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마산항지19

마산항지(1926년) - 60 - 건권(乾卷) / 제8장 거류민단 시대사요(時代史要) 38. 생각나는 사람들 천지는 만물의 여인숙이며 시간은 영원한 손님이라 함은 결코 당나라 사람의 잠꼬대가 아니다. 소위 생리적인 과학, 자연의 추세는 인력으로서는 어찌할 수 없는 노릇, 수백억 년이란 셀 수 없는 천지에 태어나 백 세 내외의 생명을 사는 우리. 속세에서 여러 가지 제 욕심을 마구 채우려는 자, 우국지사를 자임해 청빈에 안주하는 자, 혹은 자본가로 돈을 출자하지 않고 노동자를 괴롭히는 자, 정의를 저버리고 인도(人道)를 가소로이 여기는 자, 관리(官吏)를 명예직으로 오해하는 자, 관공리에 머리 숙이는 것을 천분(天分)으로 잘못 아는 자 등의 세태는 온갖 모습으로 그 끝이 없으나 살아있는 시간이란 그 헤아릴 수 없는 여원에 비하면 한 거품도 되지 않을 만큼 하찮은 것이리라. 우리 동포가 개항.. 2023. 8. 14.
마산항지(1926년) - 50 - 건권(乾卷) / 제8장 거류민단 시대사요(時代史要) 19. 마산신보(馬山新報)의 발행 마산의 관민유지는 마산의 기관신문을 발행코자 기획했다. 그 자금은 한 번에 걸어내는 계(契) 방식을 채용해 50원을 한 구좌로 하여 그 반과 4분의 1의 금액을 한도로 해 모집을 했더니 미마스 구메기치(三增久米吉), 후지사키 도모히데(藤崎供秀), 마츠바라 하야조(松原早藏), 메카다 헤이사부로(目加田平三郞), 니시카와 다로이치(西川太郞一) 다섯 사람이 각 4구좌 2백 원씩을 필두로 총 응모액이 3천 2백여 원이 되었다. 게다가 히로시 세이조(弘淸三) 씨는 인쇄기 및 활자 기타 일체를 제공하였다. 도리코시 엔지로(鳥越圓次郞) 씨를 발행인 겸 편집주간으로 하고 저자를 사우(社友)로 하여 마산신보 제1호가 발행된 것이 실은 명치 41년(1908) 10월 1일이었다. 사옥은 현재.. 2023. 6. 5.
마산항지(1926년) - 37 - 건권(乾卷) / 제7장 동포발전사 제7장 동포발전사 13. 축첩회(祝捷會)와 철도개통식 해전 대첩 축하회는 6월 1일 개최될 예정이었는데 마산 철도선의 공사가 거의 완료되어 6일에 거행할 개통식과 합동으로 하면 어떻겠느냐는 제안이 있어 미우라 영사는 이를 수락하고 회장을 현재의 교마치 3정목 네거리에 있는, 당시의 빈터 풀밭에서 하기로 하고 그 중앙에 좌석 배치를 겸한 여흥 무대로 만들었다. 혼마치에서 들어오는 정문에는 대국기를 교차시켜 게양하고, 거기서 혼마치로를 종관해서 매축 미완성지를 비스듬히 가서 오직 흙바닥 상태인 마산역에 이르는 도로변 양쪽에 등과 깃발을 같이 걸어 놓았다. 개회는 오후 2시로, 미우라 영사는 러일전쟁 개전의 경위를 간단히 얘기하는 식사를 마치고 양 폐하의 만세를 삼창하였고, 도키오 반장은 마산철도의 기공과 결.. 2023. 2. 20.
마산항지(1926년) - 36 - 건권(乾卷) / 제7장 동포발전사 제7장 동포발전사 12. 천동같이 진동한 쓰시마 앞바다 해전 개전 이래 이희일우(一喜一憂)하며 그 결과를 걱정했던 마산의 동포들은 당시 생활해갈 길이 막막해 떠나가는 사람도 적지 않았는데 철도공사 개시 후로 철도감부 마산반의 사무소는 마산우편국의 맞은편 해안으로 내려가는데 있는 러시아인 소유의 빈집에 설치되어 감부원 수십 명이 근무하게 되어 이에 수반하는 다수의 인부가 출입함으로써 시장 상황이 크게 회복되었다. 특히 요정, 음식점 등에는 짙게 화장한 매춘부까지 나타나기도 했다. 전황은 매번 우리 황군의 연승을 보도하였고, 러시아가 난공불락이라 자랑하던 여순 요새도 마침내 함락되었다 한다. 광무 9년 즉 명치 38년(1905) 1월 1일 수비대장 스텟셀(1848~1915, 러시아제국 육군 중장. 1904년.. 2023. 2. 13.
