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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총독부28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64) - 강점제3시기 태평양 전쟁 막바지에 한반도에도 연합군의 공습이 있었습니다. 최초로 한반도 근해, 즉 부산과 제주도 남방에 미군비행기가 날아다닌 것은 1944년 7월 8일 자정 무렵이었습니다. 그 후부터 심심찮게 내습하다가 1945년 들어서는 빈도가 잦아져 45년 5월 경 부터는 거의 매일 같이 나타났습니다. 그 때부터는 한반도 남부뿐만 아니라 인천 황해도 대전 광주 원산 청진 나남 나진 등에까지 내습하여 항해중인 선박과 운행 중인 열차 및 육상 해상 시설에 총격과 폭격을 가했습니다. 아래 사진은 태평양 전쟁에서 맹위를 떨쳤던 미군 B-25 경폭격기입니다. 미군의 공습에 당황한 조선총독부는 1945년 4월 4일자로 '소개(疏開)실시요강'을 공포하였고, 이어서 4월 7일 '소개공지대(疏開空地帶)'로 경성 5개, 부산1개,.. 2013. 6. 3.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56) - 강점제3시기 중앙부두 건설공사도 제1부두와 같이 1936년 10월 조선총독부에서 경성의 삼택조(三宅組)에 맡겨 시공하여 제1부두와 같은 날인 1939년 5월 19일 준공하였습니다. 총 25,475평 규모로서 총길이 1,080m의 물양장도 갖추었습니다. 현재 이 중앙부두에는 연안여객터미널․마산지방항만청․모래부두․쌍용양회 시멘트 사일로․세관․검역소 등이 자리하고 있습니다만 현대아이파크 앞에 합동청사가 준공되었기 때문에 공공기관은 곧 이전할 것 같습니다. 공공기관들이 이전하고 나면 이 일대를 근래에 조성한 서항부두와 함께 해양친수공원으로 조성할 것입니다. 마산 해안에 큰 변화를 가져올 계획이므로 시민들 기대가 높습니다. 시멘트 사일로도 철거한다고 하는데 여수엑스포 때처럼 재사용하는 것이 더 낫지 않을까 싶습니다. 아래 설.. 2013. 4. 8.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38) - 강점제3시기 지난 시기와 마찬가지로 강점제3시기인 1931년부터 1945년까지 제작된 마산관련 지도를 해제하고 그 외 관련 자료를 토대로 마산 도시구조의 변화를 살펴보겠습니다. ----------------------------------------------------------------------------- 1931년 / 내무국토목과항만계 / 조선총독부 / 1:15,000 / 마산만매립서류 / 서울대중앙도서관 이 지도는 마산의 매립공사에 관한 도면으로, 마산시가지 전역이 비교적 상세히 표현되어 있습니다. 간행연도인 1931년 이전에 이미 매립이 끝난 부분을 ‘기성부분(旣成部分)’으로, 현재 시공 중인 부분을 ‘공사중(工事中)’으로 구분하여 각기 표현하고 있기 때문에 당시의 매립 상황을 잘 알 수 있습니다. 이.. 2012. 12. 3.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33) - 강점제3시기 한 도시를 짧은 말 한마디로 규정 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각 도시는 그 도시의 특유한 자연조건과 문화조건 혹은 대표적인 생산품 등으로 그 도시의 이미지를 결정하기도 합니다. 목포하면 항구, 진해는 벚꽃 등과 같은 것들을 두고 하는 말니다. 이런 관점에서 일제강점기 마산을 말한다면「술과 꽃의 도시」였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마산지역의 역사에서 술과 관련된 기록이 등장하는 것은 꽤 오래 전의 일입니다. 마산지역을 찾은 관료나 시인들의 시를 보면 술과 관련된 작품이 적지 않습니다. 고려의 유명한 시인 정지상은 “푸른 물결 아득하고 돌이 우뚝한데……백년 풍류에 싯귀가 새롭고 만리 강산에 한잔 술을 드네”라고 하였습니다. 같은 시기의 또 다른 이는 “기이한 바위가 바닷가에 우뚝한데 모두들 유선.. 2012. 10. 29.
