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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 2. 24. 00:00

창원 진전 출신 이교재의 독립운동과 상해 임시정부-10

Ⅳ. 임시정부 발행 9개 문건의 국내 반입과 그 의미(3)

 

그렇다면 개별 문건들의 내용은 무엇이었는가. 이교재(우측 사진)가 전달하려던 문건 중에는 달성의 문영박(호는 장지, 1880~1930)에게 보내려던 두 종류의 문건이 있다.

하나는 문영박이 사망한 데 대해 임정에서 뒤늦게 조문한다는 추조문으로 내용은 ‘追弔 本國 慶北達成 大韓國春秋之翁 文章之先生之靈 大韓民國臨時政府一同’으로 되어 있다.

문영박은 1930년 12월 18일에 사망하였는데, 문서의 작성일자는 1931년 10월 3일이었으므로 사망한 지 10여 개월이 지난 뒤에 조문을 한 셈이다.

그의 자녀들, 곧 문대효에게 보낸 특발문에는 현재 벌어지고 있는 ‘日中大事變’ 곧 1931년 9월의 만주사변이 세계대전의 도화선이 되고 있어서 국내에서 호응하면 일본제국주의를 타도할 수 있으나 비용이 없으므로 특파원을 보내니 그에게 常備金을 보내 주었으면 한다는 내용이다.

그렇게 되면 무력감에 빠져있는 임시정부를 도울 수 있다는 것이다.(「특발, 기원4264년· 대한민국 13년 10월 3일. 대한민국임시정부 상해, 본국경북달성 문대효 애전」. 달성화원 인수문고 소장.)

제로 문영박은 1919년부터 그가 사망한 1930년까지 전국을 왕래하면서 임정에 군자금을 지속적으로 송달해 주었다고 한다.

특히 1929년 2월 27일에는 대구경찰서의 고등계형사들에게 4시간 동안 가택수색을 당한 뒤, 장남 문원만과 함께 체포된 적도 있었다.(「大邱高等係員出動 文永樸富豪突然檢擧 사건내용은 중대시된다고 四時間의 家宅搜索, 삼월일일 압두고 예비검속인듯 」, 동아일보, 1929년 3월 3일자 :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문영박 [文永撲] ’(디지털달성문화대전 대구광역시 달성군)에는 1927년으로 기재되어 있다. 오류다.)

아울러 문영박은 국내에서 독립운동을 하던 오세창과 유창환에게 각각 ‘수봉정사’와 ‘수백당’이란 친필을 받기도 하였고, 또 이들과 더불어 이승훈·한용운·김진호·姜邁·이상재·유진태·이득년은 1918년 망명지에서 국내로 잠입한 우당 이회영과 함께 국제정세의 변동에 대처할 방법을 비밀리에 논의하기도 하였다.(김종서, 「남평문씨(南平文氏) 수봉정사(壽峯精舍) 수백당(守白堂)과 하겸진(河謙鎭)의 ‘수봉정사기(壽峰精舍記)’」, [문헌과해석] 발표회 논문(2017년 12월 22일), 1-3쪽과 무정부주의운동사편찬위원회, 한국아나키즘운동사 전편: 민족해방투쟁, 형설출판사, 1978, 127쪽.)

말하자면 전국적인 독립지사들의 네트워크 속에 포함되어 있던 인물이었던 것으로 보인다.(문영박의 손자인 문태갑은, “조부가 큰 부자라고는 할 수 없지만, 군자금을 많이 냈다는 말이 주변에 돌았다”고 하였다(2017년 9월 12~13일 양일간, 대구시 달성구 화원읍 남평문씨 세거지에 거주하는 문태갑 선생 방문 면담))

그는 특히 상해에서 활동하던 창강 김택영을 통해 많은 서책을 구입하였는데, 그 수송 방식은 상해에서 목포까지 배로 운송하면 그곳에서 다시 수레를 이용하여 화원까지 이송하는 것이었다고 한다.(문희응 씀, 仁興錄 -南平文氏與世居地, 규장각, 2003, 114쪽.)

이 역시 문영박과 임정과의 통로로 활용되었을 가능성도 있다. 임정에서 추조문을 보낸 이로는 밀양의 황상규가 포함되어 있다.

추조문 내용은 앞의 문영박 선생과 큰 내용은 같으나 일부 다른 점도 있다.

“追弔 本國慶南密陽/ 大韓國義士/白民黃尙圭君之 靈/紀元四千二百六十四年·大韓民國 十三年 十月三日(建國紀元節)/大韓民國臨時政府一同/派弔/上海(Shanghai)”이다.

문영박의 경우 ‘大韓國春秋主翁’으로 부른데 비해 황상규에게는 ‘大韓國義士’로 호칭하였다. 앞의 경우 역사의 주인이라는 뜻을, 황상규는 의사를 강조한 셈이다.

