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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 11. 17. 00:00

마산·창원 역사 읽기(26) - 고인돌은 지배층의 무덤이었나?

4. 유적으로 보는 마산·창원의 역사

4-1 고인돌은 지배층의 무덤이었나?

 

인류가 지구상에 처음 출현한 구석기시대부터 사람들은 ‘죽음’이라는 피할 수 없는 상황에 직면하게 되었다.

과거의 사람들이 죽음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가졌는지를 구체적으로 알 수는 없지만, 무덤을 통해서 그 생각의 일부를 엿볼 수 있다.

무덤을 만들어 시신(屍身)을 따로 모시는 것 자체가 ‘죽음’은 삶의 연장이었으며, 내세관(來世觀)의 표현이었던 것이다.

시신을 별도의 장소에 모시는 것은 물론 껴묻거리副葬品를 함께 묻은 것으로 보아 내세를 분명하게 인식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전 세계적으로 볼 때 구석기시대 후기에 이르러서 무덤이 만들어졌던 예가 가끔 있기는 하다.

한반도의 경우 구석기시대의 무덤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신석기시대가 되어서야 비로소 무덤의 모습을 어느 정도 갖춘 초기적인 형태의 매장시설이 나타나고 있다.

그러나 신석기시대의 무덤 역시 그 수가 그다지 많지 않고 무덤의 구조 또한 매우 단순하다. 따라서 이 시기에도 시신을 매장하는 습속이 일반화되었다고 보기에는 어려울 듯 하다.

이와 같은 전반적인 흐름으로 볼 때 무덤이 본격적으로 만들어지기 시작하는 것은 청동기시대부터라고 할 수 있겠다.

<창원 덕천리 11호 무덤 (석곽묘)>

 

-마산·창원지역에도 고인돌이 있었다-

고인돌 또는 지석묘(支石墓)라 불려지는 무덤은 청동기시대에 만들어졌던 여러 종류의 무덤 가운데 대표적이다.

땅 속에 돌로써 무덤을 만들고 그 위에 큰돌을 얹은 것이 보통인데, 무덤 속에는 시신과 함께 돌칼이나 화살촉, 토기, 장신구 등을 함께 묻는다.

땅 위에 드러난 큰 돌을 상석(上石)이라 부르고 그 아래에 받쳐진 작은 돌을 굄돌 또는 지석(支石)이라 한다.

‘고인돌’ 혹은 ‘지석묘’라는 이름은 상석 아래에 받쳐진 작은 돌에서 유래하고 있는 듯하나, 실제로 고인돌의 가장 큰 특징은 땅 위에 드러나 있는 상석에 있다.

이 상석으로 말미암아 고인돌의 존재 그 자체를 쉽게 파악할 수가 있으며, 상석의 크기 또한 몇 톤에서부터 수십 또는 수백 톤에 이르기까지 매우 다양하다.

무엇 때문에 무덤 위에 그토록 큰 상석이 필요한지가 의문의 시작이다. 상석은 무덤을보호하는 동시에 뚜껑돌(蓋石)의 역할을 한다는 견해도 있지만, 상석 아래에 있는 무덤에는 대부분 별도의 뚜껑돌이 덮혀 있으며, 상석 때문에 무덤이 찌그러진 경우도 많아서 타당한지는 의문이다. 풀어야할 첫 번째의 문이다.

수십 톤 이상의 큰 돌을 옮겨와서 무덤을 만드는데에 많은 사람의 노동력이 필요함은 당연하다. 이런 까닭으로 고인돌을 한 집단의 장(長)의 무덤으로 생각하는 견해가 있었다.

한 사람의 시신을 묻기 위해 수백 명의 인원이 동원되어야 하다면, 그 무덤에 묻힌 사람은 결코 평범한 일반인은 아니었을 것이라고 판단한 것이다.

이러한 견해는 매우 타당성이 있지만 반대의견도 적지 않다. 고인돌을 집단의 장, 즉 수장(首長)의 무덤으로 보기에는 그 수가 너무 많고, 상석의 크기에 비해 부장품이 너무 빈약하다는 것이다.

때로는 상석이 아주 큰 무덤의 부장품이 아주 보잘 것 없는 데 반해 조그마한 상석을 가진 무덤에서 많은 유물이 출토되는 경우도 있었다. 따라서 상석의 크기와 부장품의 질이나 양은 반드시 일치하지 않는 것이다.

이러한 점이 고인돌에 관한 연구나 이해를 어렵게 하고 있으며, 앞으로 풀어야 할 두 번째의 숙제이다.

마산·창원지역에 있는 고인돌 관련 유적은 모두 20개소 이상으로, 100기 이상의 고인돌이 분포하고 있다.

그러나 본래부터 상석이 없었거나 한 개의 상석 주위에 여러 기의 무덤이 배치되어 있는 경우를 생각한다면, 실제 무덤의 수는 이 보다 훨씬 많을 것이다.

현재의 행정구역을 기준으로할 때, 마산 창원지역의 고인돌 분포는 크게 3개의 지역군(地域群)으로 나눌 수가 있다.

첫째는 해안지역으로서 삼진(진동, 진전, 진북)과 구산면 지역이 여기에 속한다. 진동만을 끼고 있으면서 그 주위의 평지나 산기슭에 분포하는 유적들로, 진동 진동리 유적과  고현리유적, 진전 곡안리·오서리유적, 구산 반동리 유적 등이 대표적이다.

이 외에 진북 신촌리유적에서는 3기의 주거지와 30여 기의돌상자무덤(石棺墓)이 조사되었고, 진동 송도와 다구리에서는 돌칼이 출토되기도 하였다. 또한 지금의 자동차운전 면허시험장을 만드는 과정에서 파괴된 진동리 유적은 마산·창원지역에서는 드물게 요령식동검(遼寧式銅劍)이 출토된 곳이기도 하다.

반동리 고인돌은 이미 도굴되었는데, 이곳에서도 청동검이 출토되었다는 이야기가 있으나 확실한 내용은 알 수 없다.

발굴조사된 유적을 중심으로 볼 때, 이 지역은 청동기시대의 이른 시기부터 사람들이 살았을 것이다.

둘째는 내륙지역으로서 내서읍과 북면, 동읍 지역이 여기에 속한다.

바다와는 멀리 떨어진 곳으로, 하천 주위나 산지에 인접한 평지이다. 함안 오곡리유적, 북면 외감리유적, 동읍의 덕천리·용잠리·봉산리·신방리·봉곡리·화양리유적 등이 대표적이다.

오곡리유적은 행정구역상으로는 함안군에 속하나, 내서읍을 가로지르는 광려천변에 위치하고 있어 이곳에 포함시켰다.

이 유적에서는 고인돌을 비롯하여 돌곽무덤(石槨墓), 돌상자무덤, 움무덤(土壙墓) 등 모두 30여 기 이상의 무덤이 조사되었다.

그리고 내서 안성리에서는 손잡이의 모양이 특이한 돌칼이 출토되기도 하였다.

동읍 일대에는 30여기 이상의 고인돌이 분포하고 있으며, 이 가운데에서 정식으로 발굴 조사된 곳은 덕천리유적 한 곳 밖에 없다. 덕천리유적은 모두 5기의 고인돌로 이루어져 있었는데, 발굴조사 결과 주위에서 모두 20여기의 무덤이 확인되었다.

이 중에서 1호 고인돌은 주위에 56×17.5m의 돌담장(石築)이 돌려져 있고, 그 가운데에 무덤이 만들어져 있다. 무덤은 8×6m 크기의 구덩이를 4.5m 깊이까지 파고 돌로써 쌓은 것인데, 지금까지 한반도에서 발견된 청동기시대 무덤 가운데에서 그 규모가 가장 크다. 1호 고인돌의 상석 무게는 35톤 정도이다.

2호 고인돌에서는 160여점의 대롱옥이 출토되었으며, 이것과 인접한 작은 무덤에서 청동검이 출토되기도 하였다.

인접한 용잠리에서도 크기나 구조상 이것과 비슷한 고인돌이 도굴된 채 발견된 적이 있었다.

이러한 점으로 보아 동읍 일대의 고인돌이 대체로 규모가 클 뿐만 아니라 독특한 구조를 갖춘 것은 매우 특이한 점이다.

이처럼 대규모의 무덤에 묻힌 사람은 과연 어떤 사람인지를 밝히는 것도 앞으로의 과제이다.

<창원 덕천리 유적 1호 지석묘 전경>

 

셋째는 창원분지이다.

마산만으로 흘러드는 하천변에 형성되어있는 창원분지는 얕고 완만한 구릉과 평지로 이루어져 있어 일찍부터 사람이 살기에 좋은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창원시내의 가음정동, 외동, 내동, 상남동, 남산동 등 곳곳에는 다양한 유적들이 분포하고 있다.

상남동에서는 고인돌과 함10여기의 무덤이 발굴조사되었고, 외동의 고인돌은 일제강점기에 이미 2단으로 이루어진 특이한 구조의 무덤방이 조사되어 일찍부터 학계의 주목을 받았다.

한편, 남산유적에서는 환호(環濠)라고 하는 방어용 도랑으로 둘러싸인 대규모의 취락이 조사되어 고인돌을 축조할 당시의 생활상을 살필 수 있는 좋은 계기가 되었다.

<창원 외동 지석묘(창원 남고등학교 내)>

 

이상으로 마산, 창원지역에 분포하는 고인돌을 크게 3개의 그룹으로 묶어서 살펴보았다.

고인돌의 분포에 비해 주거나 취락의 수가 상대적으로 적은 점이 아쉽다. 그러나 고인돌은 상석이 땅 위에 드러나 있으므로 쉽게 발견할 수 있는데 반해, 주거지나 취락은 모두 땅 속에 있으므로 쉽게 발견되지 않는다는 약점이 있다.

그러므로 현재까지 발견된 주거유적이 전부라고는 할 수가 없으며, 무덤이 있으면 인접한 곳에 당연히 주거지도 있을 것임은 쉽게 짐작할 수 있는 것이다.

한편, 고인돌과 같은 무덤은 아니지만 독특한 청동기시대 유적으로 마산 가포동유적을 들 수 있다.

가포유원지의 뒷산 경사면에 위치하는 이 유적은 동검(銅劍)과 동모, 동과(銅戈) 등의 청동기가 출토되어 주목을 받았다.

바닷가에 위치한 산의 급경사면에 자연적으로 굴러 내린 바위틈 사이에 청동기를 끼워 넣어둔 이 유적은 청동기를 이용한 제사유적(祭祀遺蹟)으로, 흔히 청동기 매납(埋納) 유적으로 불려진다.

