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마산305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47) - 강점제3시기 1945년 / 미군정청 / / 1:25,000 / 옥한석 논문 / 허정도 이 지도를 최초로 공개한 옥한석 교수(강원대학교)에게 입수 경위를 직접 확인했더니 1980년경 미국에 체류할 때 미군정에 관여했던 민간인한테서 얻은 것이라고 했습니다.세밀한 지도는 아니지만 표기 상태는 아주 선명합니다. 1945년 해방 당시 마산에 이미 개설되어 있던 도로가 모두 표기되어 있으나 매립지 쪽의 세부 도로는 표기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부 내 각 정(町)의 위치는 표기되어 있습니다. 범례에 기존도로와 계획도로가 각각 실선과 점선으로 구별되어 표기되어 있으며 지도에도 이 두 도로가 표기되어 있습니다. 지난 1월 2일에 포스팅한 142회「馬山府全圖**」에 나와 있는 계획도로와 이 지도에 표시된 계획도로가 동일합니다. 미.. 2013. 2. 4.
못 먹고 사는 사람 구해줬더니 집 내놔라 한다? 통합창원시 청사위치 문제 때문에 지역 간 갈등이 고조되면서, 해서는 안 될 말들이 난무하고 있습니다. 심지어 옛 창원지역 출신 시의원 한 분은 '시청사는 마산과 진해 중에 가야 한다'는 주장에 대해 “못 먹고 사는 사람 구해줬더니 집 내놔라 한다”는 말까지 했다고 합니다. 마산시민을 두고한 말 같습니다. 그 분이 누군지는 몰라도, 공직자로서 해야 될 말과 해서는 안 될 말을 가리지 못하니 시민이 시의원을 걱정해야할 판입니다. 그렇습니다. 3년 전 통합여론조사 때 창원 진해 시민들에 비해 마산시민들이 통합을 많이 원했던 것 사실입니다. 도시의 미래를 확신하지 못했던 마산시민들이 도시통합을 돌파구로 생각했던 것 사실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못 먹고 사는 사람 구해줬다”는 생각 옳지 않습니다. 통준위 합의사항.. 2013. 1. 30.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46) - 강점제3시기 1937년 / 임시토지조사국 / 조선총독부 / 1:200,000 / 朝鮮二十萬分一圖 / 국립중앙도서관 1918년 임시토지조사국에서 편찬하고 제판한 지도로 1921년 발행되었다가 1928년 1차 수보(修補)한 후 1937년 2차 수보하여 발행된 지도입니다. 동래군․창원군․통영군․함안군․고성군․진주까지 남부 경남 일대를 알 수 있는 자료입니다. 마산부 내의 도시구조에 대해서는 전혀 알아 볼 수가 없지만 마산부에서 외부로 이어지는 도로는 상세히 표기되어 있습니다. 인쇄는 경성에 있는 조선인쇄주식회사에서 하였으며 일반인에게 판매를 하였는지 매당 30전이라고 적혀있습니다. 1940년대 초 / 마산부 / / 매립준공인가관계서류, 문서번호 87-3026 / 정부기록보존소 죽본웅차(竹本熊次)의 오동동 매립공사와 관련된.. 2013. 1. 28.
당신의 말이 듣고 싶습니다 어제와 그제, 지역 언론에는 통합창원시 청사위치에 대한 여론조사 결과가 머리기사를 장식했습니다. 이미 여러 경로를 통해 결과가 예고되었던 터라 보도 자체가 새롭지는 않았습니다. 시민다수가 신청사 건립을 원하지 않을 것이라는 여론조사 결과, 이미 예측되었던 일입니다. 여론조사결과를 두고 일부 언론과 SNS에서 통합정신 훼손, 비민주적 의사결정, 통합준비위원들을 향한 날선 비판 등 이런저런 주장들이 있습니다만 모두 쇠귀에 경 읽기인 것 같습니다. 통합 때문에 생긴 청사위치 여론조사결과를 보니 문득 지난 일들이 생각납니다. 3년 전 상황들 말입니다. 