또한 문영박의 경우 수신인을 ‘본국 경북달성 문대효 애전’으로 표시하였으나 황상규의 추조문에는 이것이 빠져 있다.

검토해 보아야 하겠지만, 조문을 받을 대상이 마땅치 않았을 수도 있다.

밀양 출신인 황상규는 밀양 뿐만 아니라 만주와 임정에서도 활동했던 대표적인 독립운동가였고, 특히 동양척식주식회사 창녕지역 관리인인 양인보를 설득하여 창녕군에서 받아들인 동척의 소작료 1년분을 받아 임시정부에 헌납한 것으로 알려졌다.(최필숙, 일제 강점기 미리벌의 분노와 희망, 밀양독립운동사연구소, 2017, 240~241쪽. )

이러한 공헌도 임정에게는 중요한 부분이 아니었을까 한다.

황상규는 김약산의 고모부이자 의열단의 창립자로도 알려져 있었으나 1931년 9월 2일에 폐결핵 복막염으로 사망하였다.(최필숙, 일제 강점기 미리벌의 분노와 희망, 239~246쪽. 133)

임정에서 이교재를 통해 추조문을 보낼 때에는 그의 사망 사실이 거의 한달 만에 임정에 알려진 시점이었다.

임정에서 다양한 방식으로 국내의 정보를 수집하였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것과 동시에 그에 맞는 예우를 해 준 것으로 보인다.

추조문이 애국인사에 대한 예우 차원의 성격이 강한 문건임에 비해 특발문은 임정에 대한 재정적 지원을 호소하는 문건이라고 할 수 있다.

영박에게 보낸 특발문은 이미 언급하였지만, 창녕의 성낙문에게도 거의 동일한 내용의 특발문을 보냈다.(「본국경남창녕 성낙문선생 귀하」라는 수신처만이 다르다. 동아대학교 박물관 소장.)

진주의 허만정에게 보낸 특발문도 위의 경우와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허만정에게 보낸 특발문은 앞서 언급한 동아일보에만 소개되었을 뿐 소재나 내용을 알 수 없었다. 이를 알기 위해 2018년 9월 28일에 지수면 승산리에 있는 허만정 본가에 찾아갔지만 현재 그 후손이 부재 중이어서 특발문의 소재를 확인할 수 없었다.)

성낙문과 허만정은 각각 창녕과 진주를 상징하는 부호들이었다.

창녕군 지포면 석리 출신의 성낙문은 잘 아는 바와 같이 창녕지역의 대성이자 부호로서, 손녀인 성혜림(1937-2002)은 북한의 유명 여배우였고, 암살당한 김정남의 어머니이기도 하다.

성낙문은 1921년에 창녕자동차를 창립하는데 주주로 참여하였으며, 1940년에는 부산지방법원 창녕출장소 청사 신축 중에 건물 1동과 부속건물 등을 기부한 공로로 일제 당국으로부터 포상을 받은 기록도 있다.(조선총독부 관보 제3890호, 1940년 1월 12일자.)

표면상으로는 당시의 식민지배 당국에 협조하였던 것이다.

진주시 지수면 승산리 출신인 허만정은 1925년에 백산무역에 250주를 투자한 주주의 한 사람이자(朝鮮銀行會社要錄(1925年版), 東亞經濟時報社.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 베이스 「 한국근현대회사조합자료」 참고. htp:/db.history.go.kr/item/level.do?levelId=hs_001_1925_08_14_0150) 중외일보의 창립자 명단에도 주식을 투자한 인물로 소개되고 있다.(「주식회사 중외일보사 창립총회의 건」, 사상문제에 관한 조사서류 5 (京種警高秘 제15854호, 1928년 11월 24일),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국내항일운동자료 경성지방법원 검사국 문서)

GS 그룹의 창업주인 허만정은 ‘인심이 좋고 인권을 존중하는 유풍이 남아 있는 승산리’에서 만석꾼으로 이름이 났었고,(김동수 기자, 「진주시 지수면 ‘향토사’ 面誌(면지)발간 추진위 구성」, 「한국장애인신문/KJB방송, 2010년 6월 20일자) 또한 민족해방운동을 위해 청년 중심으로 모인 보주청년회라는 단체에도 이름을 올린 34명 중 1인이었다.(「보주청년회 부흥기념식 성황, 사무실 낙성식도 거행」, 중외일보, 1926년 12월 28일자)

부호이면서 독립운동을 지원하는 데에도 적극 관여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추조문과 특발문의 수신인들을 분석해 보면 다음과 같은 몇 가지 특징을 보여준다.

먼저 상해임시정부는 국내에서 활동하는 독립지사들이나 임정후원자들의 동향을 잘 파악하고 있었고, 그들을 정성들여 예우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심지어 추조문이나 특발문은 비단에 쓸 정도로 세심하게 상대방을 배려하였다. 또한 특발문은 부호가들에게 보냈는데, 이들에게는 앞서의 문장지에서 본 바와 같이 ‘일중대사변’, 곧 만주사변으로 세계정세가 변하고 있으니, 재정적으로 독립투쟁을 더욱 지원해 달라는 내용을 전하고 있다.

