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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속 도시이야기

마산항지(1926년) - 59 - 건권(乾卷) / 제8장 거류민단 시대사요(時代史要)

by 운무허정도 2023. 8. 7.

36. 제4회 민회의원 선거

조선은 이미 우리 제국의 판도에 들어왔는데 거류민단제는 종래부터의 관계상 아직 철폐되지 않아 명치 45년(1912) 3월 2일 제4회 민회의원 선거회를 개최했다.

민단제의 철폐를 목전에 두고 있어서 입후보자의 열기는 별로 오르지 않았다. 특히 마산포야말로 별 영향을 받지 않았지만 신마산 방면은 날로 그 호수와 인구가 줄어들어 한적해졌으며 전년까지 16명이던 의원수도 전처럼 12명으로 감소되어 선거전은 심항 경쟁 없이 치러졌고 당선자는 다음과 같다.

신마산 방면 ; 히로시 세이조(弘淸三), 오카 요이치(岡庸一), 오키타 토시타로(沖田敏太郞), 나카지마 오리조(中島織三), 마츠모토 다조(松本多藏), 사토 토요스케(佐藤豊介), 미야케 요시로(三宅吉郞)

마산포방면 ; 마츠바라 하야조(松原早藏), 히사에 간사쿠(久重勘作), 고가 고헤이(古賀公平), 나츠메 데츠조(夏目哲三), 요시다 마스터로(吉田益太郞)

당선자는 최종시기의 의원으로서 대정 3년(1914) 3월 말까지 계속해 3개 조의 은잔 포상과 하사를 받는 행운을 보게 되었다.

그 사이 열심히 일을 하여 복잡하게 문제가 되었던 마산포 시구개정을 실현하였다. 1호선부터 5호선가지의 간선도로를 완성하는 대사업에 종사했던 것이다.

당시 부산의 하자마 후사타로(迫間房太郞) 씨의 사업인 구마산 모토마치(元町) 앞바다 약 1만2천 평의 매축공사가 진행되고 있었다. 개량 노면의 높은 요철지는 깎아내어 개량 지역의 낮은 곳에 쌓아 메꾸는 수량 이외에는 남은 흙은 그 매립지에 공급되는 일거양득의 형세가 된 것이다.

다만 제6호선 이하 제13호선까지는 땅값이 올라가는 바람에 단행하지 못한 것이 유감스럽다.

기타 현저한 업적 없이 대정 3년(1914) 3월 말일, 마산거류민단의 사업은 마산부와 민단을 대신해 생겨난 학교조합에 인계되어 민회의원은 자연 소멸하게 된 것이다.

 

37. 마산포 매축지

마산포 매축지란 현 모토마치(元町) 앞바다를, 부산의 하자마 후사타로 씨가 종래 배가 정박하던 곳은 포함해 남쪽으로 약 1만2천 평의 매축을 수행하고 있는 데를 가르킨다.

<하자마 후사타로의 모토마치(元町, 남성동) 매립지, 1916년 경 지도>

착수는 명치 43년(1910) 중이며 대정 2년(1913)에 그 태반이 준공 됐는데 방파제가 완성된 것은 대정 13년(1924)이었다.

중앙의 정박소는 오목한 모양으로 되어 남풍을 막는 벽을 세운 격으로 방파제 안에 있다.

길과 동네를 세로와 가로로 구획하여 상점과 주거는 저의 건축되었지만 아쉬운 점은 파게 된 우물의 수질이 좋지 못하다는 점과 그 전세료가 비교적 비싸다는 것이다.

오사카상선회사의 일본 고베, 오사카와 마산 사이의 정기직항선의 화물 작업은 마산세관 부두에서 행해지는데 조선우선(朝鮮郵船) 회사와 기타 회사의 사외선(社外船)은 모두 이 매립지 부두를 주로 사용했다.

가을 출곡(出穀) 시기에는 해안 부두에 쌀푸대가 벽처럼 쌓인 풍경은 마산의 연중행사의 하나로 꼽힌다.

회고컨대, 아직 매립사업이 없을 때 타원형의 정박해역의 배 옆에 틈을 메꾸듯 낡은 한국 배가 들어와 정박한 적도 있었는데 이때 분뇨가 그냥 흘러나와 냄새가 지독하기도 했다.

그 긑머리에 마산석유조합의 사업으로 미국 오일스탠다드회사의 송함(松函) 석유창고가 연와(煉瓦)로 건축되었을 때는 실로 쓰레기장에 학이 내려앉은 듯했는데 지금은 그 모습도 없이 모토마치 우편소 건물을 비롯하여 좌우에 일본인, 조선인의 집들이 빼곡히 들어서 있다.<<<

 

이 글은 창원시정연구원이 2021년에 번역한 『馬山港誌』(1926) 중 59번 째 것이다. 그림은 별도로 삽입하였다. 『馬山港誌』는 1900년대에 발간된 일본 문헌 중 가장 가치가 높은 책으로 평가 받고 있다. 저자는 앞서 게재한 『馬山繁昌記』와 같은 스와 시로(諏方史郞)이다. 본 포스팅은 비영리를 전제로 창원시정연구원의 양해를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