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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속 도시이야기

마산항지(1926년) - 50 - 건권(乾卷) / 제8장 거류민단 시대사요(時代史要)

by 운무허정도 2023. 6. 5.

19. 마산신보(馬山新報)의 발행

 

마산의 관민유지는 마산의 기관신문을 발행코자 기획했다.

그 자금은 한 번에 걸어내는 계(契) 방식을 채용해 50원을 한 구좌로 하여 그 반과 4분의 1의 금액을 한도로 해 모집을 했더니 미마스 구메기치(三增久米吉), 후지사키 도모히데(藤崎供秀), 마츠바라 하야조(松原早藏), 메카다 헤이사부로(目加田平三郞), 니시카와 다로이치(西川太郞一) 다섯 사람이 각 4구좌 2백 원씩을 필두로 총 응모액이 3천 2백여 원이 되었다.

게다가 히로시 세이조(弘淸三) 씨는 인쇄기 및 활자 기타 일체를 제공하였다. 도리코시 엔지로(鳥越圓次郞) 씨를 발행인 겸 편집주간으로 하고 저자를 사우(社友)로 하여 마산신보 제1호가 발행된 것이 실은 명치 41년(1908) 10월 1일이었다.

사옥은 현재의 하마마치 3정목에 있는 전의 소학교 구 사옥을 무상으로 대부받았다.

이것이 현재의 남선일보(南鮮日報, 아래 그림)의 전신이 되는데 당시는 2쪽 격일 발간의 작은 신문에 불과했다.

 

 

이보다 앞서서 명치 38년(1905) 현재 혼마치 3정목의 화장품점 주인 스미다 마사키치(隅田政吉) 씨는 히로시 세이조(弘淸三) 씨를 자본주로 삼고 활자와 인쇄기 일체를 구입해 한쪽 4면이 되는 신문을 한 달에 6번 발행하는 마산시보(馬山時報)를 창간해 비로소 마산이 보도기관을 가졌다고 마산 관민사회에서 큰 환영을 받고 장래가 촉망되기도 했다.

그런데 그 다음 해 초겨울에 확장을 도모했던 바, 그 운동이 다소 무리가 있었던 것인지 경찰의 수사를 받아 체포되고 신문 발행은 자연 소멸하였다.

그 이후 보도기관을 잃은 마산항민의 갈망은 여전하여 이 새 신문의 발간은 많은 박수갈채를 받았다.

 

20. 민회의원 선거

10월 23일 거류민의 증가에 따른 민회의원 12명의 선거회가 열렸다.

종래 마산의 공직은 고참벌(古參閥) 일부의 전유물같이 잘못 인식되어 새로 들어온 사람들을 경시, 배척하는 폐습이 있었다.

그러한 검은 구름이 언젠가는 우리에 의해 열리지 않을까 염원해 왔는데 과연 경천동지라 할, 정의를 표방한 후보자는 격렬한 운동으로 마침내 고참 벌족의 성을 허물고 의석의 반을 차지하게 되었으며 그 결과로 재선된 사람들은 히로시 세이조(弘淸三)(신), 마츠바라 하야조(松原早藏)(포), 히로시게 세츠노스케(弘重節之助)(신), 히사에 간사쿠(久重勘作)(포), 다나하시 센노스케(棚橋仙之助)(포), 시게무라 우이치 (重村宇一)(신) 씨이고,

혁신동지파의 당선자는 미야하라 가네유키(宮原兼行)(신), 에다 구니미츠 (江田國光)(포), 야마모토 구니치(山本國次)(포), 후지사키 도모히데(藤崎供秀)(신), 햐쿠모토 케이이치(百本惠一)(포), 나츠메 데츠조 (夏目哲三)(포) 씨이다.

이상의 12명이 회의장에 나란히 서게 된 결과는 의연히 인물은 그저 그렇다고 볼 수 있을 터이다.

당일 의원명부에서 이름이 삭제된 이는 오다 젠시로(小田善四郞)(신), 하나오카 지사부로(花岡治三郞)(포), 모리야마 이지로(森山亥次郞)(포), 후지하라 다케키(藤原建樹)(신), 다나카 츠루마츠(田中鶴松)(신), 야마모토 고조 (山本好藏)(포)의 여섯 사람이며 다 업무 혹은 사고로 운동을 그만 두었거나 운동이 시원치 않았기 때문에 낙선된 것이라 한다.<<<

 

이 글은 창원시정연구원이 2021년에 번역한 『馬山港誌』(1926) 중 50번 째 것이다. 그림은 별도로 삽입하였다. 『馬山港誌』는 1900년대에 발간된 일본 문헌 중 가장 가치가 높은 책으로 평가 받고 있다. 저자는 앞서 게재한 『馬山繁昌記』와 같은 스와 시로(諏方史郞)이다. 본 포스팅은 비영리를 전제로 창원시정연구원의 양해를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