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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속 도시이야기

마산항지(1926년) - 39 - 건권(乾卷) / 제7장 동포발전사

by 운무허정도 2023. 3. 6.

제7장 동포발전사

 

16. 군사철도의 개방

군사철도 마산선이 개통됐을 당시에는 마산, 삼랑진 간에는 오직 창원과 진영의 두 개 역밖에 없었는데 러일의 평화가 회복되고 군사전용이 필요가 없어짐에 따라 이해 11월 1일부터 민간에 개방되어 일반 공중이 자유로이 탈 수 있게 되니 이주자는 확연히 격증하였고 다음 해 광무 10년 즉 명치 39년(1906) 봄부터 거류지, 마산포 및 그 중앙부 다 같이 건축공사가 대대적으로 이루어졌다.

일본인의 여관은 빈방이 있는 데가 없고 한인의 여인숙에도 좁은 온돌방에 모국의 동포가 네댓 명이 합숙하는 등 정도의 서광을 엿볼 수가 있게 된 것이다.

다음은 그해 6월 하순에 적어놓았던 필자(아래 사진)의 메모 몇 절을 발췌해서 수록하니 최고 자료로 삼았으면 한다.

 

나는 처가 있을 뿐 친척이 없는 홀가분한 세대이기 때문에 한국까지 왔던 몸이다.

월영동의 한옥 난방을 나와 군마현(群馬縣) 출신의 약제관 이이즈카 추타로(飯塚忠太郞) 씨가 경영하는 인풍당(仁風堂) 약국이 채 낙성되지 않았던 이층집에서 살다가 지금은 거류지 제51호 A구역 내의 점포를 겸한 주택의 호주가 되어 처를 솥두껑 장군으로 맡겼지만 형편은 어려워질 뿐, 처는 조산부의 간판을 걸고 있는데 임산부는 불과 두세 명뿐이었다.

집주인은 고이즈미(小泉) 기모노 가게를 운영하는 바, 재봉의 주문은 끊이지 않고 들어오니 호구지책은 되어도 보증금 석 달 치와 매월 15월의 월세를 감당하기에는 턱없이 모자랐다.

이 집은 가게로 6첩 방과 4첩 반 방이 있고 밖에는 부엌과 화장실이 있으며 길가의 가게로부터 부엌까지의 건평은 총 11평에 불과했다. 게다가 장롱에는 여닫이도 없고 받침대도 없을뿐더러 부엌에는 솥도 세수대도 없다. 가게 앞부분에는 나무문이 있어도 유리문은 없다. 더욱이 다다미도 실내문도 없다.

쌀 한 말에 80전 하는 시절, 장인의 공임을 합쳐 한 평당 27~28원만 내면 이 전셋집보다 훨씬 훌륭한 신축 가옥을 지을 수 있을 텐데, 이 집의 월세가 너무 비싼 것에는 놀라서 말이 나오지 않는다.

이때가 마산 부자들이 폭리를 취한 전성시대이며 그때의 시세이니 어쩔 도리가 없다. 다만 대곡천에 걸린 반룡교의 서남쪽에는 후쿠야(福屋)라는, 도이 마타헤이(土井又平) 씨가 음식점을 하는, 삼나무 껍데기로 외장을 한 가게가 한 군데 있을 뿐이었다.

그 북쪽에는 그래도 몇 채 가게가 나란히 서 있으며 다나카 히코기치(田中彌興吉) 씨의 철물가게, 와카모토 추지로(若元仲次郞) 씨의 에비스(蛭子湯) 목욕탕, 오제키(大關) 양품점, 오카자키 가헤이(岡崎嘉平) 씨의 요정 간즈키(玩月), 우리집 주인의 고이즈미(小泉) 기모노점 등 모두 다 당당한 이층 건물이다. 후쿠야의 맞은편이 요정 모치즈키(望月)이며 거기서 서쪽 일대(현재의 사카에마치, 아케보노마치 혼마치 3, 4정목)와 전에 영사관인 이사청 아래 사카에마치(榮町) 모퉁이에서 세관 부두 입구 사이에는 그 좌우에 상가가 즐비해 마산의 긴자가(銀座街)라 불려진다.

수산회사의 한 지역에는 어부들의 집이 부락을 이루고 있다. 히로시게 세츠노스케(弘重節之助) 미곡점, 세 집이 이어진 나가야(長屋)의 끝 집이 나카하라 신이치(中原新一) 잡화점, 다음이 시게무라 우이치(重村宇一) 잡화점, 다음이 다나카 추르마츠(田中鶴松) 잡화점, 그 서쪽 이웃이 오사카상선회사 마산하객취급점, 빈집을 건너서 마산우편국, 그 뒤 길가에는 요정 아즈마(吾妻), 우편국과 비스듬하게 맞으편에 마산세관지서가 있고 그 일실(一室)에 제일은행 마산출장소 지배인이자 법학사인 나카무라 고키치(中村幸吉) 씨가 근무하고 있다. 거기서 동쪽으로 마산교까지는 빈터다.

