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장 거류민단 시대사요(時代史要)
1. 거류민단의 조직
우리 거류민회가 마산이사청 미마스 구메키치(三增久米吉) 이사관을 감독관으로 거류민단제를 시행한 것은 광무 10년 즉 명치 39년(1906) 9월 1일이었다.
이보다 앞서 일본정부가 경성에 한국통감부를 두게 되자 각지에 있는 영사관을 폐지하여 이사청을 두고 재근 영사를 바로 이사관으로 임명했다.
이때 내외의 교섭에 기민하게 대처하고 평민주의의 원활함이 너무 좋다는 평을 들어온 미우라 야고로(三浦彌五郞) 영사는 경성이사청 이사관으로 전보되어 이해 2월에 부임하러 떠났다.
경성 영사였던 미마스 구메키치 씨가 그 후임으로 마산 이사청 이사관으로 부임하게 된 것이다. 씨는 삿포로농대 출신의 농학사로 미국공사관 서기관부터 구미 각지의 영사를 역임한 관권 만능주의의 사람이라 제국대학 출신의 법학사로 원만하고 활달한 미우라 씨를 따르던 사람들은 다 미마스 씨에 아연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미마스 이사관은 민단제도의 기관을 운영해야 할 정식 민장(民長)의 추천 허가를 받을 때까지의 기간에 일시적으로 전 거류민회 민장인 미우라 야고로(三浦彌五郞) 씨에게 민장 사무대행을 명하였다.
그리하여 미야하라 대행은 민단기관을 운영하기 위해 바로 민회의원 10명의 선거를 치렀다. 당시의 민단제 시행구역 내의 동포 호구수와 인구는 다음과 같다.
각국거류지 호수 316호 남자 774명 548명
마산포 호수 216호 남자 405명 여자 298명
중앙부(완월교 동쪽에서 척산교까지)
호수 128호 남자 273명 여자 135명
합계 호수 660호 남자 1,452명 여자 981명 합계 2,433명
의원 선거의 결과는 아래와 같다.
거류지 히로시 세이조(弘淸三)
시게무라 우이치(重村宇一)
히로시게 세츠노스케(弘重節之助)
후지하라 다케키(藤原建樹),
오다 젠시로(小田善四郞)
마산포 마츠바라 하야조(송원조장)
모리야마 이지로(森山亥次郞)
히사에 간사쿠(久重勘作)
야마모토 고조(山本好藏)
다나하지 센노스케(棚橋仙之助)
민단서기로는 마츠자와 게이조(松澤慶三), 하라다 나오미(原田直美) 양 씨가 채용되고, 민단 사무실은 진해교 부근의 러시아인 소유의 빈집에 개설하고 그 별실에는 소학교를 이전했다.
2. 민장의 전형(銓衡)
민장은 민회의원의 전형 추천에 의한 것이어서 거류민 전반은 모두 미야하라 씨가 촉망받고 있어 그의 추거를 의심하는 사람은 없었지만 의원 중 일부에서는 씨의 평소에 무사적(武士的)이고 담백한 태도를 싫어하는 사람도 있었다.
이와 동시에 부산거류민단 서기 제1과장인 마에다 에이이치(前田榮一) 씨가 그동안 비밀리에 선서운동을 획책해 왔다는 풍문이 나돌기도 했다.
과연 마에다 씨가 추거되어 이사관의 인가를 얻기에 이르렀다. 당시 미야하라 씨가 남긴 사업으로는 굳이 기록할 만한 것은 없지만, 하마마치에 있는 심상소학교는 인구가 격증함에 따라 아동의 취학을 거절할 수밖에 없는 사태가 되자 한때 응급책으로 마산포의 산기슭에 있는 후지사키 도모히데(藤崎供秀) 씨 소유의 가옥 한 채를 빌려 분교를 두는 계획과 또한 심상소학교에 고등과 병설의 신청을 하였다.
다만 인가를 못 받고 물러서게 되어 마에다 민장이 되고 나서야 비로소 인가를 얻어 교장 겸 훈도로서 사가(佐賀) 현 사범학교 부속 소학교장인 나가지마 데이지로(中島訂治郞) 씨를 초빙했다.
무라이 아이(村井あい), 다케시타 도모(竹下智) 두 훈도는 본교에, 오가타(緖方) 전 교장은 스와 도요(諏方とよ)와 마산포 분교에서 심상과 1, 2년 아동을 위해 교편을 잡게 되었던 것이다.
여기서 저자의 개인적인 몇 가지 일화를 소개한다.
아아, 조산부란 간판만으로 단 한들의 환자가 올뿐, 나의 집사람은 나날이 재봉에만 여념이 없다.
나가지마 교장이 갑자기 반문하여 말하기를 “부인이 오카야마 고아원에서 기숙사의 주부(主婦)를 하셨다고 들었는데, 얘들에 대한 사랑은 잘 이해하고 계실 줄 아니 마산포 분교는 동포 심상 1, 2학년의 꼬마들만을 수용하고 있으니 부디 분교의 얘들을 돌봐 주었으면 합니다.”고 했다.
나는 처가 학력이 없다며 이 청을 사양했는데, 조산부 학교를 졸업할 정도의 학력이 있으면 남음이 있다고 간청하니 나는 이를 마침내 승낙했는데 후에 처한테는 많은 빈축을 샀다.
처는 오전 10시경 민단사무소에 가서 한 장의 사령서를 받고 돌아왔다. 나가지마 교장과 다른 교원들로 만난 모양이다. 사령서를 보니 “마산심상고등소학교 교원으로 명함. 분교 근무, 월 수당 15원을 지불함. 명치 39년(1906) 11월 6일 마산거류민단 민장 마에다 에이이치”라고 적어 놓았다.
처는 오늘 하카마(袴 고, 기모노 위에 입는 주름 잡힌 정장용 치마)를 입고 마산포 분교에 갔다.
하카마 모양은 왠지 건방져 보였다. 애당초 나카지마 교장에게 조산부의 간판을 달고 있는 이상 언제라도 임산부의 진찰을 해야 할 때가 있을지 모르겠고 또한 현재 진찰 중인 임산부도 한두 명 있기에 만약 출산 시에는 학교를 쉬어도 괜찮은지 물어 봤더니 지장이 없다는 언질은 받아 놓고는 있었다.
과연 오늘 오후 3시 반 우리 집 뒤에 있는 기라쿠자(喜樂座) 배우의 안사람이 출산할 것 같다고 급히 왕진해 달라는 연락이 왔다.
처에게 알리려면, 아직 전화가 마산에는 가설되지 않아 내가 집을 비우고 마산포까지 달려가야 했다.
거류지에서 가는 길은 역전을 지나 비탈진 장군교에 이르는 길이 열려있지만 역전 앞은 굽 높은 게다(足駄)가 박힐 만큼 진흙길이다.
신월동을 거치는 길은 뱀이 기어가듯 고부랑 우회길이다.
어느 쪽으로 갈까 고민하다가 진흙길을 결심하고 간 것이 오후 4시다. 비탈진 길의 중간쯤에서 퇴근한 처를 만났다.<<<
이 글은 창원시정연구원이 2021년에 번역한 『馬山港誌』(1926) 중 41번 째 것이다. 그림은 별도로 삽입하였다. 『馬山港誌』는 1900년대에 발간된 일본 문헌 중 가장 가치가 높은 책으로 평가 받고 있다. 저자는 앞서 게재한 『馬山繁昌記』와 같은 스와 시로(諏方史郞)이다. 본 포스팅은 비영리를 전제로 창원시정연구원의 양해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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