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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8. 30. 00:00

마산번창기(1908) - 2

 

서언

마산의 진상(眞相)을 그야말로 적절한 표현으로 세상에 알리는 일은 오직 스와교도(諏方去洞) 씨가 편찬한 『마산번창기』 이외에는 없을 것이다.

시찰이나 관광 명목으로 수많이 관민에 의한 수기가 잡지, 신문 등에 기술되었건만 여태껏 정곡을 찌른 것이 없었음은 참으로 유감스러운 일이다.

비평과 판단이 적절하고 저자의 평소의 언론관으로 과감하게 써 내려간 점은 그 강직하고 영리한 저자의 성격 덕분이라 감동하는 바이다.

저자가 마산을 사랑하는 마음은 세상사람 모두가 잘 알고 있고 저자의 강직한 언동 역시 주지된 바이거니와, 잘 웃고 잘 나무라고 술잔을 기우리면서 얘기를 나누는 속에서 이 글들이 써진 것이라 하겠다. 저자의 준명함 없이 이 일을 어찌 완성할 수 있단 말인가.

넘쳐흐르는 큰 재간은 없다 해도 두뇌가 명석하고 성격이 소탈하면서도 치밀한 사상을 지녔다는 점은 마산의 많은 지사(志士)들이 미치지 못할 터이다. 그리하여 한 편의 글로써 제 마음을 담아 그 강직한 저자에게 바치는 바이다.

자쿠오(鵲翁) 하마다 시치주로(濱田七十郞)

 

저자에게 보잘 것 없는 평을 보내다

화낼 때는 참으로 무서우면서도 심기가 바뀌면 웃고 지내는 저자의 모습에 많은 이가 추앙을 한다.

숨김없고 계산 없이 솔직하고 청빈한 생활에 자족하면서 약자를 돕고 강자를 꺾는 저자의 의협심은 고향인 일본의 동북지방에서는 널리 알려져 왔던 바, 저자 스와교도(諏方去洞)는 그런 사람이다.

저자가 한때 대만을 방문한 적이 있다고 들었는데 생활상 도움을 얻기 위해서겠지 추측을 했으나 실제는 아니었구나, 저자가 명성과 영달을 버리고 한적하고 맑은 마산의 산과 물을 글로 옮기게 됨을 보니 내 생각이 짧았음을 깨닫게 된다.

저자가 활약하고 있다 함은 바로 언론계의 빛이 아직 살아 있음을 뜻한다. 저자는 지금도 세상의 평범한 공인, 상인들과 세상 속사를 얘기하는 것을 잊지 않고 관리, 농민을 벗으로 삼아 백성을 지키려고 정치에 분개하는 것을 잊지 않는다.

이름을 날리기 보다는 입으로 붓으로 따지고 나무랄 때의 그 기개가 아주 사나웠으면서도 심성은 유유했으며 그것은 마치 마산만에 수십만 톤급의 군함이 떠 있는 모습과 유사했다.

오래오래 그 필봉이 더욱더 용맹하기를 기원하며 하루 속히 일을 마치고 고향 산천에서 그 아름다운 필치를 다시 펼쳐 주시길 기원하는 바이다.

도쿄(東京) 아카마츠 겐콧세이( 赤埴玄骨生)

 

지역사 발굴연구 교양총서 01

마산번창기

발간사

서언

제1장     마산의 대관

제2장     마산의 관공서

제3장     지질 및 기후

제4장     위생 및 의사

제5장     교육기관

제6장     신도 및 종교

제7장     교통

제8장     호구

제9장     경제사정

제10장     마산의 잡록, 여러 근황   

             마산의 노래             

해제     마산번창기

부록     원문수록

 

경남지고(慶南志稿) 제1편 마산번창기

서언(緖言)

본기(本記)는 1906년(명치 39년) 6월 하순에 시작하여 1908년(명치 41년) 9월에 끝을 내었다.

그 기간 불과 2년 4개월, 마산의 형상은 날마다 변화하고 시시각각 발전해 가는 모양이어서 쉽게 원고의 끝을 못 맺는 이유는 그 최근의 호황을 세상에 알리고자 하는 친절한 마음 때문이었으리라.