예우를 넘어서서 실질적인 도움을 요청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문장지나 허만정은 독립운동을 지원하는데 노출된 듯이 행동하였던 반면, 성낙문은 거의 드러나지 않았고 오히려 지역유지로서 일제의 지역 지배 사업에 협력하는 양상도 보여 주었다.

수신인을 밝히지 않은 채 김관제와 윤상태에게 전달해 주기를 부탁한 편지에는 국내 지사들에게 투쟁을 독려하고 있는 내용이다.(임정 시절 김구는 “연구실행한 정책이 있으니 편지정책이다.. 임시정부의 현상을 극진 설명하고 동정을 구하는 편지를 써서 엄군(항섭), 안군(공근)에게 피봉을 써서 우송하는 것이 유일의 사무”라고 할 만큼 편지를 중요시하였다(김구 지음/도진순 탈초 교감, 정본 백범일지, 돌베개, 2016, 397쪽). 국내에는 우편으로 전하지 않고 개인에게 밀봉하는 방식으로 전달하려고 했던 것 같다.)

곧 현재 적국의 지배를 받고 있는 상황이지만 세계가 변동하면서 폭발하기 직전이니 칼을 뽑아야 하지 않겠는가. 따라서 국내의 지사들과 연합하여 그 성취를 함께 도모해야 할 것이며, 이에 이군(이교재, 필자주)을 파견한다는 것이다.

조완구와 김구가 연명하여 보낸 것이므로 임정의 이름으로 보낸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할 수 있다.

이시영이 김관제에게 보낸 편지 역시 독립의 당위성과 협조를 부탁하고 있다.

이로 미루어 보아 임시정부의 지도층이 당시 경상남북도에서 활동하던 애국지사들에게 특별한 관심과 더불어 임정의 현안을 도와주도록 요청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두통의 비밀편지 형식을 통해 알 수 있다.<<<

이 글은 유장근 경남대 역사학과 명예교수(사진)가 한국민족운동사학회 학술지 「한국민족운동사연구 Vol.99 No.- [2019]」에 게재한 논문이다. 본문 중 푸른색은 논문의 각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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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 2. 17. 00:00

창원 진전 출신 이교재의 독립운동과 상해 임시정부-9

Ⅳ. 임시정부 발행 9개 문건의 국내 반입과 그 의미(2)

 

이교재(우측 사진)의 임정문서 일부가 동아대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는 정보는 이정순의 아들인 이상화를 통해 알게 되었다.(이상화와의 면담은 2017년 9월 27일 마산의 이디야 커피집에서 있었다. 그는 부친께서 동아대학교 총장에게 기증하였다고 말하였다.)

해당 박물관에 찾아간 결과 밀양의 황상규에게 보내는 추조문, 창녕의 성낙문에게 보내는 특발문, 그리고 두 통의 편지 등 4개의 문건이 소장되어 있었다.

그러나 이것이 동아대학교 박물관에 간 까닭까지 정확하게 알 수는 없었다.

이상화의 말에 따르면 부친이 동아대학교 총장인 정재환에게 기증하였다는 것이다.

동아대학교 박물관의 소장자료 목록(74-4)과 관계자에 따르면(관련자료는 두 가지로서 1)분류번호: 74-4, 품명: 대한민국임시정부특발, 2) 분류번호:동아대 003776-00000, 명칭:대한민국임시정부특발. 후자는 박물관이 부민동으로 이사할 때 새로 작성한 것이라고 관계자가 말해 주었다.125) 이상순으로부터 정재환이 기증받은 것을 박물관으로 이장하였으며, 그 날짜는 1963년 2월 1일로 되어 있다.

연유는 적혀 있지 않다.

그렇다면 동아대 박물관으로 간 문건들은 동아일보에 기사화되기 이전이었다고 할 수 있다.

곧 일부는 이미 정재환에게 전달되었고, 나머지 일부가 동아일보에서 보도되었다고 짐작된다.

위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우리는 홍여사의 발언과 김형윤의 기행문, 동아일보기사, 남평문씨 세거지 소유 문건, 이상화의 진술 등을 통해 이교재 선생이 마지막으로 입국할 때 9개의 문건을 휴대하고 들어왔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특히 홍여사의 진술을 통해 이들 문건이 이교재 선생이 직접 휴대하고 들어왔으며, 임정에서 발행한 문건이라는 사실도 명백하다고 본다.

형태상으로도 이 임정문서는 임정에서 발행한 격식을 갖추고 있었다.