청동기의 매납은 집단의 수장이 청동기를 이용하여 제사를 지낸 후 그것을 바위틈에 감춰 둔 것인데, 이러한 유적이 정식으로 발굴 조사된 것은 가포동유적이 처음이다.

-고인돌은 무엇을 말하는가-

지금까지 확인된바로는 마산, 창원지역에 신석기시대의 사람들이 살았던 흔적은 없다.

그러나 청동기시대의 이른 시기부터 사람이 살기 시작한 증거는 곳곳에서 발견되고 있다.

특히 마산, 창원지역은 넓지는 않으나 바다를 끼고 있으면서, 바다로 흘러드는 하천변에 형성된 평지가 있어 사람이 살기에 적합한 환경을 갖추고 있었다. 따라서 청동기시대가 되면서 거의 전지역 곳곳에 사람들이 살고 있었다고 생각된다.

고인돌이 분포하고 있는 진동만 일대의 삼진지역과 내서읍, 창원분지 등은 모두 거의 비슷한 자연지리적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일반적으로 고인돌은 농경사회와 관련된 거석(巨石) 기념물로 알려져 있다.

농사를 짓기 시작하면서 사람들은 정착되고 안정된 생활을 추구하였으며, 한 곳에서 대를 이어 살아가는 동안에 조상의 중요함도 깨닫게 되었다.

조상의 시신을 모셔두고, 그곳을 관리하고 참배하는 풍습은 오늘날 농촌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다.

땅 위에 드러나 있는 상석은 지금의 무덤에 있는 봉분과 마찬가지로 무덤을 보호하는 동시에 무덤의 표시였다.

이러한 점은 덕천리유적이나 상남 고인돌 등과 같이 상석을 가운데에 두고 그 주위에 일정하게 무덤이 배치된 것으로 보아 알 수가 있다.

창원 남산유적의 취락은 대규모의 저장시설, 수확용 반달돌칼이나 목제 농기구를 가공하기 위한 돌도끼의 존재 등으로 보아 농경을 위주로 하는 취락이었다.

더구나 대규모의 방어용 환호는 집단 모두가 동원되지 않고서는 만들거나 보수 자체가 불가능한 것이었다.

이와 같은 집단 구성원의 공동 작업은 큰 돌을 옮겨서 무덤을 만드는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사람들이 한 곳에 모여 살지 않고서는 이룰 수 없는 일인 것이다.

이런 점에서 본다면, 고인돌이 반드시 수장의 무덤이라 할 수만은 없을 것 같다. 품앗이와 같은 공동의 노동으로도 가능할 수가 있기 때문이다.

다만, 덕천리 1호 고인돌과 같이 엄청나게 규모가 큰 무덤의 경우는 그 나름대로 특별한 의미가 있었을 것이다.

다른 무덤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큰 무덤에 묻힌 주인공은 그 신분이 매우 특별났던 것으로 볼 수밖에 없다.

가포동유적에서 청동기를 이용하여 제사를 지낸 수장(首長)이 그러한 사람이 아니었을까.<<<

고 이상길 / 경남대 역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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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 11. 3. 00:00

마산창원 역사 읽기 (24) - 「아이들에게 희망을」- 이원수

3. 지역의 인물을 찾아서

3-7 「아이들에게 희망을」, 이원수

 

‘나의 살던 고향은 꽃피는 산골……’

이 땅에 사는 사람이면 <고향의 봄>이라는 노래를 불러 보지 않았던 사람이 있을까?

노랫말을 쓴 사람이 동원 이원수다.

그는 15세 되던 해 방정환이 내던 잡지『어린이』에 <고향의 봄>이 당선된 후 71세의 나이로 이 세상을 떠나기까지 주옥같은 작품을 수도 없이 남겼다.

동요, 동시, 동화, 소년소설, 아동극, 수필, 시, 아동문학 평론 등 모두 800편의 방대한 작품을 남겨 아동문학의 거의 모든 분야에서 그의 손길이 닿지 않은 곳이 없었다.

그의 문학은 늘 인간의 삶을 중심으로 하였고, 우주 만물의 모든 사물을 소재로 삼으면서 서로 사랑하며 함께 살아가야 할 것을 강조하였다.

그는 이념의 갈등으로 희생되고 서로를 죽였던 처참한 전쟁과 그로 인한 후유증으로 고통받는 우리 겨레의 삶, 외세에 의한 고난 등으로 얼룩진 우리 현대사의 한가운데서 어린이와 함께 호흡했다.

또한 부정한 사회에 대한 저항과 비판의 목소리를 외면하지도 않았다. 어린이 문학이 현실을 떠나 알록달록한 모습만 그리는 관념적인 이야기들이 난무할 때도 이원수는 늘 아이들이 처한 현실에 주목하면서 아이들 곁을 떠나지 않았다.

 

-민족 수난의 가운데에서-

이원수는 1911년 경남 양산 북정동에서 가난한 목수의 아들로 태어났고, 1년 뒤 창원으로 이사 와서 유년시절을 보내게 된다.

창원읍에서 자라며 나는 동문 밖에서 좀 떨어져 있는 소답리라는 마을의 서당엘 다녔다. … 마산에 비해서는 작고 초라한 창원의 성문 밖 개울이며 서당 마을의 꽃들이며 냇가의 수양버들, 남쪽 들판의 푸른 보리…, 그런 것들이 그립고 거기서 놀던 때가 한없이 즐거웠던 것 같다. 그래서 쓴 동요가 <고향의 봄>이었다.「( 흘러가는세월속에」, 1980)

 

1920년 마산으로 이사를 간 다음 해에 바로 마산 공립보통학교 2학년에 입학하여 신식 공부를 하게 되면서『어린이』와『신소년』을 애독하기 시작했다.

<고향의 봄>으로 아동문학에 입문하던 그 무렵 이원수는 ‘신화 소년회’에 가입하고 민족의 현실에 눈뜨게 된다.

이 소년회의 정신은 그의 자전적 소년소설 <오월의노래> 속에 잘 나타나 있다.

비록 나라를 빼앗겼다 할지라도 죽는 날까지 조선 사람으로 살아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라도 우리 말을 쓰고 우리 혼을 단단히 가져야 한다고, 우리 소년회에서는 늘 서로 말하고 생각하고 해온 것이다. 

 

이원수는 1927년 마산 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하고 마산 공립상업학교에 입학한다.

1939년 지은 시 <고향바다>에서 확인되듯이〈고향의 봄〉창원과 더불어 마산은 그에게 정신의 고향과도 같은 곳이었다.

식민지 현실을 극복하기 위한 사회운동의 분위기가 강했던 마산에서 이원수가 소년기와 청소년기를 보내며 소년회 활동을 한 사실은 이후 그의 문학에 짙게 배인 현실성을 설명해 주는 요소가 된다.

1930년 마산 상업학교를 졸업한 그는 함안 금융조합에 취직을 한다. 이곳에서 이원수는 일본 사람들에게 착취당하고 굶주리는 농민들의 비참한 현실을 알게 되는데, 그의 시 <여항산>을 읽으면 짐작할 수가 있다.

함안에서 독서회에 참가하면서 농촌의 현실과 문학에 대해 배우고 농촌 아이들에게 용기를 주려 했다.

그러나‘함안 독서회’는 치안 유지법 위반 혐의로 1935년 회원 6명이 모두 경찰에 의해 체포되었다.

이 독서회에 카프 중앙위원이 끼어 있는 것으로 보아 당시 이원수는 프로문학에 강한 관심을 갖고 공부하고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경찰에 검거되어 징역 10월, 집행유예 5년을 언도 받게 된다.

19361월 출옥한 그는 3개월 후 수원에 있는 최순애(『어린이』에 <오빠생각>, <가을>을 발표한 동시 작가)와 마산 산호동에서 신혼살림을 차린다. 산의 한약방 서기로 일하다 이듬해 함안 금융조합에 복직되어 함안에서 살게된다.

1945년 해방은 국민 모두에게 환희였으나 식민지로부터 완전히 해방된 것은 아니었다.남북한에 미군과 소련군이 주둔했으며, 그들은 한반도의 정치를 좌지우지했다.

자주적인 통일된 독립국가를 건설하고자 했던 국민들의 소망은 이루어지지 못했다. 좌우익의 정치적 충돌은 극심했다. 이러한 상황은 문학계도 예외는 아니었다.

이원수도 당시 조선 프롤레타리아 예술동맹의 흐름을 이어 받은 ‘조선문학가동맹’에 가입했다.

이원수는 종래의 동요, 동시 쓰기와 함께 1947년부터 동화와 소년소설을 쓰면서 이전보다 더 치열하게 작품활동을 하게 된다.

동시대의 작가들이 동심천사주의적인 노랫말이나 이념의 갈등으로 흔들리고 있을 때 혼란과 격동기를 살아가는 아이들과 사회의 모습을 그리기에 운문만으로는 부족하다고 여겨 산문으로 전환하여 동화와 소년소설을 발표한다.

압제자는 갔으나 감시자가 더 많아진 조국의, 자리 잡혀지지 않은 질서 위에 이욕에 눈이 시뻘개진 사람들. 이들이야말로 노예근성을 가진 벼락장군처럼 사방에서 큰소리들을 치고, 또 권세와 재물을 쌓아올리고 있었다. … 이런 동시로써 내 가슴이 후련해질 까닭이 없었다. 동화를 쓰자. 소설을 쓰자. 그런 것으로 내 심중의 생각을 토로해 보자는 속셈이었다. 쫓겨가는 외인에게 주먹을 들어보이며 욕을 하는 사람들이 들어오는 외인에게는 허리를 굽혀 환영을 한다. 외인의 것이면 물자건 풍습이건 즐겨 받는다. - 이런 세상이 싫었다. (나의 문학 나의 청춘」, 1974)

 

이원수의 첫 장편동화인 <숲 속 나라>(1949)는 당시의 현실을 바탕으로 돈과 권력을 배제하고 서로 돕고 사랑하며 스스로의 힘으로 살아가는 모습을 그린 나라로, 이원수가 그리는 이상적인 인간사회를 그린 판타지 작품이다.

이 작품의 사상적 토대는 “자주적 독립, 민족의 눈을 속이는 경제적 침략 등을 경계하는정신” (「아동문학프롬나이드」)이었다.