조선총독부가 대한민국정부의 전신? 창원시가 추진하고 있는 마산임항선 철도부지의 푸른 길 가꾸기 사업에 문제가 생겼습니다. 철도부지를 관리하는 한국철도시설관리공단에서 창원시더러 임항선 부지를 사용하려면 400억에 매입하라했기 때문입니다. 임대할 경우에는 연간 4억 정도가 필요하지만 장기임대는 곤란하며, 현행 법률상 다른 방법은 없다고 합니다. 한국철도시설관리공단은 국유지인 철도부지를 관리하는 공공기관이기 때문에 매입요구 주체는 사실상 정부라고 보아야 합니다. 이 글은 정부의 이런 입장에 대한 질문입니다. 제국주의 국가가 식민지에 부설하는 철도는 식민지의 방대한 토지와 물자 그리고 노동력수탈을 전제로 합니다. 20세기 벽두에 시작된 일제의 한반도 철도공사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일제는 철도건설을 이유로 조상 대대로 지켜온 한국인의 논과 밭을 무.. 2012. 7. 18.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14) - 강점제2시기 마산에 최초로 철도가 개통된 것은 개항 6년 후인 1905년이었습니다. 러일전쟁 종전으로 일본이 조선을 본격적으로 집어 삼키기 시작할 즈음이었습니다. 경부선 개통과 같은 해였으며 마산이 종착지라 ‘마산선’이라고도 불렀고 삼랑진에서 마산과 연결된다 해서 ‘삼마선’이라고도 불렀습니다. 마산선은 한국인에 의해 설립된 철도회사를 일본 군부가 러일전쟁을 빌미로 그 사업권을 강제 접수한 다음, 자국의 중요 인력을 동원하여 개통시킨 철도였습니다. 비록 국력이 약해서 강제로 탈취 당한 철도였지만, 이 철도의 개통은 마산의 도시화를 촉진시켰으며 마산을 일본열도와 한반도 내륙을 연결하는 교통요충지로 만들었습니다. 마산선이 개통된 20여년 뒤, 진주 방면으로 연결되는 또 하나의 철도가 놓였습니다. ‘경남선’이라 불린 이 철.. 2012. 6. 18.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03) - 강점제2시기 마산(조선교통도 마산5호) 1926년 / 일본 육지측량부 / 조선총독부 / 1:50,000 / 조선교통도 / 국립지리원 이 지도는 1916년에 측도하여 1926년 6월 25일에 인쇄, 6월 30일에 발행한 것으로 저작권 소유자는 조선총독부이며 인쇄 겸 발행자는 육지측량부입니다. 1916년 측도한 것으로 기재되어 있지만 1925년 6월에 개통한 경남선 철도가 뚜렷이 표기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발행 연도인 1926년 당시의 지도인 것이 분명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지도의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교통도’이기 때문에 등고선 등의 표기는 없고 그 대신 도로 사정을 잘 알 수 있도록 제작되어 있다는 것이 이 지도의 특징입니다. 이 지도의 제작과 관련된 기록을 소개하겠습니다. 글의 출처는 1986년 栢書房(株)에서.. 2012. 4. 2.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00) - 강점제2시기 2010년 4월 8일에 시작한 연재가 오늘로 100회를 맞았습니다. 매주 월요일마다 글을 올린 것이 그럭저럭 2년이 다되었군요. 보잘것 없는 글을 보아주셔서 감사합니다. 4) 문헌을 통해 본 당시 상황과 중앙마산의 도시계획 직전 포스팅에서 올린 중앙마산에 대한 문헌의 내용들을 정리해 보면 당시 중앙마산의 상황이 다음과 같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① 중앙마산의 범역은 신월천에서 장군천을 거쳐 척산교에 이르는 철도용지 내 시가를 뜻했다. ② 마산은 마산포․신마산․중앙마산이라는 세 영역으로 나누어지는데 마산포 방면은 한인을 상대하는 상점이 많고, 신마산은 정비된 가로에 군인 및 관리를 상대로 하는 상점이 많으며 중앙부는 관아․학교․사원․철도소재지가 있기 때문에 이와 관련한 사택이 많이 있다. ③ 1931년에는.. 2012. 3. 12.