우편국의 뒤쪽에는 우편국 관사 세 집이 있는데 그 위쪽 즉 러시아영사관 문전 부근에는 요정 나루토(鳴戶), 고쿠라안(小倉庵)이, 또한 이사청 아래쪽 사카에마치 네거리의 좌우에는 요정 산수이(山水), 쇼리(勝利), 이치마루(一丸), 아사히(旭), 이로하(いろは) 등이 하나의 유곽지대를 이루고 있다.

모치츠키에서 서쪽으로 가는 네거리의 좌우에는 점포들이 점점이 띄어서 있고 사카에마치 모퉁이 맞은편에 니시다(西田) 주조점이 있다. 내가 일전에 빌려 살던 이이즈카 인풍당(飯塚仁風堂) 아래 낮은 편, 현재 혼마치에 가까운 서쪽에서 후쿠다(福田) 주점이 있다.

남쪽 이웃 혼마치 모퉁이에는 스미다 마사키치(隅田政吉) 씨의 화장품 가게가 있고 옆에는 마산시보사(馬山時報社)의 간판이 달랑거리고 있다.

그 동쪽 이웃에 마산목욕탕이 신축 중에 있고, 모치즈키 여관은 그 남쪽 이웃으로 마산교 서남 모퉁이에 있다. 이 여관은 후지사키 도모히데(藤崎供秀) 씨의 건축으로 듣고 있는데 이층 건물이기는 하지만 별로 내세울 만큼 훌륭한 것이 못 된다. 단지 넓어서 마산 제일의 여관인 것이다.

히로시 세이조 씨가 사는 하자마(迫間) 지점은 첫째가는 건축물인데 서쪽에 붙어있는 집에서는 조산부 유카와 우미에(湯川海江) 씨가 산다. 또한 그 서쪽 이웃에는 사사키 우마지로(佐佐木馬次郞) 미곡점이 있을 뿐이다.

동쪽으로 가다가 해안로 모퉁이에는 철물을 취금하는 하마다 시키주로(濱田七十郞) 가게가 있다. 그 뒤쪽 도로 동쪽은 매춘굴로 불리고 두세 음식점이 장사를 잘 하고 있다.

하마다 씨 집에서 동쪽으로 가면 창원교 부근에 오다 젠시로(小田善四郞) 씨의 이층집이 있고 거기서 더 동쪽으로 가면 철도 매립지를 지나 마산역에 이르는 유일한 도로인데, 길가의 허술한 건물에서는 병사가 승차권을 발행하고 있다.

역이라 해도 비바람을 막아주는 건물이 있는 것이 아니며 단지 흙을 올려 다진 터에 4인용 의자를 두고 있을 뿐이다. 그 전방 북쪽에 가면 나지막한 언덕이 누워 있는데 정상에는 망루가 있어 철도감의 부원들이 바람 쐬거나 달놀이 하는 휴게소로 이용되고 있다.

창원교에서 비스듬히 신월동을 향해 올라가는 도로는 매립한 곳인데 나는 그 길가에 서너 번 망둥어 낚시를 해 본 적이 있다. 거류지에서 오는 노선은 여기서 막히고 그 동쪽 일대는 모두 갈대밭이다.

그 경사 도로의 가로에는 점차 신축의 기초를 서두르는 데가 있으며 이 동네 높은 곳에는 치과의사 여쿠라 노부요시(興倉信義) 씨가 신축 가옥에서 개업하고 있다.

마산포에 이르는 도로로서는 이 신월동에서 전방은 한국식의 길 폭이 5척도 안 되는, 굽이굽이 도는 좁은 길 밖에 없다. 장군교 전후에는 일찍이 동포가 띄엄띄엄 살고 있는 연동식 가옥이 세워져 있음을 발견한다.

척산교(尺山橋)에서 공세산(貢稅山) 밑으로 나가는 길에는 ‘서성리수백년지음정(西城里數百年之飮井)’이라 표시된 우물이 있다. 동행했던 고쿠부 야스타카(國府保敬) 씨는 옛날 몽고 정동군(征東軍)이 체재 중에 팠던 것이라 설명하고 옆에 있는 바둑돌 같이 생긴 네모난 구멍이 뚫린 돌 평판은 당시 벼를 갈았던 도구라고 들려주었다.

여기서 철도 건널목을 지나면 좁은 길이 내리막길로 되어 길가 양측에 도깨비 얼굴을 새기고 아래에는 천하대장군, 지하여장군이라고 적은 표목이 몇 개 세워져 있는데 한인 미신으로 방역신(防疫神)이라 사료된다.

조금 올라가니 야마모토 구니지(山本國次) 씨 집이 나온다. 그 집은 화양절충의 건물로 시의 구역 개정 후 하쿠유우(博友) 상회 터에 지어진 것이다. 거기서 수십 걸음 거리에는 가옥은 없고 큰 느티나무가 가지를 많이 뻗고 있는데 그 아래 시냇물이 넘쳐흘러 걷는데 애를 먹었다.