일제식민지시대를 마감하고 자유와 민주의 나라를 세워 우리 뜻대로 살아볼 희망과 꿈에 부풀어있던 우리 민족은 1950년 민족상잔의 비극 한국전쟁을 겪게 된다.

이원수는 1·4후퇴 때 3녀 영옥과 3남 용화를 잃게 된다. 그에게 전쟁은 고아들, 굶주림, 이별 등 온갖 고통의 원인이었으며, 세상에서 부정되어야할 모든 것들의 집합체일 수밖에 없었다.

그러기에 전쟁의 참상은 작품의 중심소재가되었고, 평화를 열망했던 그의 정신이 작품 곳곳을 가득 메웠다.

19604·19겪으면서 이원수는 정치와 사회문제, 분단과 실향의 문제, 무분별한 문명수용에 대한 비판과 고발정신을 담은 작품을 많이 발표하면서 자유와 정의와 평화를 염원했다.

<'고향의 봄' 가사에서 '울긋불긋 꽃대궐'로 묘사된 근대조각의 선구자 김종영 생가 / 창원시 의창구 소답동 현존>

 

-죽는 순간까지 붓을 놓지 않았다-

최근 이원수의 친일작품이 발견되었다.

조선금융연합조합회의 국책 기관지인『반도의 빛』이라는 월간 잡지 428월호에 <지원병을 보내며>라는 친일 시를 비롯하여 몇 편의 친일 글을 남겼던 것이다.

친일글을 쓰게 되었던 당시 상황의 변명인지는 모르지만 당시 그의 처지를 글로 남기기도했다.

여전히 생활은 어려웠다. 그런데 이듬해인 일천 구백 삼십 칠년에 나는 함안 금융조합에 다시 가게 되었다. 이른바 사상범으로 형을 받은 사람을 써줄 턱이 없는 시절이었건만 그 곳의 이사 김정완 씨는 우선 임시 직원으로라도 오라고 했던 것이다. … 일본의 태평양전쟁이 시작되어 세상 살기가 날로 어려워져 갔다. … 정말 막막한 시대였다. 눈에 보이는 것, 귀에 들리는 것이 모두 일본의 노예로 사는 것만이 가장 정당하고 옳은 것 같은 시대였다. … 따지고 보면 나 자신도 친일분자의 하나로 보였을 지도 모르고. (<털어 놓고 하는 말>,1980)

 

일제시기를 살았던 대부분의 문인들처럼 그도 일제의 유혹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의 삶이 고통스러웠다 하더라도 친일글이 정당화될 수는 없다. 그 만이라도 ‘친일분자로 보였을지도 모르고’가 아니라 진정한 참회의 글을 남겼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있다.

이원수가 태어난 1911년부터 세상을 떠난 1981년까지 우리 나라는 격랑의 세월이었다.일제식민지, 해방, 6·25 전쟁, 분단, 4·19, 5·16에 이르기까지 우리 민족이 겪어야 했던 극심한 물리적, 정신적 수난은 그에게도 예외일 수 없었다.

어린 시절과 청년시절, 장년, 노년에 이르기까지 온몸으로 고스란히 겪어내야 했다. 이러한 경험은 그의 작품에 짙게 녹아 들어있다.

198171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용인공원묘지에 안장되었다. 마지막 병상에서도 이원수는 정신을 꼿꼿이 해서 갱지 위에 글을 썼다. <때묻은 눈이 눈물 지을 때>(1981)와 <겨울 물오리>(1981)는 눈앞에 죽음을 마주하고 있는 그의 심경을 짐작케 한다.

이원수는 스스로 때묻은 눈이기를 바라고 있었다. 온 세상 사람들이 어린이를 감싸고, 목을 축여 활짝 피어나게 하는 때 묻은 눈이기를 바란 것이다.

이원수의 호는 ‘동원(冬園)’으로 스스로 겨울들판이 되려고 하였다. 그것은 일본에게 나라를 빼앗겼을 때 태어나, 세상을 떠날 때까지 힘겹게 살아온 그의 삶과 관련이 있다.

추운 겨울 들판에 서있는 겨울나무와 같이 수많은 고비를 넘기면서 꿋꿋하게 쓰러지지 않고 가난하고 고통받는 아이들 편에서 글을 쓰려 했다.

죽어가면서도 그 자세 그대로‘겨울 물오리’가 되어 죽어간 아이들을 만난다는 기쁨에 넘쳐 있었던 것이다.<<<

박종순 / 당시 진주교육대학교 강사. 아동문학 전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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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멩물 2014.11.03 09:33 신고 address edit & del reply

    잘 읽었습니다. 보일러 한번 살펴봐야 할 날씨 입니다..건강 유의 하십시요.

    • 허정도 2014.11.03 10:51 address edit & del

      벌써 그렇게 되었네요. 감사합니다.

  2. 실비단안개 2014.11.10 21:15 address edit & del reply

    잘 읽었습니다.
    언제나 나오나...
    친일에 대한 이야기도 있군요. 안타까운 일이지만 사실이니까요.
    감사합니다.

    • 허정도 2014.11.11 13:11 address edit & del

      반갑습니다. 잘 계시죠?

2014. 7. 28. 00:00

마산·창원 역사 읽기(10) - 창원은 가야의 탁순국이었다

2. 청동기 시대에서 10·18까지

2-3 창원은 가야의 탁순국이었다

 

가야 후기에 창원지역에는 탁순국(卓淳國)이 자리잡고 있었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창원시의 옛 지명은 굴자군(屈自郡)인데, 『삼국유사』와『고려사』에는 구사군(仇史郡)이라고 나오며, 『일본서기』에는 구사모라(久斯牟羅), 또는 기질기리성(己叱己利城)이라고도나온다.

 

-다양하게 남아 있는 유적들- 

창원 지방에서 신석기시대 유적은 발견된 바 없고, 청동기시대 유적은 더러 발견되었다. 즉, 창원시 남산 유적, 외동, 가음정동 민무늬토기 포함층과 진해시 성내동(웅천) 출토민무늬토기 등을 비롯하여, 창원시외동, 토월동, 가음정동, 용지동, 동읍 덕천리, 용잠리, 화양리, 신방리, 남산리, 북면 외감리 등에서는 지석묘 유적이 발견되었다.

창원시 남산 유적은 마을이 야산의 구릉에 높이 조성되어 있고 그 전체가 사람 두길 이상되는 환호(環濠)에 둘러싸여 있는 방어성 취락 유적으로서, 이미 청동기시대에 창원 지방에 농경 생활을 기반으로 하는 주민들이 많이 거주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1992년부터 1993년 사이에 걸쳐 경남대학교 박물관에서 발굴한 덕천리 1호 지석묘는 길이 8미터, 폭 6미터, 깊이 4.5미터의 토광 하단에 석곽을 설치하고 그 위를 판석과 괴석으로 3단에 걸쳐 덮은 후 다시 흙을 덮고 지석과 상석을 설치한 것이었다.

그 외곽에는 방형의 주구(周溝: 주위를 도랑으로 판 것)가 만들어져 있고 안쪽으로는 높이 40∼50센티미터의 석축이 쌓여 있었다. 유물로는 민무늬토기 평저옹, 홍도, 대롱구슬(管玉) 일괄, 간돌검, 간돌화살촉, 비파형동검 등이 출토되었다.

이처럼 묘역을 갖춘 대형 지석묘 유적이 발견되기는 최초의 일로서, 지석묘 유적 단계에서도 상당한 정도의 계급 분화가 있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사례의 하나이다.

기원 전후한 시기 이후의 유적으로는 분묘와 성지가 있는데, 목관묘 및 목곽묘 유적으로는 창원시 가음정동, 반계동, 도계동, 봉곡동, 봉림동, 불모산동, 서상동 고분군, 동읍 다호리 고분군, 북면 화천리, 동전리 고분군, 진해시 성내동(웅천) 고분군 등이 있고, 옹관묘 유적으로 삼동동 고분군이 있다.

 

<창원대학교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도계동 유적>

 

창원시 토월동 진례산성(進禮山城), 동읍 무성성지(武城城址), 북면 화천리성지(花川里城址) 등은 해당시기의 성지로 추정된다.

위의 고분군 중에 시기적으로 가장 오래된 것은 기원전 1세기 후반으로 편년되는 다호리 1호분인데, 봉분이 없고 길이 278센티미터, 너비 85센티미터, 깊이 205센티미터의 토광에 길이 240센티미터의 통나무형 목관이 안치되어 있었다.

부장품으로는 세형동검, 철검, 철제 고리자루손칼[鐵製環頭刀子], 청동투겁창, 쇠투겁창, 판상철부, 쇠따비, 성운문 거울[星雲文鏡], 청동띠고리[靑銅帶鉤], 오수전[五銖錢], 청동말종방울[銅鐸] 등의 금속기와, 휴대용 화장품곽을 비롯하여 검집, 원형두(圓形豆), 방형두(方形豆), 원통형 칠기,뚜껑, 각형(角形) 칠기, 붓, 부채 등의 칠기류, 유리구슬, 민무늬토기와 와질토기편 등이 출토되었다.

유물 가운데에서 성운문 거울, 오수전, 띠고리, 청동말종방울, 유리구슬, 칠기 화장품곽 등의 중국 한나라식(漢式) 유물은 평양 정백동이나 경주 조양동 유적에서도 출토된 바 있어서, 이 시기에 한반도 남부지역과 낙랑과의 교섭이 활발했음을 보여준다.

또한 목관의 형태나 청동기, 철기 및 칠기의 모습은 중국이나 일본의 것과는 다른 독창적인 세형동검 문화의 전통을 보인다. 따라서 기원전 1세기 무렵에는 경남 해안 지대에서 창원 지방에 가장 선진적인 정치세력이 존재했음을 알 수 있다.

창원시 도계동 및 다호리 분묘 유적에서는 기원전 1세기부터 4세기에 이르는 기간의 유물들이 출토되었으나, 기원 후의 시기에 이들은 다호리 초기와 같은 강대한 세력을 구축하지는 못했다고 보인다. 이는 같은 시기에 김해 양동리나 대성동 고분군이 번성하던 것과는 대조된다.

4세기경의 창원 도계동18호 목곽묘는 길이 350센티미터, 너비 160센티미터, 잔존 깊이 55센티미터의 토광 안에서 철제 손칼 2점, 투겁창 2점, 미늘쇠[有刺利器] 1점, 도끼 2점, 낫 1점, 끌 1점 등의 철기류와 적갈색 양이부소호(兩耳附小壺) 2점, 회청색고배 2점, 원저단경호 1점, 유개대부호(有蓋臺附壺) 1점 등이 출토되었다.