일본전관지(日本專管地)에 중포병영(重砲兵營)이 아직 공사 중인 점, 마산 진주 간의 도로가 아직 개통이 안 된 점 등이 있으나 현 상황상 기타의 것들은 거의 일단락 지어진 상황으로 사료되어 부랴부랴 인쇄하기에 이른 것이다.

저자는 현재 형편이 아주 안 좋고 원래 몰락한 아이즈번(會津藩) 무사 출신이라 가난한 처지도 이만저만 아니어서 쉽사리 인쇄비를 지출할 수도 없었다. 여러 물건을 팔며 돈을 빌려도 인쇄비용에 못 미친 터였다.

본 저작이 진정으로 마산을 사랑하고 마산의 발전을 유도하려는 소개서임을 알게 된 의리 두터운 분들이 깊이 동정을 해 인쇄 발행에 큰 도움을 주셔서 드디어 여기에 그 출판이 가능해진 것이다. 그래서 아래에 그 성함을 기록하고자 한다.

거동노부(去洞老夫) 스와쇼오센(諏方松仙) 경백(敬白)

 

찬조 제씨 성함

마산포 유지자     가키모토 히로시(柿本鴻)

마산상업회의소 의원(맥주 도매상)     하마다 시치주로(濱田十七郞)

한해수산조합 마산지부장(순라선 우편소장)     미야하라 가네유키(宮原兼行)

본파본원사 개교사(군대포교사)     히다카 다츠게이(日高達契)

마산상업회의소 회장(제일은행 마산지배인)     니시카와 타로이치(西川太郞一)

마산상업회의소 의원     에다 구니미츠(江田國光)

마산상업회의소 의원(미두도매 겸 도매상)     나스메 테츠조(夏目哲三)

마산포 유지자(전당포)     모모키 게이이치(百木惠一)

일한산홍법사(진언종 포교사)     산노미야 다이코(三宮隊晃)

마산상업회의소 부회장(미곡무역상)     미츠바라 하야조(松原早藏)

신탁사장(토지가옥매매 주선 및 대리업)     고쿠후 야스케이(國府保敬)

통영 유지자(일어교수양성학교 주임)     와타나베 쵸쿠(渡邊直躬)

마산상업회의소 의원(잡곡 및 사금상)     야마모토 고조(山本好藏)

마산상업회의소 의원(농사경영)     후지사키 도모히데(藤崎供秀)

육군군의(마산포병원분원 주임)     히라다 히코지로(原田彦次郞)

마산상업회의소 의원(미두무역상)     히사시게 간사쿠(久重勘作)

마산상업회의소 의원(미두무역 우피수출)     다나하시 센노스케(棚橋仙之助)

마산포 유지자     야마모토 구니츠구(山本國次)

마산상업회의소 의원(한인상대 잡화상)     요시다 마스터로(吉田益太郞)

마산상업회의소 의원(미두 무역상)     야마노 겐지로(山野原次郞)

마산상업회의소 의원(미곡상)     히로시케 세츠노스케(弘重節之助)

마산포 유지자     나카가와 후사키치(中川房吉)

미산이사청 이사관     미마스 구메키치(三增久米吉)

마산거류민단민회 의장(무역상)     히로시 세이조(弘淸三)

마산상업회의소 의원(잡화 및 주조업)     아카마츠 기이치로(赤松龜一郞)

마산 기모노점(우에니시상점)     우에니시 겐지로(植西原次郞)

부산항     오이케 츠우스케(大池忠助) <<<

 

이 글은 창원시정연구원이 올 초에 번역한 『馬山繁昌記』(1908) 중 두 번째 것이다. 『馬山繁昌記』는 1900년대에 발간된 일본 문헌 중 단행본으로는 처음인 것으로 알려졌다. 개항 이후 마산으로 몰려 들어온 일인들의 수는 1908년 6월 3천355명에 달했다. 같은 통계로 한인은 7천515명이었으니 당시 마산으로 이주한 일인들의 규모를 짐작할 수 있다. 책의 제목처럼 당시 마산은 '번창'해 가고 있었다. 마산으로 이주한 일인들에게 마산은 꿈을 주는 신도시였다. 책의 제목과 내용은 이런 시대 상황과 그들의 기대를 반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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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8. 23. 00:00

마산번창기(1908) - 1

창원시정연구원이 올 초에 번역한 『馬山繁昌記』(1908)를 포스팅한다. 기록전문가 박영주 선생이 일본의 한 대학도서관에 참자고 있던 이 책을 찾아냈고, 이를 창원시정연구원이 번역 출판하였다.

