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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간과 건축의 궤적 - 창원 성산구 대원동 '꿈에그린' 재건축 터의 역사 - 8 1. 시작하는 글 2. 주거의 변화(대원2구역에 아파트가 들어서기까지) 3. 공간의 변화와 대원2구역 아파트 - 4 1) 전면 폭 2) BAY 수 3) 실 구성 가. 공실(거실 Living, 식사실 Dining, 부엌 Kitchen) 변화 나. 침실 침실 수의 변화는 면적에 따라 결정적으로 달라진다. 전용면적 60㎡의 경우, 1995년경까지는 침실 수가 2개인 경우와 3개인 경우가 비슷한 비율로 계획되었지만 그 이후부터는 대부분 3개의 침실로 바뀌었다. 이는 주거동 형식이 편복도형에서 계단형으로 변화하여 침실 3개를 넣기에 용이하도록 된 것과 관계가 있다. 85㎡규모의 경우는 시기와 주거동 형식에 상관없이 대부분 3개의 침실도 설계되었다. 침실의 면적은 공실면적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전용면적 60㎡에서.. 2019. 1. 14.
공간과 건축의 궤적 - 창원 성산구 대원동 '꿈에그린' 재건축 터의 역사 - 7 1. 시작하는 글 2. 주거의 변화(대원2구역에 아파트가 들어서기까지) 3. 공간의 변화와 대원2구역 아파트 - 3 2) BAY 수 대규모 단위주거가 아니라면 BAY 수가 크게 변하지는 않는다. 대원2지역이 건축되었던 1980년경에 지어진 60㎡는 전부 2BAY였고 85㎡규모의 계단실형 아파트도 대부분 2BAY였다. 최근은 두 규모 모두 3BAY, 심지어 4BAY까지 출현하였다. 여기서 말하는 BAY 수는 채광이 양호한 쪽의 실 개수를 말한다. 대원2구역 아파트의 BAY 수는 모두 2BAY이고 북쪽은 3BAY이지만 ②새경남아파트와 ⑥세플러코리아사원아파트, ⑦경남아파트는 남북 두 쪽 모두 2BAY로 구성되어 있다. 다만 ⑤동양상가아파트의 경우 주방과 거실 및 작은 방으로 구성된 3BAY이고 북쪽이 큰 방 .. 2019. 1. 7.
공간과 건축의 궤적 - 창원 성산구 대원동 '꿈에그린' 재건축 터의 역사 - 6 1. 시작하는 글 2. 주거의 변화(대원2구역에 아파트가 들어서기까지) 3. 공간의 변화와 대원2구역 아파트 - 2 우리나라의 경우 초기에는 다양한 형태의 단위주거 조합방식이 나타났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편복도형식과 계단실형식으로 양분되어 정착하였다. 박노학의 「국민주택규모 아파트의 단위주거 평면계획 변화특성에 관한 연구」에 따르면 1970년대 이전까지만 해도 편복도형은 아파트 주거동 형식의 대다수를 차지했지만 1980년대 이후부터 85㎡규모 중심으로 계단실형이 본격적으로 나타나기 시작하여 1990년대부터는 그 변화가 두드러졌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이 시기부터 엘리베이터를 비롯한 설비가 보편화되었고 무엇보다 땅값과 건축비가 급등하면서 경제적인 측면에서 엘리베이터 설치비가 차지하는 비중이 낮아졌고 거주자.. 2018. 12. 31.
공간과 건축의 궤적 - 창원 성산구 대원동 '꿈에그린' 재건축 터의 역사 - 5 1. 시작하는 글 2. 주거의 변화(대원2구역에 아파트가 들어서기까지) 3. 공간의 변화와 대원2구역 아파트 - 1 아파트의 기원은 산업혁명 이후 도시로 집중하는 노동자들의 숙소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집단주거로 거슬러 올라간다. 18세기 후반 시작된 도시로의 인구집중과 그에 따른 주택난이 토지의 입체적 이용, 즉 공동주거 형태로 나타난 것이 아파트였다. 형식은 집단주거였지만 이념적으로는 19세기 서구사회에서 꿈꾸었던 ‘유토피아적 공동체’라는 이상주의의 산물이었다. 우리나라 최초의 아파트는 1950년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하지만 당시의 아파트는 전쟁 때 가족과 함께 들어온 주한미군을 위한 것이거나 그 외의 것은 극히 소규모였다. 따라서 국내 최초의 아파트는 일반적으로 60년대 초에 건설된 위 그림의 서울 마.. 2018. 12. 24.