마산항지(1926년) - 35 - 건권(乾卷) / 제7장 동포발전사 제7장 동포발전사 10. 군용철도 마산선의 건설 명치 37년(1904) 8월 31일 우리 영사관에 갑자기 ‘철도대 내일 귀지에 간다’라는 내용의, 발신인이 누군지 알 수 없는 전보가 배달되었다. 그때는 미우라 야고로(三浦彌五郞) 씨가 사카타 영사 대신 마산 주재 영사로 부임한지 얼마 되지 않은 때였다. 영사관에서는 이 전보가 어떤 것인지를 잘 모르고 아주 의아해 했다. 과연 9월 1일 아침에 몇 척의 운송선이 인천 철도감부(鐵道監部)의 마산 반장인 도키오 젠사부로(時尾善三郞) 중좌, 지바(千葉) 대위 등을 태우고 철도재료, 측량기 등을 운반하며 많은 인부들과 함께 상륙했다. 이것은 8월 21일의 어전회의에서 결정한, 경부선 삼랑진에서 분기해 마산에 이르는 일본육군 군사전용철도 속성공사의 착수임이 처음으로.. 2023. 2. 6.
마산항지(1926년) - 34 - 건권(乾卷) / 제7장 동포발전사 제7장 동포발전사 8. 러일의 국교단절 러일간의 기압이 갑자기 내려가 국교가 단절된 것은 명치 37년(1904) 2월 10일, 청황의 선전포고 때부터다. 이에 앞서 오사카상선회사의 시라카와마루(白川丸)는 한국 동남연안의 정기선으로 어느 날 마산에 입항한 그 배에 한 외국인이 타고 있었는데, 중국 산동성 지부(芝罘)에 가서 일본함대의 주력이 마산포의 전면인 진해만을 점거하고 있음을 전보로 알렸고 이것이 외국 신문에 게재되어 우리 해군은 크게 놀랐다. 곧바로 각 선박의 진해만 출입을 금지하여 해상 경계는 아주 엄격해지고 실리도와 견내량에는 탐조대를 설치하고 우편기(郵便旗) 깃발을 달고 각 어장을 순항하는 순라선(巡邏船)을 빼고는 어선이라도 빠짐없이 검문토록 했다. 이 바람에 마산거류민은 일상생활품의 공급이 .. 2023. 1. 30.
마산항지(1926년) - 31 - 건권(乾卷) / 제7장 동포발전사 제7장 동포발전사 저자가 일본인이므로 여기서 '동포'란 마산 거주 일본인을 말한다. 1, 일본인회의 조직 명치 32년(1899) 5월 1일의 개항 당시 우리 일본 동포로서 마산포에 거류한 자는 야마모토 고조(山本好藏), 스미다 마사키치(隅田政吉), 하마다 린조(濱田林藏)와 그 외 2~3명에 불과했다. 미곡상인 나가사키(長崎) 현 사족 출신의 마츠바라 하야조(松原早藏) 씨가 본거를 부산의 친형 마츠바라 도모조(松原友藏) 씨 집에 두면서 창원읍내에 임시로 살며 가을에 미곡 매출로 왕래하는 일 외에는 부산영사관 마산분관원 2~3명과 경찰관 2명이 있을 뿐이었다. 같은 해 11월 3일 제1회 각국거류지 경매 이래 마산의 좋은 입지와 산수의 풍광명미함이 강지에 선전되어 이주자도 역시 점점 늘어나 동 33년(190.. 2023. 1. 9.