강탈당한 진해와 두 지도자 지난 11월 23일 올린 글에서처럼, 100여년 전 진해의 중평벌판 그 평화로웠던 마을에 일본의 군대가 청천벽력처럼 들이닥쳤습니다. 하루아침에 모든 것을 잃고 부랑자 신세가 된 당시 진해사람들의 정황은 그야말로 아비규환이었을 것입니다. 이 참담한 상황을 전후해 민족의 최고지도층이 보여준 극단적인 두 사례가 있어서 소개합니다. 첫째는 주민들의 아픔에 동참한 사례로 매천 황현에 대한 이야깁니다. 당시 진해지역에서 일어난 아비규환을 두고 황현은 『매천야록(梅泉野錄)』에서 「倭人勒奪慶南之鎭海灣………定期軍港………熊川距鎭海數百里而亦捲入港域吏民漁散如逢亂離 ; 웅천에서 수백리의 항역이 군항으로 포함되어 이속도 농민도 고기잡이도 모두 흩어져 마치 난리를 만난 것 같았다」 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웅천에서 수백리.. 2011. 12. 28.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88) - 강점제2시기 1920년 4월 ‘회사령’이 폐지되었습니다. ‘회사령’은 1910년 12월 30일 조선총독부가 공포해 3일 만인 1911년 1월 1일부터 시행한 ‘기업통제령’입니다. 분문 및 부칙 20개조로 되어 있는 회사령의 주요 내용은 한국에서의 회사설립 및 한국 외에 설립된 회사가 한국 내에 지점을 설치코자 할 때는 조선총독부의 허가를 받아야한다는 것이었습니다. ‘회사령’의 표면상 이유는 한국의 산업을 위한다는 것이었으나 그 본질은 식민지인 한국에 일본 국내공업과 경합되는 근대공업을 억제하기 위함이었습니다. 한국의 기업 성장을 억제하고 한국을 일본자본주의를 위한 원료공급지로, 상품판매시장으로 육성한다는 의도로 만든 규정이었습니다. 회사령은 1910년대 내내 한국 내에서 한국 사람들이 마음대로 기업을 할 수 없게 통.. 2011. 12. 12.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87) - 강점제2시기 『조선총독부 통계연보』에 의한 1920년대 마산의 인구변화입니다. 1921년부터 1923년까지의 통계는 구하지 못했습니다. 연도 한국인 일본인 외국인 합계 일본인비율(%) 1920 11,923 4,172 70 16,165 25.8 1921 1922 1923 1924 13,616 5,168 98 18,882 27.4 1925 17,148 4,824 109 22,081 21.8 1926 17,802 4,975 124 22,901 21.7 1927 18,019 5,095 129 23,243 21.9 1928 18,300 5,339 95 23,734 22.5 1929 19,309 5,592 87 24,988 22.4 1930 20,149 5,559 102 25,810 21.5 1930/1920 169.0% 13.. 2011. 12. 5.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78) - 강점제1시기 통감부 시절인 1907년경에 이미 마산포의 도로 폭을 조금 넓히거나 형태를 곧게 하는 가로개수 공사가 마산경찰서 주관으로 있었습니다. 하지만 본격적인 근대식 도로가 건설된 것은 1912년부터 1915년까지였습니다. 이 때 개설된 도로들을 사정토지대장에서 확인해 보면 1912년부터 1915년까지이지만 시기는 다양합니다. 도로의 개설 시기가 토지대장에 기록된 시기와 반드시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만 이 3-4년 사이에 공사가 지속되었던 것 같습니다. 이 사업으로 자연발생적인 좁은 골목길뿐이었던 마산포에 폭8m, 10m의 쭉 뻗은 새 도로가 신설되었습니다. 