공간과 건축의 궤적 - 창원 성산구 대원동 '꿈에그린' 재건축 터의 역사 - 4 1. 시작하는 글 2. 주거의 변화(대원2구역에 아파트가 들어서기까지) - 3 앞에서 본 것처럼 창원신도시의 계획과정에서 제시되었던 원칙들은 어디 내어놔도 손색이 없을 만큼 훌륭한 내용들이다. 이러한 최초의 의도는 건설과정에서 제대로 반영되지 못했고 건설 후 관리과정에서 더 손상되었다. 정치적 경제적 상황에 따라 백년대계가 되어야할 도시정책이 갈지(之)자 걸음을 걸은 탓이다. 대원2구역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민간대자본 투입이 용이치 못해 단지를 소규모로 나눈 것이 대원2구역의 가장 큰 문제였다. 소규모로 분절된 부지로서는 도시계획에서 내세웠던 아파트 단지 계획의 여섯 가지 원칙을 수용할 수 없었던 것이다. 창원공단 조성 2년이 경과한 1976년 말에는 공단에 58개 업체가 입주하였고 그중 18개 업체가 .. 2018. 12. 17.
공간과 건축의 궤적 - 창원 성산구 대원동 '꿈에그린' 재건축 터의 역사 - 3 1. 시작하는 글 2. 주거의 변화(대원2구역에 아파트가 들어서기까지) - 2 창원 신도시에 주거용 건물이 본격적으로 건설된 시기는 1980년대였다. 대부분 단독주택으로 민간사업자들이 주도한 조적조 2층의 철근콘크리트 구조였으며 한층 혹은 심지어 한층 반 씩 세를 놓을 수 있는 평면구조가 대부분이었다. 임대와 매매를 염두에 두고 지었기 때문에 공간구조나 외형에서 차별성이 보이지 않았다. 아파트 역시 초기에 공공주택으로 건설한 반송동 주공아파트를 비롯하여 대기업이 참여해 지은 평범한 것들이었다. 이는 창원만의 문제가 아니라 주택이 대량으로 보급되기 시작한 한국사회 전체의 일반적인 상황이었다. 1976년 9월 1일 마산시가 설치한 창원지구출장소는 1977년 인구 30만 수용(1986년 기준)의 창원 신도시 .. 2018. 12. 10.
공간과 건축의 궤적 - 창원 성산구 대원동 '꿈에그린' 재건축 터의 역사 - 2 1. 시작하는 글 2. 주거의 변화(대원2구역에 아파트가 들어서기까지) - 1 수혈주거로 시작된 인간의 거주양식이 드디어 아파트라는 형식에까지 도달했다. 생활에 필요한 내외조건의 변화에 따라 인간은 달라졌고 인간의 삶을 담았던 주거시설의 형식도 변했다. 변화의 가장 큰 요인은 자연조건과 생산의 수단 및 관계 변화였지만 때로는 정치 사회의 변화가 요인이 되기도 했다. 우리나라의 주거형식이 가장 비약적으로 변한 시기는 소위 근대적 건축술이 등장한 개항기와 일제강점기였다. 1876년 강화도조약으로 시작된 개항은 외국의 여러 문물을 직접 유입되는 계기가 되었고, 이에 따라 일본과 서구의 건축술도 들어왔다. 개항장에 건설된 일본인 주택들은 당연히 일본 자본에 의해 일본인의 설계와 시공으로 시행되었다. 대부분이 상.. 2018. 12. 3.
공간과 건축의 궤적 - 창원 성산구 대원동 '꿈에그린' 재건축 터의 역사 - 1 목차 1. 시작하는 글 2. 주거의 변화(대원2구역에 아파트가 들어서기까지) 3. 공간의 변화와 대원2구역 아파트 4. 외관의 변화와 대원2구역 아파트 5. 마치는 글 1. 시작하는 글 1972년 10월 17일 유신헌법 체제로 시작된 제4공화국은 공업입국을 위한 기계공업의 요람지로서 1970년대 중반부터 창원공업단지(이하 창원공단)를 개발하였다. 창원공단은 국제적인 규모의 기계류 공장을 집단화함으로써 기술집약적 발전을 도모하는 한편, 관련 기계류 공장의 전문화와 계열화로 투자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한 기계공업단지이다. 당시 마산시에서 동북쪽으로 14km 떨어진 창원지역을 기계공업단지로 결정한 요인은 다음과 같다. ① 포항·울산·구미·부산·마산 등 다핵적 공업벨트의 중앙에 위치하고 있다. ② 남해고속도로 및 .. 2018. 11. 26.