1900년대에 발간된 일본 문헌 중 마산이 언급된 책은 『韓国出張復命書』(1901), 『韓国案内』(1902), 『韓国水産誌』(1908) 등이 있지만 단행본으로는 이 책이 처음인 것으로 알려졌다. 지금까지는 『馬山と鎮海湾』(1911)으로 알려졌었다.

을사늑약과 대한제국의 외교권이 박탈, 통감부 설치와 통감 정치, 고종의 강제퇴위와 순종 즉위 등으로 이어지는, 사실상 반(半)식민지 상태였던 당시의 시대상황은 마산도 예외가 아니었다. 대한제국의 창원군청이 아니라 통감부의 마산이사청이 실질적인 통치기관이었다.

더구나 개항 이후 마산으로 몰려 들어온 일인들의 수는 1908년 6월 3천355명에 달했다. 같은 통계로 한인은 7천515명이었으니 당시 마산으로 이주한 일인들의 규모를 짐작할 수 있다.

책의 제목처럼 당시 마산은 '번창'해 가고 있었다. 마산으로 이주한 일인들에게 마산은 꿈을 주는 신도시였다. 책의 제목과 내용은 이런 시대 상황과 일인들의 기대를 반영하고 있다.

여러 한계에도 불구하고 개항기와 식민지시대로 이어지는 시기의 마산이라는 지역 사회를 좀 더 깊이 이해하는 또 하나의 자료가 추가된 셈이다. 번역서에 실린 ‘발간사’와 ‘마산번창기 해제’를 우선 소개한다.

 

 

발간사

지역의 역사와 문화전반을 조사하고 연구하는 일은 일상에서 마주하는 지역의 정체성을 확인하고 이웃과의 연대를 강화하는 데 필수적인 기초가 될 것입니다. 또한 지역의 정체성을 찾고, 자긍심을 확립하려는 노력은 도시성장을 위한 지방자치 발전과 궤를 같이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지난 2020년 12월, 지방자치법 정부개정안이 통과되면서 창원시는 마침내 인구 100만 대도시에 걸맞은 ‘특례시’로의 위상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이는 창원, 마산, 진해의 3개 시가 통합한 지 10년 만에 얻게 된 소중한 결실로, 통합창원시를 감싸왔던 3분 4열의 원심력이 ‘셋(3)이 하나(1) 됨으로써 다섯의 총합으로 나타난다’는 3·15의 구심력 원리가 발현된 것이기도 합니다.

이제 우리 창원시는 2022년 ‘창원특례시로서의 새로운 역사의 장’을 열게 됩니다. 따라서 ‘창원의 번창’을 위해 한 걸음 한걸음 앞으로 나아가야 하며, 이 행진은 과거로부터 현재까지 이어진 여러 시민의 발걸음과 함께해야 할 것입니다.

지난해 봄, 창원시정연구원은 창원이 가진 고유성과 차별성을 찾고 현재를 기록하며 미래를 설계하는 데 필요한 역사·문헌자료의 발굴 및 번역, 시민·전문가 연구 공모사업 등의 다양한 연구 활동을 맡을 창원학연구센터를 출범시켰습니다.

그리고 오늘 2021년 새해의 시작과 함께 그 첫 번째 결과물로 ‘지역사발굴연구 교양총서’ 『마산번창기(馬山繁昌記)』를 출간하게 되었습니다.

일제강점기 마산을 다룬 문헌 중 가장 유명한 『마산항지(馬山港誌)』의 저자인 스와 부고츠(諏方武骨)가 1908년에 발행한 책으로, 전통적인 농어촌이었던 마산지역이 근대도시로 변화하는 과정을 여실하게 보여주는 최초의 조사연구서라 할 수 있습니다.