다음 도면은 도로가 개설되기 전의 마산포와 개설 후 모습, 그리고 도로개설 후인 1916년 지도에 나타나는 마산포 모습입니다. 두 번째 도면에서 직선으.. 2011. 10. 3.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75) - 강점제1시기 한가위 즐겁게 보내시기 바랍니다. 오늘은 강점 제1시기에 시행된 매립에 대해 올리겠습니다. 이 시기에는 봉암동과 남성동 두 번의 매립 밖에 없었습니다. 매립이 시작되기 전, 마산의 해안에는 70m에서 200m에 이르는 간석지가 있었습니다. 그 중 봉암동, 현 마산자유무역지역에는 최고 1㎞에 달할 정도의 대규모 간석지가 있었습니다. 앞서 소개한 지도 중 마산만의 수심이 나타나 있는 것들을 보면 봉암 지역의 넓은 간석지가 잘 나타나 있습니다. 다시 한 번 보시죠. 연두색으로 표시된 지역으로 현재 마산자유무역지역입니다. 이런 간석지는 당시 마산포 주변의 주민들에게는 해산물을 제공하는 보고(寶庫)였지만 일제의 눈에는 얕은 수심이 경제적으로 매력 있는 매립 대상지일 뿐이었습니다. 그래서인지 합방 직 후 곧장 매립.. 2011. 9. 12.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74) - 강점제1시기 -마산포 최초의 수익용 매립- 馬山(1919年修正測圖) 1919년 / 육지측량부 / 조선총독부 / 1:10,000 / 柏書房 影印本 / 울산대 도서관 지난 주에 포스팅한 「馬山」을 보완한 지도입니다. 1916년 측도하여 1917년 발행했던 지도「馬山」을 1919년 제1회 수정측도하고 1924년 6월 25일 인쇄하여 6월 30일 발행한 것이 이 지도입니다. 따라서 이 지도의 도시상황은 1919년으로 보면 될 것 같습니다. 저작권과 인쇄 및 발행자는 앞의 지도와 같습니다만 지도 가격은 인상되어 18전하던 것이 40전으로 많이 올랐습니다. 영인본을 제작하는 과정에서 삭제했는지 모르지만 이 지도에는 범례가 없다는 것이 앞 지도와 다릅니다. 지도에 나타나는 도시공간의 상황은 1916년 당시의 지도인 「馬山」과 거.. 2011. 9. 5.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73) - 강점제1시기 마산최초의 근대식 지도 1916년 / 육지측량부 / 조선총독부 / 1:10,000 / / 울산대 도서관 이 지도는 근대적 측량법에 의해서 제작된 최초의 마산 지도입니다. 1916년에 측도하여 1917년에 제판하였고 1917년 6월 25일 인쇄하여 6월 30일 발행하였습니다. 저작권소유자는 조선총독부이고 인쇄 겸 발행자는 육지측량부입니다. 정가(定價)가 십팔전(金拾八錢)이라고 기재된 것을 보아 판매도 했던 것 같습니다. 범례도 지금까지의 것과 달리 각종 시설물은 물론 토지의 상태와 도로의 종류 및 행정구역의 경계까지 세밀히 나누어 표기해 놓았습니다. 본 지도의 제작과정에 관해서 1986년 백서방(栢書房)에서 펴낸 淸水靖夫의 『日本統治機關作製にかかる朝鮮半島地形圖の槪要』에 상세히 기록되어 있어서 그 내용을 소.. 2011. 8. 29.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72) - 강점제1시기 -한일병합 직 후 제작된 마산인근 군사극비 지도- 1916년 / 육지측량부 / 총독부임시토지조사국 / 1 : 50,000 / 1/50,000지형도 / 국립중앙도서관 확대해 보았습니다. 이 지도는 1906년에 측도하고 1921년에 축도제판(縮圖製版)하여 같은 해 11월 25일 발행된 지도입니다. 제작자는 조선총독부 임시토지조사국․육지측량부․참모본부가 동시에 표기되어있으며, 제목은 「軍事極秘 (戰地ニ限リ極秘)」로 되어 있고 그 아래 진해만요새근방9호(共三十一面), 오만분일지형도 마산5호(共十五面)라고 기재되어있는 것으로 보아 군사용 지도인 것 같습니다 이 지도와 관련된 기록을 소개합니다. 1986년 일본인 청수정부(淸水靖夫)가 쓴 『日本統治機關作製にかかる朝鮮半島地形圖の槪要』라는 책에 나옵니다. 