통합에 가장 앞장 선 분들은 당시 한나라당의 지역 국회의원, 시의원들이었습니다. 당시 병환 중이었던 진해시장을 뺀 두 시장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 과정에서 시의원.. 2013. 1. 23.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45) - 강점제3시기 1937 / / / 1 / 40,000 / / 김한근 당시의 도시상황을 비교적 상세하게 표기한 지도입니다. 건물이 들어선 지역을 검은 색 빗금으로 쳐놓아 도시화가 어느 정도까지 진행되었는지를 대략 가늠할 수 있습니다. 특히 이미 시행된 중앙마산의 도로 상황과 도시범역이 잘 드러나 있을 뿐아니라 추후 시행될 계획도로도 그려져 있습니다. 현 용마고(마산상고) 앞 일대 산호동 지역의 계획도로도 표기되어 있습니다. 도시의 중요시설 12개, 즉 상업학교(전 마산상고, 현 상남성당 자리), 마산도립병원, 지방법원지청, 세무서, 부청사 이전예정지, 장군교, 여학교(마산여고), 본원사 본파(현 경남아파트), 우편국, 시장(일본인 전용시장, 현 반월시장), 헌병대, 세관 등이 범례에 잘 표기되어 있습니다. 그런가하면 현.. 2013. 1. 21.
창원시청사, 여론조사로 결정할 일 아니다 통합창원시의 청사 위치를 시민 여론조사로 결정한다고 합니다. 엄청난 돈을 들여 시청사 위치 연구용역을 한다고 했을 때, 필요 없는 일 한다고 말이 많았는데 그 염려가 맞아 떨어졌습니다. 「창원시청사 여론조사로 결정」 어떻게 생각합니까? 창원 마산 진해의 인구 차이가 있지만 세 지역 똑 같이 각각 1,000명 씩 2개의 조사기관에서 여론을 묻는다니 아주 공정하다고 보십니까? 혹은 주민 주권 시대인데 주민들의 여론을 물어 시청사의 위치를 결정하니 진일보된 민주적 의사결정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그도 아니면, 결정권을 가진 시의회가 제 역할을 못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내린 창원시의 고뇌에 찬 결단이라고 보십니까? 제 생각입니다. 창원시 청사 위치, 이런 식의 여론조사로 결정하는 것 옳지 않습니다. 이유는 다음.. 2013. 1. 16.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44) - 강점제3시기 1937년 / 마산부 / 마산부 / / 觀光の馬山 / 우무석 所藏 지난 주 포스팅한 「마산***」과 함께 첨부된 지도로 역시 채색본입니다. 보다시피 이 지도에는 마산만에 진입하는 해로를 표시한 광역 지도가 추가로 함께 인쇄되어 있습니다. 일본(內地)으로 가는 해로을 비롯해 세 종류의 해로가 표시되어 있습니다. 지난 주의 「마산***」지도에서 처럼, 이 지도에 표기된 도로들도 계획도로까지 표기하고 있어서 이 지도를 통해 당시의 도로 사정을 정확히 알 수는 없습니다. 이 계획도로는 연재 142회에 포스팅한「馬山府全圖**」와 내용이 같은 것으로서 조선시가지계획령에 의한 마산의 도시계획도면을 그대로 옮긴 것으로 보입니다. 각종 시설들의 위치를 글로써 표기하고 있으며 범례를 두어 중요시설의 표시를 해 놓았는데 도.. 2013. 1. 14.
