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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춰진 도시이야기

창원시 마산 회원1지구 재개발지역 이야기 - 23

by 운무허정도 2021. 1. 18.

3. 주민 열 분의 이야기

 

6) "사십 년을 살아온 제2의 고향" ------------------------- 조○○

1940년생

마산합포구 교원동 2-2

날짜 : 2015년 1월 7일

장소 : 자택

 

- 선생님께서도 우체국에 오래 근무하셨다고 들었습니다.

= 나도 우체국에 근무했습니다. 한 삼십 년 됩니다.

예전에는 체신부에 근무한다고 체신인이라 했어요. 체신부가 건국 이후 부터 내려오다가 과학이 발달되고 정보통신 계통 업무가 늘어나다 보니까 정보통신부로 개명이 되었다가 다시 전파 업무를 관장하게 되다 보니까 모든 방송전파 업무를 관리를 해야 되거든요. 그래서 전파관리국에서 전화국도 관리 했고 통신도 관리했지요.

처음에는 체신부에서 전화와 모로스 전신 업무를 담당했는데 업무가 점점 늘어나서 전화국에서 담당하게 되었어요. 그 당시에 산업이 발달하게 되면서 통신 업무가 제일 중요했는데 전화 수요가 폭발적으로 늘어났습니다.

그런데 전화 가설을 해줘야 되는데 그 수요를 못따라 가서 부작용이 많이 생겼어요. 그래서 전기통신연구소를 창설해서 거기서 자동교환기를 우리나라 자체적으로 개발한 겁니다. 그 기술을 금성사에다가 넘겨 가지고 기계를 만들어서 엄청 돈을 벌었다고 해요.

그 당시만 해도 전자교환기는 없었거든요. 미국이나 일본, 유럽에서는 독일 정도가 했고 나머지 나라에서는 못만들었던 시절에 우리나라 전기통신연구소에서 개발했어요.

그러다 보니까 우리나라도 1만회선 정도 되면 그 당시에 전화국을 하나 지었어요. 그 당시 그러니까 75년도에 내가 마산으로 이사를 왔습니다.

그때 창원공단이 막 설립이 되었어요. 지금 창원우체국 전신인 창원기지우체국을 창설하는데 필요한 수요조사를 맡게 되었어요.

- 창원기계공단이 조성되던 초기이군요.

= 그렇죠. 그 당시에 공단 쪽에서 하는 얘기가 우체국을 꼭 세워줘야 한다고 하더만요. 그러면 자료를 달라고 했더니 앞으로 공장이 몇 개가 들어설 것이고 하는 내용인데... 그 당시만 해도 나도 그렇고 우리 우체국 안에서도 선반이 무엇인지 금형이 뭔지 몰랐어요.

그래 모든 걸 되는 쪽으로 출장보고서를 체신청에 올렸어요. 그걸 기준으로 해서 설립이 되었는데 그 우체국이 기지우체국에서 서기관 우체국으로까지 발전했어요.

- 처음 그 우체국이 들어선 자리는 어디입니까?

= 처음 들어선 데는 공단관리청(아래 사진) 안입니다.

몇 년 안가서 공장이 많이 들어서게 되니까 전화 업무도 폭발하게 되었고 그러다보니까 거기 전화국도 하나 서게 됐습니다.

 

공단 관리청. 당시에는 저층부(2층)만 있었다.

 

- 그럼 마산에는 언제 오시게 되었습니까?

= 함안에서 살다가 75년도인가 집을 사고 이사 오기는 76년도에 이사를 왔습니다. 지금 살고 있는 바로 이 자리입니다.

집은 기와집인데 아래채 두 채가 물치로 등기가 되어 있었어요. 물치가 뭔 말이냐 하면 헛간입니다. 그런데 농사를 안짓게 되니까 거기다가 방을 넣어서 방을 여덟 개를 가지고 있었어요.