조선반도 1/.. 2011. 8. 22.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69) - 강점 제1시기 -마산시의 첫 지도- 1913년 / 조선총독부官房總務局 / 조선총독부 / / 조선총독부 관보호외 / 서울대 중앙도서관 이 지도는 1914년 조선총독부가 단행한 지방행정구역 개편을 목적으로 1913년 12월 29일자로 발행한 것입니다. 총독부령 제111호로 도의 위치와 관할구역 그리고 부(府)와 (郡)의 명칭 및 관할구역 등에 관한 조정명령이었습니다. 이 때 개편된 마산부가 사실상 마산시의 시작이었습니다. 그러니 이 지도는 마산시의 첫 지도가 되는 셈입니다. 이 행정구역개편에서 마산부에는 관할구역으로 마산포각국거류지일원, 외서면의 완월리, 신월리, 월영리, 자산리, 서성리, 성호리, 중성리, 성산리, 동성리 및 오산리, 상남리, 교방리의 일부가 포함되었습니다. 지명을 이렇게 소개하였지만 사실은 앞서 포스팅.. 2011. 8. 1.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67) - 강점제1시기 사라져버린 ‘마산시’,,,, 오늘은 그 ‘마산시’의 시작을 알아보겠습니다. 마산이라는 지명은 이미 오래전부터 사용하였습니다만 이 글은 행정구역명칭으로서의 ‘마산’에 대한 내용입니다. 1895년 을미개혁으로 태종13년(1413년) 이후 480여 년간 지속되어온 8도제가 폐지되고 부제(府制)가 시행되었습니다. 전국에 23부를 두고 336군을 부의 관할로 두어 종래의 부, 목, 군, 현 등으로 다양하게 불리던 하급행정구역들을 군으로 통칭하였습니다. 이때 마산은 진주부 관할의 21개 군 중 창원군에 속했습니다. 그러나 이 제도는 부제(府制)의 인위적인 행정구역획정이 마찰을 빚어 실시 1년 3개월 만에 폐지되고 말았습니다. 이어서 1896년 병신개혁(丙申改革)으로 13도제가 채택되었습니다. 이때의 13도는 종래의.. 2011. 7. 18.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66) - 강점제1시기 1910년대에는 마산에 도시변화가 많이 없었던만큼 건축공사도 많이 없었습니다. 종교시설과 일부 교육시설만 약간 들어섰습니다. 개항기에는 식민지를 지배하기 위한 관아시설들이 주로 건설되었지만 이 시기에는 개항기에 지어 놓은 건물들의 증․개축이 많았으며 관아건물에 비해 상대적으로 산업용 건물이 많았습니다. 또한 목조건축물이 많았던 이전과 달리 이 시기부터는 벽돌을 이용한 조적조 건축물이 많아지기 시작했습니다. 지역적으로 보면 신마산에 집중되었던 건물들이 서서히 원마산 쪽으로 뻗어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1910년 장군천 이북에 지방법원지청이 들어섰고 현 마산시청 자리에 전기회사가 들어오는 등 공공건물들이 건축되었습니다. 그 결과 이 일대(옛 마산시청부근)가 신마산의 마산포 진출이라는 의미 외에 마산포와 신마산.. 2011. 7. 11.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60) - 강점 제1시기 일제강점기 마산의 인구 통계는 마산부가 자체적으로 간행한 몇몇 자료에 남아 있는 기록과 국세조사 등에 수록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일정한 기간을 단위로 조사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일제강점기 전반에 걸친 인구변화의 추이를 알아보기 위한 자료로서는 부적당합니다. 그러나 병합 이후에 매년 조선총독부에서 조사해서 출판한『조선총독부 통계연보』는 조사방법이나 조사시기의 간격이 일정합니다. 여기서는 이 자료를 이용해 마산의 인구변화를 살펴보겠습니다. 1910년대 마산의 인구변화추이입니다. 