창원시 인구 150만 가능할까? 덕담 나누는 신년입니다만, 시간을 놓치면 문제가 더 커지겠다 싶어 포스팅합니다. 지난 연말 창원시청에서 2025도시기본계획 중간보고 성격의 간담회가 있었습니다. 균형발전협의회에 참여하고 있는 민간인 8-9명이 연구용역업체 전문가의 설명을 듣는 자리였습니다. 법적효력을 갖는 회의가 아닌 탓에 간단한 설명과 몇 마디 질의가 오간 느긋한 회의였습니다. 하지만 그날의 설명 속에는 정말 어이없는 내용이 들어 있었습니다. 무릇 한 도시의 기본계획은 장차 그 도시의 미래를 결정하는 방향타입니다. 기본계획의 성격과 방향에 따라 그 도시의 현재와 미래가 결정되기 때문입니다. 제가 ‘어이없다’라는 가혹한 언어를 사용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창원시2025도시기본계획의 예상인구추정 때문입니다. 이 계획서에는 현 110만 창원시.. 2013. 1. 9.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42) - 강점제3시기 1937년 / 마산부 / / 마산시구개정관계서류, 문서번호 1014 / 정부기록보존소 정부기록보존소에 소장되어 있는 지도입니다. 제작시기에 맞춰 아주 정확하게 표기된 지도로 보입니다. 조계지는 물론 신마산 전역에 이미 개통된 도로가 정확하게 표시되어 있으며 주요 시설들도 명기되어 있습니다. 원마산 역시 그 때까지 개설되었던 도로가 그려져 있고 당시 이미 준공되었던 신포동 매립이 완성된 것으로 표기되어 있는데 죽본조(竹本組)가 매립한 오동동 해안의 매립은 점선으로 표기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형태는 달랐습니다. 이 지도를 통해서 장군천까지 완전하게 도시를 이룬 신마산을 확인할 수 있으며 원마산 역시 교방천까지 도시의 범역이 확장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또한 1920년대부터 시작된 중앙마산의 조성도 진.. 2013. 1. 2.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41) - 강점제3시기 1936년 / / 朝鮮運送株式會社 / / 朝鮮港灣之事情 / 경남대학교 박물관 『朝鮮港灣之事情』이란 단행본에 수록되어 있는 지도인데 마산의 도로 정황을 비교적 소상히 알 수 있는 지도입니다. 신포동의 매립이 완료되어 ‘중앙매립지’라고 기록되어 있으며 후에 시행될 원마산의 죽본조 매립이 점선으로 표기되어 있습니다. 1920년대 후반에 시행된 중앙간선도로 서쪽 일대의 도로가 잘 표시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당시 마산 도시사정을 정확하게 나타낸 것으로 볼 수 있는 지도입니다. 조계지의 도로도 실제로 개통되어 있는 부분만 표시하였으며 중앙마산 고지대 중 이미 개통되었던 도로가 비교적 정확하게 표기되어 있습니다. 이 지도의 특이한 점은 중앙마산의 고지대 부분, 즉 진주가도의 상부로서 지금의 완월동과 자산동일부에 점선.. 2012. 12. 24.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40) - 강점제3시기 1936년 / / / / 진해만 요항부 검열제 도면철 / 정부기록보존소 앞(138회)의「馬山港平面圖*」와 동시에 작업한 도면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연대가 다른 만큼 지도의 내용은 차이가 많습니다. 이미 신포동의 대규모 매립이 완료되어 있고 제2부두와 제1부두가 표기되어 있습니다. 추정컨데 이 지도는 중앙부두 시공과 관련한 도면인 것으로 보입니다. 지방법원과 부청이 표기되어 있으며 아직 시구개정사업에 의한 도로는 표기되지 않은데 반해 강점 말기에 시행된 신마산 해안의 매립이 표기되어 있습니다. 시기적으로 보아 상호모순인 이 현상은 내륙의 도로 상황의 변경을 그때마다 수정하지 않았기 때문인 것으로 보입니다. 신마산해안의 매립공사는 도면의 선의 상태를 보아 현재 공사 중이거나 계획 중인 상태를 새로 선을 그은.. 2012. 12. 17.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39) - 강점제3시기 1932년 / 마산공립보통학교 / / / 鄕土の硏究 / 경남대학교 박물관 마산공립보통학교에서 필사본으로 당시 마산상황을 정리하여 간행한『향토의 연구(鄕土の硏究)』에 수록되어있는 지도입니다. 