그래 그 방세 받아가지고 내 월급하고 해서 아들 공부시키고 그랬죠. 그 뒤에 정년퇴직 하면서 뜯고 집을 새로 지었어요.

- 그럼 언제 정년퇴직 하신 겁니까?

= 98년도 말에 이 집을 지었는데 정년퇴직 하면서 이사를 들어왔어요.

새 집을 지을려고 사택 있는 데로 부임해 갔다가 집을 짓고 퇴직 하면서 이리 들어 온 거죠. 76년도에 여기 왔으니까 내년이면 딱 사십 년이 되네요.

- 여기서도 오래 사셨군요. 그럼 원래 고향은 어디 입니까?

= 함안 산인입니다. 내가 커기는 산인에서 컸어요. 마산대학 있는 고개 하나 넘으면 우리 동네인데 문암마을이라 불렀어요.

산인 입곡못 들어가는 거기에 고속도로 있고 옛날 기차길도 있는 그 길가에 집채만한 바위가 네갠가 다섯갠가 있었어요. 문처럼 생겼다고 해서 문바구인데 그게 우리 동네 이름입니다.

그 동네가 분지처럼 되어 있거든요. 기차굴도 뚫혀 있고 그 가운데쯤 동네가 우리 동네입니다. 그리고 또 학교도 창신고등학교 나왔는데 59년도에 졸업했어요.

- 그럼 고등학교 다니실 때 산인에서는 어떻게?

= 기차로 통학을 했어요.

아침 통근차가 그 당시에 여기에 여덟시인가 도착하는 기차가 있었어요. 산인에서 타면 한 삼십 분 걸렸어요.

- 옛날 북마산역(아래 사진)에 내렸겠네요?

 

 

= 그렇죠. 그런데 걸어다니면 두세 시간 걸렸지요. 기차가 없을 때는 걸어다녔어요. 당시에 우리 마을에서 걸어다닌 학생이 있었어요. 나보다 두 살 더한 사람인데...

- 76년도에 이사왔을 때는 이 동네에 주택이 다 들어서 있었습니까?

= 여기에는 집이 얼쭉 다 있었어요. 저 다리걸 위로는 다 밭이고 꽃 키우고 그랬어요.

여기 조금 위에 예전에는 논으로 해서 물이 내려오던 도랑이 있었는데 지금은 그 도랑이 전부다 묻히고 물이 다른 쪽으로 흘러나갑니다. 미나리꽝은 앵지밭골 쪽에 있었고 이쪽에는 많이 없었어요.

- 그리고 또 공장은 없었습니까?

= 저 무학상가 쪽에서 어떤 사람이 공장을 하다가 망해서 팔고 거기에 무학상가를 지었어요. 그리고 저 건너 대림아파트 쪽에 공장이 있었는데 염색공장인지 그 염색한 물이... 회산다리 옆에 구거가 하나 있어요.

어북 높은 하수구가 있었는데 거기에 항상 시커먼 물이 흘러갔습니다. 지금도 그 하수구가 철길따라 쭉 있어요. 그때 우리가 그걸 보고는, 저것 때문에 우리 앞바다가 죽음의 바다가 된다, 그런 이야기를 하고 그랬거든요.

그리고 이 밑에 소가죽 가공하는 우피공장이 있었는데 도둑놈들이 소 몰고 와서 잡아가지고 시장에 팔고 그랬다는 얘기도 있어요. 지금 자동차주차장 있죠?

그 옆에 큰 집이 그것 허물고 지은 집입니다. 거기 두 갈래 길이 있는데 주차장 옆으로 들어 가는 그게 우피공장 터구만요. 또 회산다리 쪽에 정미소가 있었어요.

그 정미소 이름은 모르겠는데 산인에서도 구르마를 대가지고 나락을 싣고와서 찧어 가지고 마산에 팔고 그랬거든요. 산인에서도 여기 올 정도가 됐으니까 내서, 칠원 쪽에서 많이 왔죠.