이로 보아 창원 지방의 중심지가 아닌 도계동 고분 축조 집단도 어느 정도의 세력은 유지하고 있었다. 특히 김해 양식의 고배, 즉 아가리 부위가 급격하게 바깥으로 꺾여있고 굽다리가 팔자형(八字形)으로 퍼지되 투창이 없는 외반구연 무투창 고배(外反口緣無透窓高杯)가 나타난 것으로 보아, 이들은 김해의 가락국과 밀접한 연관을 가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패총 유적으로는 창원시 외동 성산패총, 가음정동, 남산동 패총, 진해시 웅천 패총, 진해 패총, 용원동 패총 등이 있다.

특히 용원동 패총에서는 움집(수혈주거지) 14기, 고상가옥(高床家屋) 4기, 저장공, 승석타날문(새끼줄로 두드린 무늬)이나 무문의 평저단경호, 고배, 장경호, 단경호, 옹, 하지키 뚜껑(土師器蓋) 등의 적갈색 연질토기, 타날문 단경호, 고배류, 대형 단경호, 평저단경호, 화로형토기, 원통형 기대 등의 회청색 경질토기, 철정, 쇠손칼, 쇠화살촉, 소형 쇠도끼, 녹각제 자루 등의 유물이 출토되었다.

그 중에서 원통형기대는 원통의 중간 부위가 주산알 모양으로 약간 부풀어 오르고 하단부의 곡선이 불룩하게 내려가는 것으로서, 4세기 후반의 김해 대성동 41호분, 양동 9호분, 230호분, 부원동 패총, 부산 복천동 95호분 출토품과 같은 양식이므로, 해당 시기의 그 지역들 사이에 문화적 교류가 긴밀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일본과의 교류- 

『일본서기』신공 섭정 46년(366) 조에서 백제는 창원의 탁순국(卓淳國)을 매개로 해서 왜국과 통교하기를 원했고, 탁순국 말금한기(末錦旱岐)는 왜로 통하는 길을 묻는 백제사신에게 자문해 주고 왜국사신에게 백제 사신의 말을 전해 주기도 했다.

그리고 탁순 사람 과고(過古)를 보내 왜국사신의 시종을 백제로 인도해 주기도 했으며, 탁순국은 왜국 사신 일행이 귀국하는 출발점이 되기도 했다. 또한「신공기(神功紀)」49년(369) 조의 기사에서, 탁순국은 왜군의 집결지 역할을 하기도 했다.

 

<일본서기>

 

『일본서기』에 전하는 이런 기사들이 얼마나 진실을 전하고 있는지는 분명치 않으나, 창원 탁순국은 일본과의 교류가 활발했던 정치집단이었음은 확실하다.

4세기대 이후의 어느 시기에 창원지역에 탁순국이 자리 잡고 있었음은틀림없다. 『양직공도(梁職貢圖)』백제국사 전의 ‘탁국(卓國)’과 『일본서기(日本書紀)』의 ‘탁순국(卓淳國)’이 바로 그것이다.

창원 반계동 고분군은 6세기의 것으로서 25호분에서 쇠망치, 쇠집게 등의 단야구가 출토되어 이들이 제철집단 임을 알 수 있으며, 23호분에서는 고령양식의 유개대부 장경호, 단추형꼭지 뚜껑 단각고배, 개배, 유개대부 파수부발(有蓋臺附把手附鉢) 등이 출토되어, 이들이 대가야와 긴밀한 관계를 가지고 있었음을 보이고 있다.

창원 탁순국의 왕 또는 유력자로 추정되는 아리사등(阿利斯等)은 대가야의 맹주권을 인정하며 후기 가야 연맹의 한 소국으로 편입되어 있다가, 522년대가야와 신라의 결혼 동맹 당시 따라온 수행 인원 중 창원 지방에 배치된 사람들이 돌연 신라 관복으로 갈아입자, 그 수행 인원들을 신라로 쫓아 보내는 자주적인 행동을 취하였다.

그러나 신라가 이를 트집 삼아 탁순국을 공격하고, 백제군이 함안 안라국 주변의 걸탁성까지 진주해오자, 탁순국은 왜국에 구원을 요청했다.

그런데 왜국의 사신단도 구사모라((久斯牟羅)=기질기리성(己叱己利城))에 머물면서 자기 이익만을 도모하자, 아리사 등은 백제, 신라에게 사신을 보내 회의를 요청했다.

백제는 군대를 더욱 전진시켜 칠원에 구례모라성(久禮牟羅城)을 쌓고 주둔하면서 탁순국을 압박했다.

그러자 탁순국 내부에서는 백제에게 투항하자는 일파와 신라에게 투항하자는 일파가 있었는데, 그 왕이 신라에 종속되기를 원했다. 그 멸망 연대는 분명치 않으나 530년대 후반의 어느 시점이었다고 추정된다.

신라는 탁순국을 복속시켜 굴자군(屈自郡)으로 삼았으며, 경덕왕이 의안군(義安郡)으로 이름을 고쳤다. 영현(領縣)은 칠제현(함안군 칠원면), 합포현(合浦縣: 마산시), 웅신현(熊神縣: 진해시 성내동)의 셋이다.

이는 멸망 시기 탁순국의 영역 범위가 매우 넓었음을 보여준다. 혹은 멸망 직전의 탁순국이 신라에게 협조적인 자세를 보여 전쟁 없이 투항했기 때문에 신라에 의하여 군현 편제될 때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여, 탁순국 당시보다 넓은 영역을 신라로부터 배정받은 때문일 수도 있다.

김태식 / 홍익대학교 역사교육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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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 6. 23. 00:00

마산·창원 역사읽기(5) - 조선시대의 마산과 창원

1. 한국사 속의 마산·창원

1-5 ·조선시대의 마산과 창원

 

창원이란 지명이 만들어진 것이 조선시대이다.

조선 태종대에 의창과 회원을 합쳐 창원이라 이름지었다. 부로 승격되었다가 뒤에 도호부가 되었다. 선조 34년에 대도호부로 승격했다.

대도호부로의 승격은 임진왜란때 병사 겸 부사인 김응서와 그를 따르는 군인, 관인, 백성들이 한 사람도 일본에 항복하지 않았다는 체찰사의 장계 때문이었다.

임진왜란때 일본군과 벌였던 대표적인 전투는 노현 및 창원성 전투, 안민고개전투, 합포해전이 대표적이다.

칠원군과 합쳤다가 광해군 9년(1617)에 나누었다. 인조 5년(1627)에 진해와 합쳤다가 7년에 나누고, 현종2년에 전패를 잃었기 때문에 현으로 강등되었다가 11년에 다시 승격되었다.

조선후기에 들어서면 이 지역은 경제활동의 중심지가 되었다. 특히 마산지역은 조선후기에 물산의 집산지로서 발전하기 시작했다.

대동법이 시행으로 해로가 연결되는 전국 각지에 조창이 설치되었는데. 영조 36년(1760년)에 창원 마산창이 설치되었는데 마산창 관할구역은 인근 8개 읍이었다.

고려시대의 석두창이 없어진 후 이 때 다시 신설된 것이다.

마산창은 남해안의 수산 물집산지이자 교환의 중심지역활을 담당했다.

조선시대에 남해의 마산은 동해의 원산, 서해의 강경과 더불어 전국 3대 수산물집산지의 하나였다.

이렇게 번성한 마산장은 함경도 덕원의 원산장, 충청도 은진의 강경장과 더불어 조선후기 15대 자아시 중의 하나로 발전하면서 마산이 남해안 최대의 상업도시가 되었다.<<<

남재우 / 창원대 사학과 교수

 

아래 그림은 조선 후기에 제작된 각선도본(各船圖本)에 실린 조운선 그림과 조선시대 이용했던 조운선의 모형이다. 그림에서는 배의 골격만 나타내었지만 모형은 섬세하게 복원된 것이다. 배의 기본구조 위에 삼판(杉板)을 얹어 용적량을 늘린 것이 특징이며 배 안에다 세곡을 적재했다.

초 봄에 이런 조운선 16척이 각 읍에서 보내온 대동미 9,215석(石) 5두(斗)를 싣고 마산포를 출발하여 거제 견내량→고성 사량도→남해 노량→전라도 영암 갈두포→진도 벽파정→무안 탑성도→영광 법성포→만경 군산포→충청도 태안 서근포→보령 난지포→경기도 강화 이고지포를 지나 6월 하순경 한강 마포에 있는 경창(京倉)에 도착한다. 1886년 일본과 미국의 차관으로 구입한 기선 해룡호가 나오기 전까지 모든 세곡이 이 배로 수송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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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 6. 9. 00:00

마산·창원 역사읽기(3) - 고대사회의 마산과 창원은 가야의 영역이었다

1. 한국사 속의 마산·창원

1-3 고대사회의 마산과 창원은 가야의 영역이었다

 

고려군읍」 연혁도칠폭, 채색필사본, 19세기 이후, 영남대학교 박물관 소장 / 단군조선 이후 고려까지 각 왕조의 강역을 그린 일종의 역사지도. 강역의 역사적 변천과 도성을 비롯한 주요지명의 위치를 이 지도를 통해서 파악할 수 있다.

 

흔히들 한국의 고대사회를 고구려, 백제, 신라를 중심으로 하는 삼국시대로 이해하고 있다.

하지만 기원을 전후로 한 시기에 한강의 남쪽 지역에는 많은 나라들이 있었다.

중국의 정사서인 “삼국지”에는 마한(지금의 경기도,충청도,전남지역), 진한(낙동강의 동쪽), 변한(낙동강 서남부지역)이 있었다.

이들 삼한에는 다양한 이름의 나라들이 있었다. 마한에는 백제국을 비롯한 54개국이, 진한에는 사로국을 비롯한 12개국이, 변한에는 구야국,안야국을 비롯한 12개의 나라가 있었다.

이와 같은 나라 외에도 다른 나라들이 ‘삼국사기’, ‘삼국유사’에 들장하고 있다. 포상팔국이 대표적인데 그 중의 하나가 골포국이다.

골포국이 “삼국유사”에는 합포로 비정되고 있다. 하지만 유적과 유물의 분포로 보아 고대사회의 마산.창원지역에서 정치집단이 형성 되었을 가능성이 있는 지역은 세 곳이다.

성산패총 일대의 창원시 지역, 다호리를 중심으로 하는 창원 동읍일대와 마산의 진동만 일대이다.