모두 한문으로 작성한 이 문건들은 ‘기원 4264년, 대한민국 13년에 대한민국임시정부 상해’라고 기록하고 임시정부라는 글자 위에 사각형의 ‘大韓民國臨時政府印’이 새겨진 국새를 찍어 임정에서 발행하였다는 사실을 증명하였다.

<그림 3> 동아대학교박물관에 소장된 이교재임정문서 4건. 성낙문에게 보내는 특발문(상), 조완구·김구발 김관제·윤상태 대조 편지(중), 이시영발 김관제 수신 편지(하우)와 밀양의 황상규에게 보내는 추조문(하좌)

 

이교재위임장의 경우에는 국새와 더불어 ‘내무장인’, ‘재무장인’이라는 부서인을 문건 좌측 상단에 나란히 찍었다.

성낙문에게 보내는 특발문에는 작은 부전지에 주석이자 법무장이던 이동녕의 이름과 인장을 덧붙여 놓아, 임정 발행의 문건이라는 점을 증명하고 있다.

그리고 위임장, 상해격발문, 추조문, 특발문은 모두 비단에 작성하였고, 편지는 종이에 쓴 것이다.

이교재의 후손이 소유하고 있는 위임장과 격발문은 한 장인 듯이 보이지만 내용과 발행일, 인쇄방식, 비단의 섬세함 등에서 다르기 때문에 각각의 문건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다만 증명을 위해 두 문건을 겹쳐 놓고 국새를 찍었기 때문에 하나의 문건처럼 보일 뿐이다.(이 문건은 2019년 3월부터 6월까지 창원시립마산박물관에 전시되고 있다. 한 액자 속에 들어있는 이 문건은 유족들이 이를 보관하기 위해 배접하는 과정에서 하나의 문건으로 인식하였을 것이라 짐작한다.)<<<

이 글은 유장근 경남대 역사학과 명예교수(사진)가 한국민족운동사학회 학술지 「한국민족운동사연구 Vol.99 No.- [2019]」에 게재한 논문이다. 본문 중 푸른색은 논문의 각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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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 2. 10. 00:00

창원 진전 출신 이교재의 독립운동과 상해 임시정부-8

Ⅳ. 임시정부 발행 9개 문건의 국내 반입과 그 의미(1)

 

이교재(우측 사진)의 독립운동 중에서 증거가 가장 많이 남아있는 부분은 상해임시정부에서 발급한 ‘경상남북도 상주대표’라는 위임장을 비롯하여 다종의 문건을 휴대하고 입국한 일일 것이다.(여기서는 ‘임명장’보다 ‘위임장’이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경상남북도상주대표’에게 독립운동과 관련한 여러 가지 중요한 사항을 위임한 까닭이다.)

작성연도 중 제일 늦은 것이 1931년 11월 20일이니만큼 그의 입국은 상해에서 창원군 진전면까지의 거리나 교통 수단 등을 생각하면 빨라도 1932년 초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따라서 이교재가 국내에 가지고 들어온 이른바 ‘이교재임정문서’를 중심으로 그의 마지막 독립활동을 살펴보기로 하자.

현재까지 필자가 조사해서 파악한 이교재임정문서 속의 문건은 9개이다.(여기서 문서는 상위개념, 문건은 하위개념이다. 다시 말해 문서는 범위가 넓고, 문건은 정해진 서식이나 규범에 맞춰 작성된 것으로, 기관의 규정 업무에 따라 생산된 기록물을 말한다(松世勤(中國人民大學 檔案學科), 「文書, 文件與公文有區別麽?」, 「檔案時空 1986年 01期, pp. 42~43). 따라서 ‘이교재임정문서’라는 의미는 임정에서 독립운동을 위해 생산하여 이교재에게 건넨 문건의 조합이라는 뜻을 가지며, 각각의 문건은 그 문서에 포괄된다고 하겠다.)

문서에 포함된 문건의 명칭과 세부 사항은 <표 3>과 같다.

 

우선 이와 관련해서 검토해야 할 사항은 이 문서가 언제 국내에 들어왔으며 어떻게 해서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는가 하는 점이다.

이 문서에 대해 최초로 보도한 이는 마산일보의 김형윤 기자였다.

1954년 4월에 진전에 있는 이교재의 자택을 방문하였을 때 “洪老媼(이교재의 부인, 필자)은 우리를 맞아들이며 과거 상해 임정으로부터 선생이 군자금 모집이라는 중대한 사명을 띠고 국내에 잠입할 시, 조완구·김구 두 사람 명의로 발부한 비밀지령서를 우리에게 보여주었다. 좀처럼 보기 어려운 귀한 기념물”(H생, 「삼진기행, 이교재선생 묘지전배기(2)」, 마산일보, 1954년 4월 15일자)이라면서 문건을 소개하였다.

여기서 우리는 두 가지 사실을 알게 된다.