마산항지(1926년) - 13 - 건권(乾卷) / 제4장 중고사(中古史) 제4장 중고사(中古史) 2. 정동군(征東軍)의 출발지 이에 앞서 원의 세소제는 이미 남송(南宋)의 왕실을 움직여 무위(武威)는 사방으로 드날렸으나 오직 일본열도 제국만은 의연하게 동행 우뚝 서서 대치하는 모습은 마치 원나라가 일어난 것을 모르는 척하는 것 같았다. 이에 따라 수차례 선유사(宣諭使)를 보내어 조공을 재촉했던 것이다. 당시의 가마쿠라바쿠후(鎌倉幕府)의 집정직에 있던 호조사가노미노카미 도키무네(北條相模守時宗)는 강인하고 과단력 있는 성격의 인물이라 원나라에서 사신이 올 때마다 그 서한의 존대 무례함을 힐책해서 그 사신을 방축 시키거나 참살까지 해서 답서를 주지 않았다. 쿠빌라이는 화를 내며 일본을 정복하기로 결정하여 새로이 정동행중서성(征東行中書省)을 세워 원나라의 종왕(宗王)을 그곳의 좌승상.. 2022. 9. 5.
마산항지(1926년) - 5 - 건권(乾卷) / 제1장 마산항의 대관 제1 마산항의 대관 2. 날씨(風信)와 기온 마산에는 아직 측후소가 설치되지 않아 겨우 부청이나 기타 한두 개의 불완전한 사설 기관이 있을 뿐이다. 여름에는 남풍이 불며 때로는 유쿠(琉球, 오키나와) 방면에서 일어나는 폭풍우, 곧 태풍이 내습하여 나무를 꺾어버리고 집을 날려 버리는 참혹한 현상을 보여주기도 한다. 낙동강 연안의 수리조합이나 농장 등의 경작지는 물이 범람하여 누런 호수가 되며 수확이 전무한 흉년을 호소하기도 하며 교통기관의 운전이 방해되기도 한다. 그래도 북에는 산이 있고 남으로 경사져 있는 마산에서는 과거에 이와 같은 참사는 일어나지 않았으며 오히려 수해지에 식량이나 연료, 피난용구, 배, 예방약품 등을 공급, 구제하는 일이 예사다. 혹서(酷暑)는 7월 중순부터 8월 하순까지이며 최고 화.. 2022. 7. 11.
마산항지(1926년) - 3 - 목차 / 건권(乾卷), 곤권(坤卷) 현세사(現勢史) 목차 마산항지 건권(乾卷) 제1 마산항의 대관 1. 위치 및 지세 2. 날씨와 기온 3. 지질과 수질 제2 영광에 찬 마산의 산과 바다 1. 고려 충렬왕의 행차 2. 고노에(近衛) 귀족원 의장의 내유 3. 동궁 요시히토 친왕(嘉仁親王) 4. 융희황제의 행차 5. 이토 통감의 애석(愛惜) 제3 상고사(上古史) 1. 고시가라(古志加良) 이름의 연유 2. 일본 황실의 대한책(對韓策) 3. 최치원의 내유(來遊) 제4 중고사(中古史) 1. 내우외환 2. 정동군(征東軍)의 출발지 3. 제2차 전동전쟁(征東役) 4. 스와오카미(諏方大神)의 기서(奇瑞) 5. 전쟁 후의 지방 사정 6. 왜구의 침해 제5 근고사(近古史) 1. 이씨 조선의 흥기 2. 마산성터의 유래 3. 사츠마군(蕯軍)의 호랑이 잡이 기록(摶虎錄) 4. .. 2022. 6. 27.
마산항지(1926년) - 2 - 추천사, 저자 머리말 스와 시로(諏方史郞) 옹의 저술 『마산항지』에 붙여 도오산(宕山) 소시 힌(莊子 斌) 煥發史才斑馬豪(환발사재반마호) 옹의 사재가 얼룩말의 빛과 같이 드러남이여 操觚幾歲肺肝勞(조고기세폐간노) 문필 작업하는 세월동안 허파와 같이 성했을까 謝君彰考闡幽筆(사군창고천유필) 선친의 필치를 펼치어 아버지를 드러내셨고 爲我馬山吐氣高(위아마산토기고) 우리 마산을 위해 기운을 크게 토하셨네 父子文名並見豪(부자문명병견호) 부자 함께 문명을 호쾌히 보이시도다 料知昔日切嗟勞(료지석일절차노) 일찍이 절차탁마의 노력 있었음을 알겠도다 一家衣鉢相傳在(일가의발상전재) 가문의 전통이 전승되고 있음이여 筆底波瀾萬丈高(필저파란만장고) 붓 아래 치는 파도 만장같이 높도다 스와 옹의 시문(詩文)의 원천은 부친 고슈(翁洲) 선생의 은택인 바, .. 2022. 6. 20.