따라서 합포가 마산만이므로 마산의 중심지 보다는 마산만을 끼고 있는 창원시 지역일 가능성이 높다.

이곳에는 청동기시대 이후부터 가야시기까지의 유적이 골고루 분포하고 있다. 가음정동유적(지석묘,청동기시대주거지.패총,고분군,수전지), 성산패총, 내동패총, 삼동동고분군, 외동패총 등이다.

다호리유적이 있는 창원의 동명일대도 정치집단의 성장가능성을 보여주고 있다.

정치집단의 이름을 알 수는 없지만, 다호리 유적에서 조사된 오수전이나 중국제 거울은 당시 북쪽에 존재하였던 낙랑군 등 다른 나라와도 교류가 있었음을 보여주고 있으며, “삼국지”의 기록처럼, “변한에서 철이 많이 생산되어 이것을 낙랑이나 왜 등지로 수출하였다”라는 것은 정치집단이 존재했던 근거를 제공해 주고 있다.

또한 이를 재료로 하여 만든 다량의 철기유물, 그리고 그 원료인 철광석 등이 다호리유적에서도 확인되고 있으며 성산패총은 철생산지였음을 보여주는 증거가 되고 있다.

 

마산.창원지역에 있었던 골포국 등의 나라들은 4세기대를 지나면서 다른 나라로 바뀌었다. 창원지역을 중심으로 한 정치집단은 탁순국이었다.

4세기대가 되면 백제국과 사로국은 인근 지역으로의 진출을 통하여 영역을 확대하고 백제.신라로 발전해 나갔다. 변한지역도 마찬가지였다.

가야지역에는 “일본서기”에 의하면 13개의 나라가 있었다. 고령의 가라국, 김해의 남가라국, 함안의 안라국등이었다.

탁순국은 창원지역을 포함하는 정치집단이었다.

탁순국의 성장과 발전을 보여주는 유적은 고분을 통하여 알 수 있다. 마산의 경우 고성과 인접한 진동쪽의 대평리유적을 비롯하여 현동유적, 자산동고분군이 있고 창원에는 주남저수지와 인접한 야산과 저지대에 넓게 형성된 다호리유적, 도계동고분군, 가음정동유적, 삼동동 옹관묘유적, 반계동유적, 천선동고분군, 창곡동유적등 10개소에 달한다.

탁순국은 신라와 백제의 가야지역 침략과정에서 가야지역의 독자성을 유지하기 위한 노력을 끝까지 기울였다. 하지만 신라의 끊임없는 가야지역 진출과정에서 김해의 금관국이 신라에 멸망됨으로써 더 이상 세력을 유지하지 못하고 6세기 중반경에 신라에 자진 투항하고 말았다.

신라가 가야지역에 대한 침략을 본격화했던 것은 6세기대에 접어들어 신라가 국가체제를 정비하면서부터였다. 법흥왕은 금관국을 함락(532년) 시켰고, 562년 고령의 가라국이 신라에 정복됨으로써 신라는 가야의 전역을 차지 하게 되었다.

이를 바탕으로 신라는 한반도에서 군사적인 주도권을 장악하게 되었다. 그리고 7세기 중엽에 백제를 멸망시키고 고구려의 일부 영역도 차지하게 되어 삼국을 통일하게 되었던 것이다.

통일후 신라는 새로이 확보된 영역을 통제하기 위하여 지방제도를 정비하였다. 685년 신문왕은 대동강 이남의 지역을 주-군-현 체제로 정비하여 중앙집권을 강화했다.

마산과 창원지역은 이미 신라가 탁순국을 정복하여 굴자군으로 삼았으며, 경덕왕이 의안군으로 이름을 고쳤다. 소속된 지역은 칠제현(함안군 칠원면), 합포현(마산시), 웅신현(진해시 성내동)의 셋이다.<<<

남재우 / 창원대 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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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 6. 2. 00:00

마산·창원 역사읽기(2) - 언제부터 이곳에 사람이 살았을까?

1. 한국사 속의 마산·창원

1-2. 언제부터 이곳에 사람이 살았을까?

 

<마산 진동면 고현리 공룡발자국 화석>

 

이 지역에 언제부터 사람이 살았을까?

이 지역에는 구석기시대 유적이 조사되거나 유물이 채집된 사례는 없다.

하지만 가까운 부산.경남 권역에서는 최근 후기구석기시대 유적이 많이 발견되었고 중기구석기시대 이전 유적들도 몇 군데서 확인되었기 때문에 마산.창원지역에도 이 시기의 유적이 나올 가능성은 많다.

신석기 시대의 시작은 지금으로부터 약 8천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신석기시대는 보통 농경이 시작되지만 우리나라를 포함한 동북아시아의 신석기시대에는 처음부터 농경을 한 것이 아니고 식물성식료의 채집과 특히 어로생활 중심의 생업경제였다.

이러한 생활형태였다면 신석기시대 유적인 부산 동삼동유적, 김해 수가리 유적, 통영 상노대도 유적처럼 마산.창원지역도 이들 지역과 유사한 환경이었기 때문에 패총을 이루며 살던 신석기인의 유적이 잔존해 있을 가능성은 높다.

신석기시대의 짧은 기간 중에도 상당한 수준의 해수면 변동이 있었기 때문에 과거 멀리 진출해 있던 바닷가 유적은 지금 물에 잠겨 있을 수도 있다.

현재까지의 자료로서 이 지역에 인간이 살기 시작한 것은 청동기 시대부터이다.

청동기 시대의 유물.유적들은 정치권력이 발생했음을 보여준다.

농업 생산력의 발전으로 잉여생산물의 축적과 사유재산의 출현은 공동체사회를 해체시키고 계급분화를 낳았다.

소수의 지배층이 다수의 피지배층을 통치하고 그들의 생산물을 약탈하는 체제로 전환되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 지역에 정치권력의 구조화를 보여주는 지배체제인 국가가 있었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유적과 유물의 분포로 보아 정치권력이 발생했음은 추정 가능하다. 청동검이나 지석묘는 이를 잘 보여주는 유적이다.

이 지역에도 많은 지석묘가 널리 흩어져 있다. 창원의 동읍, 구산면, 진동, 진북 등지에서 조사되고 있다.

이외에도 청동기시대의 주거지가 마산 현동유적에서 조사되었다.<<<

 

<창원 상남동 유흥가 한복판에 있는 청동기시대 지석묘(일명 고인돌). 나이 약 3천 살>

 

<남재우 / 창원대 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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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 5. 26. 00:00

마산·창원 역사읽기(1) - 지역의 역사를 알아야 한다

예고해 드린대로 오늘부터는 우리 지역의 역사서  마산·창원 역사읽기」를 올리겠습니다. 모두 이 도시에 대한 이야기라 택했습니다

이 책은 전공분야가 연구분야가 다른 31명이 함께 쓴 책입니다. 저도 함께 했습니다.

이제는 도시통합이 되었지만 원래 책 제목대로 이 글 제목도 마산·창원 역사읽기」로 하겠습니다.

목차는 다음과 같습니다.

1. 한국사 속의 마산·창원

2. 청동기 시대에서 10·18까지

3. 지역의 인물을 찾아서

4. 유적으로 보는 마산·창원의 역사

5. 삶과 문화로 보는 마산·창원의 역사

한 꼭지에 5-10개 정도의 작은 꼭지가 있기 때문에 약 40 꼭지 정도 됩니다만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해방 이후 부분이 준비될 때까지만 싣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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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한국사 속의 마산·창원

1-1. 지역의 역사를 알아야 한다

 

마산.창원지역에서 일어난 많은 역사적 사건들은 한반도의 전체 역사와 아무런 관련이 없을까? 부정선거에 저항했던 3.15의거는 마산지역만의 문제였을까?

그렇지 않다.

3.15의거는 이승만 독재로 인한 자유와 민주가 탄압받던 한국사회의 모순이 마산지역에서 가장 적극적인 형태로 전개된 하나의 실례이다. 의거는 마산에서 비롯되어 이승만 정권을 타도했던 4.19민주항쟁으로 이어졌고, 결국 이승만 독재정권을 무너뜨렸다.

이처럼 지역은 해당 시기의 사회적 모순이 응집된 현장이며, 지역민의 의지가 한국사회전체의 변화에 커다란 영향을 미친다. 즉 지역사의 발전은 한국사의 발전과정과 동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맞물려 있는 것이다.

하지만 중앙집권의 오랜 전통 때문에 지역민들조차 지역은 관심 밖이었다. “사람이 나면 서울로 보내고 말이 나면 제주도로.....” 라는 옛말은 여전히 유효하다. 중앙이 아닌 지역에 사는 사람들은 지역에 살고 있다는 이유만으로도 상대적인 박탈감을 가지고 살아 가고 있다.

한국사 교육이 한민족의 구성원으로 가져야 할 정체성을 갖게 하는 것이라면 지역에 살고 있는 사람들 또한 지역사 교육을 통한 지역구성원으로서의 정체성을 가져야 할 것이다.

물론 전근대사회나 일제시기에도 지역사에 대한 관심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하지만 당시의 지역사는 지역이 주체가 되는 한 시기, 한 지역의 역사상을 제대로 전달하지는 못했다.

조선시대에는 지리서나 읍지가 많이 편찬되었지만, 중앙집권적인 지배체제를 계속적으로 유지하기 위한 정보수집(조세원.군역담당자의 확보.공물의 수취 등)을 위한 것이었다.

일제시기에는 도사.부사 등이 쓰여졌지만 식민지 지배를 효율적으로 수행하기 위한 자료집에 불과했다.

해방이후에도 지역사는 시사.군지라는 이름으로 쓰여져 왔지만 지역민의 다양한 요구를 만족 시키지 못했다.

최근 들어 지역사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지방자치제의 실시라는 현실사회의 변화와 맞물려 시민사회의 다양한 요구를 중앙중심의 획일적 통제만으로는 해결할 수 없기 때문이다.

지역의 특수성, 지역사회의 과거와 현재적 조건이 인정되지 않고서는 국가 전체의 발전도 보장될 수 없게 된 것이다.

(김정호의 동여도에 나타나는 마산·창원 지역)

 

바람직한 지역사 연구는 지역이 중심이 되어야 한다. 지역사는 한국사의 발전과 다르지 않다. 지역사를 연구하는 것 그 자체가 한국사회의 모순을 해결하는 지름길이다.