입체형식으로 그린 일종의 조감도인데 당시 마산의 도로가 잘 그려져 있습니다. 특히 일제기 마산 이야기 중 많이 등장하는 월포해수욕장의 위치가 정확하게 표기되어 있는 것이 이 지도의 자랑입니다. 월포해수욕장의 위치에 대해 이런 저런 주장이 많습니다만 이 지도를 보면 해수욕장의 위치가 신포동 매립지 쪽이 아니라 제2부두에서 중앙부두 쪽(현, 쌍용 시멘트 사일로 부근)에 있었다는 것을 정확히 확인할 수 있습니다. 두어 달 전, 제일여자고등학교 교장을 지내신 배두이 선생님에게서 월포해수욕장에 관한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2012. 12. 10.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38) - 강점제3시기 지난 시기와 마찬가지로 강점제3시기인 1931년부터 1945년까지 제작된 마산관련 지도를 해제하고 그 외 관련 자료를 토대로 마산 도시구조의 변화를 살펴보겠습니다. ----------------------------------------------------------------------------- 1931년 / 내무국토목과항만계 / 조선총독부 / 1:15,000 / 마산만매립서류 / 서울대중앙도서관 이 지도는 마산의 매립공사에 관한 도면으로, 마산시가지 전역이 비교적 상세히 표현되어 있습니다. 간행연도인 1931년 이전에 이미 매립이 끝난 부분을 ‘기성부분(旣成部分)’으로, 현재 시공 중인 부분을 ‘공사중(工事中)’으로 구분하여 각기 표현하고 있기 때문에 당시의 매립 상황을 잘 알 수 있습니다. 이.. 2012. 12. 3.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34) - 강점제3시기 마산은 술 생산량에서도 이름이 높았지만 더 유명했던 것은 마산 술의 품질입니다. 마산 술의 향과 맛은 타의 추종을 불허했습니다. 마산 술이 얼마나 유명했는지를 알만한 재미있는 이야기 하나 소개합니다. 식민지 시대, 일본에서 가장 유명한 술은 나다자케(灘酒, 탄주)였다고 합니다. 「나다자케(nadazake)」는 일본의 효고켄(兵庫縣)의 나다(灘)지방에서 나는 고급 청주를 말합니다. 지금도 생산되는 일본 고급 전통주입니다. 「나다자케」가 생산된 것이 1624년이라는 설도 있지만 실제 그 기원은 그로부터 훨씬 더 오래전인 14세기경이라고 합니다. 문헌에 의하면 무로마치(室町: 1338-1573)시대에 이미「僧坊の酒(승방의 술), 酒屋の酒(술집의 술)」이라고 불렸다고도 합니다. 가히 일본 최고의 술이었다고 볼 .. 2012. 11. 5.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33) - 강점제3시기 한 도시를 짧은 말 한마디로 규정 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각 도시는 그 도시의 특유한 자연조건과 문화조건 혹은 대표적인 생산품 등으로 그 도시의 이미지를 결정하기도 합니다. 목포하면 항구, 진해는 벚꽃 등과 같은 것들을 두고 하는 말니다. 이런 관점에서 일제강점기 마산을 말한다면「술과 꽃의 도시」였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마산지역의 역사에서 술과 관련된 기록이 등장하는 것은 꽤 오래 전의 일입니다. 마산지역을 찾은 관료나 시인들의 시를 보면 술과 관련된 작품이 적지 않습니다. 고려의 유명한 시인 정지상은 “푸른 물결 아득하고 돌이 우뚝한데……백년 풍류에 싯귀가 새롭고 만리 강산에 한잔 술을 드네”라고 하였습니다. 