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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 2. 6. 00:00

김형윤의 <마산야화> - 136. 1900년대의 국제관계

 

136. 1900년대의 국제 관계

 

 

청일정쟁으로부터 노일전쟁에 이르는 시기는, 세계적으로 자본주의가 최고의 단계인 제국주의 단계로 이행하던 시기로 이 시기의 시대적 특징인 극동에 있어서는 제국주의 열강의 대립의 심화와 그 확대로 표현되었던 것이다.

 

특히 이시기는 나이 어린 제국주의 열강(일본, 독일, 미국)이 식민지 쟁탈전의 무대로 등장함으로써 국제 발전 관계에 새로운 역사적 시대를 열게 되었고, 불균등 발전 법칙에 의한 이 같은 자본주의 제국의 급속한 진보는 특히 침략적인 이러한 여러 나라의 정책을 규정하였던 것이다.

 

청일 전쟁 전 청국의 발전단계는 겨우 근대적 산업의 발생을 보기는 하였으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해체기에 있는 봉건사회가 그 반식민지 상태에서 절대주의로 전형(轉形)을 보이는 것뿐으로 그 기본적인 생산양식은 역시 후진적인 봉건제에 불과하였다.

 

이에 대하여 일본은 청국보다 뒤늦게 개방되었으나 1868년의 명치유신으로 극히 불완전하면서도 근대적 자본 형성으로의 길을 열어 반봉건적인 농업생산관계를 기초로 하여 소위 일본형의 자본주의가 성립하였다.

 

그러나 그 자본은 특수성으로 인한 국내시장의 협애(狹隘)로 중국 진출 및 조선 시장이 독점을 필수 조건으로 규정짓게 하였다.

 

, 일 두 나라 생산구조의 이 같은 기본적인 상위(相違)는 각각 그 외교 정책에 그대로 반영되었다.

청의 대()조선 정책은 조선 시장으로의 상업적 진출을 기초로 하는 청(), () 종속관계의 유지 확보로 그것은 처음부터 방어적인 것이었다.

 

이에 대하여 일본의 외교정책은 군사적 산업자본 확립의 요구를 반영하여 매우 계획적이고 조직적이었다.

 

이 같은 정세 하에 일어난 갑신정변은 실패로 돌아가고 18943월 일본의 사주로 김옥균의 살해 및 조선 정부의 배일적 의사 표시는 청일개전(淸日開戰)의 공기를 일본 국내에 양성(釀成)케 하여 이를 이용한 일본 정부는 갑오동학 농민란을 계기로 청·일전쟁을 일으켰다.

 

·일전쟁(1894~1895)은 중국 봉건제에 대한 일본 자본에의 승리로 끝났다. 이를 계기로 중국은 명확하게 반식민지로 전락했고 이에 반해 일본은 급속히 자본주의적 성숙을 촉진하게 되었다.

 

 

<프랑스 삽화가 조르주 비고가 1887년에 그린 ‘낚시 놀이’. 일본 중학교 교과서들이 ‘한국(COREE)’을 낚싯감으로 묘사한 이 그림을 실어 일제의 침략을 정당화하는 시각을 은연중에 드러내고 있다>

 

 

한편 처음 유럽 열강의 청·일전쟁에 대한 태도는 제정 러시아와 같이 직접적으로 중국 영토에 대하여 이해관계를 가진 나라 이외에는 이 전쟁이 오히려 중국 영토적 침략의 계기가 될 것이라는 인식하에, 소위 일본의 요구가 전승(全勝)을 틈타 과대해지지 않도록 상호간에 일치하여 중국을 원조하지 않으면서 일본을 견제하는 것이었다,

 

이때 제정 러시아는 그 확대된 자본제 상품생산의 필연적 경제적 모순의 출구를 식민지에 구하려는 내적 요구에 따라, 당시 부동항 획득의 정책에 의해 점차 남하하여 만몽(滿蒙)에 그 세력을 뻗으려 하고 있었다.

 

1895년 드디어 청·일전쟁이 끝나고 전승국 일본이 조선에 있어서 지배권을 독점하고 요동반도를 획득한 것은, 제정 러시아의 극동 정책에 커다란 장해가 되므로 제정 러시아는 독·(·)과 손을 잡고 3국 간섭으로 노국황제폐하(露國皇帝陛下)의 정부는 일본국으로부터 청국에 대하여 요구한 강화조약을 사열(査閱)컨대, 요동반도를 일본이 소유하는 것은 오로지 청국 정부를 위태롭게 할 우려가 있을 뿐 아니라 조선국의 독립을 유명무실하게 하는 것이기 때문에 장래 극동의 영구 평화에 대하여 지장을 주는 것으로 인정한다.