그 아들이 김형일 씨라고 로타리 회장도 하고 그랬는데 지금은 시조회관하고 연결이 되고 있어요.

이 밑에 북마산중앙시장 주인이지 싶은데 박씨라고 그 분이 또 솥 공장을 했어요.

- 처음 이사 오셨을 때 여기 하천에는 물이 어땠습니까?

= 내 이사올 그때는 벌써 추접어졌어요. 비가 와서 한번 싹 쓸고 내려가면 만회할 정도였지요.

왜 그렇느냐 하면 건너 둥구나무 있는 데 사람들이 많이 살아가지고 하수가 많이 나왔거든요. 지금 마여중 있는 데까지 올라가야 빨래를 할 수 있었어요.

- 예전에 출퇴근은 주로 어떻게 했습니까?

= 나는 주로 걸어다녔거든요. 차를 안타고 마산우체국까지 지금 중부경찰서 앞에 합포우체국까지 걸어 다녔어요.

여름 한철 한 두어 달 정도는 못걸었고 그때 외에는 늘 걸어서 출근 했어요. 왜 그러냐 하니까 나는 버스를 타는 게 굉장히 싫더만요. 그 당시는 시내버스는 굉장히 비좁고 좀 뭐한 운전기사는 일부러 급브레이크를 밟아 사람들을 뒤로 밀어서 억지로 많이 태울려고 그런 짓을 많이 했거든요. 사람을 짐짝 취급하는 게 싫어서 걸어다니기로 하고 그때부터 계속 걸어 다녔어요. 걸어 다니니까 좋은 것이 지금 나타납니다.

그 걸어다닌 그 결과로 지금 무릎이 안아파요. 처음 사십대에는 무릎이 많이 아팠는데 계속 걸어다니니까 그 아픈 게 잦아들더만요. 그래 철길따라 쭉 가는 길로도 다니고 화장막으로 해서 자산동으로 걸어다녔어요.

그 당시에 우리 집 있는 도랑 이쪽은 여기까지만 길이고 그 위로는 없었고요. 지금 저 웃다리 앞에 다리는 오래된 다리이고 그 위 다리도 오래된 다리거든요.

거기서 버스 다니는 길과 연결되는 길이 있는데 그쪽만 연결되어 가지고 꼬불꼬불 하게 위로 올라갔지 지금처럼 안발랐어요. 그 공사하는 바람에 우리 집에도 물이 들어와 가지고 혼이 났지요.

- 이 하천 때문에 수해가 많았지 않습니까? 그 얘기 좀 해 주시지요.

= 80년도인가 79년도인가 그렇습니다. 앵지밭골에서 내려오는 냇가가 있는데 마여중 쪽에서 부터 하천 직강공사를 했거든요.

그 이전에는 꼬불꼬불 했어요. 그 공사를 빨리 했어야 되는데 흙을 그냥 방치해 둔 상태에서 엄청난 비가 오니까 그 흙이 다 쓸려 내려가 버렸어요.

개울에 흙이 어느 정도 쌓였냐 하면 저 , 절반쯤 쌓였어요. 그 흙이 다 쓸려내려와 오니까 우리 집에도 물이 들었고 지금 소담한의원 하던 자리도 싹 쓸어가지고 거기 살던 사람이 수해를 많이 입었죠.

그 당시 낮에 비가 크게 왔으니까 인명피해는 나지 않았어요. 밤에 비가 왔으면 집 쓸려 간 사람들은 욕을 봤을 겁니다. 저 밑에 빙 돌아가는 거기가 지대가 좀 낮아요.

낮부터 비가 많이 왔으니까 사람들이 웅성웅성 모여서 물 구경도 하고 그랬거든요. 나도 퇴근해가지고 애들을 친척집에다가 데려다 주고 이 집을 비웠어요. 연탄 때던 시절인데 집에 물이 들어차 가지고 연탄이 녹아서 가루가 되어 버리고... 그런 시절이었지요.