같은 시기의 또 다른 이는 “기이한 바위가 바닷가에 우뚝한데 모두들 유선.. 2012. 10. 29.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32) - 강점제3시기 마산 최초의 의료기관은 1904년 덕영오일(德永吾一)이 설립한 사립마산병원인데 1925년 도립마산의원으로 변경된 이후 1926년 신축하여 현재의 위치로 이전했습니다. 다음 사진입니다. 1941년 당시 마산의사회 회원은 12명이었습니다. 이 중 한국인이 운영하는 의원은 삼성의원․학산의원․순천의원과 창동의 동인의원․중앙의원․평안안과의원과 중성동의 대동의원 그리고 수산의원․삼광의원 등 9개의 의원이 있었습니다. 일본인 의사가 경영한 의원은 대곡(大谷)․전원(前原)․수상(水上)의원 등 3개소였습니다. 강점말기 마산의 치과의사는 한국인이 4명이었으며 일본인 치과도 이와 비슷했는데 한국인이 경영하는 치과에 환자가 많았다고 합니다. 강점 말기, 마산에도 방송국이 설립되었습니다. 조선방송협회에서 노비산에 자리잡고 있던.. 2012. 10. 22.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31) - 강점제3시기 1941년 간행된『약진마산의전모(躍進馬山の全貌)』와『마산개항백년사』에 게재된 내용에 의하면 1930년대 마산의 교육기관은 공립으로 마산공립중학교․마산공립상업학교․마산공립고등여학교가 있었습니다. 반면 사립으로는 창신․호신․의신학교․마산노동야학교 등이 있었으며 초등교육기관으로서 마산공립심상고등소학교․마산성호공립심상소학교․마산완월공립심상소학교가 있었습니다. 유아교육기관으로는 사립마산유치원과 사립대자유치원 등 몇 개의 시설이 있었으며 종교기관에서 사회교육차원에서 행한 교육시설도 있었습니다. 현 마산고등학교의 전신인 마산공립중학교는 1936년 개설하였으며 입학생의 대다수가 일본인이었습니다. 한국인 학생은 친일파 자제이거나 성적이 우수한 극소수의 학생만 입학할 수 있었습니다. 반면 마산상업고등학교를 거쳐 몇 년 전.. 2012. 10. 15.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30) - 강점제3시기 1938년, 전시체제를 총괄하는 기본골격 '국가총동원법'이 제정되어 조선 전역에 시행되었습니다. 이 법으로 일제는 한반도의 사람과 물자 모든 것을 마음대로 유린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 땅의 백성들은 말 그대로 아비규환에 빠졌습니다. 쌀의 자유로운 시장거래를 완전히 중지하고 공출제란 이름으로 빼앗은 후 배급하였으며, 태평양전쟁 말기에는 각 가정에서 사용하고 있는 금속식기류까지 공출이란 명목으로 탈취해 갔습니다. 세숫대야 솥 등 가정집에서 갈취한 금속류를 만족한 듯 바라보고 있는 일제관료들입니다. 이런 과정에서 마산항에는 공출이라는 이름으로 수탈한 쌀가마니가 쌓였고 이 쌀들은 일본으로 건너갔습니다. 아래 사진은 미곡공출을 강요하는 전단지입니다. "한 알의 쌀이라도 더 많이 나라에 바쳐서 귀축미영을 때려부.. 2012. 10. 8.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28) - 강점제3시기 『마산상공회의소 백년사』에는 1939년 현재 마산에서 활동한 개인 영업자에 대한 기록이 있습니다. 제조업과 운수업 등은 제외한 통계입니다. 이들 개인영업자 중 한국인 상인들은 주로 원마산 중심상가와 부림동 시장 및 남성동 해안 일대에서 곡물, 면사포 등의 포목류, 해산물, 식료품, 고무신 등 생활필수품을 많이 취급했고 대금업도 있었습니다. 이에 비해 일본 상인들은 주로 건축자재, 철물, 과장, 서적과 문방구, 가구, 의복, 술과 고기, 연료, 선구(船具) 등을 판매했고 대금업도 10여명 정도 되었고 토건청부업도 있었습니다. 