 

따라서 노국 정부는 일본 황제 폐하의 정부에 향하여, 거듭 그 성실한 우의를 표하기 위하여 여기에 일본정부에 권고하기를, 요동반도를 영유(領有)하는 것을 포기케 함으로써 한다.’ ‘청일강화조약 조인 후 423일 동경 주재 노··(··) 3공사에 의해서 일본 외무성에 제출한 권고 중 노국 공가의 각서라고 권고하였다.

 

당시 제정 러시아가 불국(佛國)과 결탁하게 된 유력한 요인은 1888년으로부터 1894년까지의 40억 프랑의 공채가 불국(佛國)에서 조달되었기 때문이었다.

 

이같이 공채는 주로 제정 러시아에 있어서의 철도, 광산 및 군수품 공업에, 또 불국(佛國)을부터 순수품을 구입하는데 사용하였다. 제정 러시아는 이 공채로 아시아에 있어서의 영토 확장의 대사업을 수행할 수 있었다,

불국(佛國) 측으로부터 이 공채는 금융자본 수출의 신무대로, 또 자국의 야금(冶金) 공업을 위한 새로운 시장을 연 것이었다.

 

청일전쟁 후 제정 러시아는 중국이 일본에 지불하기로 되어 있는 배상금의 반액 즉 4억 프랑을 사분이자(四分利子) 공채로 모집에 착수하게 되었다.

 

한편 독일이 3국 간섭에 착수한 것은 이로써 노·(·)동맹을 차단하고 노·(·)로 하여금 고립의 지위에 서게 하기 위해서였다.

 

이때 노·(·)은 발칸반도, 아프리카를 중심으로 대립상태에 있었으므로 각각 노국(露國)을 자기편으로 끌어넣어 적수(敵手)에 대비하고 제국주의 패권을 쥐려하고 있었다. 다시 말하면 대립이 그들을 일치시켰던 것이다.

 

그러나 제정 러시아가 이 3국 간섭을 단독으로 하지 않고 독·(·)을 끌어 놓지 않으면 아니 되었다는 것, 여기에 성공하고 독·(·)도 용이하게 여기에 협력하게 된 근본적인 요인은 제국주의의 동양에 있어서의 지위에 대한 3국의 일치 즉 영··(··)의 대립이었으니, 이는 1902년에 영·(··) 동맹의 성립을 가능케 하여 일본으로 하여금 노·(·) 전쟁을 일으키게 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국제관계하에서 삼국간섭 후 조선 주() 노국공사(露國公使) 웨벨(Weber)은 청을 대신하여 배일파인 민비파 정권과 결탁한 후 대원군과의 암투대립의 모순 및 그 일본의 노골적인 내정간섭과 침략행위에 대한 조선인의 반감을 이용하여 그 세력을 부식(扶植)하여 갔다.

 

이리하여 친로파의 우세를 가져오게 하고 친일정부를 위기에 빠뜨리게 하였다. 조선정부 내의 이 같은 급격한 정치적 선회에 놀란 일본은 강경책을 취하기 위해 새로이 육군 소장 삼포오루(三浦五樓)를 주조선공사(駐朝鮮公使)로 파견하였다.

이들 침략자들은 1895108(820) 드디어 민비를 학살하는 야수적인 만행을 감행하였던 것이니 이것이 유명한 기미 살해사건인 것이다.

 

이 같은 일본의 만행은 조선 민족의 분노를 가져와 반일 의병투쟁이 전개되어 갔고, 한편 조선 정계는 친일파, 친청파로 분열되어 자주성은 한층 더 상실되는 가벼운 동요와 혼란이 계속되어 갔다.

 

189622일 밤 박정석, 이범보 등 친로파는 웨벨과 결탁하여 고종을 노국(露國) 공사관으로 옮김으로써(아관파천俄館播遷) 노국세력의 조선 침투와 친로파 세력의 일시적인 강화를 보장하였다.

이리하여 중국 진출의 일환으로 나타난 제정 러시아의 조선 진출은 독자적 중요성을 지니고 일본과 심한 외교적 투쟁을 계속하면서 노일(露日)전쟁의 전초전을 양성(釀成)해 가게 되었던 것이다.

 

일본은 한·(·滿)을 둘러싼 이 같은 노·(·)간의 모순을 해결하는 길은 전쟁만이 만능이라고 생각하여 청으로부터의 배상금을 토대로 방대한 군비계획안을 작성하여 대로(對露)전쟁에 대비해 갔던 것이다.

 

이에 의하면 단기간 내에 육군의 인원을 3배로, 해군의 함선 톤수를 4배로 확장하여 제정 러시아가 시베리아 간선철도를 완성하기 전에 대로(對露) 공격을 개시한다는 것이었다.