이를 통해 우리는 일본 제국주의하에서 한국의 근대식민도시가 어떻게 형성되고 건설되는지 그 과정을 자세히 엿볼 수 있습니다.

다만, 일본인의 시각에서 근대 창원지역, 그 가운데 근대 마산사회를 대상으로 자신들의 번창을 구가한 점은 뼈아프지만, 한국의 근대사가 안았던 숙명을 반증하는 일이기도 하며, 역사의 교훈을 절실하게 새기게 하는 대목이기도 합니다.

『마산번창기』가 출간되기까지 도움을 주신 분들이 많습니다.

오랫동안 제목 정도만 알 뿐 구할 수 없었던 귀한 자료를 찾아 내어주신 박영주 선생님, 자료가 지닌 학술적·역사적 가치를 알아보시고 창원학연구센터의 첫 과제로 제안하고 발간에 필요한 모든 작업을 도맡아 주신 한석태 초빙연구원과 송효진 센터장, 그리고 일본어와 우리말의 간격을 전혀 느끼지 못할 만큼 매끄럽게 번역해주신 재일동포 하동길 선생님, 어떤 요청에도 흔쾌히 도와주신 문창문화연구원의 안용준 연구위원 및 한 면 한 면 정성으로 디자인과 편집을 맡아주신 불휘미디어 관계자분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앞으로도 창원시정연구원과 창원학연구센터는 창원인에 의한 『창원번창기』가 나오길 기대하고, 창원의 언어, 역사, 지리, 풍속, 예술, 문화, 인물 등의 인문학 분야를 중심으로 사회, 정치, 경제, 행정 등 사회과학 분야와 도시, 조경, 건축, 교통, 물류 등의 지역 도시학 분야 등과 연계할 수 있는 체계적인 연구기반을 다져 나가며 창원인을 위한 노력을 지속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2021년 2월

창원시정연구원장 전수식

 

마산번창기 해제

일본 제국주의의 조선 침탈과 경영은 조선의 식민지화 과정과 그 궤를 같이한다고 볼 수 있다. 근대 창원지역을 대상으로 하는 일본 문헌자료를 번역하는 작업은 이 지역의 식민지화 전개과정을 살펴보는 데 필수적 과제이다. 창원의 근대사 연구에 선결해야 할 작업임은 두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마산과 진해지역은 일본 제국주의의 영향을 이른 시기에, 가장 직접적이고도 강력하게 받은, 일본제국의 식민도시였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식민도시 건설 당시 일본인의 시작에 의해 기록된 문헌자료의 검색과 정리는 지역의 근대사 연구에 있어 더 이상 미루어 둘 수 없는 일임은 자명하다.

『마산번창기』는 1908년(명치 41년)에 발간된 저작으로, 1902년(명치 35년) 『한국안내(韓國案內)』 속의 마산편에서 소개된 소략한 기사와는 달리 한 개인 기록자이자 연구가인 단행본 체재의 형식과 내용을 갖춘, 창원지역 중의 마산을 대상으로 한 최초의 지리지이다. 동일 저자에 의해 보강된 1926년(대정 15년) 『마산항지(馬山港誌)』와 함께 근대 식민도시 마산을 조명하는 데 가장 비중이 크고 내용이 충실한 것으로 평가된다.

저자 스와 부고츠(諏方武骨)는 부친 고슈(翁洲)의 차남으로 태어나 부친의 영향으로 시문에 일찍이 눈을 떴다 한다.

부친은 아이즈와카마츠(會津若松)란 대번의 무가 출신으로 소년 시기 선발되어 에도에 가서 쇼헤고(昌平黌)에서 10년간 수학하고, 귀향한 후 일신관(日新館)의 교수가 되었다. 보신전쟁(戊辰戰爭)에 연루되어 참전했다가 지금의 후쿠시마 현인 아이즈번의 몰락을 보게 된다. 유폐의 고초를 겪은 후 와카마츠 현 양성학교장 겸 예과학과장, 후쿠시마 현 제3사범학교 학감을 역임하고 1888년(명치 21년) 미야기(宮城) 현 센다이(仙台) 시에서 세이신기쥬쿠(聲振義塾) 관사숙을 열고 한문을 교수했다. 동북의 두 석학 중 일인으로 칭해졌다.