자료에 나타난 개인영업자의 숫자는 232명이며 영업장의 위치까지 정확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기록을 이용해 232개의 영업장을 원마산․신마산․중앙마산으로 나누고 다시 각 동별로 나.. 2012. 9. 24.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26) - 강점제3시기 강점 제3기 마산의 산업 중 상업부분을 살펴보겠습니다. 우선 시장입니다. 마산의 시장은 1924년 개설한 원마산의 부림동공설시장과 1923년 신마산에 개설된 반월동공설시장 외에 구마산 어시장․신마산 어시장․우시장․신마산청과시장이 있었습니다. 다음 사진은 1937년경 부림시장 전경입니다. 그리고 1930년대 들어서 마산해산주식회사(1940년)와 부림동(富町) 부영(府營)청과시장(1941년)이 전 강남극장 앞에 개설되었습니다. 1931년 경상남도가 펴낸 통계연보에 의하면, 당시 마산에서 법인으로 등록된 회사는 주식회사 20개와 합자회사 5개로 총 25개가 있었는데 그 중 한국인이 소유한 회사는 8개였습니다. 1940년에는 법인조직으로서 마산에 본사를 갖고 있던 기업체는 주식회사 21개사․합명회사 2개사․합자.. 2012. 9. 10.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25) - 강점제3시기 1904년에 한목단(寒牧丹)이라는 상표를 가졌던 아즈마(東)주조장을 시작으로 마산에는 일찌감치 양조산업이 들어왔습니다. 한목단(寒牧丹)이라는 상표를 가졌던 아즈마주조장은 나중에 원전(原田)주조장으로 회사명을 바꿨는데 현 경남대 정문 앞, 옛 일성펌프 자리에 있었습니다. 아래 사진 1930년대 중반의 원전(原田)주조장입니다. 성장에 성장을 거듭한 마산양조산업은 1928년 그 생산량이 11,000석으로 늘어 10,000여석을 생산한 부산업계를 제치고 드디어 국내 지역별 술 생산량에서 제1위를 차지했습니다. 마산청주업계의 호황은 이후에도 계속되면서 생산량이 해마다 증가하여 국내뿐만 아니라 만주와 중국에 까지 그 이름을 떨쳤고, 1938년에는 양조량이 20,000석을 넘었습니다. 마산의 청주업자 조합에서 현 제.. 2012. 9. 3.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24) - 강점제3시기 무역량을 일일이 열거하는 것은 별의미가 없는 것 같아 빼다보니 글이 짧습니다. 1931년 만주사변 후 일제가 중국대륙으로 진출하면서 병참기지 기능을 맡았던 한국의 역할은 마산의 무역량을 늘이는데 직접적인 영향을 미쳤습니다. 1930년대 마산항의 무역은 그 구조상 1920년대와 별 차이가 없이 수․이입에 비해 수․이출의 금액이 훨씬 많았습니다. 전체금액은 1930년의 730만 엔에서 1939년에는 1,770만 엔으로 두 배 이상 증가하였습니다. 하지만 1930년대 이후 마산항의 무역 증대는 정상적인 무역이라기보다는 일본의 침략전쟁 수행에 필요한 제반물자의 반․출입 증가에 지나지 않았던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일제하 마산항의 수․이출, 특히 미곡의 일본 반출량 증가는 우리나라 국민들에게 굶주림을 강요한 결.. 2012. 8. 27.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23) - 강점제3시기 강점 제3시기에는 마산의 인구도 많이 변했습니다. 1930년에 25,810명이던 것이 1941년에는 41,546명이 됨으로써 증가율이 161%에 이르렀습니다. 그 중 한국인이 20,149명에서 35,670명 177%가 늘어난 데 비해 일본인은 5,559명에서 5,865명 105.5%로 변화가 심하지 않았습니다. 