첫째, 지역문제를 극복할 수 있다. 오늘 우리사회는 자본주의의 기형적 발전과 파행적인 정치운영으로 지역문제가 사회적 갈등 요인의 하나이다. 각 지역의 발전과정을 개별적으로 살피고, 각 지역의 특수성을 인정함으로써 지역의식의 심화, 지역간의 갈등을 해소할 수 있을 것이다.

둘째, 지방자치제의 발전에 기여할 것이다. 중앙의 지방정책에 종속되어 움직이던 지방행정조직이 지방자치제의 실시로 일정정도 지역민의 삶을 책임질 의무를 지니게 되었다. 특히 경제적 현안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과거 국가와 국가간의 교섭이 지방자치단체 중심으로 변하고 있다. 과거의 역사 속에서 해당 지역이 지니고 있었던 경험은 오늘날에도 중요한 교훈이 될 것이다.

셋째, 삶의 터전인 자신의 고장에 대한 올바른 자긍심을 가지게 할 것이다. 지나치게 자기 지역만을 강조하고 자랑하는 주관적인 향토애착에서 벗어나 객관적인 향토사랑을 심어주게 될 것이다.

각 국가나 민족의 문화적 다양성을 인정하는 것이 진정한 인류사회의 발전을 담보할 수 있는 것이라면, 한 국가에 있어서도 지역문화의 다양성과 독창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다.

우리가 몸담고 있는 지역은 해당 시기 국가사회의 과제가 응집되어있는 삶의 현장이며, 이러한 과제의 해결도 지역 속에서 시작되었음을 과거의 역사적 경험은 잘 보여주고 있다.

지역의 역사와 문화에 대한 올바른 이해가 지역사회의 발전을 가져올 수 있으며, 나아가 국가발전으로 이어질 것이다. 또한 인류사회의 발전에 기여하는 길이 될 것이다.<<<

<남재우 / 창원대 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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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 3. 27. 00:00

그들을 고발한 이유

지난 3월 10일, 저와 차윤재 마산YMCA 사무총장은 각각 속해있는 시민단체를 대표하여 마산가포신항사업 시작 당시의 관계자들인 장승우 해양수산부 장관, 이정욱 한국해양수산개발원장, 황철곤 마산시장, 김형남 (주)마산아이포트 대표이사를 창원지방검찰청 마산지청에 형사고발했습니다.

우리는 왜 마산가포신항과 관련된 이 네 사람을 고발했을까요? 다투는 사람도 말려야 될 나이인데 왜 그랬을까요?

 

 

마산가포신항은 시작부터 잘못된 사업이었고, 잘못된 시작을 덮기 위해 시행과정에서 더 많은 잘못들이 행해진 추악한 사업입니다.

이 엉터리 공공사업을 정당화시켜주기 위해 전문가들이 허위로 용역보고서를 작성했고, 국책사업에 기대어 정치적 이득을 노린 마산시장은 이 사업으로 마치 마산이 경제적 돌파구를 찾을 것처럼 지역민들을 호도했던 사업입니다.

그 동안 우리 시민단체는 셀 수 없을 정도로 정부와 마산시에게 물었습니다. 마창진 통합 후에는 통합창원시에게도 물었습니다.

사기업이었다면, 내 돈 드는 일이었다면, 이런 사업을 시작했을 것인가?

당신 개인사업이라면 경제성도 없고 전망도 없는 사업을 오직 시작했다는 이유만으로 끝까지 밀어 붙이겠는가?

사업자인 (주)마산아이포트에게도 물었습니다. 최소수익보장이라는 혜택이 없었다면 이 사업을 계속 진행했겠는가?

가슴치며 물었지만 우리의 물음에 장관, 시장, 사업자, 누구도 답하지 않았습니다.

대답해야할 사람들이 일을 열지 않자, 답답했던 시민들이 대신 답했습니다. ‘아니오’라고.

아무리 국책사업이라 하더라도 시작이 잘못되었고, 과정이 잘못되었고, 결과 역시 잘못되었다면, 그래서 그 중첩된 잘못들이 지역민의 삶을 위협하고, 지역사회를 피폐하게 만든다면 지금이라도 바로 잡는 것이 옳은 일입니다.

설령 완공된 사업이라 하더라도, 냉정하게 따질 것은 따지고 책임을 물어야 할 일이 있으면 엄중히 그 책임을 물어야합니다. 그래야만 이런 엉터리 국책사업의 반복을 막을 수 있습니다.

이번 우리의 고발은 국책사업이라는 이유로 지역사회의 여론과 지역민의 요구를 무시하고 일방적으로 강행한 중앙정부의 잘못된 관행에 대한 문제제기입니다.

또한 국책사업을 비호하기 위한 수단으로 전락해버린 국가연구기관에 대한 문제제기이기도 합니다.

나아가, 국비만 따내면 나중에 어떤 결과를 가져오던 당장의 치적이 된다고 밀어부치는 지역 정치권에 대한 문제제기이고, 이권만 챙길 수 있으면 무슨 일이든지 벌이는 양심 없는 기업에 대한 문제제기이며, 자리만 옮기면 그만이라는 식으로 시키는 일이라면 아무 짓이라도 하는 일부 무책임한 공직자들에 대한 문제제기입니다.

우리의 행동을 두고 누군가는 해묵은 지난 일을 왜 들춰내느냐 할 것이고, 누군가는 질 것이 빤한 싸움을 왜 시작하느냐고 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오래 전에 시작된 일이고, 결과를 낙관하며 시작하지도 않았습니다. 그것 뿐 아닙니다. 앞으로 번거로운 절차들이 진행될 것이고, 그 과정에서 예기치 못한 상황이 전개될 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가포신항 문제는 해묵은 과거가 아니라 머지않아 닥칠 우리의 불편한 미래라는 생각으로, 마산만과 이 도시를 염려하며 고발장을 접수하였습니다.

돈이 된다면 어떤 짓도 서슴치 않고 해대는 토건세력과 그들의 탐욕을 채워주며 뭔가를 노리는 부도덕한 공직자를 향한 시민들의 함성을 함께 담아 고발하였습니다.

통상적으로 이번 소송이 어떻게 전개될지 짐작이 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여태껏 제대로 된 법적 다툼이 없었기에 혹시 몰랐던 일들이 밝혀지지나 않을까, 그래서 마산만과 이 도시를 지키는데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지 않을까 하는 기대도 갖고 있습니다.

이 고발을 끝으로 우리 지역에 두번 다시 이런 어처구니 없는 개발사업이 생기지 않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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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참교육 2014.03.27 07:19 신고 address edit & del reply

    마산지킴이 뜻이 제대로 지켜지기를 소원합니다.

  2. 박진섭 2014.03.27 11:50 address edit & del reply

    마산에 대한 애정과 공익을 위한 정의감에서 나오는 행동이 분명하기 때문에 그것을 진정한 용기라고 말하겠습니다. 마음으로 함께 하겠습니다.

  3. 삼식 2014.03.27 15:17 address edit & del reply

    불의가 정의를 이기는 나라!
    토건세력이 지방경제를 말아먹는 사회.
    침묵을 통해 암묵적으로 동조하는 지방정부

  4. 오둥추 2014.03.29 19:40 address edit & del reply

    누구도 하기 어려운 결단을 하셨네요. 고향을 지키고 살리는 일에 마산시민 모두가 관심을 가졌으면 합니다. 서서히 익어가는 개구리의 신세가 되지 않기 위해서 누군가는 앞장서야 될 겁니다.

  5. 김기철 2014.12.21 07:20 address edit & del reply

    진정으로 마산과 도시를 염려 하시는 허정도님을 사랑 합니다. 지금도 그 옆을 지나노라면 텅 비워져 있는 항만을 쳐다 보는 심정은 답답 합니다.

2013. 7. 11. 00:00

창원도시철도, 바로 알고 바로 하자 - 1

7월 5일 오후 2시 창원시의회에서 「창원도시철도 약이 될까? 독이 될까?」라는 제목으로 시민토론회가 있었습니다.

 

이 글은 토론회에서 밝힌 창원도시철도에 대한 창원시의회 김석규 의원의 발제 내용과 지난 6월 11일 창원도시철도 시민대책기구 창립총회에서 밝힌 창원YMCA 전점석 명예사무총장의 발제 내용입니다. 제 생각은 다음 번에 올리겠습니다.

우선 창원시의회 김석규 의원이 토론회에서 밝힌 내용을 소개합니다.

 

-창원도시철도 현황과 문제점-

○ 도시철도 도입 효과에 대한 의문

도시철도의 필요성에 대해 ‘자동차 증가율 억제’와 ‘교통혼잡 완화’라고 주장하고 있지만 승용차 이용자가 승용차 대신 도시철도라는 대중교통수단을 이용할 것인지에 대해 신뢰가 가지 않는다.

피크타임 때의 교통 혼잡구간의 상황도 달라지지 않을 것이다. 이유는 창원지역의 경우 도시철도가 동서방향으로 지나가는데 출퇴근 이동방향은 주로 남북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심지어 출퇴근 시 교통 서비스 수준이 가장 나쁜 E등급 정도 나올 수도 있다.

○ 수요예측의 불확실성에 대한 의문

도시철도사업의 채택여부는 수요예측에 좌우되는데 지금까지 용역을 수행했던 3개 기관의 수요예측이 다르다.

1일 수요량에서 기본계획을 한 한국교통연구원은 140,750명, 예비타당성조사를 한 한국개발연구원은 111,503명, 타당성평가를 한 도하엔지니어링은 127,750명으로 많게는 3만여 명 적게는 15,000여 명의 차이를 보인다.

그 중 기본계획을 수행한 한국교통연구원은 처음에 209,000명으로 예상했다가 최근 2021년 기준 14만여 명으로 수정했다. 수요예측 방법이 똑 같고 국가교통 데이터베이스도 같은데 왜 수요예측에서 6만 명이나 차이가 나는지 이해하기 힘들다. 아직 아무 해명도 없다.

타당성 용역에서 사용한 데이터도 믿기 어렵다.

창원시 하루 버스 이용객이 30만(창원시 버스 담당계 확인)인데 다른 근거를 대며 41만으로 추정했다. 이렇게 기초 데이터가 맞지 않으면 버스이용자 중 7만여 명이 도시철도로 전환할 것이라는 추정에 문제가 생긴다. 

○ 차량시스템 결정할 때 가장 중요한 ‘첨두시 재차인원’의 차이

(첨두시 재차인원이란 ‘가장 많은 수요가 있는 1시간 동안 한 방향으로 운행하는 모든 차량의 탑승인원’을 말함)

한국개발연구원의 예비타당성조사에서는 첨두시 재차인원을 1,046명으로 보았는데 타당성평가에서는 2,063명으로 두 배 쯤 늘어났다. 그리고 이를 근거로 차량시스템은 노면전차가 적절하다고 결론짓고 있다.

