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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속 도시이야기

김형윤의 <마산야화> - 137. 노·일(露·日) 마산포 경영

by 허정도 2017. 2. 13.

 

137. ·(·) 마산포 경영

 

 

·(·) 양국인의 마산포 경영에 대하여서는 일본 외교문서 제33권에 당시 마산 일본 영사 판전중차랑(坂田重次郞)이 일본 외무대신에게 한두 가지의 보고 즉 마산포에 있어서 노국간의 경영 비교의 건(19001130일자)에 있다.

 

여기서는 이를 중심으로 기타를 참고하면서 노일 양국 간의 마산포 경영을 비교해 본다.

 

노국 측이 조선 측과 율구미호약(栗九味互約)’을 맺고 율구미 소유지 교환문제로 노일 외교가 무르익어가고 있을 때 노국 상인들의 마산포 진출과 아울러 그 상업 경영도 한창이었다.

 

190081일 현재 노인(露人) 또는 노국 세력을 배경으로 한 사람들과 기타 외국인이 마산포에 온 지주 또는 상인들로서 그 상업 자본가는 우라지밀 미센코, 도부잔산스키, 긴스불그 상회, 휴우고 아이 두우벤, 원빈(原彬), 마릭크스 베히틴, 리푸렌치프 및 멤스 기타 외국인 지주로는 렛스나(墺人. 오스트리아인) 1(), 보헤팅 하우스(獨人) 4, 영국상회 홈링가 2, 구레이(美人) 1구 등이 있었다.

 

<현 월포초등학교 자리에 있었던 마산 러시아 영사관>

 

 

이 같은 사람들의 마산포의 상업적 활약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우라지밀 미센코 ; 마산 각국 조계지에 있어서 대지주의 한 사람으로 처음은 12구를 소유하고 있었다. 이를 점차 노국(露國) 상인에게 전매하여(190081일 현재) 7구밖에 가지고 있지 않았다.

이밖에 월영동 배후 지대에다 조선인으로부터 3만 평방미터의 산지를 250원으로 구입했다. 이가 토지를 구입하는 목적은 자가 부지 외에는 오로지 전매를 목적으로 하는 투기적인 것이었다.

자가로는 각국 조계지에 아연 함석의 지붕으로 된 가옥 1동을 건축하여 처자와 함께 거주하고 있었는데 그의 목적은 토지 전매와 아울러 노국 군함에 대한 용달(用達)과 승무사관(乘務士官), 수병들에 잡화와 음식물의 소매를 하였고, 그 외 조계지의 토목건축 공사 청부에도 야심을 갖고 있었다.

 

도부잔산스키 ; 월영동과 자복동과의 중간인 작진등(鵲津嶝) 언덕에 있는 노국의 매수지를 빌려 중국인 직공을 고용하여 벽돌 제조업을 시작했다. 이때 주택도 없이 천막 내에 기거하며 경영은 어려웠다. 전기(前記) 미센코로부터 조계 내 3지구를 매수하고는 집을 세울 양으로 있었다. 그는 중국인 직공의 증고(增雇)를 위해 블라디보스토크에 가 있었다.

 

긴스불그 상회 ; 이 상회의 본사는 일본 장기(長岐)에 있었는데 동청(東淸) 철도회사(부산) 아젠트 호버라는 자가 대리인으로 일을 보았다. 이 상회는 조계지에 있었으며 대지주였다.

 

휴우고 아이 두우벤 ; 오국인(墺國人)이나 동청철도(東淸鐵道) 회사(부산) 사람으로 그 계통은 노국(露國)에 속했다. 그는 마산포 각국조계지 지구의 총 중매인이라 일컬을 수 있어, 처음부터 사들인 지구는 무려 36가구에 달했다.

그 뒤 노국 또는 그 계통인에게 26구를 팔아넘기고 8구는 자기 명의로 남아 있었다. 그는 늘 부산에 머물고 있었으나, 수지가 맞는다고 느껴 쌀을 사들여 여순(旅順)이나 블라디보스토크에 보내고 생우(生牛)를 사서 판매도 하는 한편 노국 상인들에게 석탄도 판매했다.

그는 또 부산-마산 사이의 정기 항로를 계획하는 등 무척 돈벌이에 몰두했었다.

 

마릭크스 ; 불국인(佛國人)이나 노국 세력으로 장기(長岐) 신디게이트의 중견인이었다. 그도 조계지 내의 토지를 사들인 대지주였다.