연도 한국인 일본인 외국인 합계 일인 비율(%) 1910년 10,664 5,941 52 16,657 35.7 1911년 9,847 6,199 46 16,092 38.5 1912년 5,672 1913년 9,494 5,262 41 14,.. 2011. 5. 30.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58) - 강점 제1시기 오늘부터는 1911년부터 1920년까지 10년간을 다루겠습니다. '일제강점 제1시기'로 분류되는 이 시기의 마산은 어떤 모습이었으며 어떤 변화를 겪었을까요? 1910년 8월 22일, 우리나라는 소위 「한국 병합에 관한 조약」에 강제 조인하고 일주일 후인 8월 29일 이를 전 세계에 알림으로써 일본의 식민통치를 받기 시작하였습니다. 조약은 “한국 황제폐하는 한국정부에 관한 일체의 통치권을 완전 또는 영구히 일본국 황제폐하에게 양여함····」으로 시작되었습니다. 이에 따라 ‘대한제국’이었던 우리나라의 이름은「한국의 국호를 앞으로는 조선으로 칭함」이라는 칙령 제318호에 의해 다시 ‘조선’이라 불렸고 통치권은 조선총독부가 가졌습니다. 이 조약문이 실효를 발한 1910년 8월 29일 일제는 '일한병합축가'와 '.. 2011. 5. 16.
만날고개의 옛길을 걷다 3월 5일, 오후 2시. 날씨는 봄기운이 완연했고 사람들의 얼굴에는 화색이 돌았습니다. 유장근 교수의 마산도시탐방대 열 다섯번째 길, 모두 스무사람 쯤 만났습니다. 오늘 탐방지는 만날고개. 만날재의 전설과 옛 주막, 아기무덤터와 계비, 일제기 군용지 표지석과 일본인 유지들의 사유지 경계석, 그리고 월영마을 옛 신당,,,, 무심코 지나쳤던 만날재에 끝도 없이 펼쳐진 역사의 향연에 일행은 몸을 맡겼습니다. 이 글은 그 중 옛날 월영리에서 만날재로 넘어갔던 오래된 길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지금은 누구나 만날재공원을 아스팔트 도로를 걸어 올라가지만, 이 길이 뚫리기 전까지 만날재로 가는 유일한 길은 당산마을 한복판의 좁은 길이었습니다. 당산마을은 산복도로 윗쪽 마을 이름인데 마을에 당산나무가 있어서 지으진 이름.. 2011. 3. 9.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48) - 개항이후 지난 주 포스팅한 내용처럼 마산포 6개리의 명칭이 일본식으로 바뀔 때, 6개리의 경계가 새롭게 획정되었습니다. 여러 자료를 통해 추적한 결과입니다. 이 글에서는 일본인들에 의해 변경되기 전 6개리의 경계를 복원해보겠습니다. 정확하지는 않더라도 마산이라는 근대 도시를 탄생시킨 「조선시대 마산포 6개리 추적」 그 자체에 의미를 두고 쓰는 글입니다. 마산포라는 지명은 고려후기 혹은 그 이전부터 사용되고 있었던 것으로 추정하지만 마산포를 도시로 만든 맹아는 1760년 마산창 설치 후 발생한 6개리(里)였습니다. 동성리․서성리․중성리․성호리․오산리․성산리의 마산포 여섯 리(里)가 최초로 나타나는 지도는 마산포가 개항된 1899년에 간행된 창원읍지에 수록된 지도입니다. 관찬과 사찬을 통틀어 지금까지 행해진 마산연구.. 2011. 3. 7.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47) - 개항이후 일제는 그들의 편의에 따라 도시지역의 행정구역 최소단위를 ‘정(町, 마찌)’이라는 일본식 명칭으로 바꾸었습니다. 그 과정에서 마산창(馬山倉) 설치 후 생겼던 마산포의 6개리도 명칭이 바뀌었습니다. 이 글은 마산의 행정구역 명칭이 바뀌는 과정과 결과에 대한 내용입니다. 조선총독부를 개청한 1910년 10월 1일 하루 전날인 9월 30일, 일제는 식민지 통치를 위한 과도기적 지방통치기구를 확립하였는데 거기에 동리명의 변경에 관한 지침도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변경방법은 그 때까지 사용되던 행정구역의 최소단위인 ‘동’과 ‘리’의 명칭을 일본식이나 한국식 중 어느 것이나 택하라는 식이었습니다. 하지만 이미 일본인이 행정책임자가 되어 있었을 뿐만 아니라 온통 일본 세상이었던 때라 종래의 한식(韓式) 동리명이 채택되.. 2011. 