저자는 어릴 적부터 부친의 훈도에 따라 영문, 한문, 일문을 배우고 일찍이 지리 역사에 취미를 가졌다 한다. 몰락한 무산 계급이 대만과 조선으로 진출한 사례의 한 전형으로 저자의 이동 경로를 확인해 볼 수 있다.

저자는 도한하기 전 먼저 대만에서 일정 시간 주유한 뒤 모친을 히로시마(廣島)의 집에서 장사 치루었다. 오카야마(岡山) 출신의 보육원 교사이자 산파 자격증을 가진 부인과 혼인한 것도 이 시기 직전이었을 것이다.

인천에 도착한 다음, 마산에 온 것은 1906년(명치 39년) 3월이었다. 이 해 6월 하순부터 기록을 개시하여 1908년(명치 41년) 9월에 완성한 것이 바로 『마산번창기』이다.

명치 41년 12월 1일 발행일자의 저자 겸 발행자는 스와 부고츠(諏方武骨)란 본명을 밝히고 책의 서언에서는 거동노부(去洞老夫) 스와 쇼오센(諏方松仙)이란 아호와 필명을 사용한다. 별천지(洞天)를 찾는(去) 소나무 아래 신선(松仙) 이름과 사무라이의 후손임을 나타내는 무골(武骨)이란 이름이 퍽 대조적이다.

후일 『마산항지』에서는 스와 시로(諏方史郞)란 이름을 사용하고 자신을 겸칭할 때는 국사(局史 ; 시로의 눈)라 하기도 하여 역사기록자임을 자임한다. 자신의 집필 공간을 하쿠엔보(白猿坊)라 하여 백수(白首)임을 은연중 드러내는 문사적 기질을 드러내기도 한다.

17년간에 걸쳐 심혈을 기울여 『마산항지』와 『경남사적명승담총(慶南史蹟名勝談叢)』이란 책을 상재하고 그 후 건강이 악화되어 병상에서 「경남사적보유」를 쓰다가 1927년(소화 2년) 2월 8일 타계하였다.

본 『번창기』는 연구자에게 실물을 제공하기 위해 원본을 그대로 후철하고 번역본을 전철하기로 한다. 원본에는 25쪽에 걸친 광고가 게재되어 있어 당시 마산의 사회경제상 일면을 알려주는 좋은 자료이다. 광고 연구자들에게 희소식일 것이다.

목차대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서언

제1장 마산의 대관

제2장 마산의 관공서

제3장 지질 및 기후

제4장 위생 및 의사

제5장 교육기관

제6장 신도 및 종교

제7장 교통

제8장 호구

제9장 경제사정

제10장 마산의 잡록, 여러 근황

마산의 노래

본문 109쪽, 전부(前付) 14쪽, 후부 14쪽으로 전체가 구성되어 있다.

2020년 여름, 창원시정연구원 창원학연구센터 자문위원인 박영주(朴永周) 선생이 일본 내 대학도서관 수장고에서 잠자고 있던 원본을, 출간한지 110여 년 만에 발굴하여 세상에 드러나게 되었다.

명치시대의 어문으로 난독의 저술인지라 재일동포 재야사학자이자 교토 소재 국제중고등학교 전 교장 하동길(河東吉) 선생께 번역을 의뢰하였고 쾌히 수락한 번역 작업에 박영주 선생이 각주를 달고 본인이 윤문과 해제를 함으로써 오늘에 이르게 되었다.

창원학연구센터가 기획하고 있는 창원지역 근대문헌자료 번역 작업의 첫 결과물로서 발간함을 밝혀두고자 한다.

2021년 2월 18일

창원시정연구원 창원학연구센터 초빙연구원 한석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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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8. 16. 00:00

창원시 근대건조물 10호, 마산 전기회사 지점장 사택 - 4

지난 3월 21일 창원시 근대건조물심의위원회는 창원시 마산합포구 장군동 1가 4-17번지의 옛 전기회사 지점장 사택을 ‘창원시 근대건조물 제10호’로 결정하였다.