(참고로 기본계획을 한 한국교통연구원에서는 3,255명이라고 했다. 도대체 똑 같은 내용을 공부한 전문가들이 똑 같은 자료를 가지고 똑 같은 방법으로 분석하는데 1,046명과 2,063명과 3,255명이라니 이게 무슨 희괴한 결과인가)

아무리 분석방법에 차이가 있다하더라도 믿을 수 없다. 세 기관의 책임연구원들이 시민들 앞에서 공개토론회를 해서라도 검증을 해야 된다. 

○ 이해관계자 설득 문제

현재 창원시에는 시내버스 690여대와 택시 5,740대가 운행 중이다.

이 중 버스 이용객 7만 명과 택시 이용자 17,000명이 도시철도로 이동할 것이라는 분석을 하는데 이렇게 되면 운수업계의 경영난과 보전비용 및 고용 문제가 발생하게 될 것이다. 

○ 종합적인 대중교통계획 없이 추진

간선을 도시철도가 담당하고 버스는 지선으로 운영한다는 주장만 하는데 과연 그 방법이 대중교통의 편의성을 높여줄 것인지에 대해 의문이 든다.

그리고 현재 버스지원액이 비수익구간 244억, 환승 91억인데 이 비용이 훨씬 늘어날 것이다. 

○ 운영수입 손실비율의 불확실

운영수입에서 무임손실을 28.4%로 보고 있지만 부산시의 경우 실제 무임손실이 39.5%라는 점을 보아 약 10% 정도의 차이가 있을 것 같다. 

○ 주민들의 의견 수렵 미약

지금까지 한 번도 주민의견을 수렴한 적이 없다. 지난 5월 공청회가 처음이자 마지막 아닌가 싶다.

인구 25만 남짓한 프랑스 랭스의 경우, 도시철도를 위한 시민 모임만 140개로 동네별로 상인조합, 기업들, 사용자들, 공공서비스 주체들 등 다양한 이해당사자들이 개별 모임과 토론회, 공청회를 했다. 무려 토론회를 400회 이상 가졌다. 

○ 창원시 재원조달계획

창원시 자체적으로 편성 가능한 예산규모는 2,000-2,300억 정도이다.

총사업비는 7천여 억(타 사례로 보아 이 금액은 1조 이상으로 상승되리라 추정)인데 이 중 60%는 국비로 20%는 도비로 20%는 창원시가 부담한다.

하지만 경남도의 지원은 의무사항이 아니니 미지수이며 경남도의 사정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참고로 부천시의 경우 경기도가 5% 부담했고 수원시는 경기도에 2% 부담시킬 예정이다.

따라서 설령 7천억으로 공사가 마무리 된다 하더라도 창원시가 초기에 부담해야할 비용은 대략 1,400억에서 2,400억 정도이며 공사가 끝나고 나면 운영비용의 적자액은 별도 부담이다. 만약 공사비가 1조원이 든다면 어떻게 될까?

같은 시기에 야구장 건설에 투입될 1,000억 가까운 비용까지 고려한다면 대책이 없다. 

○ 사업 실패에 대한 책임 문제

일본경전철인 도쿠가다이선이 지자체의 부담 비용 때문에 개통 15년 된 2006년 폐선을 결정했다. 만약 실패하면 누가 책임질 건가.

(참고로, 이날 토론회에서 시장, 담당국장, 용역회사 대표 삼자의 개인 구상권까지를 포함한 공증이 필요하다는 주장도 나옴) 

결론적으로 김석규 의원은,

아직 많은 검토가 필요하다. 서두르면 안 된다. 재정이 악화되면 결국 시민복지서비스의 질도 떨어지게 된다.

수원시의 경우 6km 놓는데 1,700억 예산으로 2017년 개통을 추진 중이다.

국내 첫 도입되는 수원시의 사례를 보고 추진해도 늦지 않을 것이다. 가장 늦게 가는 것이 때로는 가장 빠른 길이 되기도 한다.

깊게 그리고 넓게 보고 천천히 하자. 서두르지 말자 라고 했습니다.

맞는 말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번에는 창원YMCA 전점석 명예사무총장의 6월 11일 발제 내용입니다.

전점석 사무총장은 매년 700여억의 혈세를 업체에 갖다 바치는 김해경전철 문제를 생각하면 중앙정부는 물론 도와 시의 공무원도 결코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고 전제하면서,

창원도시철도는 처음부터 민관이 함께 머리를 맞대고 고민해야한다고 말문을 열었습니다.

 

-창원 도시철도 건설계획의 문제점과 검토위원회의 필요성- 

○ 원초적 질문

교통의 정체, 혼잡지점과 그 시간대에 관한 분석은 필수적인데 지금까지 나온 자료를 보면 가장 문제가 심한 창원지역의 남북 간 교통체증과 봉암로 체증을 어떻게 해결할 것인지 알 수가 없다. 현재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는 도시철도를 왜 해야만 하는가?

○ 시내버스에 미치는 영향

타당성 평가 용역보고에는 도시철도가 기존 시내버스에 미치는 영향에 대한 검토가 없다. 단지 교통위계와 노선조정이 필요하다고만 지적했다. 버스의 일방적 희생을 강요하는 셈이다. 황금노선이 없어지는 버스의 재정적자 폭이 엄청 증가할 것이다. 결과적으로 타당성용역보고에서 말한 일자리 4,600개의 고용효과도 없어질 것이다.

연평균 창원시 재정부담이 노면전차는 32억, 바이모달 68억이라는데 너무 작게 잡았다. 수요예측에도 문제가 많고, 시내버스 재정지원금까지 감안하면 답이 달라질 것이다. 대안 없는 계획은 무책임한 것이다. 

○ 쉽지 않은 교통량 수요예측의 파괴력

교통량 수요예측은 방법에 따라 차이가 있을 것이다. 하지만 설령 그 차이를 인정한다 하더라도 허용범위를 훨씬 넘는 결과 때문에 해당 도시들의 충격이 크다. 심지어 고의적으로 예측치를 부풀린 지자체도 있다. 용역기관에서는 예측수요도 충분히 잡고 매년 승객수도 늘 것이라는 환상을 갖고 답을 만들었는데 이 용역기관이 창원도시철도 기본계획 용역을 한 곳이다.

창원의 경우 기본계획에서 1일 이용자 19만 명(한국교통연구원), 예비타당성검토에서는 진해구청까지 노선에 11만1천명, 타당성평가에서는 노선변경 안을 들고 나오며 12만7천명이라 한다. 어떻게 이해해야 하나?

편익비용(B/C)이 1.0 이상 되어야 사업을 할 수 있기 때문에 수요예측은 매우 중요하다.

19만 명일 때 1.2이던 것이 11만 명일 때는 0.82에 불과, 즉 적자라서 사업진행을 할 수 없다고 했다. 그러다가 12만7천 명으로 하니 다시 1.05가 되었다고 지난 공청회에서 발표하였다. 사업을 하기 위해 짜 맞추었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다.

광주의 경우 인구 148만에 도시철도 1일 승객 수 4만8천명, 대전의 경우 인구 154만에 9만 6천 명이 도시철도를 사용하고 있다. 김해의 상황까지 고려해보면 창원의 경우 6만 명 정도로 볼 수 있을 것 같다. 

○ 노면전차에 유리한 최대 재차인원

타당성 평가용역에 의하면 결제적 타당성은 바이모달이 좋은 평가를 받았는데 재무적 타당성에서는 노면전차가 훨씬 양호한 평가를 받았다. 이런 결과는 최대혼잡시간대의 수송 수요를 2천 명으로 설정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수송 수요 2천 명은 합리적인 설정이 아니다. 대안노선의 평가에서 하루 전체 승객 수에 비해 출퇴근 시 승객수를 너무 과하게 높여 잡았다.

근거가 미약해 설득력이 없다. 지금이라도 차량시스템 선정이 공정하고 공개적으로 진행되어야 한다. 

○ 행안부 투융자심사결과는 조건부 추진

예비타당성 조사보고서에서는 운영적자가 분명하니 사업추진에 신중을 기하라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 조사보고서를 평가한 용역보고에는 노선을 변경하면 걱정할 것 없다고 한다. 걱정하는 여론을 안심시키려고 너무 무리하는 것 같다.

행안부에서 실시한 2010년도 하반기 지방재정 투융자사업 중앙심사 결과는 적정, 조건부 추진, 재검토의 세 가지 가운데 창원도시철도는 조건부 추진이었다.

그 조건이란 1) 노면전차에 대한 사전조사, 2) 버스업체의 수입문제, 3) 타 교통수단의 정체 문제 등이었다. 현재 상황을 보면 어느 것 하나도 선결된 것이 없다. 

○ 제안

1) 도시철도사업 검토를 위한 민관협의회를 만들어 다함께 염려하고 참여해야 한다.

2) 타당성 평가 용역보고서에는 노선조정과 차량시스템 선정만 제시하고 있는데 손실부분에 대한 검토와 대안을 제시해야 한다. 첨두시 재차인원도 보다 정확히 예측하고 차량시스템 선정도 신중을 기해야 한다.

만약 좋은 대안이 없다면 원점에서 재검토하는 것이 좋다. 

전적으로 공감되는 내용입니다.

부분적으로 두 분의 주장이 일부 중복되기도 합니다만 대부분이 다른 내용이어서 시민들에게 큰 도움이 되겠습니다.

김석규 의원과 점점석 사무총장의 주장 중 가장 큰 핵심은 크게 세 가지로 요약할 수 있었습니다.

첫째, 과연 이런 식의 도시철도가 필요한가?

둘째, 용역기관에서 내 놓은 수요예측을 믿을 수가 없다.

셋째, 차량시스템 결정의 근거가 된 ‘첨두시 재차인원 산정’에 문제가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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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 1. 30. 00:00

못 먹고 사는 사람 구해줬더니 집 내놔라 한다?

통합창원시 청사위치 문제 때문에 지역 간 갈등이 고조되면서, 해서는 안 될 말들이 난무하고 있습니다.

심지어 옛 창원지역 출신 시의원 한 분은 '시청사는 마산과 진해 중에 가야 한다'는 주장에 대해 “못 먹고 사는 사람 구해줬더니 집 내놔라 한다”는 말까지 했다고 합니다. 마산시민을 두고한 말 같습니다.

