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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속 도시이야기

마산항지(1926년) - 72 - 곤권(坤卷) / 제4장 보건(保健) 의사(醫事) 산파(産婆)

by 운무허정도 2023. 11. 6.

 2. 의원(醫院) 의사(醫士)

의사기관(醫事機關)이 마산에 마련된 것은 명치 37(1904) 중이며 미우라 야고로(三浦彌五郞) 영사의 초빙으로 제대(帝大) 출신 의학사 아사미 쇼이치(淺見庄一) 씨가 와서 개업하였는데 얼마 있지 않아 러일전쟁에 군의(軍醫)로 소집되어 버렸다.

동년 중에 다시 제대 출신의 의학사 도쿠나가 고이치(德永吾一) 씨를 초빙했다.

당시 조선에서 의학사의 개업이란 마산, 부산, 경성의 세 곳뿐이라 크게 마산의 자랑거리였던 것이다.

도쿠나가 의학사는 대정 13(1924) 초에 그가 이끄는 사립마산병원을 금 3만 원으로 마산부에 매각하고 본인은 토오리마치(通町) 4정목에 은둔하며 약국을 갖추지 않고 진찰하고 처방전만 줄뿐이며 평소에는 낚시나 하고 온천, 광천을 탐사하는 데 소일했다.

사립마산병원을 매수한 마산부는 현상 그대로를 경상남도에 기부해 도립마산자혜병원(道立馬山慈惠病院, 현재의 도립마산의료원 전신)이 탄생하였으며, 소학교 교의를 위탁받기도 했다.

구비된 것은 내과, 외과, 산부인과에 한정되어 일요일, 경축일, 기타 휴일에는 다른 관공서와 같이 휴원하는 순전히 관료식 운영이었기 때문에 부민의 기대를 만족시키지 못한 감이 없지 않다.

이외의 개업의로는 병원이라는 간판을 건 데는 혼마치 2정목에 오카야마의전(岡山醫專) 출신의 마에하라 가로쿠(前原嘉六) 씨가 있다.

마산형무소 촉탁의사인 교토의전 출신의 히노 타케오(日野武男) 씨를 부주임으로 삼아 열심히 진료에 종사하고 있어 크게 호평을 받고 있다.

미야코마치(都町) 1정목 미야코다리(都橋) 동남쪽에 가나자와(金澤)의전 출신인 전 육군 일등군의(一等軍醫) 미나가미 슌조(水上俊三) 씨가 있다.

마산고등여학교 교의를 촉탁받은 과언실행(寡言實行)의 사람인지라 신뢰가 두텁다. 구마산 고토부키마치(壽町)에는 오카야마의전 출신의 오타니 소지로(大谷惣次郞) 씨가 있어 부인과를 잘 본다는 평이 높다.

구마산의 도미마치(富町)에는 전 육군군의였던 오사카고교 출신의 다카키 신조(高木新藏) 씨가 있으며 그 역시 과언의 실행가로 신뢰를 얻고 있다.

선인(鮮人) 측에서는 구마산 요로즈마치(萬町)에 삼성의원(三省醫院)이 있는데 오카야마의전 출신인 김형철(金炯轍, 1891-1965. 1918년 개원한 마산 최초의 조선인 의사. 19193.1운동 당시 부상자 치료에 헌신해 신망을 얻기도 했다.해방 후 초대 마산시의사회 회장 역임. 아래 사진은 김형철 선생이 운영한 삼성의원 자리에 세운 기념석) 씨가 운영하고 있다.

 

이와 나란히 학산의원(鶴山醫院)이 있는데 기독교와 연관이 있다고 전해지는 의사 이순필(李順弼, 1892-1952. 세브란스 의전 졸업 후 1922년 마산에서 개원. 1925년 문창교회 장로. 1946년 마산YMCA 초대 이사장, 1947년 창신중학교 재건기성회 회장과 초대 재단 이사장 등을 역임한 의사이자 기독교인. 아래 사진) 씨가 운영하고 있다.

 

다와라마치(俵町)에는 제동의원(濟東醫院)이 있는데 내과, 소아과, 안과, 산부인과의 4개 과를 표방하여 어느 과든지 상당히 많은 선인 환자들이 찾아오고 또한 환자 입원실도 구비되어 있다.