앞선 이들이 남겨 놓은 문화유산의 보존책무는 지금을 사는 우리에게 있다. 그중 근대기 유산은 도시의 형성기의 모습을 알 수 있다는 점에서 중요성이 크다. 이 땅을 강점한 일제가 남긴 건물이라도 마찬가지다.

근대건조물로 결정된 뒤 이 건물에 대한 명칭과 건축연도의 적절성에 대한 논란이 있었다. 이에 산호동 지하련 주택 보전문제에도 관심을 깊이 가졌던 마산YMCA 시민사업위원회는 7월 14일 제22회 시민논단의 주제로 이 문제를 올렸다.

시민논단에서 발제한 내용을 4회로 나누어 포스팅한다. 이 글이 마지막이다.

 

<글 순서>

1. 마산의 전기회사 궤적

2. 건축 연도 추정 

3. 건축적 가치

4. 제안 - (이번 글)

 

 

4. 제안

 

3회에 걸쳐 ‘창원시 근대건조물 제10호-마산 전기회사 지점장 사택’에 대한 글을 포스팅했다. 이에 대한 필자의 생각을 정리한다.

 

○ 기왕 ‘창원시 근대건조물 제10호’로 결정된 만큼 시민의 공유자산으로 활용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건물소유주도 이미 “창원시가 원한다면 시에 매각하겠다는 뜻을 이미 창원시에 통보하였다.”고 한다.

○ 하지만 부지 255평, 건물 1동 43평의 현 규모로는 시민 공유공간으로 많이 부족하다.

○ 이 건물과 동시에 건축된 인접 2동 포함하면 부지 478평, 건물 3동 106평이 되어 여러 가지 폭넓은 가능성이 열린다. ‘마산 근대사 전시관’ 등으로 사용하기에도 매우 적절한 규모가 된다.

○ 하지만 이럴 경우 현재 추진 중인 재개발 사업에 피해가 적지 않다.(아래 그림 중 붉은 색이 재개발구역, 노란색이 본 부지)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니다. 창원시가 재개발 사업승인 과정에서 창의적 인센티브를 제안한다면 방법은 있다.

 

 

재개발조합, 시민, 창원시 3자 모두 Win-Win할 수 있는 전략을 수립해 근대기 마산 흔적의 마지막 유산을 꼭 남겨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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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8. 9. 00:00

창원시 근대건조물 10호, 마산 전기회사 지점장 사택 - 3

지난 3월 21일 창원시 근대건조물심의위원회는 창원시 마산합포구 장군동 1가 4-17번지의 옛 전기회사 지점장 사택을 ‘창원시 근대건조물 제10호’로 결정하였다.

앞선 이들이 남겨 놓은 문화유산의 보존책무는 지금을 사는 우리에게 있다. 그중 근대기 유산은 도시의 형성기의 모습을 알 수 있다는 점에서 중요성이 크다. 이 땅을 강점한 일제가 남긴 건물이라도 마찬가지다.

근대건조물로 결정된 뒤 이 건물에 대한 명칭과 건축연도의 적절성에 대한 논란이 있었다. 이에 산호동 지하련 주택 보전문제에도 관심을 깊이 가졌던 마산YMCA 시민사업위원회는 7월 14일 제22회 시민논단의 주제로 이 문제를 올렸다.

시민논단에서 발제한 내용을 4회로 나누어 포스팅한다.

 

<글 순서>

1. 마산의 전기회사 궤적

2. 건축 연도 추정

3. 건축적 가치 - (이번 글)

4. 제안

 

 

3. 건축적 가치

이 건물은 2005년 문화재청에서 등록문화재로 지정 예고한바 있다. (위 사진)

당시 「경남지역(24개소) 근대문화유산 등록예고」에 따르면 이 건물은 ‘관사주택 설계집단의 인맥과 기술의 흐름을 잘 보여주며, 여러 차례의 개·보수가 이루어졌음에도 건물의 평면 상태나 외관이 비교적 잘 보존되어 있어 주거사적, 건축적, 근대사적 가치가 있다.’고 등록문화재 예고 이유를 밝히고 있다.

이때 문화재청이 등록 예고한 경남 24개소(진해 11, 마산 3, 밀양 3, 거창 2, 창원·통영·남해·진주·산청 각 1개소) 중 유독 본 건물만 건축주의 반대로 등록되지 않았다.

