣)이 소재하는 읍내 이름이었다가 명치 43년(1910) 초봄에 그 고유한 명칭을 웅중면(熊中面, 1912년에 마산부 웅중면 전부와 웅서면의 일부가 합쳐져 진해면으로 개편되었다)에 빼앗겨 진동(鎭東)이라 고쳐진 것인지라 그 당시는 우편물의 배달상 아주 복잡했기 때문에 구진해(舊鎭海)라 부르는 이도 있었다.

 

19. 지바무라(千葉村)의 출현

지바무라란 전에 러시아가 경영한 율구미포의 황량한 폐허에 나타난 지바현(千葉縣) 원양어업단이 사는 동네를 가리킨다.

명치 38년(1905)에 지바 현이 한해(韓海) 어업근거지로서 통감부와 무상차관을 체결해 다음 해 봄 40여 호의 어부 세대가 집단으로 와서 하나의 어촌을 이루고 이 속칭으로 일컬어지게 된 것이다.

지바 현의 원조를 받고 있기 때문에 현에서 수산기사 한 명이 와서 감독도 하고 있었다. 대정 4년(1915)에 보조금이 끊기고 어부들의 태반은 바로 귀향해 그 반환지는 마산중포병대대의 부속 군용지나 군용림이 되었다.

마산학교조합이 이곳의 관리를 위탁받아 교육비에 얼마간의 보급이 되고 있다.<<<

이 글은 창원시정연구원이 2021년에 번역한 『馬山港誌』(1926) 중 40번 째 것이다. 그림은 별도로 삽입하였다. 『馬山港誌』는 1900년대에 발간된 일본 문헌 중 가장 가치가 높은 책으로 평가 받고 있다. 저자는 앞서 게재한 『馬山繁昌記』와 같은 스와 시로(諏方史郞)이다. 본 포스팅은 비영리를 전제로 창원시정연구원의 양해를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