그 분이 누군지는 몰라도, 공직자로서 해야 될 말과 해서는 안 될 말을 가리지 못하니 시민이 시의원을 걱정해야할 판입니다.

 

 

습니다. 3년 전 통합여론조사 때 창원 진해 시민들에 비해 마산시민들이 통합을 많이 원했던 것 사실입니다. 도시의 미래를 확신하지 못했던 마산시민들이 도시통합을 돌파구로 생각했던 것 사실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못 먹고 사는 사람 구해줬다”는 생각 옳지 않습니다. 통준위 합의사항이니 시청사를 진해나 마산에 두자는 걸 두고 “집 내놔라 한다”는 말 역시 옳지 않습니다.

3년 때로 돌아가 차분히 생각해 봅시다.

통합은 마산시민들이 하고 싶어서 된 일이 아닙니다. 마산시민을 위해서 한 통합도 아닙니다. 통합은 세 도시 시민들이 뽑아 세운 시의회가 결정했습니다.

애당초 창원 진해에는 통합을 반대하는 분이 많았습니다. 시민 뿐 아니라 시의원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심지어 통합을 결정하기 직전, 시의회가 통합반대 입장을 확인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MB정부의 영향권 아래 있던 한나라당 국회의원이 시의원들을 압박하자 어느 날 갑자기 통합반대가 찬성 쪽으로 돌아 섰던 겁니다.

여기까지가 팩트(Fact)입니다. 지난 일이라고 잊으시면 안 됩니다.

마산시민이 통합을 가장 많이 원한 것은 사실이지만 마산시민들 중 누구 한사람 창원 시의원들에게 통합을 결의하라고 요구한 적 없습니다. 통합하자고 사정을 한 적도 없습니다. 통합은 창원 시의회가 스스로 결정했습니다.

자신을 뽑아 준 시민들의 뜻은 내팽겨 치고 공천권자 눈치만 보고 결정한 일입니다. 그 때 창원 시의회가 반대했더라면 이렇게 시끄러운 통합 애당초 없었을 겁니다.

그러니 창원지역 시민과 시의원 중 통합문제 이야기하다 욕이라도 한 마디 내지르고 싶으면 자신들이 뽑았던 국회의원과 시의원들에게 하셔야 합니다. 마산시민들에게 빈정댈 일이 아닙니다. 방향이 잘못돼도 한참 잘못됐습니다.

저는 마산에서 태어나 지금까지 살고 있습니다.

부족한 점은 많지만, 그렇다고 남한테서 “못 먹고 사는 사람 구해줬더니 집까지 내놔라 한다”는 말을 들을 만큼 함부로 살지는 않았습니다.

저 개인을 두고 한 말은 아니겠지만 파렴치범에게나 할 수 있는 그 말을 듣는 순간, 머리가 아득해지며 가슴이 까맣게 타는 것 같았습니다.

비록 마산이라는 이름이 역사 속에서 사라졌지만, 마산은 제 고향이고, 저는 마산사람입니다.

또한 이 도시는, 싫다고 등 돌릴 수 없는 제 인생 소설의 무대이자 삶에서 도려 낼 수 없는 살붙이 같은 존재입니다.

통합 당시 마산의 도시사정이 나빴던 것은 사실입니다만, 그렇다고 아무에게나 손가락질 받을 도시는 아니었습니다.

이 도시에도 역사와 문화가 있고, 이야기가 있고, 어린아이가 자라고, 골목마다 거리마다 사람들의 온기가 흐르는, 여기도 사람 사는 도시입니다.

이름도 잃었고 때로는 손가락질을 받기도 하지만 그러면 그럴수록 제 마음이 더 애잔해지니, 저는 어쩔 수 없는 마산사람입니다.

희망까지 무너진 건 아닙니다. 생물과 같은 것이 도시라 했으니 언젠가 이 도시에도 새로운 기회가 오리라 믿고 그저 지켜볼 따름입니다.

마산의 도시사정이 나빠진 것, 마산시민 모두에게 책임이 있다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일차적인 책임은 공직자에게 있습니다. 굳이 시민들에게 책임이 있다면 공직자 잘못 뽑은 책임입니다.

잘나가던 도시가 어느 날 길을 잃고 헤매어도,  기관과 기업이 떠나면서 성장 동력이 사라져도,  난개발 막개발로 도시가 난도질을 당해도,  그래서 한 사람 두 사람 이 도시를 떠나도,,,   마산을 책임졌던 분들  아무도 새 비전을 제시하지 못했습니다.

그 분들, 지금까지 시민들께 진실한 고백 한 번 하지 않았습니다. 오직 자신들의 욕심 채우기 바빴습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마산시민들에게 잘못이 있다면 공직자를 잘못 뽑은 잘못입니다.

렇다고 해서 마산시민들의 마음에 상처 주는 말, 용납되지 않습니다.

파렴치하다는 말을 들을 만큼 마산사람들이 잘못한 일 없습니다. 통합은 원했지만 마산시민이 통합을 결정하지도 않았습니다. 스스로 결정한 통합을 두고 마치 마산사람들 때문에 한 것처럼 말하시면 안 됩니다.

“못 먹고 사는 사람 구해줬더니 집 내놔라 한다”며 마산사람들을 꾸짖은 시의원께 드리는 말입니다.

명칭은 가졌으니 시청까지 전부 갖고 싶습니까? 그래야 만족하시겠습니까? 그래야 속이 편하시겠습니까? 그래서 그런 말을 하시는 겁니까?

하지만,,,

도시통합보다 더 중요한 것이 사회통합일 텐데, 이름 잃은 사람들의 마음은 무엇으로 붙잡으시렵니까?

시민인 저는 그것이 걱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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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마산시민 2013.01.30 15:45 address edit & del reply

    어디 시의원인지는 몰라도 아직도 공과 사를 확실하게 구분하지 못하는가 봅니다.
    저런 무식하고 무례한 작자들이 시의원이랍시고 가당찮은 소릴 시부리니 기가찹니다.
    시의원 저런 구조라면 없는게 낫습니다. 시민의 녹을 먹고 살 자격이 전혀 없어 보입니다.
    무료 봉사하겠다던 원래 시의원의 모습으로 돌려 보내야 합니다. 그게 정답입니다.

  2. 도시를담은틀(창동공화국) 2013.03.28 19:21 address edit & del reply

    못 먹고 사는 사람 구해줬더니 집 내놔라 한다? 정말 무식하기 짝이없는 말이네요.
    진짜 팩트를 들여다보면 됩니다.

    실제 팩트는 무엇일까요? 진짜 마산살림이 가난했을까요? 창원이 마산의 빚을 갚아줄만큼
    상황이 호락호락했을까요?
    1. 2009년 통합직전의 정황.
    1-1 마산은 국책사업에 말미암아 회생의 발판(로봇랜드)마련
    1-2 창원은 2006년이후 끊임없이 도시정체발생 인구감소와 기업유출
    입니다. 특히나 2007년이후 세계경제위기가 닥치면서 제조업산업 기업중심의 세수입으로 버티던 창원시가 세수입감소로인해 전체적인 재정자립도 하락과 재정악화상황이 빚어지고있었습니다.
    특히나 "북면""동읍"등의 무리한 도시계획사업의 추진으로 급기야 지방채를 발행하며
    돈많다고 자랑하던 창원조차 빚을지며 허덕거리고있었습니다. 그런데 누가 누구의 빚을갚아준단 말인지 정말 한심하기 짝이없습니다.

    2. 과연 마산시의 재정지수가 나빳는가?
    2-1 마산은 2007년도 재정 A급의 재정안정성을 보입니다.
    http://app.yonhapnews.co.kr/YNA/Basic/article/Press/YIBW_showPress.aspx?contents_id=RPR20080104012300353
    그런데 돈이없어 빚을 갚아줘야했다라는게 말이나 될까싶은데요

    특히나 행정안전부 재정고의 통합전의 2009년과 2010년 상반기 자료를 보면
    창원시의 예산액은 총 9700억(09'년기준)과 마산시의 예산액은 총 9000(09'년기준)으로볼수있습니다 더욱이나, http://cafe.naver.com/scenerycitygall/5551
    해당자료에의하면 재정자도와 재정결산액을 봤을때, 인구 42만의 마산시와 인구 50만의 창원시의 주민세등의 재정상황을 비교했을때 마산시의 재정이 과연 창원에서 말하는만큼 상황이 좋지않았는가라고 반문 하고싶을정도입니다.

  3. 도시를담은틀(창동공화국) 2013.03.28 19:27 address edit & del reply

    현재 통합창원시 재정상황이 매우 어렵습니다. 왜일까요?

    통합당시 온갖 찌라시를 뿌리며 시민들의 여론을 호도하고 현혹하면서 기존 중복투자를 감소해서 재정도를 줄일수있다고 현혹했습니다.
    과연그랬을까요?
    마창진은 이미 모든 그림이 그려져있는 그림과도 같습니다. 각기 다른 모습의 그림입니다.
    눈도있고 코도있고 입도있죠. 그래서 기초자치단체에 KTX역만 3곳이나됩니다.
    앞으로 중복투자는 언제할지는모르겠지만 "중복시설"을 "운영"하는데에만 재정이 지출된다는 의미입니다.

    현재 마산시의 1인당 부담해야할 재정이 약 90%이상 인상되었습니다.(행안부기준 09'~12' 비교)
    그런데도불구하고 현재의 창원시는 급격하게 긴축하며 돈을 아끼고있는모습입니다.
    그리고 항상돈이부족하고 예산이없다며 아우성치고있지요.

    통합전 마산이 과연 돈이 부족하고 예산이 부족할만큼 아우성쳤을까요?
    물론 풍족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없지는 않았다라는 말을 하고싶습니다.

    현재의 통합시가 가장필요한것은 "국가보조금"과 "교부금"입니다.
    그러나 통합시출범이후 정부지원이 끊겼습니다. 겉으로는 거대규모가 되었기때문에 당연한 사실입니다. 2007년이후, 전국 거의 모든 지자체는 자체세수입감소로인해, 교부금과 국가보조금으로 버티고있습니다. 현재 재정집계로봤을때, 중앙정치힘으로 누가더많은 국비를 끌어오는가
    창원시는 그러한 능력이 있는가 반문했을때 누가 대답을할수있을까요?

  4. 허정도 2013.03.29 07:47 address edit & del reply

    다시 생각해봐도 문제가 많은 통합이었던 것 같습니다. 안타깝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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