하나는 그 문서를 이교재의 부인인 홍노온이 직접 소개하였다는 것, 두 번째로 그것은 김구·조완구의 명의로 발부된 비밀지령서로서 이교재가 군자금 모집이라는 사명을 띠고 국내에 잠입할 시 휴대하였다는 것이다.

미루어 보건대 이 문건은 이교재를 경상남북도 상주대표로 임명하면서 주요 임무를 위임하는 위임장이었을 것이다.

이 기사에는 다른 문건에 대한 언급이 없다. 그보다는 전체문서를 보존하기 위한 홍여사의 피나는 노력을 강조하고 있다.

김기자는 “그 어려운 상황에서도 석양이 닥칠 때는 반드시 오리라는 신념으로 이 지령서를 굴뚝 속이 아니면 밧줄에 묶어서 우물 속에, 어떤 때에는 부녀자의 월경대로서 일각일분도 머릿속에 떠난 일 없이…” 숨기고 살아왔다고 전한다.

지령서를 갖가지 방식으로 숨겨왔다가 김형윤에게 털어놓았는데, 홍여사는 이 문서를 지령서라고 지칭한 것으로 보인다.

<그림 1> 이교재를 상주대표로 임명하면서 몇가지 중요사항을 위임한 위임장(좌)와 상해격발문(우). 본래 두 개의 문건이지만 이어놓고 가운데에 임정의 국쇄를 찍었다.

<그림 2> 달성군 화원의 문장지에게 보낸 특발문(우)와 추조문(좌)

 

이보다 늦은 1963년에도 동아일보에서 이 문서의 일부를 소개하였다.(「32년 만에 주인 찾는 감사장」, 동아일보, 1963년 3월 16일자)

「32년만에 주인찾는 감사장」이라는 제하의 이 기사에는 임정에 자금을 제공한 3명의 애국지사에게 임정에서 발행한 감사장과 조문 석장이 33년 만에 주인을 찾은 사정을 소개하고 있다.

세 사람이라고 소개하였지만, 실은 진주의 ‘허만기’(허만정의 오기일 것이다.)와 경북 달성의 ‘문대호’(문장지의 아들인 문원만을 지칭함, 필자주)(‘대호’는 실명이 아니라 ‘대효’의 오기로서 5형제의 효도를 통칭하는 칭호라고 한다. 문원만이 대효의 대표로서 이 문서를 찾아간 것이다. 남평문씨의 이름이 조금 복잡한데, 임정에서 조문을 보낸 문장지는 문영박의 호이며, 아래에 나오는 문원만은 문영박의 다섯 아들 중에서 둘째인 시채의 가내 호칭이다-문영박의 손자인 문태갑의 증언이다. 2019년 3월 18일의 통화) 두 사람만 언급되고 있고 있을 뿐이다.

언급되지 않은 한 사람은 창녕의 성낙문이었을 것이며, 조문은 문장지(장지는 문영박의 호. 필자주)와 황상규에게 보내는 것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신문기사가 무엇을 근거로 해서 쓰여졌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연고자가 있다면 楊경남지사 또는 홍여사에게 제시하고 찾아가 주기를 바란다”는 부탁의 말도 곁들이고 있는 것으로 보아, 경남도와 홍여사가 합동으로 문건들의 주인을 찾아주는 행사를 열었던 것이 아닌가 한다.(여기서 말하는 양 경남지사는 1961년 8월 25일부터 1963년 12월 16일까지 재임한 양찬우 지사를 말한다.)

이 기사에 호응한 이는 달성의 문대호, 곧 문원만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1963년 4월 5일에 이교재의 양자인 이정순이 달성군에 있는 문영박의 아들 문원만에게 보낸 편지에서 그 사정을 짐작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정순은 이 편지에서 “상별지후로 소식이 적적하여… 가지고 가신 서류를 조속히 부송하여 주시면 감사하겠다”는 내용의 편지를 보냈다.

본인의 구호관계 수속을 취하는데 필요하기 때문이었다고 말하고 있다.(이 편지는 달성의 남평문씨 세거지의 인수문고에서 보존하고 있던 것이다. 이곳에는 2017년 9월 12~13일, 2018년 9월 28일에 걸쳐 방문하였다. 이 편지와 두 개의 문건은 2017년 9월 13일에 확인하였다.)

문원만은 동아일보에 난 기사를 보고 진전면에 찾아와 문장지 관련 문서와 그 외의 문서를 빌려갔다고 한다. 필자가 달성의 남평문씨에서 운영하는 인수문고에 가서 확인한 결과, 그곳에서 보관 중인 문서에는 임정에서 보낸 추조문과 특발문 원본이 있으며 「상해격발문」과 「이교재위임장」은 복사본 형태로 소장되어 있었다.(「상해격발문」과 「이교재위임장」은 문원만이 붓글씨로 베껴 놓았다고 전해 주었다. 문건을 보여준 문태갑 선생에게 감사드린다.)