일본인을 제외한 기타의 외국인은 102명에서 11명 10.8%로 심하게 줄어들었습니다. 다음사진은 1930년대 한국인들이 다녔던 마산공립보통학교(현, 성호초등학교)와 일본인들이 다녔던 마산공립심상고등소학교(현, 월영초등학교)입니다. 1930년 이후부터 해방 때까지의 인구 변화는 다음 표와 같습니다. (1944년의 54,000명은『통계연보』를 인용한 표를 이용했는데 천 단위 이하는 삭제되어 있었으며.. 2012. 8. 20.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22) - 강점제3시기 일제가 「조선시가지계획령」에 의해 고시 제556호로 발포한 마산의 시가지 계획은 구역면적 43,287,000㎡, 계획인구 80,000명, 목표연도는 1961년까지, 내용은 가로개설 및 구획정리였습니다. 계획인구 8만명, 목표연도 1961년이라는 일제의 계획을 보니 어떻습니까? 이 고시가 발포된 시기는 1941년 4월 19일이었습니다. 발포시기와 달리 마산은 1936년과 1938년에 가로(街路)축조공사를 이미 시행하였는데 이 공사도 「조선시가지계획령」에 의한 것이었다고 추정됩니다. 도시사학자 손정목(사진)은 「조선시가지계획령」 분석을 통해 원마산 지역은 1920년대에 총독부의 재정 지원으로 실시한 시구개정의 결과를 그대로 받아들인 반면, 신마산 지역은 시구개정을 하지 않았지만 개항장을 조성할 때 비교적 도.. 2012. 8. 13.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21) - 강점제3시기 마산은 1920년대부터 시작된 산업구조 변화가 계속되는 가운데 30년대에 이르러 전쟁으로 인한 군수물품 공급창으로서의 기능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조건들이 원인이 되어 해안 전역에 걸쳐 대규모 매립 사업이 본격적으로 시행되었습니다. 그런가하면 1920년대 중반부터 형성되기 시작한 중앙마산이 완성됨으로써 이전까지 공간적으로 나누어져 있던 두 도시가 하나의 도시로 연담화되었으며, 원마산은 철도의 발달과 인구의 증가로 범역이 크게 확산되었습니다. 우리나라 최초의 도시계획법은 1934년 6월 20일자로 만들어진「조선시가지계획령」입니다. 이보다 앞서 1920년에 시가지계획령을 입안한 일이 있으나 시기상조란 이유로 폐기되어 버렸습니다. 도시계획과 관련한 법제 중 가장 이른 것은 한일병합(1910) 이전에.. 2012. 8. 6.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20) - 강점제3시기 오늘부터는 1930년부터 1945까지 15년간을 올리겠습니다. '일제강점 제3시기'로 분류되는 이 시기의 마산은 어떤 모습이었으며 어떤 변화를 겪었을까요? 이 시기는 일제가 대륙침략의 야욕을 드러낸 1931년 만주사변으로부터 일제가 패망한 1945년까지로 전쟁수행을 위해 한국을 병참기지화한 시기입니다. 1929년 10월 미국에서 발발한 경제공황은 자본주의 세계 전반에 파급된 대공황이었습니다. 대미무역에 상당히 의존하고 있던 일본 경제도 여기에 휩쓸리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공업생산이 위축되고 임금체불 노동자의 대량 해고로 노사 간의 갈등과 대립이 격화되었고, 그 여파가 농촌에까지 이어져 몰락하는 농가가 속출했습니다. 대내외적으로 심각한 위기에 직면한 일본자본주의는 이러한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 1931년 .. 2012. 7. 30.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19) - 강점제2시기 85회부터 시작된 1920년대 마산도시변화에 대한 마지막 포스팅입니다. 