2. 28.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41) - 개항이후 마산도시변천사는 매립의 역사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매립은 마산의 도시규모를 키웠고 교통과 산업에도 큰 영향을 미쳤으며 때로는 도시중심권을 이동시키기도 했습니다. 매립이 지도만 바꾼 것이 아니라 마산시민의 생활까지 바꾸었습니다. 특히 근대도시 형성기였던 일제강점기의 매립은 마산도시구조에 결정적인 영향을 키쳤습니다. 그러므로 마산만 매립에 대한 이해 없이는 마산도시변천과정을 제대로 알기 어렵습니다. 일찍부터 마산이 항만으로서 가치를 인정받은 이유는 마산만 주변을 둘러싼 자연조건, 즉 내륙 깊숙이 들어온 마산만의 위치와 피항에 적합한 지형 때문입니다. 멀리 고려시대 조창인 석두창(石頭倉)과 일본정벌을 꿈꾸었던 정동행성, 그리고 조선시대 마산창(馬山倉)에 이르기까지 왕조시대 조정에서 마산항을 중시한 까닭도 .. 2011. 1. 17.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25) - 개항기 이것으로 개항기까지의 글은 마감합니다. 정리하는 의미로 최근 찍은 항공사진에 1899년 문을 연 마산개항장의 위치를 표시해 보았습니다. 노란색의 조계지를 포함한 도시전부가 당시에는 모두 논밭이었습니다. 그리고 일본인들이 탐욕스럽게 똬리를 틀었던 저 조계지가 근간이 되어 오늘날 마산도시의 골격이 형성되었습니다. 111년 동안 있었던 도시의 생성과 변환,,,,, 넓게 펼쳐진 저 도시가 노란색 조계지로부터 시작되었다고 생각하니 도시가 생명체임이 다시 한 번 실감납니다. 그렇다면 마산개항은 우리 정부가 자의적으로 했을까요? 아니면 열강의 강제에 의한 것일까요? 마산 개항의 성격은 아직 정확히 규명되지 않았습니다. 크게보면, 대한제국 정부에 의한 자의적인 개항이다. 아니다, 열강의 강요에 의한 강제적인 개항이다... 2010. 9. 27.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24) - 개항기 110년 전 마산포 해안 1900년 / 김경덕 / / / 매축청원서 첨부, 창원항안Ⅰ / 규장각 1900년에 마산포 해안을 매립하기 위해 김경덕이 정부에 제출한 매축청원서에 첨부되어 있는 지도입니다. (1907년 창원감리 이기(李琦)가 일본인 홍청삼(弘淸三)의 매립을 저지하기 위해 정부에 보낸 보고서에 첨부되어 있습니다) 지형만 알아 볼 수 있도록 붓으로 대략 그려놓은 지도이기 때문에 정확하지는 않지만 매립 전 마산포 선창과 굴강의 위치, 그리고 해안 주변의 길을 알 수 있습니다. 붉은 글씨는 당시 마산포 사람들이 사용했던 선창과 굴강의 명칭과 위치를 제가 표시한 것입니다. 이 지도에는 오산리․동성리․중성리․서성리로 기록된 당시의 리(里) 위치가 표시되어 있어서, 일제에 의한 행정구획 이전의 마산포 6개.. 2010. 9. 20.
250년 된 원마산(마산포) 골목길 「유장근 교수의 도시탐방대」 세 번째 참석 후의 글이다. 원마산(마산포)에 자연취락이 형성되면서 생긴 ‘길’에 대한 이야기다. 1760년, 마산창(馬山倉)이 설치된 후 마산이 도시 형태를 띠면서 도시공간의 성격도 형성되었다. 요즈음 말로 하자면 마산창 주변은 공공업무지구로, 현재 황금당 옆 골목길 주변은 상업지역으로, 동성동과 오동동 즉 코아양과점 뒤편 일대는 배후 주거지로 사용되었다. ‘·······사람이 다니면서 길이 생겼다’는 루쉰의 말처럼, 마산포에도 사람이 모이고 사람이 다니면서 ‘길’이 생겼다. 자연취락 특유의 좁고 꾸불꾸불한 ‘길’이었다. 지금도 생생히 남아있는 원마산의 좁은 골목길들은 멀게는 250년 가깝게는 200년이 족히 된 마산사람들의 ‘길’이다. 조선시대를 살았던 이곳 사람들이, 때.. 2009. 11. 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