얼음장수의 뜨거웠던 하루 : 3.15의거 한 참여자에 관한 미시사적 분석 - 8 Ⅳ. 맺음말 이 글에서 우리는 1960년 3월 15일 마산에서 일어난 1차 시위에 참가한 하상칠이라는 특정 개인의 경험에서 도출된 다음 두 가지 의문에 답하고자 노력했다. 하나는 시위 참가 동기에 관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오랜 침묵의 이유에 관한 것이다. 첫 번째 의문과 관련해 사회적 요인을 바탕으로 개인적 요인들에 천착함으로써 개인에게 체화된 사회적 정의감을 확인했다. 두 번째 의문에 답하는 과정에서 우리 사회에서 국가가 개인에게 가한 보복 공포증과 빨갱이 트라우마가 얼마나 강력한 것인지 구체적인 사례를 볼 수 있었다. 하상칠의 증언은 3․15의거 당일 시청과 무학국교 앞에서 벌어졌던 야간시위의 전개과정을 좀 더 구체적이고 생생하게 알 수 있게 해준다. 그래서 향후 4월혁명 공로자 신청이 추가 시행된.. 2018. 11. 19.
얼음장수의 뜨거웠던 하루 : 3.15의거 한 참여자에 관한 미시사적 분석 - 7 1. 그는 왜 시위에 직접 참가했던가 2. 그는 왜 그토록 오랫동안 침묵했던 것일까 1) 보복 공포와 빨갱이 트라우마 2) 증언 결심 동기 하상칠은 그동안 증언을 하지 않았던 이유에 대해 “그날 밤 내 혼자만 싸웠던 것도 아니고 마산시민 모두가 앞장서 싸웠기에 자기 혼자만이 영웅취급을 받는다거나 어떤 보상을 생각한다면 참으로 부끄러운 일”(증언록, 478쪽)이라고 말했다. 그는 필자에게 “들켜서 보복 당하거나 빨갱이로 몰려 패가망신하지 않은 것만 해도 다행”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한 적도 있다. 그러나 50년이 지나는 동안 그가 증언할 마음을 먹었을 수도 있는 계기들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이에 대해 그가 구체적으로 밝힌 적은 없지만 우리는 다음과 같이 그 이유를 짐작해본다. 먼저, 이승만 정권이 무너진 이.. 2018. 11. 12.
얼음장수의 뜨거웠던 하루 : 3.15의거 한 참여자에 관한 미시사적 분석 - 6 1. 그는 왜 시위에 직접 참가했던가 2. 그는 왜 그토록 오랫동안 침묵했던 것일까 하상칠의 증언에서 품게 되는 두 번째 의문은 그는 왜 그토록 오랫동안 시위 참가 사실을 비밀로 유지해왔는지 그리고 50년이나 지난 시점에서 증언을 하고 공로자 심사 신청을 하기로 맘먹게 되었는가라는 것이다. 먼저 철저한 비밀 유지의 이유를 살펴본 후 증언 결심의 동기를 알아보자. 1) 보복 공포와 빨갱이 트라우마 하상칠이 3․15의거 당일 시위에 참가한 이후 무려 50년 동안 침묵해왔다는 사실을 설명해줄 수 있는 거의 유일한 동기는 ‘공포’라는 감정과 ‘빨갱이’ 트라우마라 할 수 있다. 이것들은 개인의 성격보다는 객관적이고 사회적인 요인에 기인하는 것이지만, 하상칠의 사례는 이것들이 개인의 의식에 어떻게 각인되었는가를 알.. 2018. 11. 5.