이정순이 송부해 달라고 부탁한 것은 뒤의 두 문건일 것이다. <<<

이 글은 유장근 경남대 역사학과 명예교수(사진)가 한국민족운동사학회 학술지 「한국민족운동사연구 Vol.99 No.- [2019]」에 게재한 논문이다. 본문 중 푸른색은 논문의 각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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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 2. 3. 00:00

창원 진전 출신 이교재의 독립운동과 상해 임시정부-7

Ⅲ. 상해 임시정부로의 망명과 통영 군자금 모금 사건(2)

 

이교재(우측 사진)가 상해 임정에 도착한 1921년대 혹은 1922년대 초는 임정으로서는 어려운 처지에 놓여 있었다.

베르사이유 체제가 공고화되고, 임정 내의 갈등도 증폭되었으며, 국내외의 독립자금 지원도 점차 줄어들었다.

이를 타개하기 위해 임정은 1922년 이후 독립전쟁 준비론으로 나아갔다.

1922년 10월 여운형과 김구 중심의 임정 요인들은 한국노병회를 설립하였는데, 이는 독립전쟁 준비 방략의 일환이었다.

곧 노동과 군사를 겸한 인물을 양성한다는 목표를 제시하면서 일본이 국제 전쟁에 휘말릴 때를 기다려 독립전쟁에 필요한 조건을 갖추어 나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군사력이 뒷받침되지 않은 임정에서 이것을 확보하기 위한 방책이었고, 거기에는 중국군관학교에 한국인 입학생을 보내는 것도 포함되어 있었다.(김희곤, 대한민국임시정부 I –상해시기, 192~198쪽)

이러한 시기에 임정에 도착한 이교재가 어떤 과정을 거쳐 그 일원이 되었는지 역시 알 수는 없다. 앞서 말한 1922년의 기부금모집 위반으로 체포되었을 때에도 임정과의 관계를 고려해 볼 수 있다.

그럼에도 1923년 9월에 통영에서 군자금을 모집하다 체포된 사건을 통해 볼 때, 이교재는 국내에 밀파되어 군자금 모금이라는 중차대한 역할을 맡겼을 정도로 임정의 요인이 되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이교재가 주도한 통영군자금 사건은 무엇이었는가.

이에 대해서는 당시의 기관에서 작성한 두 종류의 재판기록과(마산지방검찰청 통영지청, 「형사사건부」 1-1(1923), 국가기록원 관리번호 CJA0018428, 대구복심법원, 형사공소사건부 대정 13년(1924), 국가기록원 관리번호 CJA0016075) 경남고등경찰부가 작성한 일지형식의 기록이 남아 있다.

먼저 1923년 9월 21일자로 경남고등경찰부에서 작성한 기록에 “창원군 진전면 오서리 前敎員 李敎載가 上海假政府의 密命을 받고 군자금을 모집하기 위해 조선내로 들어와서 통영군 통영면 署町의 金宗元에게 군자금을 강요하던 중 체포되어 당국에 보내져 징역 2년에 처하였다”라는 사실을 들 수 있다.(慶尙南道警察部, 高等警察關係摘錄 –1919년~1935년-, 소화 11년, 39쪽)

이교재의 신분이 ‘전교원’으로 되어 있다는 점은 이미 말한 바지만, 그의 활동 근거가 임정의 밀명이었고, 그 목적은 국내에 들어가서 군자금을 모집하려는데 있었다.

그가 선택한 곳이 통영이었고 그 대상이 김종원이었다는 것이다.

1923년에 통영지청에서 작성한 刑事事件簿에 따르면, 통영경찰서에서 ‘비현행범’으로 체포된 이교재의 죄목은 ‘대정8년제령제7호위반’이었다. 구류일자는 대정 12년(1923년) 10월 4일, 검사에 이송된 날짜는 동년 10월 13일로서 ‘진주’로 표기되어 있다.

통영지청에서 재판을 받은 그날 진주교도소로의 이송이 결정된 것이다.

피고인의 본적과 직업, 그리고 연령은 ‘창원군 진전면 오서리 578번지, 농민, 이교재 37세’로 적혀 있다.

같이 체포된 인물로는 金宗元, 姜相烋, 朴性淑, 朴世洪, 李瓚根, 潘光閔 등 6명으로 그 신상과 죄목, 구류일자, 검찰이송여부 등은 <표 2>와 같다.

<표 2> 이교재의 통영군자금 모금사건 관련자(마산지방검찰청 통영지청, 「형사사건부」 1-1(1923)에 의거하여 작성)

통영경찰이 파악한 바에 따르면 통영사건 관련자들의 죄명은 군자금 모금이 아니라 ‘증거인멸’이나 ‘범인은익’ 혹은 ‘동행취체령위반’ 등이었다.