김형윤의 <마산야화> - 25. 기독교인과 마산신사, 26. 도리이를 닮은 문 25. 기독교인과 마산 신사(神社) 일본인 추방무골(諏訪武骨)옹의 마산항지(馬山港誌)에 의하면 현 문화동의 높은 자리에 위치하였던 마산 신사는 1909년(원문에는 1910년으로 되어 있음 / 옮긴 이), 즉 명치 42년에 창건된 것이다. 정전(正殿)에는 천조(天祖) 천조대신(天照大神)을 모신 곳이며 경내 우측에는 도하대명신(稻荷大明神)을, 그 곁에 사당은 주호신(酒護神)을 모신 송미신사(松尾神社)를 건조하여 경신(敬神)관념을 숭양(崇養)해 왔는데 신관(神官)으로서 발령된 사람은 고등관 3등의 수자춘충(須子春忠)이었다. 아침 미명 때를 기하여 일본인 노소남녀가 앞을 다투어 박장(拍掌) 참배하는 것은 그들의 경신(敬神)하는 정신적 관례이지만 일인 아닌 조선인의 별의별 각설이와 풍각쟁이 같은 아유배(阿諛輩) .. 2015. 6. 22.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09) - 강점제2시기 오늘부터는 1920년대 마산포(원마산)의 변화에 대해 올리겠습니다. 이 시기 마산포는 근대식 도로망이 확산되는 시기였으나 도시시설의 수준은 낮았습니다. 일제하 마산의 유통시장은 원마산과 신마산 상가로 뚜렷이 구분되어 있었습니다. 그 중 원마산(마산포) 지역의 상가는 남성동 제일은행 자리에 1910년대 새로 개설된 도로 주변이 중심상권기능을 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당시 마산포 지역의 상권은 중심번화가인 남성동과 창동을 비롯해서 중성동․동성동 일부 지역에 걸쳐 형성되어있었고 부림시장과 그 주변 및 남성동 어시장 근처의 해안매축지에도 곡물상․해산물상․식료품상․포목상․잡화상들의 점포와 노점상인들이 즐비했습니다. 그 때까지 제조업 분야에 손을 뻗지 못한 한국 상인들은 주로 이곳 마산포 지역 상가에서 도소매업을 경.. 2012. 5. 14.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99) - 강점제2시기 3) 각종 문헌에 나타나는 '중앙마산'의 철도용지 ‘중앙마산’이라는 용어는 이 글에서 처음 사용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미 일제기에 간행된 마산관련 몇몇 자료에서「중앙마산(中央馬山)」혹은「중앙방면(中央方面)」「중앙부」라는 용어가 사용되었습니다. 이것은 이 지역이 신마산과 원마산의 두 영역에 포함되지 않으면서 두 지역 사이에 있는 다른 성격의 도시공간이라는 것을 말합니다. 여기서는 1920년대 일본인이 발간한 문헌에 나오는 '중앙마산' 관련 기록들을 모아 소개하겠습니다. 내용을 간추려 번역한 것이며 명칭은 현재 사용하는 용어로 고쳐 적습니다. ①『馬山港誌(마산항지, 1926)』- 諏方史郞(추방사랑) a. 위치와 지세(p.3) 마산부의 대체적인 지세는 본래 마산포 즉 마산포 방면과 이전의 각국거류지 및 군영,.. 2012. 3. 5.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76) - 강점제1시기 한일병합 직후 마산 최초의 상업용 매립이 남성동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위치는 어시장의 진동골목과 대풍골목 등 오래전부터 마산어시장 상권의 핵을 이루고 있는 지역입니다. 이 매립의 규모와 형태는 매립 전 마산포 지도(1899년)와 매립이 시작되려던 시점의 지도(1910년 초반), 그리고 매립이 끝난 후 마산포 지도(1919년)를 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다음과 같습니다. 1920년대 이후의 매립에 관해서는 국가기록원에서 그 경위와 내용을 찾을 수 있지만 합방직후에 시행된 이 매립공사에 관해서는 기록을 찾기가 어려웠습니다. 어쩔 수 없이 매립의 규모와 위치 및 일자 등은 사정토지대장과 사정지적도를 보면서 낱낱이 확인하였습니다. 확인 결과, 이 매립은 대지 8,078평 도로 3,560여 평으로 모두 11.. 2011. 