얼음장수의 뜨거웠던 하루 : 3.15의거 한 참여자에 관한 미시사적 분석 - 5 1. 그는 왜 시위에 직접 참가했던가 1) 사회적 요인 2) 개인적 요인 동일한 사회적 요인이 주어져 있다 해도 모든 시민이 동일한 반응을 하는 것은 아니다. 저항심이 강하든 정의감이 투철하든 또는 사회적 불만이 가득하든 모두가 위험한 시위에 가담하지는 않는다. 그 이유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진지한 대답이 주어진 적이 없는 까닭은 참가자 개개인에 관한 탐구가 없었기 때문이다. 이 글은 최초로 “왜 하상칠인가”라는 질문에 답하려는 시도이기도 하다. 하상칠의 경우 가장 궁금한 것은 3․15의거 당시 세 명의 자식을 가진 35세의 가장이었고 잘 나가는 얼음 판매업자였던 그가 왜 그토록 위험한, 잘못하면 목숨을 잃거나 잡혀서 거의 병신이 되거나 아니면 빨갱이로 몰려 사회적으로 매장될 수도 있는 상황 속으로 스스.. 2018. 10. 29.
얼음장수의 뜨거웠던 하루 : 3.15의거 한 참여자에 관한 미시사적 분석 - 4 Ⅲ. 얼음장수의 미스터리 3․15의거 역시 한국의 민주화 과정에서 일어났던 다른 대규모 시민항쟁과 마찬가지로 수많은 분석의 대상이 되었다. 그러나 기존 분석은 대부분 거시 사회사 분석으로서 항쟁 참가자들의 정의감이나 불만이 저항적 행동으로 표출되도록 만든 사회적 요인이 무엇이었던가를 규명하는 데 치중해왔다. 따라서 3․15의거의 경우 “왜 하필 마산인가”라는 의문을 해명하는 데 집중되었다. 그런데 특정 개인의 항쟁 참가, 예컨대 “왜 하상칠인가”라는 의문에 답하려면 이러한 사회적 요인보다 개인적 요인이 더 중요하다. 사회적 요인이 모든 참가자에게 해당되는 공통 요인이라면, 개인적 요인은 특정 개인에게만 해당되는 개별적인 특수 요인이다. 양자를 동시에 살펴보는 것은 3․15의거를 좀 더 복합적이고 심층적으.. 2018. 10. 22.
얼음장수의 뜨거웠던 하루 : 3.15의거 한 참여자에 관한 미시사적 분석 - 3 Ⅱ. 얼음장수의 정체, 증언 및 평가 2. 녹취와 증언록 다음은 하상칠이 2010년 7월 21일 14시 3 15의거기념사업회 회의실에서 당시 백한기 회장 앞에서 2시간여에 걸쳐 진술한 증언 녹취록을 풀어 그해 말 동 사업회에서 발간한 『3 15의거 증언록』(474~478쪽)에 실린 것을 그대로 전재한 것이다. 부정선거 개표를 막기 위해 시청 앞에서 싸워 하상칠(당시 35세, 녹취/2010년 10월 7일) 나는 1960년 3월 15일 자유당이 장기집권을 꾀하기 위해 부정선거를 자행하자이에 항의하기 위해 오수 6시경 부정선거 개표가 진행되고 있는 마산시청으로 가는 중이었다. 내가 가는 길에 오동동빠가 있었고, 조금 앞서 거기에서 당시 도의원이며 민주당 마산시당 위원장인 정남규 씨를 경찰이 체포해 가는 광경을.. 2018. 10. 15.
얼음장수의 뜨거웠던 하루 : 3.15의거 한 참여자에 관한 미시사적 분석 - 2 Ⅱ. 얼음장수의 정체, 증언 및 평가 1. 연구 대상자 프로필 (이 부분은 연구 대상자가 필자의 장인이어서 평소 필자가 그에게 들어서 알고 있는 사항과 그의 사망 후 필자가 이 글을 쓰기로 마음먹은 후 그의 가족, 일가, 지인 등에게서 탐문해 얻은 정보를 바탕으로 쓰였음을 밝혀둔다. 정식으로 준비된 인터뷰가 아니어서 각 탐문이 있었던 시간과 장소를 적시하지 못한 것은 필자의 잘못이다.) 1) 성장 과정 하상칠은 1926년 5월 2일 경상남도 산청군 시천면 덕산리(지리산 동남쪽 기슭에 위치)에서 부친 하원수와 모친 김령 김씨 사이에서 9남매(8남 1녀) 중 7남으로 출생했다. 당시 조선의 대다수 민중들과 마찬가지로 극빈의 가정형편에 갖은 고생을 하며 자랐고, 초등학교도 다니지 못했다. 언제인지는 명확히 알.. 2018. 10. 8.