이 길을 앞으로 나아가면 한국 순경이 있는 경무서가 나오고 오른쪽으로 가면 후지사키마치(藤崎町)이다. 가고시마(鹿兒島) 현 출신으로 과거 야마카타(山形), 히로시마(廣島) 두 현에서 경찰부장으로 근무한 후지사키 도모히데(藤崎供秀) 씨가 한인 동네 가운데에 두세 채의 함석지붕(亞鉛葺)의 일식 전셋집을 건설한 관계로 이름을 따 속칭이 된 것이다.

후지사키마치에서 더 가면 창원감리서 문전이 나오고 그 내외에는 행감리선정비라든가 불망비라는 수많은 돌탑이나 철판이 세워져 있어 흥미롭다.

이 마산포에 사는 일인 동포들은 모두 한옥에 가게를 내고 온돌방에서 따뜻하게 지내면서 한인을 상대로 잡화점을 내며 한두 개의 미곡상도 섞여 있을 뿐이다. 그리고 청나라 사람과 한국인과도 누추한 골목에서 상권을 다투고 있다. 아주 무기력해 보이는 그들의 이면은 복잡하다. 한국통화인 네모 구명이 난 둥근 엽전 상평통보(常平通寶)는 개항 전까지는 모두 우리 1리(厘, 화폐단위로 1전의 10분의 1) 어치로 통용되었는데, 그 동전 모양에는 크고 작은 것, 두껍고 얇은 것이 일정하지가 않았다.

우리 동포 상인들은 그 대형의 것을 비축해 두었다가 화폐의 재료가 되는 지금(地金)으로 내지에 이송하여 이익을 얻는 것이다. 이 엽전은 뒤에 시가(時價)가 개정되어서 한때는 한 개에 1리 2모(毛, 화폐에서 1전의 100분의 1, 1리의 10분의 1)가 되거나 되기도 하고 혹은 1리 7모가 되는 식으로 나날이 시세에 변동이 있는 것이다.

동포들은 그 차액에서 이익을 보고 상품 판매에서도 이익을 보는 식의 한 엽전에서 3배의 득을 보는 일화삼득의 이익을 챙기다 보니 그 지갑 사정은 사는 모양과는 달리 항상 여유가 있다는 것이다.

한국 정부 발행의 우리 5전에 상당하는 2전 5푼(分)의 백동화(白銅貨, 1892년(고종29)에 주조된 2전5푼짜리 화폐), 우리 1전에 상당하는 5푼 동화는 아직 마산이란 시골 동네에는 회송되지 않아 전부 일정치 않는 상평통보만이 들고 있는 것이다.

마산포 해안에 악취를 풍기고 있는 좀 큰 선착장의 동쪽 후미진 데에 별돌로 된 창고 같은 것이 건설 중에 있는데 마치 쓰레기더미에 학이라도 내려앉은 것 같은 감이 들었는데 듣자하니 마산포의 동업자조합이 건설하는 미유송함석유(米油松函石油) 창고라 한다.

우선 먼저 말이 통하지 않으니 한인과의 매매상에도 간혹 충돌이 일어나고, 또한 한국 엽전인 공방원경(孔方圓卿) 상평통보가 아니면 일정 통하지 않는다는 불편함이 있음에도 땔감이나 숯, 생선이나 채소는 동포 상인의 터무니없이 비싼 것보다 한인 행상의 싼 것을 사고 있으니 불편하기도 하다.

조선은행 발행의 종이 질이 조악한 10전, 20전, 50전, 1월, 5월이란 지폐는 동포 사이에서도 별로 달갑게 생각되지 않는데, 한인들은 더욱더 이 지폐를 싫어하는 것만 같다.

어느 동포가 진주로 가려고 반성의 한인 여인숙에 묵고 다음 날 아침 숙박비로 20전 은화를 내었더니 주인은 이 엽전은 기차를 탈 때의 기차표라며 이것으로 자신을 속이려 한다고 아주 화를 내자 사람들이 모여들어 그 사람을 포위했다. 여객은 읍내에 동포가 하는 잡화점이 있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다급하게 달려가 사정을 얘기해 은화를 공방경 엽전과 교환하고 돌아와 지불하니 무사했다는 것이다.

당시 한국의 양반이 결성에 갈 때도 공방경을 꿰매어서 발에 싣거나 아니면 인부가 짊어서 갔다고 한다.

쌀 한 말 80전, 달걀 한 개 4리, 땔감 한 짐 20전, 숯 한 짐 25전, 민물장어 크고 작은 것 한 바케스 20전

 

이상은 거류지에서의 불편함의 일부인데 마산포의 동포는 모두 한국말을 사용하여 한국인과 아침과 오후의 시장터에서 일용품을 구매하니 하나도 불편함을 느끼는 일은 없다고 한다.<<<

 

이 글은 창원시정연구원이 2021년에 번역한 『馬山港誌』(1926) 중 39번 째 것이다. 그림은 별도로 삽입하였다. 『馬山港誌』는 1900년대에 발간된 일본 문헌 중 가장 가치가 높은 책으로 평가 받고 있다. 저자는 앞서 게재한 『馬山繁昌記』와 같은 스와 시로(諏方史郞)이다. 본 포스팅은 비영리를 전제로 창원시정연구원의 양해를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