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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속 도시이야기

마산항지(1926년) - 102 - 곤권(坤卷) / 제24장 문화로 가는 선인(鮮人)의 잡속

by 운무허정도 2024. 6. 3.

24장 문화로 가는 선인(鮮人)의 잡속

 

회고하면 지금부터 18~19 년 전까지는 지방의 통화(通貨)는 싯가 2()에 상당하는, 구멍이 사각형으로 뚫린 원형의 동전, 상평통보(常平通寶) 밖에 없었으며 은화(銀貨)와 지폐는 기차 승차권을 연상시킬 정도로 초라했다.

남자는 모두 상투를 틀고 까만 갓을 쓰고, 여자는 일본인을 보면 곧 집구석으로 몸을 감추고 그 기르는 개마저 일본인을 짖어대던 시대는 이미 과거의 꿈같이 사라졌다.

대정 7(1918) 경까지는 마산포의 장날에 단발(斷髮)한 선인이 보이면 진기하게 여겼는데 다음 해인 대정 8(1919)쯤 부터는 단발하고 양장한 자가 점점 보이더니 오늘날 시장을 돌아보면 양복, 한복을 불문해 단발자가 그 과반을 차지한다.

상투를 튼 사람은 지게꾼이나 멀리 시골의 노동자들뿐이다.

또한 부인에 관해서 살펴보면 길가나 시장터에서 보이는 자는 생선이나 조개를 파는 자, 아니면 하층 부류의 부인들 만이었는데 요새는 중류 이상의 부인이 다수를 차지하고 양장한 미인이 걸어가는 모습도 심심찮게 보게 된다.

비가 올 때에 큰 삿갓 외에는 우산이 없었던 마산포도 지금은 양산(洋傘), 화산(和傘)을 사용하며, 남녀가 같이 오래전부터 신어 오던 짚신과 진흙 속에 잘 빠지는 깃 달린 나막신은 대정 11(1922) 가을경부터 유행하기 시작한 고무신에 압도되어 그 모습을 감추어 버렸다.

고무신의 대유행이 전 조선의 도시와 시골에 퍼진 결과, 오사카, 고베 등지의 제조원은 너무 많은 이익을 얻어 조악품 제조에 기울어져 오늘날에는 다소 비싸도 가죽으로 된 고급 신발을 신게 되었으며 그 구두 제조업자도 크게 증가한 것 같다.

또한 종종 일본식 게다(下駄, 왜나막신, 아래사진), 아시다(足駄, 비 오는 날에 신는 굽이 높은 게다), 셋타(雪踏, 대나무 껍질로 만든 짚신의 밑바닥에 가죽을 대고 쇳조각을 단 일본의 전통 신발) 등을 신는 자도 보게 되었다.

 

가옥은 종래 비좁은 길가에 세운 초가지붕 아래 온돌 방식의 난방 구조이며 방구석에 요강을 두고 거기서 잠을 잔다.

남자는 두세 자 길이의 담뱃대로 잎 연초를 썰어 흡연하는데 외출 시에도 이것을 들고 나다닌다.

오늘까지 이것을 애용하는 자는 완고한 어른이나 시골뜨기에 한정된다.

나머지는 대개 내 지식으로 짧은 담뱃대에 썬 연초를 이용하든가 아니면 종이로 돌돌 말은 담배를 피운다.

또한 새로 큰길에 면해서 세워지는 집들은 소방상 함석판을 깐 지붕이나 혹은 기와지붕의 집들이다.

이는 초가지붕을 금지한 건축제한령에 따른 것은 아니다.

구래의 온돌 건축도 본 제한령에 의해 개축되었기 때문에 대정 11(1922) 경부터는 갑자기 시가지의 면목이 일신하였다.

도로는 대정 원년(1912)에 제1회 시구 개정을 단행하고, 데라시마 부윤 착임 후 세 번이나 시구 개정을 행하였다.

일등도로에 접속하는 창원군과의 연락도로도 개통하여 도미마치(富町) 공설시장을 개설하는 등 수년 사이에 시가지는 많이 미화가 되어 격세지감을 느끼게 한다.

선인은 옛날부터 목욕하고 몸을 깨끗이 하는 습관이 없으며 오로지 때때로 몸을 씻을 뿐이다.

여름이 한창일 때는 남자는 강이나 바다에서 씻는 사람이 있는데, 부인은 맨몸 드러내는 것을 꺼리기 때문에 방안에서 몸을 닦아낼 뿐이다.

개항 이래 동포 간에는 몇 군데 목욕탕을 영업하는 사람이 나왔지만 선인은 그때까지 목욕탕에 들어가는 것을 몰랐다.

명치 42~43(1909~1910) 쯤부터 겨우 입욕(入浴)을 알게 된 일부 소수의 선인 남자는 시각을 한정하여 내지인의 입욕 시간 후에 들어가게 했는데, 최근에는 남녀 더불어 입욕의 재미를 터득하고는 우리도 같은 일본 사람이라며 기생이며 지게꾼에 이르기까지 내가 먼저랍시고 목욕탕의 문이 열리는 시간을 기다리는 상황이 되었다.

영업자 역시 조선에서는 조선 사람 본위로 장사해야지 하며 환영하는 편이다.

그러나 같이 목욕하는 사람에게 비눗물을 날려도 아무렇지도 않는다든지 욕조에 들어가기 전에 아랫부분을 씻지 않고 뛰어든다든지 하면서 방약무인의 감이 있어서 많은 내지인은 자기 집에 욕조를 만들고 그렇지 못한 사람은 옆집의 것을 빌려 쓰는 식으로 해 목욕탕에 가는 사람은 크게 그 숫자가 줄어들었다.