 

이 건물의 건축적 가치를 간략히 정리하면,

1) 강점기에 일본인들이 많이 거주했던 마산이지만 공공건물로 마산헌병분견대 정도만 남아 있을 뿐 모두 사라졌다. 하지만 이 건물은 비교적 원형이 잘 보존된 주택이다. 유일하다.

2) 단층 조적조+목조이며 일식 시멘트 기와로 지붕을 얹은(현 지붕은 덧씌움) 전형적인 일식주택이다. 벽체하부는 구형 적벽돌로, 상부는 시멘트 모르타르로 단순하고 검소하게 디자인되어 당시 관사건축의 흐름을 가늠하게 해준다.

3) 스위치, 욕실, 창호, 화장실 등의 기구 및 소재가 비교적 원형을 유지하고 있어서 당시 건축 기자재의 수준과 형태를 잘 알 수 있으며, 전통 일식주택의 건축요소인 다다미(たたみ), 후스마(ふすま), 토코노마(とこのま), 오시이레(おしいれ), 부쓰단(ぶつだん) 등의 형태를 잘 알 수 있다.

4) 경사지를 극복하기 위해 건축한 석축 옹벽 및 돌계단과 세월을 말해주는 가이즈카(カイヅカ) 향나무가 잔존하고 있다.

 

 

○ 이런 점들을 종합적으로 평가해서 2021년 3월 12일 창원시 근대건조물심의위원회 심의를 거쳐 ‘창원시 근대건조물 제10호’로 결정하였다.

1. 유일하게 남아 있는 근대기 일본 관사주택이라는 건축사적 관점에서,

2. 110년 전(1911년)에 들어온 마산 전기회사가 남긴 유일한 것이라는 산업사적 관점에서,

3. 개항으로 시작된 일본인 마산진출의 중요한 흔적이라는 도시사적 관점에서, 이 건물의 가치는 충분하다.

문제는 현재 이 건물이 포함된 주변 일대에 재개발사업이 추진되고 있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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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8. 2. 00:00

창원시 근대건조물 10호, 마산 전기회사 지점장 사택 - 2

지난 3월 21일 창원시 근대건조물심의위원회는 창원시 마산합포구 장군동 1가 4-17번지의 옛 전기회사 지점장 사택을 ‘창원시 근대건조물 제10호’로 결정하였다.

앞선 이들이 남겨 놓은 문화유산의 보존책무는 지금을 사는 우리에게 있다. 그중 근대기 유산은 도시의 형성기의 모습을 알 수 있다는 점에서 중요성이 크다. 이 땅을 강점한 일제가 남긴 건물이라도 마찬가지다.

근대건조물로 결정된 뒤 이 건물에 대한 명칭과 건축연도의 적절성에 대한 논란이 있었다. 이에 산호동 지하련 주택 보전문제에도 관심을 깊이 가졌던 마산YMCA 시민사업위원회는 7월 14일 제22회 시민논단의 주제로 이 문제를 올렸다.

시민논단에서 발제한 내용을 4회로 나누어 포스팅한다.

 

<글 순서>

1. 마산의 전기회사 궤적

2. 건축 연도 추정 - (이번 글)

3. 건축적 가치

4. 제안

 

 

 

2. 건축 연도 추정

이 건물의 건축연도는 1939년으로 알려져 있다.

이유는 건축물대장에 기록된 건축연도가 1939년이기 때문이다. 이 기록을 2000년 마산근대건축물에 대한 최초의 논문인 「한상술」에서 사용하였고 후속연구자들이 이 논문을 인용함으로써 확산되고 확정되었다.

하지만 해방 한참 후 작성된 건축물대장의 건축연도는 신빙성이 낮다. 뿐만 아니라 일제강점기 사(私)건물의 건축연도가 대부분 이 시기로 적혀있어서 기록정리과정에서 편의상 발생된 오류로 보는 이들이 많다.

무엇보다도 1939년이라는 건축연도는 다음의 자료들이 그 신빙성을 떨어뜨린다.