9. 19.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60) - 강점 제1시기 일제강점기 마산의 인구 통계는 마산부가 자체적으로 간행한 몇몇 자료에 남아 있는 기록과 국세조사 등에 수록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일정한 기간을 단위로 조사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일제강점기 전반에 걸친 인구변화의 추이를 알아보기 위한 자료로서는 부적당합니다. 그러나 병합 이후에 매년 조선총독부에서 조사해서 출판한『조선총독부 통계연보』는 조사방법이나 조사시기의 간격이 일정합니다. 여기서는 이 자료를 이용해 마산의 인구변화를 살펴보겠습니다. 1910년대 마산의 인구변화추이입니다. 연도 한국인 일본인 외국인 합계 일인 비율(%) 1910년 10,664 5,941 52 16,657 35.7 1911년 9,847 6,199 46 16,092 38.5 1912년 5,672 1913년 9,494 5,262 41 14,.. 2011. 5. 30.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47) - 개항이후 일제는 그들의 편의에 따라 도시지역의 행정구역 최소단위를 ‘정(町, 마찌)’이라는 일본식 명칭으로 바꾸었습니다. 그 과정에서 마산창(馬山倉) 설치 후 생겼던 마산포의 6개리도 명칭이 바뀌었습니다. 이 글은 마산의 행정구역 명칭이 바뀌는 과정과 결과에 대한 내용입니다. 조선총독부를 개청한 1910년 10월 1일 하루 전날인 9월 30일, 일제는 식민지 통치를 위한 과도기적 지방통치기구를 확립하였는데 거기에 동리명의 변경에 관한 지침도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변경방법은 그 때까지 사용되던 행정구역의 최소단위인 ‘동’과 ‘리’의 명칭을 일본식이나 한국식 중 어느 것이나 택하라는 식이었습니다. 하지만 이미 일본인이 행정책임자가 되어 있었을 뿐만 아니라 온통 일본 세상이었던 때라 종래의 한식(韓式) 동리명이 채택되.. 2011. 2. 28.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45) - 개항이후 각국공동조계지를 건설할 때, 해안선의 경계는 해수의 간조선과 만조선을 고려하여 결정하였습니다. 그러나 조계지의 북단과 남단은 만조선이 깊어서 매립을 한 후 호안공사를 했으며, 중앙부 세관지역을 비롯한 호안선은 전부 매립이 있었다고 추정됩니다. 아래 두 그림을 비교해 보면 매립여부가 잘 나타납니다. 노란선은 현재 시내버스가 다니는 간선도로인데 그림의 비교를 위해 그었습니다. 이 지도는 1899년 마산개항 때 각국조계장정에 첨부되었던 것입니다. 전체 조계지 중에서 1차로 조성할 부분이 표기되어 있는데, 마침 간조선(Low Water Line)과 만조선(High Water Line)이 표기되어 있어서 매립여부를 판단하는데 큰 도움이 됩니다. 다음 그림은 1916년 일본 육지측량부가 제작해서 발행한 같은 지역의.. 2011. 2. 14.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34) - 개항이후 일제가 우리 민족을 무력으로 위협한 것이 군대와 경찰이었다면 정신적으로 위압한 것이 신사(神社)였습니다. 한반도에 가장 먼저 들어온 일본신사는 부산신사인데 이미 17세기에 일본인들이 부산에 상주하면서 세워졌다고 합니다. 그 후 1876년 한일수호조약(강화도조약)이 체결된 후 개항된 도시에 각국공동조계지가 설치되면서 일본거류민들이 조계지에 신사를 세웠습니다. 마산의 일본 신사(神社)건립계획은 순종이 마산을 방문했을 때 쯤 (1909년 초) 홍청삼(弘淸三)에 의해 주도되었습니다. 그 이전부터 마산경제회 등 일본인 유지들이 모인 자리에서 여러 차례 신사의 필요성이 제기되었지만 아무도 그 일을 맡아서 하는 사람이 없었는데, 어느 날 홍씨가 마산의 일본인 유지 27명을 요정 ‘망월’에 초대하여 신사 창건을 호소하.. 2010. 11. 29.