 

라프렌치프 ; 동청철도(東淸鐵道, 원산)로 마산 각국 조계지 내에는 겨우 1구를 갖고 있었는데 일본인 소유구를 매수하려고 애썼으며 가옥 건축도 계획하고 있었다.

 

이상은 190081일 현재 노국을 비롯한 기타 서구 상인들의 마산포 경영 상황이다.

다음은 일본 상인의 마산포 진출과 경영 상황을 보련다.

 

일본 당국 매입한 지소(地所) 11구와 우편국 부지 6구를 제외하면 그 소유는 겨우 12구에 불과했다.(서구측 소유는 총 50)

이때 그들 손으로 조계지 내에 세운 건물은 두 집뿐이었다.

 

조계지의 토목공사청부인 팔두사직길(八頭司直吉)이란 자가 가진 20평짜리 단간 집과 또 한 집은 노국 군함에 용달상(用達商)을 하던 강본 용(岡本 勇)이라는 자가 가지고 있는 2층 집이다.

 

이 무렵 일본 거류민 중 십중팔구는 소자본으로 잡화의 소매인들이었다. 이들은 조선인과 어울려서 살려고 조계지에서 10리나 떨어진 구마산포에 있었다.

 

이 같은 노·일 양국 상인들의 마산포 경영 상황에서 일본 영사 판전중차랑(坂田重次郞)은 일본 외무대신에게 보고하면서 자기 의견을 아래와 같이 구신(具申)한 것이다.

 

……의당 경제상으로 보면 무역으로는 아직 볼만한 것이 없고, 거기다가 세관(稅關)까지도 옮기지 않아 오늘의 마산포에서 조급한 계획으로 부질없이 거액의 자본을 들여 지소를 매입하며 가옥을 건축하여 물건을 진열한다 해도 도저히 수지가 맞을 리 없다.

그런데 지금 노인(露人) 거류지에서 하고 있는 바를 보면 언제 이용할 수 있을지도 예측하기 어려운 토지에 대해 대단한 돈을 뿌리는데 원가 백원인 토지에다 무려 1만원의 거액을 의심치 않고 투자하고 있다.

또 무인(無人)의 마산포에 속속 가옥을 건축하고 벽돌 제조업을 개시하는 등 그 행위는 의심할 바가 많다. 그들은 거액을 들여 얼마간의 이익을 볼 때까지 앞으로 얼마만한 자본을 어느 때까지 투입할지 예측할 수가 없다. 지금까지 1(一厘)도 수입을 못 보면서 단순히 지출뿐으로 수년을 계속하는데 앞으로 얼마를 지탱할지 보통의 정리(定理)로서는 이해할 수 없다.

 

어떤 특수한 이유가 있을 것인즉 그들의 마산포 경영에 대하여는 자연히 두 가지의 추정을 하는 것은, 기일(其一)은 노국 정부의 보호이며 기이(其二)는 이들이 마산포에 상업상의 중요성을 둔데 그 원인이 있는 것으로 생각한다.

이 점 모두(冒頭)에 기술한 본년(本年) 311일자 기밀 반공신(半公信) 및 동원 22일자 기밀본(機密本) 26호에 있어 진언한바 있거니와 노국은 마산포 또는 그 부근에다 군사적 대 계획을 완성할 것을 기하는 동시 이와 관련하여 마산포를 노국 이익선(利益線)의 기점으로 하려는 것으로 생각한다.

 

즉 조선해협에 있어 부산이 가지는 역사와 상업은 도저히 빼앗을 수 없다는 것을 알고, 마산 방면에다 조영물(造營物)의 수요품 매도를 시작하면서 조계지에 상업을 육성하고 한편으로는 무비(武備)를 강구하는 동시에 장차 여기를 근거지로 삼고 부산에 대항하고 그 이익선의 확장을 도모하려 한다.

그들은 제1회 공매 때에 조계지에 있어 적지 않은 토지를 매입한 것과 같은 것은 오로지 이런 의미에서의 준비에 불과하다고 생각된다.

 

이 같은 사실은 노국 상인들이 정부 당국에서 직접 간접 보호를 받을 뿐 아니라, 군사적 성공을 빌면서 마산포의 미래의 상업적 번영을 마치 블라디보스토크이나 여순(旅順)과 같이 알고 있는 것이니 즉, 현재의 엄호(掩護)와 희망을 믿고 자본을 투입하는데 의심하지 않는 것으로 판단할 수가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