첫째, 토지대장에 의하면 전기회사 사택이 앉은 터를 경성전기주식회사가 일본인 사토 사부로(佐藤三郞)에게서 매입해 소유권을 이전 등기한 일자가 1927년 6월 3일이라는 점이다. 알려진 대로 건축연도가 1939년이라면 경성전기에서 마산지점장 사택 건축용으로 토지를 매입한 후 12년이나 묵힌 뒤 건물을 지었다는 말이다. 특별한 사정이 있었을 수도 있지만 상식적으로는 납득되지 않는다.

 

 

둘째, 현 사택 건축 당시 실내용 문짝에 바른 도배지의 초벌로 사용된 신문지가 「조선조일(朝鮮朝日)」 1928년 10월 28일자 및 12월 9일자라는 점이다. 이 신문지는 필자가 직접 현장조사 후 확인하였다. 알려진 대로 건축연도가 1939년이라면 이 신문을 무려 11년이나 보관해 두었다가 도배지로 사용했다는 의미다. 특별한 사정이 있었을 수도 있지만 상식적으로는 납득되지 않는다.

 

 

셋째, YMCA 시민논단에 토론자로 참여한 신삼호 건축사의 주장이다. 마산에 수도시설이 준공된 것은 1930년 3월 31일이었고 집집마다 수돗물이 공급된 것을 기려 행한 통수식은 같은 해 6월 6일이었다. 따라서 수도시설이 있느냐 없느냐는 건축연도를 알 수 있는 하나의 기준이 된다. 그런데 현장에서 확인한 결과 이 사택 주방으로 인입되는 수도관이 건물외부에 노출 배관되어 있다. 신축 당시 배관한 것이 아니라는 증거다. 또한 화장실에 설치된 세면기는 아예 급수가 안 되는, 사용자가 직접 물을 부어 사용하도록 만들어진 세면기이다. 이것으로도 이 건물은 수도시설이 없었던, 즉 1930년 이전에 건축되었다는 사실이 확인된다.

 

 

위의 세 가지 이유 외에 몇 가지 추가로 덧붙인다.

1) 앞서 포스팅한 ‘시기별 전기회사 변경과정’에 의하면 1939년 건축했을 경우 이 건물은 ‘남선합동전기(주) 부산지점 마산영업소장 사택’이 된다. 지점에서 격하된 영업소장의 사택 치고는 건물이 너무 고급지지 않은가.

2) 그런가하면 이 시기 경성전기의 전기료는 매우 고가여서 사용자들의 항의가 잇따랐다. 시대일보 (1924. 5. 14일자)와 중외일보(1930. 10. 1일자) 등에 따르면 마산에서도 전기사용자들이 집단적으로 전기료 인하요구를 하였다. 이런 불만은 경성전기에서 생산한 전기가 독점적으로 공급되었기 때문에 일어난 원성이었고 그만큼 경성전기의 수익이 높았음을 말해준다.

3) 1920년대 경성전기는 서울을 제외한 인천, 수원, 마산 세 곳에 지점을 갖고 있었으며 한국근현대사회사조합자료에 의하면 지점장을 중역으로 분류하고 있다. 경성전기주식회사 마산지점장이었던 야마모토 토시오(山元利雄, 1887~?)는 가고시마(鹿兒島) 출신으로 1914년 7월 동경제국대학 법학과 정치부 졸업한 엘리트였다. 1915년 1월에 한국으로 건너와 동양척식주식회사 입사하였고, 경성전기주식회사에는 1918년 6월에 입사했다. 마산지점장(진해지점장 겸임)으로는 1926년 9월 부임해 1935년 11월 1일 경성전기 마산지점이 조선와사전기주식회사로 넘어갈 때까지 재임하였다. 마산지점장 재직 중 마산체육협회 회장을 역임하기도 했다.

이런 점들을 모두 종합하면,

1) 토지매입시기 2) 초벌도배지로 사용된 신문 발행일자 3) 신축 당시 수도시설이 없었던 점 4) 건물의 수준 5) 경성전기의 독점적 위세 6) 경성전기 내 마산지점장의 지위 등을 감안할 때,

야마모토 토시오(山元利雄)가 마산지점장으로 부임한 직후인 1927년 후반기나 1928년 봄쯤 착공하여 1929년 초에 준공했을 것이라고 추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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