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장 동포발전사
3. 각국거류지의 첫 장날(初市)
명치 35년(1902) 8월 3일은 음역 6월 30일에 해당되니 거류지의 첫 장날임을 각지에 선전하며 시장터를 마산영사관에서 아래로 내려온 현재의 혼마치 네거리 주변 일대로 정했다.
선전 노력의 효과가 났는지 지방시장 상인의 출점이 꽤 많았으며 사방 주위의 손님도 상당수가 모이고 동포들은 첫 시장을 경축하려 상인들에게 술과 음식을 제공하니 그들도 좋아하고 앞으로 더 성대해질 것 같았다.
한편으로 정기장을 잃게 된 구강(舊江) 민중들은 크게 분노하여 이전에 반대하고 그것의 회복에 분주하거나 혹은 감리서에 압박을 넣거나 경성 정부에까지 운동하기도 했다.
또한 시장의 이전으로 재산까지 없어진 자가 나오는 등 사태가 심각해지자 새 시장을 연 지 20여 회 즉 4개월로 이 장을 구강에 반환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마산포의 조선인 상인들은 구강장을 되찾기 위해 마산상호회를 중심으로 창원감리서에 몰려가 집단 항의를 하는 한편 대표를 중앙에 파견하여 진정을 하는 등 강력한 활동을 펼쳤다)
우리 동포는 겨우 얻은 재원을 반환하여 장래의 발전이 절망적이 될 것을 염려하여 서로 의논해 음역 1일과 6일 장, 한 달에 6번의 신시장을 신월동에 열었는데 선전이 미흡했는지 위치가 좋지 않아서인지 혹은 마산포 방면에서 방해공작이 있었는지 장마다 나오는 상인들이 적고 지방 민중들이 찾아오지 않아 대여섯 번을 열다가 자연히 소멸하고 말았다.
4. 한일인의 난투
명치 35년(1902) 추석에 우리 영사관 직원과 마산 거류 동포가 친목을 도모하고자 요리를 휴대하여 구강 즉 산호리에 있는 마산성지에 놀러갔다.(주-마산성지는 용마산에 있는 왜성을 말한다- 위 사진 당시모습, 아래 사진 현재모습)
광종민비의 풍조가 아주 강한 시기이며 특히 순사(巡査)는 영사관을 경호하는 직무는 있어도 민중보호라는 책임은 없다고까지 할 시대이니만큼 아무리 술자리라 해도 관민 사이의 높은 벽이 엄존해 당소 기대했던 재미는 느끼지 못하고 달빛을 밟으며 귀가했다.
민간 수십 명이 다음 날, 날씨 쾌청한데다 어제의 재수 없음을 만회하고자 환주산성 옛터 공세봉(貢稅峯)으로 요리를 들고 올라간 것이다.
취하여 돌아오는 좁은 길에서 한인 소년이 나무를 짊어지고 우는 것과 마주쳤는데 술 취한 김에 객기 있는 일행은 소년을 피하려 하지 않았고 소년 도한 역시 양보하지 않으며 서로 망설일 때 특히 많이 취한 야마모토(山本) 모(某)가 갑자기 뛰쳐나와 술병으로 소년의 이마를 쳤다.
술병이 깨지고 그 파편이 산산조각이 나서 소년은 아이고 하며 주저앉았고 그의 손등으로 파편에 상처 난 피가 줄줄 흘러내렸다.
이 광경을 밭에서 본 농부가 달려가 온 마을에 알리니 금방 수백 명의 한인이 모여들고 일행을 포위해 욕을 퍼부었다. 일행 중의 한 취한이 양지팡이(洋杖)를 휘두르자 난투가 벌어져 아수라장이 되어 버린 것이다.
일행 중의 일부는 포위망을 뚫고 하쿠유(博友) 상회로 피신했는데 탈출 기회를 잃은 일단은 경작지에서 아직 분투를 계속해 사태는 심각해졌다.
하쿠유상회는 현 마산포 사이와이마치의 야마모토 구니지(山本國次) 씨 저택에 있는 2층 건물인데 동 씨와 오카모토 유우(岡本勇), 부산의 오쿠다 쇼지로(奧田庄次郞) 씨 등이 공동경영하는, 러시아 해군을 상대로 하는 회사이며 특히 흑빵을 제조, 납품하는 곳이다.
배일(排日)의 한인들이 이 피난처로 몰려오는 위기가 다가오니 일동은 2층에 올라가 장탄한 총으로 사격하는 시늉을 하며 한인이 올라오는 것을 막았다.
오늘의 등산 산행에 참여치 않았던 한 동포는 이 사태를 보자마자 영사관에 통보하려 했으나 한인 군중에 막혀 길을 갈 수가 없었다. 해안에 배가 한 척이 있어 거류지까지 저어서 간신히 영사관에 보고하니 사카이 경부는 바로 무장 순사 몇 명을 데리고 마산포로 급히 달려갔다.
이에 앞서 통영에서 범인을 호송해 마산포 경무서에 온 진위병(鎭衛兵) 4명이 있었는데 이 소요 소식을 듣고 바로 순경과 함께 달려가 한인들을 진무해 사카이 경부가 도착했을 때는 한국, 일본 민중은 서로 따로 운집하고 이 건을 어떻게 할 것인가를 얘기하고 있었다.
다행히도 쌍방에 중상자는 없었고 우리 동포는 타박상 등의 경상을 입지 않은 자가 없을 정도였다고 한다.
이 사건으로 한인의 배일의 열은 점점 높아져 거류지에서 불과 20정(町, 척관법의 1(町)은 미터법으로 환산하면 약 109미터이다) 밖에 안 되는 짧은 길에 대낮인데도 살기어린 한인 부락의 왕래는 아주 위험하다는 것이 실감되었다.<<<
이 글은 창원시정연구원이 2021년에 번역한 『馬山港誌』(1926) 중 32번 째 것이다. 그림은 별도로 삽입하였다. 『馬山港誌』는 1900년대에 발간된 일본 문헌 중 가장 가치가 높은 책으로 평가 받고 있다. 저자는 앞서 게재한 『馬山繁昌記』와 같은 스와 시로(諏方史郞)이다. 본 포스팅은 비영리를 전제로 창원시정연구원의 양해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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