선인남녀 가운데는 요 이삼 년 전부터 내지인과 같이 해수욕(海水浴)을 즐기는 자가 나온 일은 진화과정의 한 현상일 것이다.

<1910년대초에 개업해 지금까지 남아 있는 두월동의 앵화탕>

 

또한 소학교에 통학하는 선인 아동이나 고등여학교에 재학하는 선인 여학생의 경우 내지인 아동, 내지인 여학생과 동일한 복장을 하며, 학교에 있는 동안의 대화는 다 일본어를 쓰며, 그 일본어가 유창하며 특히 영어 발음의 정확성은 과연 언어의 나라란 이름에 부합할 만큼 내지인보다 잘하니 내선인의 판별을 지난하게 한다.

원래 과대망상과 자존망대는 선인 일종의 특성이기 때문에 점포 같은 경우도 어제 문을 열고 오늘 폐업하는 자, 또한 아직 상품이 충실하지 못하면서 간판만은 함부로 큰 것을 자랑하는 자, 자금이 준비되지 않는데도 개점하여 장래를 걱정하는 자 등이 비일비재하다.

저기에 대간판의 양복 재봉점이 나왔다고 했다가 다음날에 다른 사람의 잡화점으로 변했다는 예는 한둘이 아니었다.

이는 문화로 가는 과도기의 허영의 시대라고도 하겠지만 심지어는 협소한 가게 입구에 무슨 무슨 회, 무슨 청년회, 또한 무슨 소년회, 혹은 무슨 단체 사무소, 혹은 무슨 야학회, 혹은 무슨 구락부 등나무간판 예닐곱 가지를 거는 것을 보면 참 무모하다고 밖에 볼 수 없는 노릇이다.

어떤 이가 말하기를, 만사가 간판의 선인이니 간판에 비해 실속 없다는 속담도 선인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냐고.

부내 선인의 점포로서는 화양백화점, 양품모자재봉판매점, 미술장신구점, 귀금속안경점, 미국제미싱점, 제화점, 양말제조판매점, 가성소다제조판매점, 미곡점, 운송점, 여관, 인쇄 조각사(彫刻師), 활판인쇄소, 사진업, 요리점, 정육점, 주막, 방임대업 및 기타 공업가 등을 주요한 것으로 하고 농업가는 극히 드물다.

합병 당시 국경일, 축일 등에 국기를 게양하는 선인은 27백 호 인구 13천 명 중에 20~30호는 있었지만 그때마다 기독교 청년에 의해 나라의 수치, 나라의 도적이라는 협박을 받아 일제히 게양을 폐지하였다.

그 후 대정 8(1919) 봄에 각지에서 배일 선전의 만세 소요사태가 일어나 배일사상이 점점 심각해졌다.

좁은 길에서 내지인과 마주 보게 되어도 길을 양보하지 않을뿐더러 심지어는 보통학교 학생의 경우 종래는 내지인 교사에 대해 선생님이라 불렀는데 이 소요 이후 모군(某君)이라고 말을 바꿀 만큼 악화된 것이다.

대정 12(1923) 91일의 관동지방대지진(關東地方大地震, 아래 사진) 때 무고한 선인이 많이 처참하게 살해되었다는 풍평(風評)이 퍼지자 내지인에 대한 적의는 점점 더 깊어 가 마산포에 사는 내지인을 불을 태워 버리겠다, 음료수 원천에 독약을 던지겠다는 등의 풍설이 풍설을 불러, 각자가 경계하는 것은 물론 헌병, 경관들도 크게 경계를 굳혀 소방조로 하여금 임시 야경을 서게 했다. 또한 위수중포병대대에서도 주시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

 

인심은 흉흉했지만 며칠 후 마산에서 도쿄로 간 사람 중에는 한 사람도 피해자가 없다는 점, 그리고 피난하는 길에서 선인이 도리어 온후한 구호를 받았다는 점이 판명되어 비로소 분위기가 잠잠해졌다.

그래도 사상은 도리어 점점 내화되어 표면상 내성융화를 입에 달아도 내지상품의 비매동맹을 종용하는 자도 있다고 전해지니 몰래 배일을 계속하고 있다는 풍평이 있다.

생각해보니 이는 필경 당사자가 그들에 대한 교육 방침을 잘못해 조상 전래의 공맹교(孔孟敎)를 배척해, 내지동일한 과학적인 교육을 실시하는 바람에 교활한 천성을 더 증장시킨 탓이라고 비방하는 자가 있는데 혹여 맞는 말이 아닌지 모르겠다.

이상은 마산포를 잠깐 보고 탐방하여 적은 바이며 부내 각 동은 내지에서의 소위 대도시 주변의 시골이라 할 수 있으며 관공리인 선인도 많다.

선인의 따뜻한 온돌방을 빌려 쓰는 내지인과 아웃사이더 내지인은 대개 농업자가 아니면 연금 혹은 유족 보조료로 생활하는 자들이거나 전원생활을 즐기려는 돈 대부업자 혹은 우유 짜는 업자들에 불과하다.<<<

 

이 글은 창원시정연구원이 2021년에 번역한 『馬山港誌』(1926) 중 102번 째 것이다. 그림은 별도로 삽입하였다. 『馬山港誌』는 일제강점기에 발간된 일본 문헌 중 가장 가치가 높은 책으로 평가 받고 있다. 저자는 앞서 게재한 『馬山繁昌記』와 같은 스와 시로(諏方史郞)이다. 본 포스팅은 비영리를 전제로 창원시정연구원의 양해를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