그게 아마 79년도일 겁니다. 내가 이사 온 몇 년 뒤니까요. 그때 교방동에도 수해가 났는데 그 위에 풀장에 물을 가두었다가 한참에 여는 바람에 피해가 많았다고 하더구만요.

- 그 당시에 이 앞에 다리도 떠내려가고 그랬다고 하던데요?

= 완전히 쓸려내려 간 것 아니고 반쯤 떠내려갔던 것 같네요. 일렁일렁 해가지고 난리가 났었지요.

그 당시에 우리 집에서 조금 내려가면 돌다리가 두 개 있었어요. 위에 다리는 허물고 새 다리를 지었고 밑에 거는 도시계획으로 동중학교로 연결되는 길이 뚫리면서 새 다리가 섰고 그 다리는 못 쓰는 다리가 됐지요. 옛날에 내가 학교 다닐 때는 조금만 올라가면, 여기 다리 말고 웃다리에만 가도 이런 바위들 큰 돌멩이가 많았거든요.

바위가 아니고 둥글둥글 한 큰 돌멩이지요. 그걸 학생들이 주워다가 창신고등학교 울을 쌓았어요.

- 담장을 만들었다는 말입니까?

= 그렇지요. 우리가 학교 다닐 때 만들었어요. 그 전에는 학교 담이 없고 철조망이 쳐져 있었는데 새로 온 교장 선생님이 학생들이 마음대로 들락거리니까 안되겠다며 담을 쌓았어요.

학생들을 모두 동원해서 이 회원천에서 돌멩이를 말큼 주워와서 쌓아가지고 돌담을 만든 겁니다. 전부 다 학생들이 운반했어요. 그 당시에 우리 고등학교가 세 학급으로 모두 아홉 학급이고, 중학교가 아홉 학급 되니까, 열여덟 학급이고 육십 명씩 하면 약 천 명이 됐거든요.

그러니까 학생 한 명이 한 개씩 운반해도 천 개니까 그게 어디요? 그렇게 쌓은 그 담이 최근까지 있다가 아파트 지으면서 그걸 싹 다 없애버렸더라고요.

- 그런 일이 있었군요. 그럼 그때가 언제입니까?

= 그 때가 58년도, 59년도지요.

그 당시만 해도 이 하천 바닥을 견치돌로 안해놨고 시멘트도 안해놨고 자연상태 그대로니까 그냥 일반 내와 같이 이런 돌멩이들이 많았어요.

그래 학교 졸업하고 십 몇 년 지나서 여기로 오니까 냇가 양쪽을 견치돌로 다 쌓았더라고요. 바닥도 견치돌로 전부 다 이렇게 해놓고 물이 그 위로 흐르도록 해놨더라고요.

- 예전에 이 하천 건너 정자나무 있는 데는 뭐라고 불렀습니까?

= 그냥 회원동 둥구나무라 했지요.

또 회원동 그쪽은 일제시대 일본군 말 키우는 마사가 있었다는데 일본군이 물러가고 나서 귀환동포가 거기 살았다고 합디다. 그걸 시에서 싹 뜯어버리고 아파트 지어 분양을 하고 그랬다하대요.

- 그리고 이 위로는 그 당시에 앤지밭골 하고 무학농장이 유명했다고 하던데요?

= 그렇지요. 무학농장은 주로 봄철에 사람들이 놀러 가던 장소로 유명했습니다. 나는 직장생활을 하다보니까 자주 못갔는데 우리 함안조씨 화수회를 거기서 한 적도 있어요.

한때 사람들이 많이 놀러 갔었는데 그 뒤에 무학농원이 없어지고 나서는 마재고개 두척 골짝에 도축장 밑에도 놀러 갔어요. 그것도 요 근래에는 없어졌는데 거기도 우리가 두어번 놀러갔어요.