얼음장수의 뜨거웠던 하루 : 3.15의거 한 참여자에 관한 미시사적 분석 - 1 이 글은 1960년 3․15의거 당일 야간 시위에 주도적으로 참가했던 한 개인의 증언을 바탕으로 그의 개인사를 하나의 창으로 삼아 역사적 사건을 재조명한 경남대학교 경제금융학과 서익진 교수의 논문이다. 연구는 사적 기록이나 증언 등 이른바 비 사료들을 활용해 가능성의 역사를 최대한 기술하고자 하는 미시사 방법론을 원용했다. 또한 연구 대상자의 프로필과 증언을 제시한 후 증언에 내포된 역사적 가치를 평가했다. 논문의 대상이 된 이(하상칠)의 증언은 당일 시청 앞 야간시위의 주요 사건들에 관한 새로운 정보를 제공한다는 점에서 역사적 가치가 크고 결과적으로 도시사적 가치도 크다. 이 논문은 『인문논총』 제46집(2018. 6)에 게재되었다. Ⅰ. 머리말 Ⅱ. 얼음장수의 정체, 증언 및 평가 1. 연구 대상자 .. 2018. 10. 1.
걸작 - 이집트 룩소르 구르나 마을 - 4 구르나 마을이야기 - 2 《극장》 극장은 아름다운 내부공간과 무대를 가지고 있었다. 햇빛을 가리기 위해 담쟁이가 덥혀있었다는 객석 회랑 목조 파고라 위의 담쟁이는 이미 찾아볼 수 없었지만 흙으로 빚어진 구조물은 모두 원형대로 보존되어 있었다. 하싼 화티는 이 극장을 일러 그리스식과 엘리자베드시대풍의 중간 정도라고 했다. 극장은 지붕이 없는 사다리꼴의 공간이었는데 가장 긴 쪽에 무대가 있고 나머지 삼면에 관객을 위한 계단식 좌석이 있으며 원형무대가 있었던 중앙부는 별 표식 없이 텅 비어 있었다. 무대는 단순한 형태의 1m 높이에 폭 10여m 크기로 돌로 만들어졌으며 천정이 열려있었다. 무대에는 고정된 두 개의 장식이 있는데 관객 쪽에서 볼 때 왼쪽의 계단은 길을 나타내며 오른쪽의 시설물은 내부 또는 정원을.. 2018. 9. 24.
걸작 - 이집트 룩소르 구르나 마을 - 3 구르나 마을 이야기 - 1 일행이 나일강변에 자리한 경관 좋은 호텔에서 휴식을 취하던 오후. 안내자와 함께 조그만 배를 타고 나일강을 건너 구르나 마을로 향했다. 구르나 마을을 찾을 수 있었던 것은 현지 안내자 덕분이었다. 그는 내가 제시한 구르나 마을의 전경 사진을 보자 자신이 그 마을을 잘 알고 있다고 했다. 마을 입구에는 ‘Hassan Fathy Culture Place’라는 입간판이 서있었지만 그 앞을 지나는 관광객들의 눈길을 끌지는 못했다. 마을 중심에 자리 잡고 있는 회교사원 앞에 이르자 관리자로 보이는 한 사내가 나왔다. 키가 컸으며 순한 얼굴의 소유자였다. 그는 자신이 건물을 안내하겠다고 하면서 선뜻 앞서서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오래 동안 흠모 했던 대 건축가의 작품을 직접 보고 만진다는.. 2018. 9. 17.
걸작 - 이집트 룩소르 구르나 마을 - 2 위대한 건축가 하싼 화티(Hassan Fathy) - 2 하싼 화티가 구르나 마을을 건설할 1940년대 중반, 그 당시 영국의 식민 지배를 받고 있던 이집트는 서양식 건축이 판을 치고 전통적인 이집트 양식의 건물들은 사라져가고 있었다. 이들 서양식 건축은 이집트에서 흔한 흙 대신에 시멘트를 사용하였다. 때문에 대부분의 사람들이 비싼 건축비를 감당 할 수 없었고, 서양식 공사를 할 수 있는 숙련공도 모자랐다. 콘크리트 건물은 단열성이 낮아 이집트의 기후조건에 전혀 맞지 않았지만 사람들은 그쪽으로만 몰렸다. 이러한 상황에서 하싼 화티가 이집트의 가난한 사람을 위해 도전장을 냈다. 그는 햇볕에 말린 진흙 벽돌과 나무, 갈대 등을 사용하여 직접 하나의 마을을 건설하고 세계와 이집트인들에게 자신의 주장을 증명해 .. 2018. 9. 10.
