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 마산항의 폐쇄
전년부터 착수한 진해의 군항 건설은 거의 완성에 가까워지고 또한 중앙에서 방사선식으로 뻗을 8대 가로가 구획되어 진해 시가지도 그 토지의 대부도 거의 완료되었다.
동양에 자랑할 만한 시가지가 출현한 것은 명치 42년(1909) 여름 이후의 현상이다.
이 때문에 진해에서 살기를 원하여 내지에서 오는 이주자는 물론 조선 곳곳에서 오려는 자들은 진해의 건축이 완성될 것을 기다리는 동안 잠시 마산에서 살게 된다. 명치 43년(1910) 말에 이르는 1년 반 정도의 기간은 마산개항 이래 전성기로서 한때 호수가 3천, 인구가 7천이라 전해졌다.
이들은 점차 진해로 이주해 갔을 뿐더러 자유항으로서의 마산은 명치 43년(1910) 12월 말로 폐쇄되어 외국선은 물론 우리 국적선이라도 세관의 허가 없는 기선이고 범선은 함부로 출입이 금지되었다. 이런 쇠퇴 경향이 뚜렷해지면서 마산에서는 퇴거자가 속출하게 되고 신마산 방면의 좋은 곳에서 전세의 딱지가 붙을 지경이 되었으며 또한 집을 해체하여 부산, 대구 등으로 이축한 것도 적지 않았다.
이유는 마산만 건너에 있는 진해에 해군 시설물이 출현한 결과라 하지만 실로 세상 사물은 항상 변천하여 잠시도 가만히 있지 않는다는 유위전변(有爲轉變)의 세상임을 다시금 느끼게 하였다.
그래도 마산포 방면은 아무런 영향을 받지 않았던 것은 불행 중 다행이라 하겠다.
35. 전등이 반짝이기 시작하다
명치 44년(1911) 5월 23일 일한와사(日韓瓦斯) 전기회사가 운영하는 장군천 하류 동쪽에 건설된 마산지점(아래 사진)에서 마산의 관민 150여 명을 초대해 개업식이 거행되었는데 무대, 연회석과 모의상점 등을 설치하고 여흥으로 요곡(謠曲), 사츠마비파(蕯摩琵琶), 치크젠비파(筑前琵琶), 검무(劍舞), 니와카(仁和加, 가면을 쓰고 만담을 하거나 노래를 하는 전통연회), 예기(藝妓)들의 춤 등이 공연되었다.
접대의 즐거움이 가라앉을 무렵에는 모의상점이 되며 저녁노을과 촛불 빛이 훤할 때 큰 굴뚝 위에서 전구가 연결될 세 가닥 줄이 금(金) 자형으로 걸리니 처음으로 전등을 보는 선인들을 많이 놀라게 했다.
이것이 바로 오늘의 경성전기주식회사 마산지점의 전신인데, 전류를 공급해 불야성으로 만든 곳은 마산, 진해, 창원, 진영 네 시가지이며 낮에 공급하는 전력도 역시 적지 않았다.<<<
이 글은 창원시정연구원이 2021년에 번역한 『馬山港誌』(1926) 중 58번 째 것이다. 그림은 별도로 삽입하였다. 『馬山港誌』는 1900년대에 발간된 일본 문헌 중 가장 가치가 높은 책으로 평가 받고 있다. 저자는 앞서 게재한 『馬山繁昌記』와 같은 스와 시로(諏方史郞)이다. 본 포스팅은 비영리를 전제로 창원시정연구원의 양해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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