우리 동네에서 친목계를 만들자 해서 모아가지고 장구도 사고 해서 그 장구 가지고 놀러가고 그랬습니다. 동네 계이니까 별 이름도 없이 그냥 묵자계인데 나는 그 뒤에 빠졌지만 지금도 그 계가 있습니다.

그러고 보니까 내가 놀러 다니는 편이 아이었던가 봐요. 일요일에도 집에 붙어 있고... 그 당시만 해도 경제사정이 어려워가지고 놀러 한번 가는 것 같으면 월급이 많이 손해가 나거든요.

그러니까 못갔어요. 요새처럼 돈이 넉넉했으면 놀러도 다녔을텐데... 항금에야 등산이나 하고... 허허허. 그리고 지금 생각나는 게 하나 있는데 저 위쪽 산에 수도사라고 절이 있어요. 그 자리가 원래 창신고등학교 선생님 한 분이 맨 처음... 참 그 어른도 굉장한 분이야.

그 당시에 순 바위만 있는 거기에다가, 어디 가서 바위 깨는 방법을 배워와가지고, 바위를 깨고 그걸 쌓아가지고 거기다 집을 조그맣게 하나 지었어요.

몇년 지나고 거기 가니까 절이 서 있더라고요. 왜 갔느냐 하면 그 선생님이 장미에 굉장히 관심이 많아서 자기 집 근처에 장미꽃을 많이 심었어요. 백장미도 있고 흑장미, 검붉은 장미도 있고... 장미를 아주 많이 심었는데 우리가 가면 그 선생님이 접을 하는 방법을 가르쳐주더만요.

눈만 딱 떼어가지고 접붙이는 방법을 가르쳐 주는데 나도 그 꽃이 너무 좋아서 그걸 하나 얻어와서 해보고 했는데 한번도 성공을 못했어요.

지금 거기 가면 주춧돌 바닥에서 돌멩이로 쌓은 언덕이 있는데 거의 반 정도는 그 선생님이 쌓았을 거구만요. 그래서 지금은 거기가 넓은 절터가 되어 있습니다. 지금 수도사에서 등허리를 하나 넘으면 무학농원이거든요.

- 예전에 시장은 어디로 다녔습니까? 목욕탕은 어디가 먼저 생겼습니까?

= 남일탕이 먼저 생겼지요. 지금은 남일탕은 없어졌는데 거기에 어린이집이 들어섰습니다.

그 다음에 태양탕이 생기고 나서는 주로 태양탕에 갔어요. 남일탕이 좀 낡았다고 사람들이 잘 안가더만요. 태양탕은 그 주인이 그것 팔고 저 건너편에 현대탕을 했어요.

당시에 수출자유지역에 공장이 많이 있으니까 그 공장에 다니는 노동자들이 우리 동네 와서 방 얻어가지고 그리 생활 했어요. 그러니까 우리 집에 방이 그리 많았지요.

이 밑에 중앙시장도 전에는 없었어요. 북마산역 앞에 소전거리라고 제비산 밑에 우시장에 있었던 상점이 옮겨온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여기 못쓰는 땅에다 건물을 지었는데 거기에 북마산시장이 생겼거든요. 시장 들어선 데가 원래 지대가 좀 낮은 곳이었요.

그래 내가 이 동네로 오니까 이미 거기에 상남동우체국이 있었어요. 시장이 이사 오고 사람들이 엄청 붐비니까 상남동우체국도 일이 많아진 거죠.

- 벌써 사십년 가까이 이 동네에서 사셨는데 감회가 어떠십니까?

= 뭐 특별한 감회 같은 그런 거는 없고요. 현대적인 집이 들어선다 하니까 좋지요.

- 예. 오늘 말씀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이 글은 창원 소재 '도시문화콘텐츠연구소'에서 펴낸 창원시 마산 회원1지구 재개발사업 ‘마을흔적보존사업 실행계획서(2017)’ 중 발췌한 것이다. 지금은 이미 고층 아파트 단지가 되어버린 이 재개발 지역의 변천과정과 그곳 사람들의 생활에 대한 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