치과, 구강외과 전문의로는 미야코마치 1정목에 있는 노무라 치카토시(野村親俊) 씨와 마산포 요로즈마치에 선인인 고상목(高相穆, 19219월 시행한 제1회 조선총독부 치과의시험에 합격해 그해 12월 마산에서 개원한 마산 최초의 치과의) 씨가 있다.

두 사람이 지방의 고객을 모으면서 그 기교를 겨루고 있다.

게다가 침이나 뜸 요법으로서 마산포 신마치(新町)에 아마츠류(天津流)의 츠시타 미노루(津下實) 씨와 미야코마치 1정목에 수기야마류(杉山流, 침의 시술법의 하나인 관침법(管鍼法)을 창시한 스기야마 와이치(杉山和一)로 부터 비롯된 침구유파(鍼灸流波))의 도쿠시마 하루마스(德島春益) 씨가 있다.

두 사람 다 안마요법도 하는데 보통 안마가 아닌 것이 유감스럽다.

 

3. 산파(産婆)

혼마치(本町) 2정목에 마산에서 가장 오래된 이사미(勇美) 씨 부인 조산부 츠게 우미에코(柘植海江子) 씨가 있다.

명치 37(1904) 중 당시의 마산영사 미우라 야고로(三浦彌五郞)의 부인이 임신했을 때 부산에서 오게 되어 개업했다.

조산(助産) 기관이 완비될 때까지 영사관으로부터 상당한 보조를 받고 있었던 이 분의 원래 성은 유카와(湯川)이다.

마산에 온 이후 오늘까지 23년 동안이나 한 일에 정근하여 신마산 방면에서 최우량의 인기를 얻는 동시에 대성공자가 되기도 했다.

또한 미야코마치 2정목에는 도쿄제국대학 졸업임을 표방하는 조산부 니시하라 마스에코(西原增枝子) 씨가 있다.

명치 40(1907)에 개업한 고참인데 성급하게 성공하기를 노렸는지 혹은 가정 사정 때문에 그랬는지 빈번히 업무를 쉬는 일이 잦았다.

도쿄에 가고 또 평양에 떠나고 혹은 경성에 옮겨서 혹은 간호부 일을 전문으로 한다는 등 여러 일이 있었던 것이다.

마산에서의 고객들의 기반을 잃고, 대정 14(1925) 말에 돌아와서는 종전처럼 조산부 일과 간호부회 일을 병행했지만 일단 잃어버린 고객의 회복은 여의치가 않은 듯하다.

두 분 외로 미야코마치 1정목에 조산부 사이키 가나요(齋木カナヨ) 씨가 개업하고 있으나 고객은 많지 않은 것 같아 주로 간호부 업무에 종사하고 있다고 한다.

마산포에서의 조산부 나카가와 나츠코(仲川夏子) 씨는 가업인 잡화점이 다망하고 연세가 드셨기 때문에 폐업을 했다.

사이와치마치(幸町)에 신축하여 개업한 저자의 처 스와 도요(諏方豐)는 명치36(1903) 야마가타(山形) 현 조산부 양성소 졸업과 동시에 고향인 센다이(仙臺) 시에서 개업하다가 명치 38(1905)에 오카야마 고아원에 전근하여 한 기숙사의 30명 아동의 어머니 역할을 했다.

명치 39(1906) 3월 도한(渡韓)하여 마산에서 개업한 이래 21년 동안 특히 최근 2~3년 전부터는 선인 임부도 내지의 조산부를 많이 신뢰하여 오게 되었고 그 진찰, 분만시킨 총수 1300건 중에서 선인은 60여 건에 이르고 있다.

부언해서 적거니와, 선인 임부의 임산에는 이웃에 있는, 출신을 경험한 부인이 수발들어 분만시키는 것이 보통인데, 중산계급 이상은 다 내지인 조산부를 신뢰해서 찾아오는 경향이 있다.

선인 부인을 조산부로 양성함이 급선무인데도 우리 마산부 내에는 아직 한 명의 조선인 조산부가 없다는 것이 다소 아쉬움이 남는다는 것이다.<<<

 

이 글은 창원시정연구원이 2021년에 번역한 『馬山港誌』(1926) 중 72번 째 것이다. 그림은 별도로 삽입하였다. 『馬山港誌』는 일제강점기에 발간된 일본 문헌 중 가장 가치가 높은 책으로 평가 받고 있다. 저자는 앞서 게재한 『馬山繁昌記』와 같은 스와 시로(諏方史郞)이다. 본 포스팅은 비영리를 전제로 창원시정연구원의 양해를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