일제강점 제2시기인 1920년대는 한국이 일제의 상품시장 및 원료공급지, 특히 식량공급지로 산업구조가 재편되었던 산업수탈기였습니다. 정치적으로는 기만적인 소위 문화정치가 표방되었으며 경제적으로는 산미증식계획이 강행되었고 회사령이 철폐되었습니다. 1920년대의 마산인구는 1920년에 16,165명이었던 것이 시간이 흐르면서 인구성장의 폭이 조금씩 많아져 1930년에는 25,810명이 되었습니다. 일본인은 1920년 당시 4,172명이던 것이 1930년에는 5,559명이 되어 1920년에 비해 133.2%로 늘어났지만 한국인들은 같은 시기에 169.0%로서 일본인의 증가율에 비해 약간 높았습니다. 조선회사령 폐지로 마산의 민족자본가들도 .. 2012. 7. 23.
조선총독부가 대한민국정부의 전신? 창원시가 추진하고 있는 마산임항선 철도부지의 푸른 길 가꾸기 사업에 문제가 생겼습니다. 철도부지를 관리하는 한국철도시설관리공단에서 창원시더러 임항선 부지를 사용하려면 400억에 매입하라했기 때문입니다. 임대할 경우에는 연간 4억 정도가 필요하지만 장기임대는 곤란하며, 현행 법률상 다른 방법은 없다고 합니다. 한국철도시설관리공단은 국유지인 철도부지를 관리하는 공공기관이기 때문에 매입요구 주체는 사실상 정부라고 보아야 합니다. 이 글은 정부의 이런 입장에 대한 질문입니다. 제국주의 국가가 식민지에 부설하는 철도는 식민지의 방대한 토지와 물자 그리고 노동력수탈을 전제로 합니다. 20세기 벽두에 시작된 일제의 한반도 철도공사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일제는 철도건설을 이유로 조상 대대로 지켜온 한국인의 논과 밭을 무.. 2012. 7. 18.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18) - 강점제2시기 1920년대 초 마산 전경 사진 몇장 소개합니다. 도시의 형태는 지금과 완전히 다릅니다만 자연은 그대롭니다. 첫번째 것은 산복도로 쯤에서 파노라마로 찍은 신마산 일대 사진입니다. 오늘 쪽 끝부분의 노란 점이 당시 마산부청, 지금의 경남대학교 평생교육원(옛, 창원군청)입니다. 멀리 돝섬과 오른 쪽 이시미곶(MBC송신소 자리)가 선명하게 보입니다. 다음은 신마산 쪽에서 마산포(원마산) 쪽을 바라보며 촬영한 사진입니다. 붉은 점이 3.15의거탑 쯤이고 노란 점이 지금 봉암다리가 있는 곳입니다. 매립되기 전이라 3.15의거탑 바로 앞까지가 바다였음을 잘 알 수 있습니다. 신월동 뒤쪽에서 신마산 일대를 찍은 사진입니다. 일본 사람들이 살았던 곳이라 집들이 제법 반듯합니다. 위 사진 확대본입니다. 2012. 7. 16.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17) - 강점제2시기 오늘은 1920년대 초에 마산의 사진 몇 장을 소개합니다. 엽서에 소개된 사진입니다. 우선 이 엽서들이 들어 있었던 봉투를 보겠습니다. 반도의 낙토, 마산명소 그림엽서, 동경당 발행(半島の樂土 馬山名所繪葉書, 東京堂發行)이라고 적혀있고, 벗나무와 마산만과 마산 전경이 그려져있습니다. 다음은 마산역이 있었던 역전광장 사진입니다. 광장 제일 안쪽에 있는 단층 건물이 역 청사인데, 중부경찰서 앞에 있는 지금의 벽산 블루밍 아파트 자리입니다. 오른쪽 건물은 우체국입니다. 건물은 다시 지었지만 지금도 저 자리에는 합포우체국이 있습니다. 다음은 마산신사입니다. 제일여자고등학교 부지 내에 있었는데, 마산공원 안에 있었기 때문에 ‘마산공원 마산신사’라고 적어 놓았습니다. 건물은 사라진지 오랩니다만, 제일여고 교정에는 .. 2012. 7. 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