모두 현행범이 아닌데다 증거를 확보하는 일이 어려웠기 때문에 다른 명목으로 경찰에 체포되었던 것으로 보이지만 모두 10월 13일에 석방되었다. 이교재가 진주교도소로 간 것과 대조적이다.

그렇다면 이들은 누구였을까?

김종원은 강상휴와 더불어 통영지역의 사회단체인 통영청년단의 창단멤버였다.(동아일보, 1921년 8월 27일자) 이 청년단은 3.1운동 직후인 1919년 8월에 창립총회를 열고 통영기독교청년회장을 지낸 박봉삼을 초대 단장으로 추대하였다.

주요 활동으로는 순회강연과 교육, 계몽, 순회공연 등이었다. 말하자면 통영지역의 애국운동과 사회계몽 운동의 본거지였다고 할 수 있다.

1923년 11월 18일에는 회관을 신축하는 행사가 예정되어 있었다. 창립 당시에는 34명이던 회원이 3년여 만에 400여 명으로 증가한데다 그만큼 갖가지 활동을 한 덕택이었고, 3대 단장이던 임철규가 사재를 털어 회관을 신축하려던 참이었다.

이교재의 군자금 모집 사건은 바로 이 회관의 낙성 직전에 벌어졌던 것이다.

위의 명단에 올라있는 박성숙(朴性淑, 1900~1932)은 통영에서 하동집으로 알려진 부유 집안의 자제로서 일본 유학을 마친 뒤 귀향하여 청소년들에게 신학문을 가르쳤고, 박세홍은 훈련을 담당하면서 수시로 시국강연회를 개최하였다.

특히 박세홍은 1920년 3월 10일에 설립한 통영노동당의 회장이기도 하였다.(통영청년단에 대해서는 김상환, 「1920년대 통영지역 청년운동과 ‘김기정 징토운동’, 역사와 경계91, 2014.6, 191~229쪽과 정갑섭, 「통영청년단 1~3」, 한산신문1993년 7월 22-8월 5일. 일제시기 통영의 3.1운동에 대해서는 김상환, 일제시기 통영의 3.1독립운동과 민족운동의 전개, 도서출판, 제일, 2005 참조)

사건부 기록에 박세홍은 학교 교사로 기재되어 있지만 통영합동노동조합에서 검사원으로도 일하고 있었다.

이 조합은 통영지역 노동조합의 연대체로서 1930년에 박세홍은 이 조합의 집행위원장의 자리에 올랐다.(통영시사편찬위원회, 통영시지1, 566쪽)

이찬근(李瓚根, 1893~1950)의 이름도 올라 있다. 형사사건부에는 직업이 의생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오늘날 통영시 항남 1번가에 壽南醫院을 개설하였다. 1914년 6월 1일자 조선총독부관보에도 그 이름이 올라있다.(조선총독부 관보제548호 1914년 6월 1일 10면, 휘보-조사 및 보고-위생. 그의 주소는 용남군 동면 북문동으로 되어 있다.)

그의 경력을 보면 단순한 한의사는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 1926년에 창간된 중외일보는 1928년에 주식회사의 형태로 확대 개편하기 위해 주주를 모집하였는데 마산의 이형재·구성전·옥기환 등과 더불어 통영의 이찬근도 5주를 투자하는 것으로 이에 참여하였다.(경성종로경찰서장 발신, 「주식회사 중외일보사 창립총회의 건」, 「사상문제에 관한 조사서류」, 국사편찬위원회 국내항일운동자료 경성지방법원 검사국문서,1928년11월24일. htp:/db.history.go.kr/id/had_138_0720)

또한 이찬근은 통영지역에서 1920년대 말에 김두옥·최천 등과 더불어 동아일보사 통영지국장으로 거론되었으며,(김보한, 「김보한의 문화칼럼-진산 이찬근을 찾다」, 한산신문 2009년 9월 4일자) 1928년 3월 25일에 봉래좌에서 열린 신간회 통영지회 임시의장이기도 하였다.(통영시지 제1권, p.576. 설립준비위원으로 박세홍도 들어있다. 박세홍은 지회에서 조사연구부에 소속되어 있었다.)

지역사회에서 진보적이며 독립운동에서 관심이 있었던 인물이었다.(그는 통영수산고등학교 교장을 역임하였고, 시와 글씨에 능해 통영출신의 시조 시인인 김상옥의 정신적 스승이었다고 하였으나 한국전쟁 시기에 보도연맹사건으로 처형당하였다-블루버드 블로그, 「통영별곡 51-초정 김상옥 거리를 아시나요? 4」 참조)

경찰의 기록에는 이교재가 김종원에게 군자금을 강요하였다고 되어 있으나 그것은 앞서 말한 바와 같이 무죄로 판명되었다.