걸작 - 이집트 룩소르 구르나 마을 - 1 위대한 건축가 하싼 화티(Hassan Fathy) - 1 (이 글은 이집트 여행 중 우연히 만났던 하싼 화티의 구르나 마을 경험담이다. 오래 전 일이다. 지금 생각해도 그 우연은 내게 축복이었다. 울렁이는 감격으로 구르나를 둘러본 그 날의 감격은 지금도 잊을 수 없다.) 이집트 룩소 지방의 구르나 마을을 건축한 하싼 화티는 이집트 출신의 세계적인 흙 건축가이다. 그는 자본과 관료와 기술전문가의 시각이 아니라 민중 자신의 토착적인 지혜와 창조성이 삶과 문화의 기준이 되어야 한다고 믿었던 건축가이다. 하싼 화티는 1900년 3월 23일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에서 부유층의 아들로 태어나 18세가 되던 해에 가족을 따라 카이로로 이사했다. 하싼 화티를 연구한 이성아의 논문 『하싼 화티의 건축에 관한 연구』에 의하.. 2018. 9. 3.
걸작 - 중국 사천성 도강언(都江堰) - 4 도강언(都江堰)에 올라 이빙(李冰)을 생각하다 저명한 중국의 역사학자 위치우위(余秋雨)는, 중국역사상 가장 감동적인 건축물은 만리장성이 아니라 도강언이라고 했다. 도강언의 외관상 규모가 만리장성처럼 거대한 것은 아니지만, 많은 사람들에게 천년의 복락을 제공하고 있기 때문이다. 장성이 드넓은 공간을 차지했다고 말한다면 이곳은 아득한 시간을 차지했다고 말할 수 있다. 만리장성은 이미 그 사회적 기능을 상실한지 오래되었지만 이곳은 지금까지도 수많은 민중을 위해 맑은 물을 보내주고 있다. 이곳이 존재했기 때문에 가뭄과 장마가 끊일 새 없던 사천 평원은 천혜의 조건을 가진 땅이 될 수 있었다. 중국민족에게 극심한 재난이 닥쳐올 때마다 이곳은 안온하게 민족을 보호하고 포근하게 적셔주었다. 그렇기 때문에 전혀 과장됨.. 2018. 8. 27.
걸작 - 중국 사천성 도강언(都江堰) - 3 위대한 목민관 이빙(李冰) 도강언 주변 일대는 성도나 인근 지역 사람들이 쉴 수 있는 아름다운 공원이기도 했다. 울창한 숲 속에서는 특유의 목소리를 내는 사천 매미가 왕왕거리며 울어댔고, 서북쪽의 산록에서는 시원한 고원 바람이 강을 따라 내려왔다. 또한 경내에는 이 수리시설에 공을 세운 이빙에서부터 삼국시대 이곳을 지키기 위해 언졸(堰卒)을 두었던 제갈량을 비롯하여 근대의 인물, 예컨대 청 말에 10여 년간 사천 총독으로 재직하였던 정보정(丁寶楨, 1820-1886)의 동상까지 죽 세워져 있었다. 뿐만 아니라 현대의 모택동, 등소평, 강택민 등도 자신의 자취를 남기고 있었다. 도강언은 단지 수리시설로서만이 아니라 고대부터 현대까지의 중국역사가 압축된 현장이었다. 한 공간 속에 자연과 역사와 과학이 공존한.. 2018. 8. 20.