 

일본은 전쟁준비가 완료될 때까지 일시 조선에 있어서의 노국 세력의 팽창을 허()하고 또 견제하는 한편 자기들의 기득권을 최대한으로 유지하기 위해 제정 러시아와 수차에 걸쳐 외교 담판을 거듭하였다.

1896514일 노·(·) 간에 웨벨, 소촌(小村) 협정(協定)’이 체결되어 일본은 아관파천 후의 친로파 내각을 승인하고 조선에 있어서의 노국세력의 우의를 확인하였다.

 

189669일에는 노일 양국 간에 로바노프 산현(山縣) 의정서(議定書)’ 1차 노·(·) 의정서가 체결되어 조선에 있어서의 양국의 동등의 지위를 상호 확인하고 일본의 특수권리가 부인되었다.

 

이 때 제정 러시아는 조선보다도 만주 침략에 더 힘을 기울이고 있었으므로, 일본은 이 기회를 틈타 조선에 있어서의 지위 유지 강화에 필사적으로 광분하였다. 그 결과 1898425일에는 로센 서(西)의정서(2차 노일 의정서)가 체결되었다.

 

이 의정서에서 제정 러시아는 조선에서 이미 획득한 경제적 우월권과 조선의 자주권 및 완전 독립을 승인하고, 또 조선 내정에 직접 간섭하지 않으며 양국의 상호 동의 없이 조선에 어떠한 군사 및 재정고문도 파견하지 않는다는, 이 같은 협정으로 이때 조선에 있어서의 모순과 대립은 일부 완화된 것 같이 보였으나 실은 날이 갈수록 심화되어갔다.

 

즉 이때 일본은 상술한 협정과 외교 담판 배후에서 영·(·)의지지 하에 대로(對露)전쟁 준비를 급속히 추진하면서 조선에 있어서 경제적 이권 약탈과 장차 조선을 점령하기 위한 경제적 군사적 토대구축에 광분하고 있었다.

 

이때 일본은 벌써 조선에서 확고한 경제적 우위를 차지해 가고 있었던 것이니, 1896년 현재 조선에 거주하는 외국인 총수 18,812명 가운데 일본인이 15,602명이나 되었고, 조선에서 활동한 외국 상사(商事) 총수 258개 중 일본 상사가 210개나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또 일본은 개항장(開港場)과 개시장(開市場)을 통하여 조선에 대한 무역액 중 일본인이 차지하는 비중은 1895년에는 72%였던 것이 1900년에는 75.3%로 증대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제정 러시아의 세력은 여전히 조선에 있어서의 일본의 독점정책을 강력히 견제하고 있었다.

18991월 노국정부는 외무대신 파브로프를 조선 주재 노국(露國)공사로 임명하여 대조선(對朝鮮) 정책을 적극화하면서 극동정책상의 요지 대련(大連) 여순(旅順)과 블라디보스토크를 연결하는 중계지점인 마산포와 거제도를 노국의 해군 근거지로 착목(着目)하였다.

 

이 같은 정책은 이에 앞서 1899년 초 노국(露國) 해군사관 중 동양 대세에 통효(通曉)하는 자들이 중심이 되어 노국(露國)의 국방상으로 보아 마산포와 거제도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건의서를 노국 정부에 제출한데 힘입은 바 큰 것이다.

 

이때 제정 러시아의 극동 정책은 만주를 중심으로 적극화되어 갔다.

이에 앞서 1896년 모스크바에서의 이홍장(李鴻章로바노프에 의한 소위 쿠시니 조약의 성립으로, 노국에 자국의 철도를 만주 지방을 횡단하여 블라디보스토크로 통하게 하는 권리 및 합이빈(哈爾濱, 하얼빈)으로부터 남하하여 요동반도를 지나 대련에 이르는 지선을 부설하는 권리를 얻었다.

 

그 후 노국은 자국민의 재산 보호라는 명목 하에 드디어 만주에 군대를 파견하는 권리를 얻고 말았다. 노국은 귀중한 광산 채굴권 및 목재 벌채권을 얻는 동시에 수천의 군대를 그 지방에 보내어 그 확보에 노력하였다.

 

제국주의 식민지 정책에 군대는 항상 따르는 법이다.

독일의 교주만조차(膠州灣租借 / 189835)에 자극 받은 노국은 2,3주일 후(327) 여순항의 25개년의 조차권을 획득하였다. 여순항은 실로 열강이 북경의 보전(保全)을 위협하는 것이라 하여 그 환부(還付)를 일본에 충고한 것이었다.

 

노국의 철도부지, () 지방으로의 군대 파송(派送), 여순의 방어설비는 영구적인 점령을 목표로 하고 있다는 사실이 명백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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