김종원은 형사사건부에 농민으로 기재되어 있으나 鱈魚, 곧 대구잡이 사업가로서 통영에서 꽤나 이름난 수산업자였던 것으로 보인다.(통영시지1, 518~519쪽)

또한 그는 통영의 3.1운동에서 사전 준비와 여론을 환기하던 시기의 주도 인물 19명 중 한사람이었다.(통영시지 1, 524쪽)

그러나 군자금 사건에서 주목해야 할 인물은 박성숙일 것이다. 박성숙의 부친인 박진영(1853~1939)은 일제 시대에 통영에서 3대 부자 중 하나로 일컬어지는 이른바 하동집의 주인이었다.

그의 부인인 李仁은 바로 이교재의 고모였다.(김상현, 「나의 삶 나의 통영- 박형균 하동집이 왜 하동집이냐 하면.」 인터넷 통영인뉴스( htp:/www.tyinnews.com/), 2019.2.21., 「박형균 –2 백석, 윤이상, 통영현악4중주단. 통영인뉴스2019.2.28. 성주이씨문열공파세포권지2.186. 109)

이교재의 외손자인 한철수의 회고에 따르면, 외할머니에게 들은 바로는 이교재는 통영으로 날아다니듯이 다녔다고 한다.(한철수 마산상공회의소 회장 증언. 2017년 9월 8일 오후 마산상공회의소장실)

이 배경에는 이교재의 고모인 이인과 그의 아들인 박성숙 등이 통영에 거주하고 있었고, 부호인 이들이 독립운동에도 자금을 제공했기 때문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교재가 사망한 뒤 그의 집이 저당 잡혀 경매에 넘어갔을 때 400엔어치의 저당권을 사들여 이교재의 모친에게 되돌려준 것도 통영군 통영읍 명정리 249번지에 살던 朴喜鎣이었다.(창원지방법원 마산지원 등기계, 건물등기부, 고유번호 1901-1912-162796. 2017년 10월 24일 발행. 이 주소는 박진영의 주소였다.)

또한 앞서 말한 대동청년단 멤버이자 독립만세운동에 참여한 통영의 미곡상 서상호는 박성숙의 아내인 서말희의 오빠였다.

그가 통영에 자주 출입하면서 독립운동과 관련된 활동을 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박씨네와의 관계가 있었기 때문이었다고 생각된다.

이교재는 이 사건으로 인해 1923년 12월 20일에 끝난 제1심에서 제령제7호 위반으로 ‘징역 4년’을 선고받고 진주교도소에 수감되었다. 9월 21일에 경찰에 체포된 지 4개월만이었다.

제2심의 공소신청은 같은 해 12월 24일이었다. 대구의 복심법원으로 넘어가 재판을 받았으나 검사의 공소 취하로 종결되었고, 확정판결은 1924년 1월 24일이었다.(대구복심법원, 형사공소사건부, 국가기록원관리번호 CJA0016705.)

진전면 소장 범죄인명부에도 죄명은 ‘대정8년제령제7호 위반’으로, 형명과 형기란에는 징역 4년으로 기재되어 있다.(진전면 범죄인명부18번 참조.)

그렇다면 그는 1924년 1월 24일부터 다시 4년간의 징역생활에 들어갔으니, 1928년 1월 23일에 만기출옥하였을 것이다. 42살 때의 일이다.

이후 이교재는 서대문형무소에서도 다시 수감되었다는 말도 있다.

주형무소에서의 출옥 직후 상해로 귀환하였고 그곳에서 임무를 부여받고 조선에 입국하는 도중에 신의주에서 체포되어 서대문형무소에서 2년간 복역하였다는 것이다.(이현희, 「임시정부 수립 이후의 독립투쟁과 서대문형무소」, 백산학보70, 2004.12, 1014쪽. 이 글에는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된 독립투사 명단에 이교재가 포함되어 있으나, 그 전거는 제시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에 관한 기록물을 찾지 못하였기 때문에 좀 더 자세한 기술은 후일을 기다려야 할 것이다. 게다가 2년간 복역하였다면 시기상으로 몇 가지 어려운 점에 봉착한다.

1928년에 출옥하였고, 다시 1931년 말쯤 국내에 잠입하였던 사정을 감안하면 그 기간 동안 상해행과 감옥행을 모두 경험하여야 한다는 의미인데, 이는 사실상 불가능하다고 본다.

또한 국내로 들어오다 신의주에서 체포되어 2년 형을 살았다면, 1931년말에 임정으로부터 임명장을 받으면서 새로운 임무를 떠맡는 것도 어려웠을 것이라 생각한다.

따라서 서대문형무소에서 2년형을 살았다는 저간의 서술은 결정적인 자료가 발견되지 않은 한 신뢰하기 어렵다. <<<

이 글은 유장근 경남대 역사학과 명예교수(사진)가 한국민족운동사학회 학술지 「한국민족운동사연구 Vol.99 No.- [2019]」에 게재한 논문이다. 본문 중 푸른색은 논문의 각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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