걸작 - 중국 사천성 도강언(都江堰) - 2 5백 갈래로 나누어진 민강(岷江) 도강언의 시설은 크게 세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어취(魚嘴)와 비사언(飛沙堰), 보병구(寶甁口)가 그것이다. 이 세 시설은 따로 있으나 서로 긴밀하게 연관되어 결과적으로 하나의 유기체적 결합을 이루고 있다. 어취(魚嘴)란 말그대로 물고기의 주둥이를 뜻하는데, 아래 사진처럼 민강을 두 줄기로 가르는 분수제(分水堤)의 역할을 한다. 그림에서 보듯이 물고기 주둥이처럼 툭 틔어 나와 있는데 이 제방에 의해 민강이 본류로 흐르는 외강(外江)과 인공수로인 내강(內江)으로 나누어진다. 어취는 죽롱법(竹籠法)이라는 공법으로 시공되었다. 아래 사진처럼 대나무를 이용하여 죽롱을 만들고 그 속에 하천에 있는 돌을 넣은 다음, 이것들을 쌓아 물을 막는 방식이다. 죽롱법과 함께 거친 강물을 .. 2018. 8. 13.
걸작 - 중국 사천성 도강언(都江堰) - 1 천부지국(天府之國) 언젠가 중국 사천성 일대를 여행하였다. 그 동안 십 수차례 중국을 드나들었지만, 보면 볼수록 놀라운 것은 수천수만 겹 녹아있는 역사의 층위다. 대륙은 깊고 넓었으며 언제나 새로운 것을 보여 주었다. 지구상에 유수한 역사를 가진 나라와 민족이 많지만 중국만큼 볼거리가 많은 나라도 없다. 기기형형한 자연은 물론이고 추측하기 조차 힘든 거석과 미금의 조형품에 이르기까지. 하지만 천하제일이라는 만리장성도, 인간의 상상력을 뛰어 넘었다는 병마용도, 도강언처럼 가슴 요동치는 감동을 주지는 못했다. 이 글을 포스팅하는 까닭도 그 때 요동쳤던 감동을 공유하고 싶기 때문이다. 마땅히 수리시설은 건축과 구분되지만 그것이 공익을 위한 구조물이란 점에서 공유의 의미가 있을 것 같다는 생각에서다. 백성의 복.. 2018. 8. 6.
노회찬의 추억 노회찬 의원과 저의 인연은 오래되지 않았습니다. 매체를 통해 저만 그를 알았을 뿐 그는 저를 몰랐습니다. 노회찬 의원을 직접 만난 것은 2016년 2월쯤이었습니다. 그해 4월 선거를 앞두고 창원에 내려왔을 때였습니다. 처음 만난 곳은 창원 상남동의 한 식당이었습니다. 노동운동가였던 박성철과 여영국 도의원이 함께 했고 그날 먹은 음식은 갈비탕이었습니다. 저는 그를 ‘의원님’이라 불렀고 그는 저를 ‘이사장님’이라 불렀습니다. YMCA 이사장을 했던 제 경력 때문입니다. 출마를 앞두고 지역민들 얼굴을 익히는 자리여서 특별한 기억은 없습니다. 저와 그가 다 잘 아는 노동운동가 황주석 최순영 부부를 이야기한 것이 기억납니다. 출마하려 창원까지 내려온 게 미안했던지 말을 많이 하지 않았습니다. '공적으로는 거침이 .. 2018. 7. 30.
북한건축 - 건축은 건축의 눈으로 보아야 (지난 5월 29일 「건축사신문」에 실렸던 글입니다. 글 중 '우리'는 건축사를 말합니다.) 남북 정상이 판문점에서 손을 맞잡은 그 날, 이 나라 모든 국민은 TV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만찬장에서 제주도 소년 오연준의 목소리에 실려 「고향의 봄」이 밤하늘에 울려 퍼졌을 때는 마치 꿈인 듯했다. 눈시울을 적신 이도 많았다. 거기다 북미정상회담에 종전협정, 평화협정 같은 말까지 나오니 벅차다 못해 오히려 두렵다. 쏟아지는 억측들만큼 넘어야 할 산도 많겠지만 열린 빗장이니 이대로 쭉 가리라 믿는다. 기왕 판이 벌어졌으니 우리의 모습을 보자. 북한건축에 대해 우리는 무엇을 알고 있는가? 별로 아는 것이 없다. 일본사람 안도 타다오도 알고, 먼 나라 사람 르 코르비제도 알지만 가까운 북한의 건축가는 한 사람도 .. 2018. 7. 23.
경남지역 주거변천사 14 - 1980년대 이후 5) 1980년대 이후 - 4 아파트의 대중화는 주거설비의 획기적인 변화를 불러왔다. 아파트 사용자들은 첨단시설에 민감하게 반응했다. 가장 큰 변화는 주방시설에서 비롯되었다. 주부의 가사노동을 줄여줄 뿐 아니라 세련된 디자인과 쾌적한 환경까지 제공되는 주방으로 변했다. 주부의 의지에 아파트 분양의 성패가 달렸다는 사실을 간파한 건설업자의 전략 때문이었다. 자동으로 작동되는 각종 기기들은 이와 조화를 맞춘 가구와 더불어 빌트인(builtin)시스템 방식을 탄생시켰다. 미디어·방재·교류 등 생활시설들도 획기적으로 변하였으며 모든 시설들이 자동 혹은 원격 조정이 가능하도록 변하고 있다. 이처럼 시설이 고급화 첨단화된 아파트는 생활의 질을 높여주기도 하지만 삶을 점점 아파트 내부로 고립시켜 자신과 자신의 가족 .. 2018. 7. 16.
경남지역 주거변천사 13 - 1980년대 이후 5) 1980년대 이후 - 3 2002년 말 우리나라 주택 보급률은 100%를 넘었다. 1인 가구를 포함하는 신주택보급률 역시 2008년에 100%를 상회(100.7%)함에 따라 주택의 양적 공급이 부족한 상태는 아니라고 볼 수 있다. 2010년 통계청 인구주택 총 조사에 의하면 경남의 주택보급율은 121.8%(1인 가구를 포함하는 신주택 보급율은 2010년 104.3%)에 이르고 있다. 주택의 절대량은 부족하지 않은 셈이다. 하지만 이런 상황과 달리 자가 거주율은 전국기준 1970년 71.7%, 80년 58.6%, 2000년 54.2%로 점점 낮아지고 있다. 그간 지속적으로 공급된 주택이 수요를 고루 만족시키지 못했던 것이다. 소유 편중 문제는 계층분리 문제와 함께 양적 공급에만 치우쳐온 잘못된 주택 .. 2018. 7. 9.
경남지역 주거변천사 12 - 1980년대 이후 5) 1980년대 이후 - 2 오늘날 우리나라 도시들을 뒤덮고 있는 아파트 홍수의 시작은 1988년에 시작한 ‘주택 2백만 호 건설’이다. 이 사업은 전년도에 있었던 대통령 선거에서 노태우 후보가 내놓은 공약이었다. 2백만 호라는 애당초 무리한 주택건설정책은 노태우 정권 내내 시행되었다. 비민주적인 권력의 행태가 언제나 그렇듯이 중앙정부가 결정한 정책은 일선 행정기관으로 하달되었고 그에 따라 경남도청 및 각 시군의 담당국과에서는 매일 주택건설 독려에 혼신을 다했다. 자연히 각 광역단체에 한 해 지어야할 주택의 량이 할당되었고 그렇게 할당된 양은 각 시군으로 재할당되어 시군 주택건설 목표치가 되었다. 목표달성을 위해 전국적으로 고밀도아파트가 대규모로 지어졌으며 여러 가지 폐해를 남겼다. 그 중 지금까지 남.. 2018. 7. 2.
경남지역 주거변천사 11 - 1980년대 이후 5) 1980년대 이후 - 1 1960년대 이후 계속된 인구의 도시집중은 폭발적으로 늘어난 수요에 비해 택지가 턱 없이 부족한 상황을 낳았다. 이런 현실은 필연적으로 주거의 집단화와 고층화를 요구하였고 그 해답으로 등장한 것이 아파트이다. 아파트라는 다소 특이한 주거형식의 시작은 산업혁명 이후 노동자들의 타운하우스라고 알려져 있지만 이념적으로는 19세기 서구사회에서 꿈꾸었던 ‘유토피아적 공동체’라는 이상주의의 산물이다. 하지만 사람들에게 심리적 일체감과 만족감을 줄 것으로 기대했던 바람과 달리 우리의 아파트는 ‘계층 간 분리’라는 새로운 사회 문제를 야기했다. 어느 아파트에 사느냐에 따라 사회적 신분이 달리 취급되고 여가와 취미 등 삶의 질을 결정하는 생활방식도 달라졌다. 아파트는 오직 현관문 하나만으로.. 2018. 6. 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